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60화 > EP.160
북부에서 로벨리움 왕국의 수도까지 끌려온 여의원은, 아침 댓바람부터 자신을 호출한 페르젠에게 자그마한 불만을 가지며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대로 씻지도 못한 상태에서 누군가를 만난다는 건, 여인의 입장에서 얼마나 싫은 일인지 알고는 있을까.
그래도 그런 사소한 불만조차 잠재우는 건, 주기적으로 자신에게 들어오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었다.
틀림없이 이 계약이 끝날 때쯤, 수도에 의원을 차릴 수 있는 비용은 우습게 모이겠지.
“여기 인가요?”
“네. 그렇습니다.”
시녀가 자신을 인도한 방 앞.
하지만 여기는 분명, 아무도 없을 텐데.
그래도 명을 받을 뿐인 시녀가 자신에게 거짓말을 할리는 없어 보였기에, 여의원은 노크를 한 뒤 안으로 들어섰다.
“……?”
그러나 방 안으로 들어서서 문을 닫기 무섭게, 코끝으로 스며드는 비릿한 냄새에 여의원은 몸을 움찔했다.
남자 경험이 없는 건 아니었기에, 자연스레 그녀는 방안을 가득 채운 이 냄새가 어떤 건지 알아차렸다.
이내 자연스레 시선이 침대 위로 향했을 때는……
흠칫!
당장이라도 이 방을 벗어나고 싶다는 욕망이 강하게 치민다.
“훌쩍……”
가랑이를 벌린 채, 새하얀 두 다리를 파르르 떨며 사내의 씨를 울컥울컥 토해내고 있는 로젠베르크의 아가씨.
엉덩이와 허벅지 주변으로는 사내의 손자국이 짙게 새겨져 있었고.
양손의 손가락 또한 일부가 꺾여 있는 듯 했다.
“저, 저, 저, 저, 저는…… 모, 모, 모봤어요……”
두 눈을 질끈 감고, 몸을 돌리며 여의원은 파르르 떨리는 입가로 간신히 한마디를 내뱉었다.
귀족들이 숨기고 있는 어두운 면이란, 대등한 위치의 누군가에게는 약점으로 작용하지만.
반대로 그렇지 않은 대상에게는, 도리어 강력한 목줄이 된다.
심지어 눈앞에 있는 페르젠이 그냥 귀족이란 말인가.
허울 뿐인 루에르그의 성 뒤에 가려져 있는 건, 무려 브뤼테인의 직계 혈통.
필시 이 목줄을 벗을 수단은 죽음 밖에 없겠지.
그러기 싫다면 영원히 그의 곁에 종속 되던가.
“그대를 부른 이유가 무엇이겠나. 그 역할에 충실하도록 하지.”
“아……”
페르젠의 저 목소리가 어찌나 절망스러운 기분을 안겨다 주는지.
결국 몸을 돌린 여의원은 떨리는 걸음을 내딛어 라우라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대체……’
코앞에서 그녀의 몸을 관찰해보니, 거친 사내의 흔적이 너무나도 적나라하다.
이 여린 몸을 도대체 얼마나 거칠게 탐했던 걸까.
“실례…… 할 게요……”
허벅지를 조금더 벌려 고간 근처를 관찰해보니, 팅팅 부어오른 음부가 두 눈에 들어온다.
속살도 조금 찢겨져 있는 듯 한데, 그 때문인지 흘러나오는 정액이 닿을 때 마다 두 다리를 움찔움찔 떨고 있다.
“이, 일단…… 씻겨야 할 것 같은데……”
“그러도록 하지.”
가져온 물품과 가방을 바닥에 내려두고, 조심조심 라우라를 부축하여 안에 딸린 욕실로 들어선 여의원은 바구니에 차디찬 물을 받았다.
“이 위에 쪼그려 앉아 보실래요……?”
머뭇머뭇, 한참을 망설이다 자신의 어깨를 붙잡고 점차 허리를 내리는 로젠베르크의 아가씨.
그에 조심조심 찬물로 그녀의 음부를 씻겨주며 안쪽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은 여의원은 끈적한 정액을 긁어내기 시작했다.
“흐, 흐읏……!”
“아파도…… 조금만 참아요.”
이 여린 몸에 얼마나 많은 정액을 쏟아 부었던 걸까.
부드러운 속살에 달라 붙은 정액을 긁어낼 때 마다 찬물이 담긴 바구니에는 희멀건 정액이 둥둥 떠다녔다.
“혹시…… 위험한 날인가요……?”
안쓰러운 마음이 들었으나, 자신 입장에서는 해줄 수 있는 게 많이 없었기에.
