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0화 > EP.150
마차에 올라타 도로를 나아가며, 유리엘은 슬그머니 그의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리고 다소곤하게 무릎 위에 모아진 손은, 한쪽만 쏙 나아가 페르젠의 빈손을 살포시 붙잡는다.
그에 페르젠 또한 그녀의 손을 따스하게 마주 잡아주며 제 2 황자로부터 받았던 서류를 읽어 나갔다.
서로가 굳이 아무런 말을 하지 않고 고요를 지키는 침묵.
이것이 불편하지 않다는 건, 그만큼이나 서로의 사이가 가까워졌다는 증거이리라.
괜히 누군가와의 친분을 확인하고 싶다면, 침묵을 하라는 말이 있는 게 아닐 테니.
* * * * *
끼익.
마차가 로벨리움 왕국 내의, 에르네스 제국의 거점에서 멈추어 선다.
그에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기 전, 페르젠은 유리엘을 보며 입을 열었다.
“안에서는 내 곁에 너무 가까이 있지 말도록 해라.”
“그건……”
분명, 로에르 때문에 이러한 요구를 하는 것이겠지.
페르젠은 자신을 어디까지나 피해자의 포지션에 두고 싶은 듯 했으니까.
“결국에는 내가 지어야 할 매듭이다. 굳이 네가 손을 보탤 필요는 없어.”
“……”
솔직히 처음에는 리지와 로에르에게 분노와 경멸의 시선을 받는 것이 망설여졌으나, 지금은 충분히 그러 할 각오가 되어 있는데……
자신이 멋대로 함께 짐을 짊어지려 하는 행동을 페르젠이 싫어할 게 분명했기에,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요구를 순순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어찌 그가 싫어할 걸 알면서도 욕심을 부릴 수 있겠나.
다만, 섭섭한 건 섭섭한 것이었기에 괜히 이 감정을 그에게 읽히지 않도록 유리엘은 고개를 숙였다.
“여자들은…… 정말 부채 없이는 감정을 숨기는 것이 미숙하구나.”
연회장에서 어찌 영애들과 귀부인들이 부채를 하나씩 쥐어들고 심심하면 자신의 입가를 가리는 가 싶었더니.
두 여인과 살을 부대끼며 살다보니 그 이유를 알것도 같다며 페르젠은 마차의 문을 잡은 손을 떼어내고 유리엘의 턱을 들어 올렸다.
“응……!”
그리고는 상당히 거친 입맞춤을 이어가며, 그녀의 허리를 휘감은 다음 빈틈없이 꽈악 끌어 당긴다.
“하으…… 읍!”
갑작스러운 입맞춤이었기에, 순간 놀란 유리엘이 고개를 뒤로 내빼나 페르젠의 커다란 손은 그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결국 한낱 먹잇감처럼 그에게 철저히 유린당하던 유리엘은 얼마 지나지 않아 갈곳 잃은 손을 뻗어 페르젠의 등을 끌어 안았다.
방식은 거칠어도, 이 키스를 통해 전해져오는 건 자신을 향한 그의 감정.
그렇기에 유리엘은 페르젠의 체취를 맡고, 탄탄한 몸을 어루만지며 일방적이기 그지없는 그의 키스를 받아들여 나갔다.
솔직히 말하자면 장소가 너무나도 아쉬울 뿐이다.
아니, 차라리 아주 잠깐이라도 좋으니 세상 모두가 이 세계에서 사라져준다면.
지금 여기서…… 당장이라도 그와 몸을 섞고 싶은데.
“흐, 하아……”
이내 짧고 거칠었던 키스가 끝이나자 페르젠은 아무런 일도 없었다는 듯 입가를 혀로 핥으며 흐트러진 옷매무새를 정돈할 뿐이다.
그리고 태연히 마차의 문을 열려는 그가 어찌나 그리도 야속한지.
일순간 본능이 얼른 음란한 암캐처럼 다리를 벌리고 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교태를 부리라고 속삭이나, 유리엘은 애써 그것을 억누르며 페르젠을 뒤 따라 마차에서 내렸다.
……역시, 여름이라 그런지 바깥은 무척이나 더웠다.
