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5화 > EP.165
쏴아아아아.
상당히 굵은 빗줄기가 거칠게 쏟아진다.
그래서일까.
검게 그을린 왕성은 더더욱 애잔한 슬픔을 머금고 있는 것 같았다.
“백작님.”
“왔는가.”
“……예측하신 대로, 엘마르크 제국은 철수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렇군.”
만약, 이것이 로에르의 독단이라면.
모든 책임은 에르네스 제국이 짊어져야 하므로, 그들은 이나스 왕자의 도움 없이 이곳 백성들을 선동할 수 있는 절호의 계기를 손에 넣게 된 것일 텐데.
얌전히 철수 하는 것을 보아하면, 역시 배후는 엘마르크 제국일까.
하지만 거기에는 이해가 가지 않는 점이 하나 있었다.
이렇게 자신들이 악역을 자처하는 전쟁의 빌미는, 언제든지 가능했을 텐데.
어째서 이리도 귀찮게 빙글빙글 돌아가는 건지.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붉은 천에 쌓여 보관되어 있을 로에르의 목을 움켜쥐고 피드백을 받는 과정을 거쳐나가고 싶었지만, 뒷수습은 이정도로 충분했으니 그만 돌아가봐야 할 시간이었다.
“저, 그리고 따로 명을 내리신것은 송구스럽지만……”
“성과가 별로 없었나 보군.”
“죄송합니다.”
“어차피 큰 기대를 바라고 명을 내렸던 건 아니었네.”
왕성이 불타오르는 과정에서 창고 내부에 있던 값어치 있는 물건들까지 전부 소실되어버렸다.
그렇기에 혹여나 이서진이 살던 세계의 비유로 따지자면.
천장이 없는 랜덤 뽑기를 시도하여 명계의 3층에 서식하고 있는, 신체의 결손과 상처를 치료하고 수복시켜주는 괴이를 불러오기 위해 따로 밑준비를 해두려 했는데……
실패를 하였다고 해서, 그를 나무랄수도 없는 노릇이다.
“아, 더불어…… 이나스 왕자가 백작님을 뵙고 싶어 합니다.”
“지금은 그럴 시간을 낼 수가 없겠어.”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
그도 지금 돌아가는 상황이 어처구니가 없고 혼란스러우리라.
물론, 그것은 로벨리움 왕국의 백성들도 마찬가지이겠지.
아직은 아무런 입장 발표를 하지 않았으니까.
“가지. 이 별거아닌 뒷수습에 시간이 너무나 지체되었어.”
왼손으로 우산을 들고 있기를 5분.
페르젠은 자연스레 오른손으로 우산을 넘겨 받으며, 빗물로 얼룩진 길을 거닐었다.
그리고 그의 걸음이 도달한 곳은, 엄숙한 분위기 아래 모두가 숨을 죽이고 있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수술을 받고 있는 거점의 복도.
……여유가 없을 황자를 대신해 뒷수습을 하고는 왔으나.
페르젠은 레이몬드 황자가 신을 읊조리며 기도를 하는 모습을 보고서, 상상이상으로 엘리자베스 황녀의 수술이 고행길에 올라 난관에 봉착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곳은 이서진이 살던 세계와 다르게, 정말로 신이라는 존재가 실존하는 터라.
종교가 힘을 가지게 되는 순간, 도저히 그것을 막을 수가 없을지언데.
그러한 황족이 앞장 서서 신의 종을 자처하는 것을 보아하면.
……이미 엘리자베스 황녀는, 인간의 손으로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른 것이 아닐까.
저벅.
조용히 의자에 앉아 시계를 바라본다.
어느덧 수술이 시작 된지 8시간이 훌쩍 넘어가는 상황.
조금 있으면 우중충한 하늘은 더욱 어두워 질텐데.
굳히 닫힌 문은 도저히 열릴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 * * * *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가.”
“18시간째입니다. 스승님……”
깔끔했던 수술복은 이미 피범벅이 되어 본래의 색을 잃어버린지 오래였고, 사방에서 진동하는 피냄새는 그들의 정신을 혼미하게 만든다.
집도의를 맡고 있는 노인뿐만 아니라, 곁에서 그를 보조하는 젊은 의원들까지 파리하게 안색이 질려 한계까지 내몰린 상태를 꾸역꾸역 이어오고 있었다.
다른 의미로, 오러 나이트처럼 역경에 부딪쳐 자신들을 담금질해나가는 의원들.