그녀가 페르젠의 아이를 가지지 않도록 약을 처방해줄 수 있는 게 전부였다.
“아, 아니요……”
“다행이네요……”
원치 않은 남자의 아이를, 그것도 강간의 형태로 품게 되는 것이 얼마나 마음이 아플까.
그나마 그녀가 안전한 날이라는 게 자그마한 안도를 피어오르게 만든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제가 약을 처방해드릴게요. 백작님에게는 다르게 돌려 말할 테니 걱정은 하지마세요.”
“네……”
의원 입장에서는 명백히 페르젠이 자신의 권위를 이용하여 라우라를 겁탈한 광경으로 보일 것이다.
그리고 페르젠은 일부러 그 오해를 풀려 하지 않았다.
해당 오해를 풀게 된다면, 의원 또한 라우라가 멸문 당한 제노바 백작가의 혈통이라는 걸 알게 될테니.
물론, 이것은 배려가 아니었다.
정확히는 라우라에게 조금더 마음의 부채감을 쌓아 움켜쥐고 있는 목줄을 더욱 억세게 조이는 것.
……그렇게 욕실 안에서 정성을 다해 라우라를 씻긴 의원은, 밖으로 나와 그녀를 침대에 앉혀두고 최선을 다해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그러다 입 안의 혀를 깨문 상처를 발견했을 때는, 그녀가 페르젠에게 겁탈 당하는 와중 자살 시도까지 했나 싶어 더더욱 연민의 마음을 들게 만들었다.
“끝났네요…… 약은 일주일치를 두고 갈 테니, 아침 저녁으로 드시면 될 거예요. 이 약은 통증을 완화시켜주는 것이니 조금 있다가 바로 드시구요.”
“고생했다.”
“백작님.”
“왜 그러나?”
“종신 계약은…… 나중에 해도 괜찮을까요?”
“눈치가 빨라서 좋군.”
“그럼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그러게.”
타악.
방안의 문이 닫히자, 페르젠은 의자를 끌고와 침대 위에 앉아 있는 라우라를 마주보며 앉았다.
“묻고 싶은 말이 많아 보이는데.”
“……”
“질문하는 것이 꺼려진다면, 내가 말을 해주마.”
나근나근한 어투로, 밤부터 새벽까지 있었던 일들을 상세하게 말해주는 페르젠.
그리고 그의 말을 듣던 도중, 라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굳이 다른 죽음의 선택지를 주어도, 복상사라는 죽음의 형태를 지독하게 고집했다는 자신의 모습에……
짚이는 점이 아주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물론, 라우라도 정말 자신의 무의식이 만월의 괴벽에 영향을 주는지는 몰랐다.
적어도 전생의 자신과 가족들은, 아주 명확한 하나의 욕구만을 갈망했으니까.
지금의 자신처럼 단순히 상대방을 죽이는 과정에서 희열을 느낀다는, 구체성이 모호한 괴벽에 대해서는 그녀도 상세한 정보를 알 수 없었다.
애당초 제노바 백작가의 역사가 짧은 건 아니었지만, 괴벽에 대한 자료가 문서로 남아 있지는 않았기에.
미쳤다고 그걸 문서로 남겨 가문의 역린을 탄생시키겠는가.
그래서 라우라는 페르젠 앞에서 더욱 주눅 들 수 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부러진 손가락과 다친 혀의 상처 정도는 그가 얼마든지 조작할 수 있으리라 보아서, 육욕 때문에 자신을 겁간했다고 생각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기회는 지금까지 얼마든지 있지 않았나.
오히려 의원에게 강간범으로 비추어지는 상황에도, 자신의 비밀을 말해주지 않은 것에 마음속 부채감이 쌓인다.
“딱히 할 말은 없는 듯 하구나.”
“……”
피로한 음색을 내뱉으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키는 페르젠.
이대로 그가 나갈까 싶어, 라우라는 슬그머니 손을 뻗어 그의 옷자락을 쥐었다.
“죄, 죄송…… 해요……”
따지고 보면 자신이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때, 그에게 득 될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사전 정황 모든 것이, 자신이 그를 겁간한 것 같아 라우라는 고개를 푹 숙였다.
“조금 여유가 생기게 되면 네 방으로 가거라. 그 때 시녀들이 이 방을 치울 테니.”
“네……”
“그리고……”
허리를 숙이는 그가 자신의 귓가로 입을 가져다댄다.
“……수음은 부끄러운 것이 아니니, 굳이 꺼리지 말도록 해라.”
“……”
타악.
방문을 닫고 나가는 그가, 자신을 홀로 남긴다.
그는 자신이 욕구불만이기에, 그 무의식이 괴벽에 표현되었다 생각하는 걸까.
