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56화 (156/260)

< 156화 > EP.156

“상황이 좋아.”

프리기아 후작은 입가를 핥으며 웃음을 머금었다.

어젯밤의 지진은 자신들에게로 틀림없이 호재로 작용하리라.

솔직히 높은 확률로 에르네스 제국이 저지른 짓이 아닐까 싶었으나, 지진같은 자연재해는 자연스레 마력의 울림도 동반하기에 누군가의 소행이라고 단정지어 말하기는 어려웠다.

애당초 원소 마법사가 대지에 행하는 일은 흔적이 좀처럼 남지 않는 간섭의 영역이었으니까.

그러나 지금 이 순간, 그것은 조금도 중요하지 않았다.

설령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이라 해도.

민심이 자신들을 따르고 있는 이상, 이나스 왕자가 나서서 쓸만한 연설을 해주기만 한다면……

좋게 말해서 혁명, 나쁘게 말하자면 폭동을 빠르게 일으킬 수 있으리라.

“이나스 왕자를 찾아가야겠군. 현재 그는 어디 있지?”

“베넨 언덕에 있습니다.”

“베넨 언덕?”

“……일종의, 공동 묘지이지요.”

“하.”

따르는 부하의 말에 프리기아 후작은 코웃음을 치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리 봐도 그는 왕이 될만한 그릇으로 보이지 않는 구나.”

이리도 중요한 순간에, 감정에 파묻혀 쓸데없는 시간을 낭비하고 있다니.

“차라리 계집으로 태어나 사내의 수발이나 드는 것이 나았을 인생이야.”

쯧.

혀를 차며 걸음을 옮기는 프리기아 후작은, 그래도 한참 슬픔에 빠져 있을 그를 곧장 현실로 끄집어내는 건 역효과를 낼거라 생각했기에 죽은 이를 추모하는 대표적인 꽃들을 몇송이 사들여 가식적인 표정을 지은 채 베넨 언덕으로 나아갔다.

* * * * *

저벅.

죽은 자의 냄새가 진하게 풍겨오는 베넨 언덕 위.

그곳을 거닐며 프리기아 후작은 어째서 로벨리움 왕국이 이곳에 공동묘지를 지었는지 알것만 같았다.

‘너머의 경치는 좋군.’

명계로 돌아간 이들에게, 적어도 이승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을 선물해주고 싶다 이건가.

그로서는 좀처럼 공감하기 힘든 감정선에 웃음이 나오지만, 곧이어 이나스 왕자의 뒷모습이 눈에 들어오자 억지로 슬픔을 덮어썼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

사들고 왔던 꽃을 근처에 내려 놓으며, 프리기아 후작은 이나스 왕자 옆에 서서 잔잔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그래.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지.”

“극복하셔야 할 겁니다.”

“……”

“지진은 자연스러운 자연의 현상이지만, 수년간 일어나지 않던 일이. 마치 우연인듯 이 시기에 일어나는 건……”

“에르네스 제국이 한짓이란 말인가.”

“그 가능성을 부정하지는 못하겠지요.”

“……”

“설령 자연스러운 현상이었다 해도, 이번 일로 우리는 에르네스 제국을 몰아낼 수 있을 겁니다.”

이나스 왕자 옆에 편히 앉으며 프리기아 후작은 말을 이었다.

“이 상황에서도 앞으로의 일을 논의하는 제가 비정해보이십니까.”

“……”

“왕자. 지금 당신이 흘려보내고 있는 오늘의 시간은, 어제 죽은 이들이 갈망하던 내일입니다.”

“하하……”

“어쩌면 이토록 수많은 죽음을 목격한 당신은 겁을 먹었을지도 모르겠지요.”

그러나.

“왕족인 당신은 죽음을 두려워해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의무를 다하지 않는 것을 두려워해야 하지요.”

“……”

“시간이 많이 없을 겁니다. 에르네스 제국은 이번 일을 말미암아 자신들을 압박해오기 전에 선수를 치려 할 텐데…… 그전에 나서는 게 훨씬 편할 겁니다.”

프리기아 후작의 말에 이나스 왕자는 끝없는 침묵을 유지했다.

강제로 고향 땅을 벗어나 수도에 종속되어, 오랜 시간을 보내왔던 자신의 백성들.

……국가의 수도란 본디, 그들에게 있어서 기회의 땅이 되어주어야 했을 텐데.

그러지 못하고 감옥의 역할을 하여 그들의 삶을 옭아맨 것에 이나스 왕자는 깊은 죄책감을 느꼈다.

“후작.”

“말씀하시지요.”

“진행하고 있는 일이 자리를 잡게 되면……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식량난이 올 걸세.”

“예.”

“……밀과 보리를, 충분히 공급해줄 수 있겠나.”

“당장은 어려울 겁니다. 하지만 머잖아 가을이 찾아 올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머잖아라……

추수의 계절인 가을은, 아직 두달 정도가 남아 있는데.

‘나는……’

누구를 믿어야 하는가.

눈앞에 놓인 갈림길에서 이나스 왕자는 숨통이 조여왔다.

어느 길로 걸음을 내딛어야 옳은 것인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아 어깨가 무거웠지만.

‘적어도……’

일정선의 위험 부담을 짊어지려 하지 않는 엘마르크 제국과.

황실의 존망을, 자신들의 역사를 걸고 부딪쳐온 에르네스 제국을 보고 있자하면.

저울이 자연스레 어느 쪽으로 기우는지, 이나스 왕자는 선명히 느낄 수 있었다.