그리고 그러한 노인──자신의 스승의 흘러내리던 땀을 조심스레 닦아주던 의원은 간신히 초점을 맞추어 테이블 위에 누워 있는 엘리자베스 황녀를 내려다보았다.
자신의 스승만큼 실력이 뛰어나다고 자부할 수는 없었으나.
그러한 자신의 눈에도, 이번 수술의 종착지는 실패라는 말밖에 떠오르지가 않았다.
‘자궁을 덜어내는 판단을 조금만 빨리했더라면……’
구할 수가 있었을 텐데.
하지만 젊은 제자는 자신의 스승을 원망하지 않았다.
분명 개복을 했을 때는, 자궁을 덜어내지 않고도 할만한 수술이었으니까.
리스크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황녀로 태어난 여인의 자궁을 어찌 그리 손쉽게 들어낼 수가 있단 말인가.
적어도 어깨를 짓누르는 엄청난 부담감 아래에, 자신의 스승은 할 수 있는 최선의 판단을 했다고 생각했다.
본디 선택은 인간이 하여도, 그 결과는 하늘이 점지하는 것이라 하지 않았던가.
애초에 의원은 환자에게 명계로부터 이승으로 돌아오는 길을 알려줄 수는 있어도.
억지로 끌고서 데려오지는 못하는 법이었다.
아마 인간이 만들어낸 산물 중에서 가장 위대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틀림없이 의술이리라.
하지만 도리어 필멸자에 속하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기에, 감히 삶과 죽음이라는 자연의 섭리를 완전히 거부할 수는 없었다.
“첫날…… 너희들에게 해주었던 말을 기억하느냐.”
잠시 손을 멈추고, 고개를 들어 올려 자신들을 훑는 스승의 말에 제자들은 일제히 입을 열었다.
“누군가를 치료하기 전에…… 그를 병들게 한 것을 포기할 수 있느냐고 물어보라 하셨습니다……”
“그래. 그 뿐만이 아니라 환자가 사망할것이라는 걸 알아차려도, 의원은 그 뒤를 끊임없이 쫓아야만 한단다.”
달아나는 생명을 쫓지 않는 의원은, 그 자체만으로도 환자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것이기에.
“그리고…… 생명을 살렸을 때는 언제나 감사함을 느끼거라. 너희들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렸을 뿐이다. 인간의 손으로 죽음이라는 것을 몰아냈다는, 아주 잠깐 동안만이라도 스스로가 신이 된것만 같은 착각과 희열을 느낀다면 반드시 의원을 그만 두어야 한다……”
“……스승님.”
“말이 길어졌구나. 자…… 그만 나가보도록 하거라.”
“스승님……!”
들었던 고개를 다시 숙이며, 노인은 홀로 수술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이것은 틀림없이, 자신들에게 테이블 데스(Table Death)를 경험시키지 않기 위함이겠지.
……살리지 못한 환자의 수만큼 성장하는 의원에게, 이것은 불필요한 배려였다.
허나 그 대상이, 제국의 황족이라면.
이 경험은 틀림없이 그들에게 거름이 되어준다기 보다는, 막대한 트라우마로 자리 잡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에.
노인은 그 한마디를 끝으로 침묵을 유지하였다.
수술방에서 수술이 시작되는 순간, 집도의는 모든 권한을 넘겨 받는 존재.
그가 퇴실을 명한 이상, 자신들에게 거부권은 없었으므로.
젊은 제자들은 저 마다 떨어지지 않으려는 발을 억지로 떼내어, 홀로 달아나는 생명을 쫓고 있는 자신들의 위대한 스승을 뒤로 하였다.
* * * * *
벌컥.
“!”
오랜 시간 끝에 드디어 수술방의 문이 열린다.
그너머에서 느껴지는 음산한 기운과 퍼져나가는 피냄새는, 살아있는 사람들로 하여금 본능적으로 죽음이 어떠한 것인지 간접적인 체험을 시켜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수술방에서 걸어 나온 의원은 총 5명이었고, 거기에 제일 중요한 엘리자베스 황녀의 수술을 책임진 집도의는 보이지 않았다.
“하하……”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 레이몬드 황자는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기에.
일순간 화색을 보이던 얼굴이 슬픔으로 얼룩지며, 애달픈 웃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레이몬드 황자의 일순간 변화하는 그 기색을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5명의 젊은 의원들은, 모두 죄인처럼 고개를 조아렸다.
“고개를 들게……”
“죄송합니다……”
“사과할것도 없네……!”
