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2화 > EP.152
땅거미가 지고, 내려 앉는 어둠을 피해 집 안으로 들어가는 이곳의 백성들.
그들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다 엘리자베스는 뒤편의, 황실 소속 원소 마법사들에게 고개를 돌렸다.
“두렵느냐.”
“예?”
“무너지는 건물 속, 죽어가는 이들은 하등 죄가 없을 텐데.”
“두렵지 않습니다.”
“그러한가.”
일말의 고민도 서려있지 않은 그들의 말을 들으며, 엘리자베스는 조용히 걸음을 내딛었다.
“……사후, 명계에서 인간이 생전의 죄를 말미암아 재판을 받게 된다면.”
“……”
“그대들은 거리끼지 말고, 황실의 핏줄들을 앞으로 내세우거라.”
“황녀 전하.”
“손에 피를 묻히게 한 짐을, 저승에서까지 짊어지게 할 생각은 없느니라.”
“……”
“그곳에는 황실도, 제국 또한 없을 진데. 충성을 바칠 이유가 어디 있겠느냐?”
작게 웃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몸을 돌리고, 치맛단을 두 손으로 살포시 쥐어든 채 계단을 내려간다.
또각.
이내 계단을 전부 내려왔을 때, 그녀는 길바닥에 떨어져 서서히 죽어가는 꽃송이를 바라보다 걸음을 내딛어 높다란 구두의 굽으로 부드럽게 즈려 밟았다.
“악녀가 되기에는…… 더할 나위없이 좋은 시간이구나.”
불어오는 밤바람만이, 그녀의 백금발을 조용히 훑고 지나간다.
* * * * *
‘한 시름…… 놓을 수는 있는 건가.’
자신의 방에서 조용히 와인을 마시던 이나스 왕자는 한숨을 내쉬었다.
프리기아 후작, 정확히는 엘마르크 제국의 의도 자체를 의심을 해왔으나.
다행히도 그들은 자신들의 왕국을 속국으로 삼으려 드는 것 같았다.
……단기간 내에 물가가 상당히 오르겠지만, 그것은 어차피 머지 않아 차차 안정화 될 것이다.
엘마르크 제국이 바보도 아니고, 만약 자신들 왕국을 속국으로 삼게 된다면.
시중에 풀어버리는 통화의 양을 원점으로 되돌리려 들 테니.
‘에르네스 제국도, 우리 왕국이 엘마르크 제국으로 넘어가는 것이 싫다면 훨씬 커다란 딜을 해올 테지.’
초반에는 조금 엇나가는 듯 했으나, 흘러가는 흐름이 서서히 자신이 의도한 바로 이어지자 이나스 왕자는 어깨가 조금이나마 가벼워지는 것을 느꼈다.
“한 왕국의 왕자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싸구려 와인 이구나.”
“콜록……!”
고요한 방안을 울리는, 갑작스런 여인의 목소리에 이나스 왕자는 사레가 들려 거세게 기침을 했다.
그리고는 곧장 문밖에 대기 중일 인원들을 불러 오려고 했으나……
“칼 하나 쥐지 않은 여인과 독대할 용기조차 없는 것이냐?”
“다, 당신은……”
에르네스 제국의 황녀이자, 지혜의 신에게 축복을 받아 앞날의 길흉을 점칠 수 있는 여인──엘리자베스를 보며 이나스 왕자는 주변과 창밖을 내려다보았다.
“어떻게……”
“걱정하지 말거라. 내가 그대를 인질로 잡는 것 보다, 그대가 나를 인질로 잡는 것이 더 쉬울 테니.”
이나스 왕자 앞으로 걸어가, 그의 맞은 편에 놓인 의자에 앉은 엘리자베스 황녀는 와인을 든 뒤 새잔에 자신의 몫을 부었다.
그리고는 한 모금 음미를 하더니, 아름다운 눈살을 살짝 찌푸리며 다시금 잔을 내려 놓는다.
“취하기는 좋은 와인 이구나.”
“여기는 무슨 이유로 오신 겁니까.”