* * * * *
거점의 안으로 들어섰을 땐, 이미 대다수의 귀족들이 모여 있었던지라.
페르젠과 유리엘은 상석에 앉아 있는 제 2 황자와 엘리자베스 황녀에게 인사를 하고는 자리에 착석을 하였다.
그렇게 얼마 지나지 않아 아직 도착하지 않은 귀족들 또한 안으로 들어섰고, 회의는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분위기 속에서 잔잔히 시작 되었다.
“……어느정도 예상을 했겠지만, 어젯밤부터 엘마르크 제국이 이런 식으로 움직임을 취해왔소.”
제 2 황자, 레이몬드가 나누어 준 서류에는 본격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한 엘마르크 제국의 행보가 적혀 있었다.
아니, 물밑 작업쯤이야 진작 끝을 내놓았을 테니.
이것은 어디까지나 그것의 연장선이라 볼 수 있겠지.
“약, 10배라……”
로벨리움 왕국 내에 내리고 있는 에르네스 제국의 뿌리는 무척이나 두텁다.
건들일 곳이 많기는 하여도, 그 하나하나가 가히 철옹성이라 할 수 있는데.
엘마르크 제국은 로벨리움 왕국 내에 형성된 에르네스 제국의 인프라를 그대로 모방하는 정공법을 취해왔다.
차이점이 있다면 막대한 자금을 쏟아 부었다는 것이리라.
지불하는 인건비는 기존의 12배.
필요한 물건과 자재는 기존의 1/10로 지불.
반대로 구매 해야하는 물건과 자재는 기존의 10배로 구매.
말 그대로 무식하게 돈으로 때려박는 방법이다.
……남동쪽의 우환을 제거하고, 거기서 엄청난 금맥을 손에 넣었다고 미리 전해 듣기는 했으나.
이정도 규모로 승부를 걸어오는 것은 페르젠으로서도 상당히 놀라웠다.
‘이것은 단순한 가림막인가.’
하지만 페르젠은 오히려 의아함을 품었다.
왜냐하면 오랜 시간에 걸쳐 형성된 에르네스 제국의 인프라를 견제하는 건.
동일한 모방 방식 보다 각 귀족들의 세력을 키워주는 쪽으로 가닥을 잡는 게 훨씬 편했으니까.
무슨 뜻이냐면 지금처럼 수도에 모든 사업 구조가 집중된 방식을, 각 귀족들의 영지 쪽으로 나누어 주는 것이다.
물론, 이러면 이나스 왕자가 바보가 아닌 이상에야 프리기아 후작이 자신네들 왕국을 속국으로 삼는 건 크게 중요치 않다는 걸 깨닫게 될 터.
한 마디로 그 점을 고려한 단순한 연기일 가능성이 훨씬 높아 보였다.
정말 속국으로 삼을 생각이라면 이미 형성된 에르네스 제국의 인프라를 그대로 흡수하는 게 차후 운영하는데 있어서 편할 테니.
‘일단, 다른 사람들의 의견을 들어나 볼까.’
엘마르크 제국이 전쟁을 준비하고 있다는 건,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알고 있는 기밀.
허니 오히려 이것이 괜한 선입견을 만들 수도 있었기에 페르젠은 여타 다른 귀족들이 내뱉는 의견에 먼저 귀를 기울이기로 했다.
“강제적인 물가 상승을 노리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2배, 하다 못해 3배도 아니고. 10배라면 그쪽으로 밖에 생각이 닿지 않는 군요.”
이서진이 살던 세계의 화폐, 한 마디로 지폐와 다르게.
금화는 그 자체만으로도 실질적인 가치를 보유하고 있다.
그래서 무분별한 통화 공급을 통해 어지간해서는 인플레이션을 일으키기 어려우나, 지금처럼 무식하게 돈을 때려 붓는 방식이라면 충분히 일리가 있는 의견이었다.
실제로 기존 인건비의 12배라면 단순한 유통 과정 사이에서 노동을 하는 사람들도 은화를 지불 받을 테고, 그 위로는 금화를 무더기로 받을 테니.
다만……
“귀하의 의견은 어폐가 있어.”
