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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67화 (167/260)

먹구름이 걷히고, 따스하게 쏟아지는 햇살을 바라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어린아이처럼 자신을 끌어안고 울던 오라버니, 레이몬드 황자를 달래고 와서인지 조금 진이 빠지는 듯한 느낌이 든다.

깊은 잠에 빠졌다가 일어난 기분일 뿐이었지만, 주변 사람들의 반응으로 예측 컨데.

자신은 틀림없이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상황에 놓여 있었겠지.

……그러나 후유증 하나 없는, 너무나도 멀쩡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어서 그런 걸까.

엘리자베스 황녀는 스스로가 인지하고 있는 몸 상태와, 주변 사람들이 보여주는 반응에서 낯선 간극을 느껴야만 했다.

그도 그럴게 불에 그을렸던 머리카락은 더더욱 윤기를 머금고 있었고.

흉측하게 타들어가 화상을 입었던 피부는, 본래의 고운 색을 되찾았으며.

검에 찔렸던 복부는, 흉터 하나 존재하지 않았으니까.

전해 듣기로는 자궁이 완전히 망가졌다고 하였는데.

어찌하여 이미 끝난 달거리를 다시금, 또 갑자기 시작하게 된 건지.

사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의문을 품을 필요도 없었다.

분명, 페르젠이 불러왔던 명계의 괴이가 자신의 망가진 자궁까지 다시 수복시킨 것이리라.

그러하다면 감사의 마음이 앞서야 할 텐데.

엘리자베스 황녀는 어째서인지 약간의 수치심과 부끄러움이 밀려들었다.

‘그대는…… 본녀의 나신 뿐만이 아니라, 정말 온 몸 곳곳을 들여다 보았겠구나.’

그러함에도 자신을 대함에 있어서 한점 변함없는 그를 보고 있자하니.

괘씸하다고 해야할지, 아니면 서운하다고 해야할지.

하기야 이제 와서 새삼스레 황실의 혈통과 브뤼테인의 혈통 사이에 미묘한 기류가 흐르는 것도 웃긴 일이었다.

브뤼테인과 황실은, 서로의 피를 섞지 않겠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존재하였으니까.

“……”

이내 감았던 눈을 뜨고, 바람에 흩날리는 자신의 머리카락을 정돈하던 엘리자베스 황녀는 조용히 들판 위에 피어난 꽃을 바라보았다.

흔하디 흔하게 널린, 이름조차 지어지지 않은.

6 ~ 7월에 잎이 저물고, 8 ~ 10월 사이에 꽃이 피는 특이한 수선화.

잎이 피는 시기와, 꽃이 피는 시기가 각각 달라 서로가 서로를 만날 수 없는 건.

어찌 보면 황실과 브뤼테인의 관계를 반영하고 있는 것 같기도 하여 엘리자베스는 자조 섞인 웃음을 터트렸다.

“네게 어울리는 이름이…… 방금 생각 났구나.”

옅은 분홍색의 꽃잎을 손가락으로 투욱 건들이며, 엘리자베스는 고운 목소리로 말을 잇는다.

“앞으로는, 상사화(相思花)라 부르겠니라……”

쏴아……

그 이름이 싫지는 않은 건지.

연분홍색의 꽃잎을 만개한 수많은 수선화들은, 불어오는 바람에 자신의 몸을 살랑이며 수줍게 춤을 추기 시작했다.

* * * * *

“……”

“……”

레이몬드 황자와 함께, 이나스 왕자를 마주보고 있는 페르젠은 그의 수척한 얼굴에서 약간의 연민을 느꼈다.

엘리자베스 황녀는 로에르의 배후가 오베른 왕국이라 하였는데, 그것이 거짓말처럼 보이지는 않았다.

다행히 자신들 제국에서 일어난 내란으로 마무리 될 것 같지는 않으나……

‘찝찝한 점은…… 여전히 있군.’

오베른 왕국을 이용하기는 했어도.

그림 자체는 어디까지나 로에르의 독단.

잘못 일부를 오베른 왕국에 물었을 때, 엘마르크 제국은 틀림없이 그 애매한 부분을 파고들 것이다.