“……물러나주겠나. 나는 이들을 조금더 추모하고서 내려가도록 하겠네.”

“그러하시지요.”

별다른 말없이 몸을 일으킨 프리기아 후작이 짧게 목례를 하고서 조용히 물러난다.

그렇게 홀로 베넨 언덕 위에 앉아 있던 이나스 왕자는, 불어오는 따스한 바람을 맞으며 입을 열었다.

“이러한 선택 밖에 하지 못해서 미안하오.”

에르네스 제국 쪽에 손을 들어준다 한들, 그것은 상황을 악화시키지 않는 선택지일 뿐이었다.

보다 나은 선택지라는 게 어딘가에 존재할지라도.

그것은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게 아니었기에, 이나스 왕자는 씁쓸하게 웃었다.

“언젠가…… 오랜 시간이 흘러…… 다시금 윤회를 거쳐 이 세계에 태어난다면……”

그 때는, 다시 한 번 이 땅을 밟아주오.

“틀림없이 머나먼 미래에 존재할 로벨리움 왕국은……”

지금보다 나은 곳일 테니.

“그리고 그 미래에 나라는 망나니 왕자에 관해서 듣는다면……”

술 한잔을 하며, 기꺼이 웃어 주시오.

비틀.

몸을 일으키는 이나스 왕자가 고개를 숙인다.

그리고 다시금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 그의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총명히 빛나고 있었다.

* * * * *

“대놓고 묻지 그러느냐.”

“……”

“그대 답지 않게, 힐끔힐끔 곁눈질을 하는 건 어울리지 않는 구나.”

로벨리움 왕국의 제 1 왕자와 마주하기 전, 엘리자베스 황녀는 페르젠의 시선을 느끼고서 그에게 웃으며 고개를 돌렸다.

“일은…… 잘 해결 하셨습니까.”

“글쎄. 그건 제 1 왕자가 나선 뒤에 결과를 보고 판단 해야 할 일이지 않겠느냐.”

“……”

“다만, 그는 어린 아이처럼 펑펑 울더구나. 본녀의 치마폭이 흠뻑 젖을 만큼.”

어젯밤의 독대를 회상하던 엘리자베스 황녀는 묘한 감상에 빠진 듯 턱을 괴었다.

그에 페르젠은 자연스레 그녀의 치마폭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솔직히 속국의 왕자로서 이나스 왕자가 보여주었던 면모를 무척이나 높게 평가하고 있는데.

그러한 사내가 여인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아이처럼 울음을 터트린다라……

페르젠으로서는 좀처럼 뇌리에 그려지지 않는 그림이었기에, 무어라 말을 하지 못하고 입을 굳게 닫았다.

그러자 페르젠의 시선이 위치한 곳이 자신의 치마 부근이라는 걸 깨닫고, 엘리자베스 황녀는 눈웃음을 치며 고운 목소리로 말했다.

“어찌. 그대도 본녀의 치마폭에 얼굴을 묻고 눈물을 흘릴만큼 힘든 일이 있더냐.”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자신의 치마를 붙잡은 채, 나풀나풀 치맛단을 흔드는 엘리자베스 황녀.

장난이라 하기에는, 그대로 받아들이기 힘들만큼의 요염함이 묻어 나온다.

이것이 그녀의 매력이라면 틀림없이 매력이라 할 수 있겠으나……

“황녀 전하. 경박한 행동입니다.”

페르젠은 그것을 다그치듯 단호히 입을 열었다.

“흥. 황실의 핏줄은 어디가서 농담도 하지 못하는 것이냐.”

“……”

“되었니라. 어차피 아내가 둘이나 있는데, 그 여인들의 치마폭으로도 감당하지 못할 만큼 그대가 우는 모습은 상상이 가지 않으니.”

흥이 식었다는 듯, 몸을 일으키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손을 내민다.

자신의 오라버니인 레이몬드 황자가 앞에 있으니, 자연스레 에스코트를 옆의 페르젠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에 페르젠 또한 몸을 일으켜 그녀의 손을 부드럽게 붙잡았다.

그러자 선명하게 느낄 수 있는 손끝의 떨림.

여유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 겉모습과는 상반되는 반응이었기에, 페르젠은 의도적으로 초점을 흐트러트린 채 엘리자베스 황녀를 마주보았다.

“시답잖은 위로의 말을 건네려 하는 것이라면 그만 두거라.”

“……”

“적당한 긴장감은, 오히려 득이 된다고 하지 않았더냐.”

“……그렇지요.”

에스코트를 맡길 사람이라면, 자신 말고도 있을 텐데.

굳이 그녀가 자신을 고른 건, 브뤼테인의 핏줄이기 때문이리라.

브뤼테인은 아주 오랜 세월 간, 황실의 나약했던 면모를 지켜봐왔으니까.

“백작.”

“예.”

“만약 전쟁이 난다면……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어찌하여 당연한 것을 물으십니까.”

일말의 고민도 없이 대답을 해주는 페르젠의 목소리는, 얼핏 보면 건성으로 자신의 질문을 받아들이는 것 같으나 엘리자베스 황녀는 어째서인지 혼란한 속마음이 잔잔하게 안정되는 기분이 들었다.

“……그래. 본녀가 적국의 전리품으로 넘어가는 일은, 결코 없으리라 믿겠니라.”

이 대화를 마지막으로.

에르네스 제국의 귀족들은 선두에서 걸어나가는 레이몬드 황자를 따라 입궁하였다.

각자가 쥐고 있는 주사위를 던질 시간이, 코앞으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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