“예……?”
“아니, 어폐라기 보다는 간과한 점이 하나 있네.”
페르젠은 탁상을 툭툭 두드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금화와 은화를 무분별하게 공급하여도 기존 통화의 가치들이 순식간에 죽어 버리지는 않아.”
중세, 그러니까 말 그대로 이곳의 시장 경제에 있어서 핵심적인 건.
음식과 옷이다.
특히나 그 중에서 음식은, 설령 수중에 동화가 아니라 은화나 금화가 있다 하더라도 그 만큼의 가치를 한 번에 구매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비율로 따지자면 5%가 될까?
그 이유는 너무 당연하게도 보존 하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기 때문이다.
특히나 지금은 여름.
금화만큼의 가치를 구매 한다 하여도, 구매한 70% 가량은 결국 먹어 보지도 못하고 썩어 버리거나 벌레에 의하여 좀먹힌 것을 버려야 할 터.
때문에 아이러니하게도 금화와 은화의 무분별한 공급 속에서 동화는 자신의 가치를 필연적으로 유지하게 된다.
이서진이 살던 현대의 냉장고를 대체할 수 있게끔, 이곳의 원소 마법사들이 길바닥의 돌처럼 흔하다면 모를까.
“그러면 도대체 엘마르크 제국의 의도가 무엇이라는 겁니까? 저들은 심지어 지불할 자신네들 나라의 금화가 없다면, 저희 금화를 환전을 해주는 미친 짓거리도 하고 있습니다.”
“……”
그래, 사실 그 점이 페르젠으로서는 의아했다.
나중가서는 그러지 않겠으나.
당장은 의도적으로 그 점을 이용해 1 : 10의 말도 안되는 교환비로, 금화 하나를 통해 금화 열개를 받아들인 뒤.
저들이 굳히기 작업에 들어가려 할 때 이 상황을 더더욱 오래 이끌 수가 있는데 말이다.
그 기간이 늘어날수록 저들의 손해는 커져만 갈터.
아무리 상당한 금맥을 손에 넣었다고 한들, 결코 무시할 수 있는 양이 아닐 것이다.
작기는 해도 엄연히 이곳은 왕국, 돈놀음으로 판을 벌리기에는 리스크가 막중했다.
게다가 이 방식을 통해 어찌 합리적인 전쟁의 명분을 얻는단 말인가?
“저……”
그리 의아함이 맴돌고 있을 때, 페르젠의 옆에 앉아 있던.
북부에서부터 함께 따라온 젊은 사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제, 제가 감히 한말씀을 올려도 되겠습니까……?”
“물론일세. 눈치보지 말게나. 이곳에서의 발언권은 자유롭네.”
페르젠을 등에 업고 있는다 한들, 눈치가 적잖게 보였는데.
다행히도 그 부담을 한시름 덜어주는 제 2 황자의 한 마디에 젊은 사내는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의, 의도 까지는 모르겠지만…… 일부러 물가 상승을 노리는 것이라면 충분히 가능하다고 봅니다.”
“그건 어째서지?”
“로벨리움 왕국은 수도에 모든 기반과 경제가 집중 되어 있으니…… 상가에서 거슬러줄 동화를 모두 통제할 수 있다면…… 가능하지 않겠습니까?”
“그건……”
불가능하다고, 페르젠은 입을 열려고 했으나.
“……가능할지도 모르겠군.”
곧바로 방향을 선회했다.
왜냐하면 중세, 정확히는 르네상스 시대의 일부가 뒤섞인 개판인 시대이기에.
아직까지는 은행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아 대부분의 사람들은 가까운 거래처, 단순 백성들이라면 자주 들리는 가게에서 돈을 환전할 뿐이다.
한 마디로 시중의 상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동화를 그들이 거슬러 받은 뒤 풀지 않고 있다면?
심지어 그것은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거래이기 때문에 전체적인 자금의 흐름이 기록된 서류를 통해서도 읽어낼 수가 없었다.
생각해보자면 저들이 이곳에 도착한 시일은 꽤나 오래 되었을 텐데, 너무 얌전히 있었다는 게 솔직히 이상하기도 했고.
