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1화 > EP.151
수동적인 포지션은 이래서 싫었다.
사실, 전쟁을 피하지 않겠다는 각오만 있어도 수동적으로 대응 할 필요가 없는데.
한참 중앙 집권으로 탈바꿈을 하려는 시기다 보니 에르네스 제국──황실 입장에서는 최대한 전쟁을 피하는 쪽으로 가닥을 잡아야 했다.
물론, 굳이 그것이 아니더라도 전쟁은 누구나 기피하고 싶은 것이겠지.
“당장은…… 환전하는 양을 조절할 수 밖에 없겠지요?”
“그것도 금화가 아닌 은화에 한해서만 한다면…… 하지만 이것은 차선책도 되지 못하는 것이라 의미가 없을지도 모릅니다.”
환전을 해주는 건 우리 뿐만이 아니라, 엘마르크 제국 쪽에서도 해줄 수 있는 것이었다.
인플레이션이 일어나지 않게끔 깨작깨작 환전하는 양에 제한을 걸면, 저쪽에서는 번거롭더라도 한번에 많은 양을 제한 없이 환전 해주겠지.
때문에 어디까지나 상처를 소독하는, 아니 소독하는 것도 아니라 혀로 핥는 미봉책에 지나지 않는다.
결국 의미가 없는 쪽으로 한참 과열 되어 가던 회의는 중간에 휴식 시간을 가지게 되었고, 홀로 옥상으로 자리를 옮긴 페르젠은 로벨리움 왕국의 풍경을 보며 깊은 생각에 잠겼다.
사실 평균 10배 가량의 통화가 풀리는 시점에서 인플레이션을 막는 건 힘들었다.
저들보다 높은 값을 지불하고, 시중에 더 많은 식자재와 물건들을 공급하는 쪽으로 갈 수도 있겠으나.
그런 식으로 출혈을 감수하며 어울려 주는 건, 어디까지나 로벨리움 왕국을 속국으로 삼느냐 그러지 못하느냐로 마무리 되는 선의의 경쟁에서 그칠 때다.
막말로 억지로 어울려준다고 한들, 제 1 황자가 가있는 반대편 왕국에서 불씨가 터질수도 있는 것 아니겠나.
그리 되면 억지로 질질 끌고 있는 이쪽의 상황에서는 답이 없어지게 된다.
……때문에 제일 좋은 건, 선택을 한다 하더라도.
그 선택지를 로벨리움 왕국에게 떠넘기는 것이 제일 좋겠지.
그렇게 생각을 마치고 페르젠은 조용히 엘리자베스 황녀와 함께 있는 제 2 황자──레이몬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전하.”
“……백작.”
“어차피 이나스 왕자는 저쪽이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갈구하고 있다는 것을 모릅니다.”
“그렇겠지.”
“그러니 이나스 왕자에게 해당 사실을 알리고, 엘마르크 제국을 부정하는 연설을 해달라고 부탁하지요. 그러면 상황 자체는 간단하게 풀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나스 왕자가 그것을 믿겠는가?”
“이나스 왕자가 믿지 못한다면…… 저희도 전쟁을 피한다는 생각을 하면 안 될 겁니다.”
“……”
과거와 다르게 엘마르크 제국은 오베른 왕국만을 삼키는 것이 아닌, 다른 두 왕국에 대해서도 야욕을 드러내고 있다.
심지어 속내가 전쟁을 준비하고 있는 것이라 했으니, 균형을 이쪽에서 잡지 못할 바에야 로벨리움 왕국을 망쳐버리는 것이 훨씬 나으리라.
적이 이곳에 무혈입성을 하게 놔둘 바에야 폐허로 만들어 쓸모 없게 만드는 것이 현명한 선택이다.
그리 되면 앞서 말했던대로 우리를 악으로 단정지어 몰아내는 쪽으로 가닥을 잡고, 엘마르크 제국이 손쉽게 명분을 손에 넣게 되겠으나.
