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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74화 (174/260)

잔잔하게 흐르는 시간이, 어찌 이리도 묘하게 불편하게 느껴지는 것인지.

벌써 일주일 정도 되는 시간이 흘렀다는 걸 깨닫고, 페르젠은 조용히 홍차를 마시며 창밖의 풍경을 구경했다.

“……”

그 때, 저택의 문 앞으로 한 대의 마차가 멈추어 서자……

탁.

페르젠은 쥐고 있던 찻잔을 내려 둔 뒤, 자리에서 일어났다.

열리는 마차의 문 안쪽에서 내리는 건, 황궁의 관료들.

그들이 자신을 찾아 올 용건이 있다고 한다면, 오직 하나 밖에 없겠지.

그래, 드디어 클로디아 가문에서 가져온 자료들의 검수가 온전히 끝나 그 결과를 보고하러 온 것이리라.

그에 페르젠은 몸을 돌려 1층으로 내려가, 직접 그들 앞으로 당도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차를 한잔 내주며 느긋하게 들을 여유 따위는 없는 것이다.

“아, 안녕하십니까. 루에르그 백작님.”

“겉치레는 되었다. 내게 보고해야 할 것이 있을 텐데.”

“예……! 안 그래도……”

상당히 두터운 서류 뭉치를 꺼내 자신에게 넘겨주는 황궁의 관료를 보며 페르젠은 그것을 받아 들였다.

“일단, 클로디아 가문과 결탁하여 이번 반란에 가담한 다른 이들은 없어 보였습니다.”

“그런가.”

이 부분에 대해서는 솔직히 페르젠도 예상을 하고 있었던 바였다.

목위에 달려 있는 것이 정상적인 머리라면, 미치지 않고서야 확률이 희박한 반란에 가담할 리가 없을 터.

그러나 빠르게 서류를 넘기던 페르젠은, 리지와 관련된 항목에서 손을 멈추고 말았다.

한번.

두번.

세번.

그것도 모자라 수십번을 읽어 보아도, 서류에 적혀 있는 내용은 변하지 않는다.

그에 페르젠은 눈앞의 관료들을 뚫어져라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이것은 사실인가.”

“예?”

페르젠이 도대체 어떤 대목에서 이런 반응을 보여주는가 싶어, 까치발을 든 관료는 힐끔 페르젠이 읽고 있던 항목을 곁눈질로 보고서는 “아……” 하는 표정을 지었다.

“예. 조사한 바로는 확실한 사실 입니다.”

“……”

확실하다는 말까지 덧붙이는 걸 보아하니, 증명 가능한 증거도 있다는 뜻일 터.

그럼에도 불구하고 페르젠은 도저히 이 보고서에 적힌 내용을 믿을 수가 없었기에……

“유페미아. 유리엘.”

움찔!

무슨 일인가 싶어 하나 둘, 자신이 있는 곳으로 모여드는 그녀들을 돌아다보며 입을 열었다.

“잠시 황궁에 다녀오도록 하마.”

그녀들의 대답조차 기다리지 않는 페르젠이 걸음을 돌려 나아간다.

그에 황궁의 관료들이 페르젠을 대신하여 유페미아와 유리엘에게 꾸벅 허리를 숙이고서는, 헐레벌떡 앞서 나가는 페르젠의 뒤를 따랐다.

보고서에 적혀 있었던, 리지와 관련된 중요 내용은 오직 하나.

그녀가 사전에 자신의 가족들이 반란을 꾀하고 있다는 것을 알리려 했다는 것.

그러나 페르젠은 클로디아 가문의 가족애가 어떠한지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보고서에 적혀 있었던 내용이 거짓이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아니, 이것은 감의 영역이 아니다.

확신이라고 해도 좋았다.

그녀가 가족까지 버릴 냉혹한 생존 결단력이 있었다면, 애당초 자신에게 이빨을 드러내지도 않았을 터.

‘그래…… 이게 로에르, 세자르. 너희들이 준비해둔 마지막 안배인가.’

침몰하는 배에 리지가 함께 수장되지 않도록, 몰래 조각배를 마련해 그녀를 피신시키는 것.

솔직히 몇 날 며칠 밤을 지새우며 검수에만 매달렸던 관료들의 눈을 속일 정도라면, 완성도가 그만큼 높다는 말이 되겠지.