“역사적으로도, 미인계는 고전적이지만 효과적인 수법 아니었더냐?”
“농담하지 마십시오.”
“경계심을 좀 풀거라. 한낱 강아지도 자신의 집에서는 반은 먹고 들어 간다는데.”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있는 듯한 그의 표정과 어깨를 보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말을 이었다.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 오늘, 나는 그대에게 두 가지 선택지를 주러 왔느니라.”
“……”
“그 전에, 그대는 엘마르크 제국이 전쟁의 준비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아는가?”
“……금시초문 이군요. 근거 없는 말로 현혹하려 드는 것이라면 그만 두십시오.”
“시중 상가에서 거스름 돈을 받는 식으로 동화를 회수할 때, 특히 식재료를 파는 곳에서…… 그들은 밀과 보리를 중점으로 사갔더구나.”
“……”
“물가가 비약적으로 오르는 시기에, 시중에서 식재료들은 분명 과도하게 팔려나가기 시작하겠지. 백성들 입장에서 구매 경쟁이 제일 과열되는 것이 이쪽일 테니. 하지만 그들이 공급하려는 식재료중에서 밀과 보리의 양은 과연 어떠할까? 전체적인 비중에서 채 10%는 차지할 수 있을까?”
벌레가 좀먹기는 해도, 상대적으로 밀과 보리는 보존할 수 있는 기간이 제일 길다.
과도하게 식재료를 사들여도 낭비가 제일 적은 품목.
“고작, 근거가 그거 하나입니까?”
“……부족하기는 하겠지. 하지만 나는 이곳에서 그대를 설득하러 온 것이 아니야.”
팅.
팅……
와인의 잔을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리며, 엘리자베스 황녀는 턱을 괴었다.
“우리는 이번 엘마르크 제국의 농단에 맞춰 줄 생각이 없느니라.”
“……그러면, 저희는 엘마르크 제국의 속국이 되는 것이지요.”
“그래. 그대들이 고작 속국이 되어, 대외적인 힘의 기울기가 엘마르크 제국 쪽으로 잠시 넘어가는 것 뿐이라면 상관이 없겠지.”
“……”
“하지만 우리는 그들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농단에 맞추어 줄 생각이 없으면서도…… 동시에 그대들을 얌전히 넘겨줄 생각도 없어.”
“하하…… 그러면 선택을 해야하는 건, 제가 아니라 에르네스 제국 쪽으로 보입니다.”
“정말 그리 생각을 하느냐?”
은은하게 미소를 머금고 있던 엘리자베스의 얼굴이 무심하게 뒤바뀌자, 이나스 왕자는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이것은 어디까지나 권위를 이용해 자신을 찍어누르려는 것처럼 보였기에, 최대한 내색하지 않으려 했지만……
쿠구궁!
“!”
일순간 거세게 흔들리는 진동에, 이나스 왕자는 놀란 얼굴로 황급히 탁자를 붙잡았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잔잔해질 거라고 예상한 것과 다르게, 진동은 폭은 점차 빠른 속도로 상승하기 시작했다.
투둑!
바닥으로 떨어지는 책장의 수많은 책.
챙그랑!
한낱 유리 조각으로 산화하는 와인 병과 잔.
당장 대피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나스 왕자는 본능적으로 벌떡 일어나 밖으로 나가려 했으나……
“……”
이 혼란함 속에서도 여유롭게 의자에 앉아 창문 밖을 주시하고 있는 엘리자베스 황녀를 보고서, 그는 그만 그녀를 따라 창문 밖으로 시선을 옮기고 말았다.
“………”
그에 이나스 왕자는 볼 수 있었다.
그래, 볼 수 있었기에 그는 일순간 호흡을 멈추었다.
털썩!
높다란 파도를 만나 흔들리는 배위의 선원들처럼 그의 몸이 균형을 잃고 바닥으로 주저 앉는다.
그러나 그의 눈동자만큼은, 여전히 커다랗게 확장 되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쿠구구구궁──!