하지만 엘마르크 제국이 얌전히 손을 떼고 물러난 것부터가.

이 상황 자체를 미리 예상하고 있었던 게 아니라면, 말이 되지 않는 모순.

그렇다는 것은 애당초 오베른 왕국은 엘마르크 제국의 지시를 받고, 자신들이 독립을 준비한다는 거짓 핑계로 로에르에게 접선을 했다고 봐야 하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오베른 왕국의 움직임을 엘마르크 제국은 알고 있었고.

오직 오베른 왕국만이 그 사실을 몰랐던 걸까.

사실 후자라고 해도, 그들이 접선을 한 것이 로에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린다.

“감히…… 간청을 해봅니다……”

고개를 조아리는 이나스 왕자가 애처롭게 주먹을 말아쥔다.

에르네스 제국이 이대로 눈을 감는 것도 하나의 선택지이기에.

눈앞의 이나스 왕자는 그것을 부탁하고 있는 것이나.

“그럴 수 없네.”

곁에 앉아 있는 레이몬드 황자는, 단호하게 그 부탁을 거절하였다.

황족 시해까지 일어난 이 시점에서 이번 사건을 덮으려 든다면.

황실의 위상이 바닥으로 처박히는 건 둘째 치고.

지금보다 더한 수작질을 부려올 가능성이 높았다.

“하하……”

이나스 왕자 또한, 큰 기대를 바라고 했던 부탁은 아니었는지.

처량하게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엘마르크 제국이 개입할 여지가 없게끔…… 오베른 왕국이 모든 잘못을 시인한다면, 전쟁은 일어나지 않을지도 모르네.”

굳이 접선한 인물이 로에르라는 점이 마음에 걸리기는 해도.

그것이 단순 우연이고, 엘마르크 제국의 지시를 받고 움직인 것이 아니라면.

이번 일은 오베른 왕국이 죗값을 치루는데서 끝을 낼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확정 사안이라기 보다는, 어디까지나 하나의 가능성에 불과했기에.

이나스 왕자의 얼굴에 드리운 근심은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서 더 이상, 무슨 말을 해줄 수가 있으랴.

망국의 왕자는 기쁘게 웃을 곳이 없고.

또, 슬피 울 곳이 없는 법이 거늘.

* * * * *

애매한 상태로.

그저 상처를 실로 꿰메어 봉합만 시켜버린 로벨리움 왕국의 사태에, 페르젠은 돌아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안이 사안이다 보니, 더는 로벨리움 왕국에 머물러 있을 수가 없는 노릇이었다.

“리지는……”

“……”

그리고 그러한 자신의 곁으로 다가와, 자그마한 목소리로 말을 거는 유리엘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페르젠은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반역죄는…… 가문을 멸하고, 그 존속들을 전부 사형시키는 것이 정법한 수순이다.”

아무리 브뤼테인이라 하더라도.

아니, 오히려 브뤼테인의 핏줄이기에.

페르젠은 이 상황에서 리지를 옹호할 수가 없었다.

그걸 유리엘 또한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 이상의 말은 꺼내지 않으며.

조용히 페르젠을 따라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에르네스 제국으로 다시금 도착했을 때는, 더이상 여름이 아니라 가을이 찾아오는 시기이겠지.

……단풍으로 물드는 나뭇잎이, 초라하면서도 애틋하게 낙화(落花)하는 계절.

그러므로.

클로디아 가문은, 그 어느 단풍보다 붉게 물들 것이고.

그 어느 꽃보다 비참하게 지게 되리라.

* * * * *

귀환길의 분위기는 무거웠다.

귀족들은 물론이고, 따르는 기사와 마법사들까지.

전부 입을 닫고, 숨을 죽인 채 에르네스 제국으로 돌아간다.

귀환이라는 의미가 무색하리만큼, 오히려 모두가 더욱 긴장을 하고 있는 상태.

아마 그들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있으리라.

언제 전쟁이 발발할지 모르는, 일촉즉발의 상황이라는 것을.

아직 에르네스 제국은 이리도 멀리 떨어져 있는데.