그러나 페르젠은 이것이 로에르와 세자르의 자작극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에, 파고들면 틀림없이 모순된 점을 찾을 수 있으리라 믿었다.

물론, 누군가는 이 정도는 눈감아 줄만 하지도 않냐고 말할지도 모른다.

실제로 리지는 완벽한 피해자의 입장에 놓여 있을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녀가 혼자 살아남아 외로운 삶을 이어 나가고, 고통스러운 하루하루를 보내다 생애를 마감하는 모습을 지켜 볼 바에야……

페르젠은 자신의 손으로 모든 매듭을 끊어 태워버리고 싶었다.

기회가 있을 때, 자신이 남긴 죄악의 형태를 이 세상에서 모조리 지워버리고 싶었다.

어쭙잖게 마음 한 구석에 불편함을 머금고, 희미한 죄책감을 매번 느끼며 살아갈바에야 그럴 여지를 조금도 주고 싶지 않았다.

그래, 결국 자기 자신이 편하고 싶어 한번더 손을 더럽히는 것이다.

애당초 상대방을 연민하여 자비를 베푼다는 행위 자체가 악당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모습이지 않던가.

이내 자신을 뒤 따라 마차에 올라탄 관료들이 슬며시 눈치를 살피고만 있자, 페르젠은 편하게 등을 기대며 한 마디를 내뱉었다.

“가지.”

“예…… 예! 알겠습니다!”

히이잉!

우렁찬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정문에 멈추어섰던 마차가 황궁으로 나아간다.

* * * * *

“이곳입니다.”

황실에 도착하여 관료들의 안내를 따라 증거를 보관해두고 있던 장소에 도착한 페르젠은, 겉옷을 벗은 뒤 재검수에 착수했다.

먼저 기간별로 나열했을 때, 가장 처음이라 할 수 있는 한 용병의 시신 앞에 허리를 숙이고 마력을 방사하여 사역한다.

……이름은 제니펠.

보고서에 적힌 내용에 따르면, 그녀는 리지로 부터 한장의 서신을 받아 그것을 전달하는 의뢰를 받았다고 하는데.

‘기간을 보아하면…… 그 때인가.’

남성과 여성, 각 성별을 가진 사람이 공통적으로 가지는 일상의 무의식적 버릇들.

그것을 조사해오라고 처음으로 과제를 내주었을 때, 겸사겸사 용병들에게 손을 뻗었다면 동선에 이상할 건 없었다.

애당초 받은 과제물만으로 그녀가 가문에서 일을 하고 있는 시종들에게 부탁을 하였는지, 다른 루트로 해당 자료를 수집하였는지는 알 겨를이 없었으니.

대신에 그만큼 조작이 쉬운 알리바이라는 걸 뜻하기도 했다.

실제로 리지의 생김새나 특징 등을 관련해서 피드백을 받으려고 하면 받아지지 않았기에, 이 용병의 의뢰인이 정확히 리지라고 판단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것이다.

로에르나 세자르가 제 3 자를 통해 자작극을 펼쳤을 가능성을 어찌 배제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용병의 시신이 확실한 증거의 일부라 할 수 있는 건, 해당 서신의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심지어 해당 용병은 편지를 전달하는 루트, 그 과정에서 곁들여 수행할 수 있는 임무를 도맡아 하던 도중 사망을 하였는데……

관료들은 그 임무의 의뢰인이 세자르일 가능성이 높다고 점치고 있었다.

로에르의 수급에서는 해당 정보를 피드백 받지를 못했기에.

하지만 어째서 굳이 리스크가 있는 용병에게 의뢰를 하는 그림을 그렸을까.

용병들이 편지 전달 등의 의뢰를 받기는 하지만 도중에 열어서 내용을 확인하는 경우가 잦았기에 보통은 가격이 조금더 나가도 상단에 맡기는 경우가 많았다.

물론 이 죽은 용병의 기억에 담겨 있는 서신의 내용에는 감시가 있는 것 같아 리스크를 감내할 수 밖에 없었다고 적혀 있기는 했다.

로에르의 수급에서 리지를 예의주시했다는 기억 자체가 피드백이 되지 않았으니, 아마 감시자 또한 세자르일 가능성이 높다고 비추어 질 터.