눈물로 얼룩진 목소리를 애써 숨기며, 천장을 올려다보는 레이몬드 황자.
“그대들의 스승은 언제나 이 말을 입에 담고 살았지…… 자신은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렸을 뿐이라고……”
“……”
“그래…… 의술은 배운 인간은 신이 아닐세. 그러한데 내 어찌 원망을 하겠나. 여기서 그대들을 원망한다면 감히 누가 다음번에 우리를 위해 의술을 펼칠까.”
“……”
“여전히 조아린 고개와 움츠려든 어깨는 그대들이 최선을 다하지 않았기 때문인가!”
“그건……! 결코 아닙니다……!”
“그러하다면 고개를 들게. 어깨를 피게……! 어려운 시험을 뚫고 올라온 그대들은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의술을 지니고 있는 인재들일세!”
“……”
“이러한 상황을 대비하기 위한, 황실의 최선이라는 뜻이지……”
다만, 최선은 언제나 최악을 물리쳐주지 않을 뿐이었다.
필멸자에 불과한 인간이 마련한 최선.
그것이 매번 본래의 역할을 수행해낼 수 있었다면.
어찌 전지전능이라는 단어가 신에게만 허락된 수식어이겠는가.
……그리고 레이몬드 황자의 그 모습을 지켜보던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로벨리움 왕국에서 엘마르크 제국과 힘겨루기를 해야했던 상황 자체가 자신 때문이었고.
엘리자베스 황녀가 죽음으로 내몰린 것 또한, 자신이 아니었다면 벌어지지 않았을 일이다.
그러나 그는 자신을 원망하지 않았다.
이것은 오랜 시간 브뤼테인에게 입은 은혜 때문일까.
아니면 반대로, 황실이 브뤼테인의 눈치를 보기 때문일까.
‘……’
의미없는 물음이었다.
어찌 이리도 쓸데없는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졌을까.
……엘리자베스 황녀는, 오히려 황실이 드디어 브뤼테인에게 빚을 갚을 일이 생겨 좋다고 했었다.
하지만 브뤼테인이 황실에게 베푼것은 은혜가 아니라, 대가를 바라지 않는 충도(忠道).
도리어 충성을 바친 군주가, 그것을 언젠가 갚아야 할 것이라 여겨 신하인 자신의 눈치를 보게 되었다면.
이것은 틀림없이 바로 잡아야 할 뒤틀림이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해보자면, 자신은 이미 그 점을 이용하여 이득을 취하지 않았던가.
그래, 잠시나마 이몸에 흐르는 브뤼테인의 피를 망각하고.
인간이자 악당인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으로서의 이득을 쫓았다면.
이제는 그 불충을 뉘우칠 시간이었다.
만개한 악의 꽃은, 더이상 누군가의 비극을 양분으로 삼을 필요가 없었으니까.
또각.
그렇기에 페르젠은 걸음을 내딛었다.
닫혀버린 수술방의 문을 향해, 조금씩 나아가기 시작했다.
“……부탁드립니다!”
그러나 다섯명의 젊은 의원들이 고개를 숙이며 페르젠의 앞을 가로 막는다.
“더는…… 저희 스승님에게 짐을 안겨다 주지 말아 주십시오……”
“……”
이들은, 자신이 저 수술방에 홀로 남겨져 있는 자신들의 스승을 질책이라도 하려는 줄 알았던 걸까.
심지어 레이몬드 황자까지 자신의 팔을 붙잡아온다.
“……괜찮네.”
적합한 가치의 물건들을 준비하는데 실패하였으니,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인 페르젠이 나서도 어찌할 도리가 없으리라.
오히려 레이몬드 황자는 페르젠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나선것이 아니라, 정말 저들의 스승을 나무라기 위해 나선것이라면……
진심으로 목청을 높여 화를 낼 생각이었다.
그러나 페르젠은 레이몬드 황자의 손을 조심스레 떼어내고, 그에게 짧게 고개를 숙인 뒤 젊은 의원들의 어깨에 손을 얹혔다.
“나는…… 그대들의 스승을 질책하러 가는 게 아닐세.”
그저, 기둥이 부서지지 않았는데.
어찌 건물이 먼저 무너지려 한단 말인가.
그것을 용납할 수가 없을 뿐이었다.
“……황족이 브뤼테인을 묻는 일은 있을지라도.”
브뤼테인이 황족을 묻는 일은 없어야만 한다.
의원의 의술로는 삶과 죽음이라는 세상의 섭리를 거스를 수가 없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