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3화 > EP.163
자신에게 접근했던 오베른 왕국의 사내는 말했다.
……자신들 오베른 왕국은 독립을 준비하기 위해, 가능하면 엘마르크 제국과 에르네스 제국이 오랜 시간 남은 두 왕국에 붙들려 있기를 원한다고.
이것을 도와주면 자신의 여동생, 리지의 발목을 고쳐주겠다고 했으나.
로에르는 그것이 얼마나 가당치도 않는 거래인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받아 들였다.
마음에도 없는 여인과 결혼을 하여, 알프레드 가문의 권세를 빌려 오려 했던 것도 무용지물이 되었으니.
그러나 외부의 조력자를 얻었다 했어도, 좀처럼 일을 풀어나갈 기미는 보이지 않아 로에르는 답답해 하던 참이었다.
다행히도 거기에 마침표를 찍어준 건, 레이몬드 황자의 엘마르크 제국이 전쟁을 도모하고 있다는 사실의 발표.
‘이 손으로…… 페르젠을 죽이기는 힘들지라도.’
인간의 극의에 도달한, 엘마르크 제국의 여제라고 한다면.
틀림없이 페르젠의 심장을 도려낼 수 있으리라.
억지로 데려온 엘리자베스 황녀를 죽인 다음, 당도한 페르젠의 손에 죽게 된다면.
자신의 시신을 탐구하며 피드백을 받는 도중 외부의 조력자가 오베른 왕국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 테고.
에르네스 제국은 그 죗값을 받아내려 할 터.
하지만 전쟁을 바라는 엘마르크 제국이, 그리도 좋은 상황을 얌전히 바라보기만 할까.
그래,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그는 자신의 손으로 전쟁의 불씨를 마련하여, 그레모리 여제의 손을 빌려 페르젠을 죽이는 차도살인을 계획하고 있었다.
그만큼 지금 자신의 수준으로는 페르젠을 어찌할 도리가 없다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기에.
“그대는, 참으로 어리석은 생각을 하는 구나.”
“어리석은 생각이라……”
불똥이 내려앉는 창고 안에서, 얌전히 의자에 앉아 있는 엘리자베스 황녀를 바라보며 로에르는 차가운 표정을 지었다.
“웃기지 마라. 클로디아 가문은 브뤼테인 못지 않게, 네놈들 황실도 증오스러우니.”
“……”
“그 날, 분명 황실에게도 의원을 보내달라고 요청을 했었는데. 못들은 척, 거절에 가까운 방관을 하지 않았나?”
투둑!
불길에 타 올라 무너져 내리기 시작하는 창고의 내부.
사방팔방에서 비산하기 시작하는 불똥이 위기감을 고조한다.
그러나 불씨를 휘날리는 그 화마 속에서도, 엘리자베스 황녀는 여유를 잃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뭐?”
“그 날, 우리는 확실히 브뤼테인의 눈치를 살펴 클로디아 가문의 요청을 무시했었니라. 하지만 그것이 어쨌다는 것이냐?”
“……”
“그대는 황실이 누구에게나 평등한 칼날을 휘두를 거라 생각을 했었나.”
가당치도 않다는 듯, 엘리자베스 황녀는 깔깔 웃으며 다리를 고혹적이게 꼬았다.
“황실에게 정의를 부르짖는 족속들이야 말로, 어디 그 얄팍한 정의를 실현한적은 있느냐?”
“……”
“가신의 탈을 쓰고 그대들이 부르짖는 정의는 언제나 세속적이고 가변적이었지.”
“어처구니 없는 감정의 호소군. 충성심은 강요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아하하! 모시는 주군을 위해, 약자와 아녀자를 위해 검을 들던 기사의 도(道)를 낭만으로 치부해버린 그대들이…… 어찌 그리 말을 하느냐.”
“……”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그대는 알고 있느냐? 흘러가는 세월 속에 끝까지 그 낭만을 품었던 이는 브뤼테인 밖에 존재하지 않았니라.”
그러니 어찌 황실이 브뤼테인의 치마폭을 뿌리칠 수 있을까.
“오래 전, 10살도 되지 않은 황자가 황위에 올라야 했었던 적이 있었지.”
교육을 받았다고는 해도, 아직 아무것도 모를 그 어린 황자는.
당연히 귀족들 사이에 놓여 끊임없이 치이는 삶을 살았다.
모든 귀족들이 호시탐탐, 무지한 황자에게 충성으로 포장한 자신들의 탐욕을 들이밀며 황실의 인장을 찍도록 강요했다.
……당연히, 그 당시 클로디아 가문의 수장──로에르의 선조도 예외는 아니었다.
그리고 그러한 황실을, 아무것도 모르는 어린 황자의 섭정이 되어 끌어주던 것이.
당대 브뤼테인의 가주였으니.
그 막대한 은혜를 어찌 갚을 수가 있으랴.
“때문에 황실은 오히려 그대의 여동생에게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에 감사하고 있느니라.”
“하하……”
손바닥의 살점이 찢겨나갈 만큼, 거세게 주먹을 움켜쥐는 로에르가 실소를 흘린다.
“항상 빚만 져왔던 브뤼테인에게, 조금이나마 그것을 갚을 일이 생겼으니까.”
그래, 그들 입장에서 클로디아 가문에게 일어난 불행은.