적어도 로벨리움 왕국이 그들의 힘이 되는 일은 없겠지.
“제 2 왕자와 접촉한 뒤에, 저희쪽 1 왕자를 내세워 저들을 부정하는 연설을 하라고 부탁을 하지요. 그에 대해 제 2 왕자가 나서서 수긍을 한다면 좋게 풀리는 것이고. 부정을 한다면……”
“백작.”
“전하. 전세를 뒤집는 전략과, 난관을 헤쳐나가게 만들어주는 계략은…… 필연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닙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힘들고 피곤해도 뻗어진 길을 걸어 나간다.
그러다 아주 가끔, 극소수의 일부만이 그러지 않고 돌아갈 수 있는 지름길을 발견할 뿐이었다.
더불어 전쟁을 굳이 피하지 않겠다 알리고.
엘마르크 제국이 전쟁을 준비 중이라는 사실을 말해준다면.
내통하고 있을 내부의 적들 또한 움츠려드리라.
그들은 어디까지나 커지는 황권을 견제하고 싶은 것이지, 전쟁을 원하는 게 아닐 테니까.
물론 전쟁이 발발하면 귀족들의 권력이 강해지나, 아이러니하게도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공을 세워 권력을 키우려는 이들은 드물었다.
자국 내에서 어느 정도 물가가 오르고, 사재기가 성행하는 리스크는 감수해야 겠지만.
이것은 필연적으로 일어날 수 밖에 없는 현상이었기에 어쩔 수가 없는 것.
“그대는…… 내가 겁쟁이 같은가.”
“아닙니다. 오히려 처음부터 간단히 전쟁을 하겠다 하였으면…… 오히려 실망을 하였을 겁니다.”
“하하…… 그런가.”
너스레 웃으며 제 2 황자가 창밖을 바라본다.
“백작.”
“예.”
“어찌하여 로벨리움 왕국의 수도에 세워진 대부분의 건물들이 고층 형식인 줄 아는가.”
“……땅이 비좁아서 이지요?”
“부차적인 이유네. 그것은.”
“……”
“언젠가, 정말 언젠가. 혹여나 이런 날이 올 때를 대비하여 높게 만들어 둔 것이라네. 한 건물에 저런 식으로 수용 인구수가 많아지면 피해를 입히는 게 쉬워지니까.”
“그렇습니까.”
제 2 황자의 말에 페르젠 또한 창밖을 바라보았다.
확실히 고층 형태의 건물은 지진에 취약하다.
실제로 이서진이 살던 세계의 현대, 그 중에서도 일본이라는 나라는 지진이 잦아 고층 형태의 아파트 보다는 주택 단지가 더 활성화 되어 있었으니.
그리고 그 현대와 다르게, 이곳이 지진 방비를 고려하여 건물을 지었을리도 만무하고.
원소 마법사들을 대동해 대지에 간섭하여 지진을 일으킨다면, 적잖은 피해가 일어날 터.
“그리고…… 내가 몸을 움츠리는 핵심적인 이유는, 엘리자베스가 보았기 때문이네.”
“무엇을?”
“흉이니라. 백작.”
“……”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진행할 총체적인 일이 적힌 보고서를 보았을 때, 내려 받은 나의 축복은 흉을 점지하더구나.”
“그래서 몸을 사렸던 것이네. 도대체 어떤 일이 원인이 되어 결과적으로 흉을 일으키는지, 알수가 없었으니까. 이 흉이 전쟁의 발발을 의미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무언가를 의미하는 것인지. 현재를 살아가는 필멸자인 내가 어찌 알 수 있겠나.”
허심탄회한 그의 말을 들으며 페르젠은 굳이 가식적인 추임새를 넣으려 들지 않았다.
“백작.”
“예.”
“그대는 운명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지니고 있는가?”
“운명입니까.”
조금 추상적일 수도 있는 황자의 질문에 페르젠은 고개를 숙였다.
“저는…… 결정론을 지지하지는 않습니다.”