용병이 임무를 수행하는 도중 죽는건 이상할건 없었기에, 리지 또한 가족들이 눈치를 챈것인지 아닌지에 대한 확신을 품기는 어려웠으리라.

실제로 이 첫번째 증거와 다음 두번째 증거 사이의 간격은 2개월의 텀이 존재했으니, 관료들도 리지 나름대로 몸을 사렸다는 것으로 받아들였겠지.

확실히 여기까지만 보자면 완성도는 무척이나 높았다.

특히 로에르는 황실 소속 기사단으로 가문을 오래 떠나있었고, 리지의 반란 사실을 어렴풋하게 눈치채고 있었던 건 세자르 뿐이라는 그림이 그려지니……

이미 죽어버린 로에르의 시신에서 얻을 수 있는 정보의 양은 제한 되는 것이다.

“하하……”

정말 막장이 따로 없을 만큼 눈물이 나는 각본이 아닌가.

틀림없이 관료들에게는 가족들의 반란 사실을 알리려는 여동생과, 죽음으로 입막음 시킬 수 없어 애써 덮으려 했던 가족들로 보이겠지.

“……나가봐도 좋다. 나는 조금더 있도록 할테니, 시녀들에게 차를 한잔 부탁한다는 언질만 넣어주게.”

“알겠습니다!”

석상처럼 페르젠의 뒤에 서있던 관료들이 숨을 내뱉으며 답답했던 방을 빠른 걸음으로 빠져 나간다.

그리고 페르젠은 의자에 앉아, 조용히 옆에 내려두었던 보고서를 들어 상세히 읽어보기 시작했다.

관료들도 바보는 아니기에 이것이 혹여나 반란죄로부터 여동생을 빼내기 위한 장치는 아니었을지, 그런 의심을 품고 검수에 착수 했었다.

실제로 로에르의 수급으로부터 반란죄에서 리지가 자유로울 수 있는 안배를 마련해두었다는 사실이 피드백이 되었으니까.

다만, 그것이 사전에 반란을 알리려 했다는 것에 대해서는 피드백이 되지 않았다.

그래, 여기까지 전개가 되었다면.

사실 리지의 목숨은 그것만으로도 보장 받을 수가 있는 것이다.

하지만 페르젠은 여기서 의도적으로 로에르가 자신에게 주어지는 정보를 제한했다고 확신했다.

황궁의 관료들과 다르게, 페르젠은 작금의 이 증거들이 전부 리지를 위한 안배라는 걸 알고 있었으니……

로에르의 수급에서 해당 정보가 피드백 되지 않았다는 사실은, 애초에 세자르를 믿고 상세한 정보를 일부러 공유받지 않은 것이리라.

“이건…… 의미가 없겠군.”

증거들 중에서는 실제로 리지의 편지가 있기는 했으나, 필체 정도는 얼마든지 흉내를 낼 수 있는 것이다.

‘인정할 건, 인정 해야 하는가.’

심증은 확실 했으나, 주어진 증거는 자신의 심증이 입증 되지 않도록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현재까지 주어진 증거에 한해서다.

로에르에게는 의도적으로 정보를 제한했다고 한들, 세자르 본인까지 그러기는 힘들 터.

여기까지는 완벽했다고 해도, 결국 세자르 본인이 처형당하고 난 뒤 그 시신에서 이것이 자작극이라는 기억이 피드백 되는 순간 리지는 뒤따라 처형당할 수밖에 없었다.

“정말이지도 우스운 발악이구나.”

눈이 감겨진 상태로 놓인 로에르의 머리를 지그시 바라보며, 페르젠은 미약한 조소를 흘렸다.

‘아마 세자르 본인에게도 나름 대로의 대비책은 있겠지.’

굳이 단계로 나누자면 이것은 1단계에 불과하리라.

가장 힘을 준 것은 핵심이 될 2단계인 세자르 본인의 시신일 터.

그렇다면 겉으로 완벽해 보여도, 허점을 찾기 제일 쉬운 건 필시 1단계이겠지.

‘그래……’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어디 기꺼이 어울려주도록 하마.

목을 옥죄는 듯한 넥타이를 풀어 헤치고, 페르젠은 서류를 집어 든 채 밤을 지새우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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