수음은 오히려……
‘지나치게……’
하고 있는데 말이다.
“하……”
전생에서도 하지 못했던 사내와의 첫경험을 이런 식으로 하게 될지는 몰랐기에.
라우라는 그저 밍밍하고, 뒤숭숭한 기분에 잠겨 몸을 뒤척일 뿐이었다.
* * * * *
“앗……”
곤히 잠을 자고 있던 유페미아는 갑작스레 침대가 삐걱이는 흔들림에 눈을 뜨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자신을 가장 먼저 반기는 건 피로한 얼굴로 곁에 누운 페르젠이 아이처럼 이불 안으로 파고들어오는 광경.
고생했다고, 푹 자라는 말을 건네주고 싶었으나.
페르젠은 자신의 그 한마디에 대답 해줄 여력조차 없어 보였기에, 유페미아는 마주보는 형태로 몸을 돌린 뒤 그의 탄탄한 몸을 꼬옥 품어주었다.
물기에 젖어 덜 마른 머리카락.
오늘 따라 그의 체취를 가리는 짙은 향유의 냄새에 약간의 낯섦이 느껴지나 유페미아는 다정한 손길로 페르젠의 등을 쓸어내린다.
그에 페르젠 또한,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유페미아의 몸을 끌어 안으며 조금씩 고른 숨소리를 내뱉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의 쇄골 부근에 와닿는 그의 숨결이 명백히 불규칙하다는 걸 유페미아는 눈치를 챘기에……
“가슴…… 만져도 괜찮아요……”
그의 손을 자신의 커다란 가슴 쪽으로 인도하며, 작은 목소리로 말한다.
“너무 쎄게 쥐면…… 젖이 나오니까…… 살살 해야 해요……”
어머니의 목소리 같은 상냥함으로, 어찌 이런 엉큼한 말을 내뱉는건지 모르겠으나.
페르젠은 고분고분 그녀의 옷자락 안으로 손을 넣어, 풍만한 가슴을 부드럽게 주물러댔다.
그 촉감은 사내의 성욕을 부채질 하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보다 깊은 저 너머로 정신을 천천히 끌어 내린다.
……그렇게 잠시 뒤, 자신의 가슴을 주무르던 페르젠의 손이 완전히 멈추었을 때.
유페미아는 쇄골 부근에 와닿는 그의 숨결이 무척이나 규칙적이라는 것을 깨닫고,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입술을 맞추었다.
분명 초기에는 이런 작은 자극에도 잠에서 깨어난 그였는데.
더 이상 그러지 않는 모습을 보아하니, 적어도 자신의 품이 그에게 따스하고 포근한 쉼터가 된 것은 아닐까.
문득 그러한 생각이 들자, 유페미아는 기분이 좋아 졌다.
* * * * *
빠르게 흘러가는 시간 속, 라우라의 괴벽을 통제하며 쌓였던 피로를 어느정도 풀어낸 페르젠은.
통째로 하루의 시간이 흘러간 다음 날, 간신히 걸을 수 있게 된 유리엘과 함께 로벨리움 왕국 내의 거점으로 향했다.
툭!
“……”
그러나 우연이라 하기에는 무척이나 어색하게, 골목에서 황급히 뛰어 나온 누군가와 몸을 부딪친다.
하지만 페르젠은 굳이 사과도 없이 재빠르게 도망치는 그 사내를 붙잡지 않았다.
그에 곁에 있던 유리엘이 황당하다는 듯 입을 연다.
“이거 전형적인 소매치기 수법 아니야?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어째서 가만히 있는……”
“유리엘.”
“으, 응……”
“먼저 가도록 해라.”
부스럭.
주머니 쪽에 손을 넣으니, 곱게 접힌 한장의 종이가 느껴진다.
기사들 또한 일부러 저 사내를 붙잡지 않은 건, 뛰어난 동체시력으로 물건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무언가를 전달해주는 것을 보았기 때문일 터.
“먼저……?”
“그래. 아마 상당히 늦을지도 모른다. 황자 전하에게는 네가 잘 말해주었으면 좋겠군.”
조금 의문이 들었으나, 유리엘은 굳이 그의 말에 토를 달지 않고 고개를 끄덕이며 뒤따르던 기사들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유리엘이 자신의 시야에서 사라지자, 페르젠은 조용히 주머니 속에 자리 잡힌 종이를 꺼내들어 펼쳐 보았다.
적힌 내용은 오직, 특정 건물의 주소가 적혀져 있는 간결한 글씨체 뿐.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자가 누구일까……
페르젠은 잠시 의아함이 들었으나, 곧이어 짐작 가는 사람이 없지는 않았기에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