관심도 없는, 고작 한 여인의 발이 처참히 박살났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브뤼테인의 오점이자 상처가 된다면, 황실은 기꺼이 품위 따위는 던져 버리고 한 마리의 개가 되어 그것을 감추기 위해 열심히 핥을 수 있었다.
“내 여동생이 아니라…… 네 년이 그리 되었어도, 앵무새처럼 똑같은 말을 반복할 수 있었을까.”
검을 빼드는 로에르의 표독스런 눈빛이 엘리자베스 황녀의 몸을 훑는다.
그러나 피부를 타고 퍼져 나가는 그 살의에도 엘리자베스 황녀는 아랑곳 하지 않고 말했다.
“당연한 것을 묻는 구나. 설령 그가 몸뚱이를 망가트리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본녀를 처참히 강간하겠다 하여도…… 오히려 이쪽에서 그의 처소에 찾아가 기꺼이 치마를 들어 올렸을 것이다.”
“미쳤군.”
“어차피 브뤼테인의 손으로 명맥을 이어온 황실이니, 그들의 손에 망가지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 싶은 것 뿐이니라.”
자신의 코 앞으로 다가온 로에르를 올려다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화사하게 웃었다.
“이것은…… 모두 그대들이 초래한 뒤틀림이다.”
인연을 맺던 기사와 군주는, 어느덧 계약을 맺게 되었고.
본래 그들이 걸어가야 할 길은 한낱 낭만이 되어버린 시대.
그래, 그리도 오랜 시간 동안.
그 누구도, 황실에게 브뤼테인에게 미움 받을 용기는 안겨다 주지 않았다.
그러니 황실이 브뤼테인의 충성에 목을 매고, 그들을 편애하는 것은 당연한 수순일 터.
꽈악!
이윽고 로에르의 왼손이 엘리자베스 황녀의 고운 백금발을 한웅큼 움켜쥐고 가냘픈 몸을 강제로 끌어 올린다.
“어차피 이 자리는 네 년의 신세한탄이나 들어주자고 마련한 자리가 아니다.”
“알고 있느니라.”
끝까지 표정 변화 하나 없는 엘리자베스 황녀의 얼굴을 마주하며, 로에르는 자신의 검을 그녀의 복부에 깊숙이 박아 넣었다.
그러자 그녀의 새하얀 드레스가, 밑단부터 조금씩 선홍색으로 물들어 나가기 시작한다.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이 사내는, 틀림없이 페르젠이 키워낸 브뤼테인 가문의 더할 나위 없는 커다란 오점.
그러하다면 이로 인해, 브뤼테인은 자신들 황실에게 더더욱 빚을 지게 되는 거리라.
‘아아……’
제게 축복을 내려주신, 지혜를 관장하는 신이시여.
어찌 당신은 제게 흉(凶)을 점지하였나이까.
‘이것, 은……’
틀림없는, 황실의 길조(吉兆)일 텐데.
촤악!
엘리자베스 황녀의 복부에 쑤셔 박혔던 로에르의 검이 그녀의 피를 가득 묻힌 채 밖으로 뽑혀져 나온다.
그리고 대롱대롱, 자신의 왼손에 매달려 죽어가고 있는 그녀를 매몰차게 바닥에 내친 로에르는 날이 상하지 않게끔 그녀의 피를 닦아냈다.
뚜둑!
쿠웅!
그 때, 이 지하에 위치한 창고의 문이 불똥을 사방으로 튀기며 열리더니……
화악!
일순간 몰아치는 거센 불길 너머, 마치 수정처럼 아름다운 얼음으로 그것을 막아내는 은색의 마녀가 모습을 드러내고.
또각.
뒤를 이어, 언제나처럼 단정한 차림새의 페르젠이 나타났다.
“……”
그래, 드디어 자신이 초대한.
인생에서 가장 증오스러운 손님이 찾아온 것이다.
그에 로에르는 오랜 세월, 억지로 평온 손에 숨겨두었던 자신의 증오심과 살의를 끄집어 냈고.
그 검끝을, 페르젠의 심장을 향해 올곧게 겨누었다.
전쟁이 터져 그레모리의 손에 페르젠이 죽임을 당하는 건 어디까지나 대비책에 불과했다.
나름의 준비를 마친 지금의 이 자리에서, 자신의 손으로 페르젠을 죽일 수만 있다면!
……그것이야 말로, 최고의 종막극이 되겠지.
일부러 엘리자베스 황녀의 숨통을 단숨에 끊지 않는 것도 그 때문이었다.
자신을 빠르게 죽여야지만 그녀를 이곳에서 데리고 나가 살릴 수 있을 테니.
촉박한 마음으로 전투에 임하는 페르젠은 분명 빈틈을 보일 터.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없나.”
그들 사이를 가로 막고 있던 화마가 잠깐이나마 잠잠해진다.
그리고 로에르의 물음에, 페르젠은 옆에 피를 흘리며 쓰러진 엘리자베스 황녀를 확인하고서는 조용히 소매를 끌어 올렸다.
“있을 것 같은가.”
이미 죄를 뇌우친 망자가 될 바에야.
그것을 온전히 짊어지고 살아가는 악당이 되겠다 다짐을 했는데.
“그래. 그렇겠지. 예나 지금이나, 오히려 변한 점이 없는 것이…… 나는 기쁘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퉁!
화르륵!
떨어져 내리는 천장의 골조.
잠깐 이나마 잠잠해졌던 불길이 다시 한 번 거칠게 솟아 오르고.
악의 꽃은, 완전히 만개할 순간을 눈앞에 두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