돌아가는 세계의 구조와 순리가.
원래는 악당이라는 이 몸뚱이를 죽이기 위해 설계 되어 있었으나.
결과적으로 주인공은 악당의 손에 죽음을 맞이 하지 않았던가.
“대다수의 사람들이 저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말을 해도, 분명 누군가는 그 불가능을 해내고는 하지요.”
“……”
“그러니 저는 불가능과, 엘리자베스 황녀 전하의 점괘는…… 단순한 의견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견이 설령 신의 것이라 해도?”
“……”
이서진이 살던 세계와 다르게, 가장 큰 차이점이 있다면 역시 신의 존재유무 이리라.
하지만 애당초 그 또한 인간의 손에 만들어져, 미완성인 채로 남은 세계의 부속물이다.
그러니……
“예. 설령 그 의견이 신의 것이라 해도, 제 관점은 변하지 않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확신에 찬 페르젠의 말에, 제 2 황자──레이몬드의 얼굴에서 근심이 서서히 옅어졌다.
“자…… 슬슬 휴식 시간이 끝나겠군. 이만 돌아가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앞서 나가는 제 2 황자를, 엘리자베스 황녀와 함께 따라 걸으며 페르젠은 슬그머니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새가 알을 깨고 나오려는 것인지.
조금씩 그의 뒷모습에서 제왕의 자태가 느껴지기 시작한다.
* * * * *
노을이 저문다.
거점에서 시작된 회의는 아침부터 시작해 저녁이 다가올 때 까지 지속 되었고.
이나스 왕자를 설득하러 갈 대상으로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선택 되었다.
그리고 전쟁의 유무에 관해서도 제 2 황자가 깔끔히 말을 해놓았기에, 회의가 끝난 이 시점.
자신들의 가신에게 몰래 말을 건네는 귀족들이 몇몇 보인다.
아마 제국으로 돌아가 미리 식량과 철을 사들이라고 언질을 주는 것이겠지.
이런 건 봐도 모르는 척 해주는 게 예의였기에, 페르젠은 목석이라 해도 다를 바 없는 로에르를 힐끔 보고는 엘리자베스 황녀에게 다가갔다.
“괜찮으시겠습니까.”
“누가 보면 내가 가서 베갯머리송사나, 적의 목을 베고 돌아와야 하는지 알겠구나.”
“……”
“백작. 황실이 그대들에게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고는 하나, 온실 속의 화초로 자라지는 않았니라.”
“예…… 주제 넘었습니다.”
“그리 저자세로 나오면 괜히 나만 미안해지지 않느냐. 아무튼 되었다면 저기서 그대를 기다리고 있는 부인이나 맞으러 가도록 하거라. 그러고 보니 전장이라 할 수도 있는 이곳에 부인을 데려오는 그대를 보아하니, 브뤼테인의 혈통이라 해도 사내는 사내구나.”
“제 곁이 가장 안전하다고 생각되어 데려온 것 뿐입니다.”
“그래. 괜히 넘겨 짚어서 미안하게 되었니라.”
후훗.
옅게 웃음을 머금는 엘리자베스 황녀가 부채를 펼쳐 자신의 입가를 가린다.
“좋은 밤이 되도록…… 이라고 말하고 싶지만, 오늘 밤은 꽤나 시끄러울 것이다.”
“틀림없이 그렇겠지요.”
“그러면 백작, 내일 보도록 하자꾸나.”
“예.”
한점 흐트러짐 없이 격식을 차리며 엘리자베스 황녀에게 인사를 건넨 페르젠은, 이윽고 걸음을 옮겨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유리엘에게로 다가갔다.
“가지.”
“응.”
신혼이라 하기에는 어딘가 어색해 보이는 두 사람이 마차를 타고 왔던 길을 돌아간다.
그리고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로에르는 조용히 걸음을 돌렸고, 그러한 로에르를 주시하고 있던 엘리자베스 황녀 또한 한숨을 내쉬며 자리를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