건물이 무너진다.
마치 한낱 모래성처럼 너무나도 허무하게 가라앉기 시작했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저 건물에는 도대체 몇 십명이나 되는 자신의 백성들이 거주하고 있었을까.
아니, 함께 무너지고 있는 건물들까지 포함을 한다면.
피해는 몇십이 아니라 몇백으로 불어나겠지.
쿠우웅!
이윽고 내려앉은 건물의 충격파가 만들어낸 거센 바람이 창문을 강타하더니……
쩌억!
순식간에 유리창에는 무수한 실금이 가기 시작했고, 머지 않아 산산히 부서져 내림과 동시에 흙먼지가 자욱하게 뒤섞인 공기를 방안으로 밀어 넣는다.
그로 인해 안과 밖에서 느껴지는 현장감의 차이가 조금씩 좁혀졌고, 이나스 왕자의 귓가로는 백성들의 비명 소리가 선명히 들려오기 시작했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황녀는 그 소리를 들으며, 굳은 채로 주저 앉아 있는 이나스 왕자에게 또렷이 한 마디를 내뱉었다.
“자신이 먹을 수 없는 만찬을, 어찌 적이 그대로 먹을 수 있게 내버려 두겠느냐.”
“아…… 아아……! 흐으아아악!”
고성을 내지르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이나스 왕자가 엘리자베스 황녀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움켜쥔다.
건장한 사내의 손이라면, 무리없이 꺾어 버릴 수 있을 정도로 여린 목.
“지금, 지금!!! 당신들이 무슨 짓을 한 건지는 알고 있어……?”
“최소 몇백은 사망을 했겠지.”
“그런데 어찌……!”
“지겨울 만큼 하품이 나오는, 구닥다리 도덕론을 끌어들이는 것이냐.”
“……”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 내가 분명 말하지 않았더냐? 나는 오늘 이곳에서 그대에게 선택을 강요하러 온 것이라고.”
움켜쥐는 그의 손 때문에 숨이 막혀 오지만, 엘리자베스 황녀는 특유의 고고한 표정을 흐트러트리지 않고 이나스 왕자를 자신의 페이스로 끌어 들였다.
“이것으로 그대에게는 두 가지의 선택지가 생겼니라. 작금의 지진을 우리의 소행이라고 하는 것과, 반대로 우리에게 덮어 씌우기 위한 엘마르크 제국의 소행이었다고 발표를 하는 것.”
“뻔뻔하게 이 상황에서……!”
“그대로 차오르는 증오심에 몸을 맡기고 싶다면 그리 하여도 좋다.”
“……”
“허나, 우리라고 한참 황권을 강화하는 이 시기에. 전쟁의 명분을 고작 속국인 왕자의 손에 쥐어주고 싶은지 아느냐? 이리 말을 하였어도 알아 듣지 못하겠다면 마음대로 하여라. 백성들의 마음 속에 증오의 불씨를 피우고, 그 방향이 우리를 향하도록 만들어라.”
“……”
“적을 단정짓고, 자유라는 이름아래 해방의 깃발을 쥐게끔 하여라. 그렇다면 우리는 주어진 역할에 충실하게끔 그대들을 학살할 것이고, 엘마르크 제국은 그대들을 도와 전쟁의 연장선이 되게끔 다리를 이어 나가겠지.”
엘리자베스 황녀의 목을 움켜쥐고 있던 이나스 왕자의 손이 파르르 떨리며 힘없이 아래로 추락한다.
“방식이 잔혹하다는 것은 알고 있으나, 이만큼 우리의 진정성을 보여주는 것은 없으리라 생각하였다.”
“에르네스 제국이, 정말로 전쟁을 원하는 것이라 한다면……”
“우스운 소리를 하는 구나.”
냉소적인 미소를 입가에 머금고 엘리자베스 황녀가 몸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특유의 높다란 장신으로, 어느새 처연히 무릎을 꿇은 채 좌절하고 있는 이나스 왕자를 내려다보며 기나긴 말을 읊조렸다.