브뤼테인에서 생산되는 광물들이 요동치며 담금질 되는 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인간의 비명이 철의 노래에 파묻히는 전장의 광경.

그것을 반기는 이들이 과연 얼마나 있을까.

그래, 이것은 어쩌면 귀환이 아니라.

출진의 첫 걸음일지도 모른다.

* * * * *

“……”

10월.

찾아오는 가을.

나무들이 앙상해질 자신의 몸을, 가장 아름다운 단풍으로 꽃단장 하는 시기.

별다른 일이 없었다면 자신은 아카데미로 복귀하여 교수직을 이행하고 있었으리라.

그러나 오늘 이날, 자신은 왼손에 들린 황실의 증서를 받들어.

제국에 반역을 꾀한 종자들을 모조리 붙잡아 수도로 이송해야만 했다.

“가지.”

마차에서 내리는 페르젠이, 자신의 옷매무새를 바르게 고치고서 브뤼테인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걸음을 내딛는다,

유리엘, 유페미아, 라우라는 미리 올려보낸 상태라.

페르젠은 감춰둔 자신의 이빨을 드러내는데에 있어서 망설임이 없었다.

‘감히……’

악당이 정의의 껍데기를 뒤집어쓰고, 누군가의 잘못을 심판할 권리가 있는가.

자그마한 영지의 초라한 풍경을 바라보며,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진 페르젠은 옅은 조소를 입가에 머금었다.

과거에도 말을 했듯.

정당한것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기에, 인간은 누구나가 강한것을 정당한것으로 삼는다.

욕망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인간에게, 정의(正義)라는 단어의 확고한 정의(定義)가 있다면 필시 그러하겠지.

그러니 상대방의 신념을 깨부수고, 그 머리를 짓밟고 올라 관철된 정의는 분명한 선이라 할 수 있음이요.

이것을 결코 위선이라 할 수 없으리라.

‘그러할진데……’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그대는 어찌하여 관철시킬 수 없는 자신의 신념을 끌어안고, 내게 이빨을 드러냈는가.

‘정의가 지배하는 곳의 복종은……’

결국 자유 이거늘.

저벅.

영지 깊숙이 들어서기 시작하자, 일상을 보내던 이곳 주민들이 각자 낯선 이들의 행차에 힐끔힐끔 시선을 보내온다.

하지만 아무리 무지한 그들이라도.

“브뤼테인……”

선두에서 걷고 있는 페르젠을 뒤따르는, 기사들의 갑옷에 새겨진 천칭의 문양을 알고 있었다.

자신들이 살고 있는 제국의 황실을 떠받치는 기둥을 어찌 모를 수가 있겠는가.

“예쁘다……”

그리고 부모의 손을 꼬옥 잡고 서있던 몇몇 아이들은.

페르젠의 곁에서 사역되고 있는,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의 외모에 홀린듯 넋을 놓았다.

또각.

그렇게 여러 사람들의 동경의 시선을 뒤로한 채, 영지 내의 중심부──그곳에 세워진 클로디아 가문의 저택 앞으로 당도한 페르젠은 자신의 마력을 한가득 소모하였다.

쩌저적!

그러자 얼음덩쿨들이 서로 끝없이 뒤엉키며, 눈앞의 저택을 순식간에 집어 삼킨다.

직후, 페르젠은 뒤에 열병해있는 브뤼테인 가문의 기사들을 보며 입을 열었다.

“감히 제국에 반기를 든 반역자들을 모두 포박하라.”

“예!”

“그리고 치욕 조차 모른 채 불경을 저지르려 한다면……”

그래.

그러하다면.

“피를 봐도 좋다.”

명을 받든 기사들이 앞으로 나아간다.

그리고 페르젠 또한, 이사벨과 함께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

시엘 미드포드.

본디 악당의 심장에 쐐기를 박아 넣어야만 했을, 자신의 대척점에 서있던 주인공의 숙운을 집어 삼킨 그가.

마침내 그의 칼자루가 되어주었을 여러 조각들을 깨부수며 이곳에 당도한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이 악당의 몸뚱이에 뒤엉킨, 운명의 종착지가 눈앞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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