“에르네스 제국의 역사가 얼마나 오래 되었다고 생각을 하느냐? 귀족들은 심심하면 황실을 업신여기며 세금을 떼먹기 일수였고, 브뤼테인이라는 동아줄에 간신히 의존하며 명맥을 이어가던 시기도 있었다.”
“……”
“그 세월을 견디고 견뎌, 드디어 온전한 황권을 수립해나가기 위해 마련된 계단이 눈앞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제발로 걷어 찰지도 모르는 이 상황이 그대는 정말로 연기 같다고 느껴지는가?”
“……”
“몇백? 우스운 숫자다. 이 계단을 만들기 위해, 흘러간 세월 아래에 희생 당한 이들은 수는 감히 헤아릴 수가 없을 테지. 한 마디로 에르네스 제국의 황실이 다년간 이뤄온 모든 것을 걸고, 본녀는 이 자리에서 그대와 독대를 하고 있는 것이니라.”
엘리자베스 황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잠시나마 가벼워졌더 이나스 왕자의 초라한 어깨에 더더욱 무거운 짐을 차례차례 싣는다.
때문에 그는 눈물을 흘렸다.
고통과 아픔에 몸부림치며 울음을 토해내듯 말했다.
“왜…… 도대체……”
나에게, 이러한 선택을 강요하는 것이냐고.
그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냉소적인 비웃음을 입가에서 지우고, 자애로운 미소를 머금으며 이나스 왕자의 머리를 부드럽게 끌어안았다.
“희대의 망나니로 기록 되는 한이 있더라도, 자신의 나라를 위해 희생하려는 각오를 다짐한 그대가 아니라면…… 어찌 본녀 또한 이 말을 그대에게 할 수 있었겠느냐.”
“……”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 오히려 그대이기에, 그대이기 때문에. 이러한 선택을 강요 받는 것이니라. 본녀의 말을 한낱 마녀의 속삭임이라 치부하고 우리를 악으로 단정 지어도 무어라 원망을 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대의 어깨를 짓누르는 이 무거운 짐을 견뎌낼 수 있다면, 부디 그 각오를 이어 나가 로벨리움 왕국을 전란의 화마속으로 밀어 놓지 말도록 하여라.”
“……”
어찌, 엘리자베스 황녀가 저 사실을 알고 있는가.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만큼은, 그 의문에 꼬리를 물지 않고.
이나스 왕자는 자신의 뒷머리를 살포시 끌어안는 엘리자베스 황녀의 손길에 몸을 맡기며 어린 아이처럼 구슬픈 울음을 토해냈다.
설령, 적대 관계에 있다 하더라도.
오랜 시간 자신들의 왕국을 속국으로 삼은 제국의 여인이라 하더라도.
처음으로 고충을 이해해주는 이가 눈앞에 있으니, 이나스 왕자는 그저 위로를 받고 싶어졌다.
“그래……”
그리고 엘리자베스 황녀는, 마치 어머니처럼.
다정한 손길로 그의 머리를 쓸어내린다.
“왕도, 장군도, 병사도, 아이의 아버지도…… 여인의 치마폭에서 만큼은 마음껏 우는 법이니. 개의치 말고 본녀의 치마를 그대의 눈물로 적시도록 하여라. 이곳에는 그대의 나약한 모습을 보는이가 아무도 존재하지 않으니까.”
심금을 울리는 듯한 그녀의 목소리 때문인지, 이나스 왕자는 더더욱 목놓아 울었다.
이리도 오랜 시간 울어 본적이 있는가 싶을 정도로,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눈물은 엘리자베스 황녀의 치마를 잔잔히 적셔 나갔다.
그렇게……
“왕자 전하! 무사하십니까!”
잠시간의 시간이 흐른 뒤, 병사들이 그의 방 안으로 들어왔을 땐.
초췌한 표정으로 눈물의 흔적을 지우고 있는 이나스 왕자와, 어째서인지 기분이 좋아지는 고혹적인 향기만이 그 자리에 남아 조용히 맴돌고 있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