“얼른 밖으로 나가서 은화를 통해 아무 물건이나 사오도록 하게!”
“예, 예……!”
의견을 듣고서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지시를 내리는 제 2 황자 레이몬드.
그렇게 체감상 한 시간 정도가 지났을 때, 밖으로 나간 몇몇 사람들이 다시 거점으로 돌아왔다.
“어떠 하던가?”
“거래 자체는 무사히 하고 왔습니다. 다만, 확실히 몇몇 가게들은 거슬러줄 돈이 없다며 다른 가게에서 동화를 받아 오기도 하더군요……”
“그렇다면 생각보다 많이 회수되지는 않았다는 건가……”
“그건 아닐겁니다.”
페르젠은 고개를 저었다.
엘마르크 제국이 상가에 풀린 동화는 이미 대부분 회수를 끝마쳤을 터.
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어느정도의 동화가 유통되고 있는 건……
기존 백성들이 가지고 있는 동화까지는 통제를 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면…… 어디까지나 시간 문제이겠군.”
“그렇지요.”
이미 엘마르크 제국이 위쪽에서 금화와 은화를 뭉텅이로 풀기 시작했으니.
동화 회수 작업을 조금만 더 한다면, 시중의 동화는 씨가 말라 버릴 테고.
12배의 인건비를 받기 시작하는 순간 강제적인 물가상승, 인플레이션이 일어나리라.
그리고 본디 혁명이란 스스로가 불합리하다고 느낄 때 만큼 발발하기 쉬운 것도 없었기에.
생존과 직결되는, 경제적인 측면이 망가지기 시작한다면 그 불길은 상당히 거세어 질 터.
“그…… 이건, 저희가 환전을 해준다면 문제가 되지 않는 것 아닙니까?”
“문제가 됩니다. 조금만 생각을 해보십시오.”
“어떤 면에서……”
“금화나 은화를 저희가 동화로 환전을 해주는 것 아닙니까? 그러면 위에서부터 풀려버린 금화나 은화를 더욱 손 쉽게 소비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꼴이지요. 그래서 어찌 되었건 물가 상승은 막을 수가 없게 됩니다. 게다가 은화라면 모르겠으나, 동화를 금화의 가치만큼 바꿔주는 것 또한 결코 쉬운 일이 아니지요.”
“하지만 어찌되었든 동화를 시중에 풀어주면 식재료는 과소비를 하지 않을 것 아닙니까?”
“준비하는데 시간이 걸릴 겁니다. 그 동안 이곳 백성들은 어쩔 수 없이 최소 은화만큼의 값어치를 지불하여 식재료를 살 테고. 자연스레 공급이 수요를 따라가지 못하는 시점에서…… 저희가 동화를 푼다고 한들 얌전히 썩거나 좀먹어 버릴 것을 대비하여 일정량만 구매를 하겠습니까? 인간은 언제나 부족한 것 보다는 과함을 추구하는 생물입니다.”
“허……”
의견을 마저 주고 받는 귀족들의 대화를 들으며 페르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상황이 조금 어렵기는 했다.
본격적으로 불을 붙여 혁명을 발발 시킨다면.
무력으로 진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겠으나, 그 도가 오직 ‘한 번’ 지나치게 되는 순간 어찌 걷잡을 수가 있겠는가?
특히나 이나스 왕자를 엘마르크 제국이 쥐고 있는 상황이기에,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에르네스 제국이라는 악을 몰아낸다는 자연스러운 명분을 터득하게 된다.
나아가 몰아내는 것에 성공한다면, 로벨리움 왕국 내의 백성들이 고양과 희열에 빠져 있을 때.
그 감정을 부추기는 연장선으로 전쟁을 발발 시키는 것이 얼마나 간단하겠나.
그 동안 속국으로 일삼은 것에 대한 배상을 요구하고, 우리가 그것을 거절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그림이 성립된다.
“……”
지끈, 머리가 아파져오자 페르젠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러자 곁에 앉아 있던 유리엘 또한 자신을 바라본다.
문득 저 풍만하고 커다란 가슴에 얼굴을 묻고, 아무 생각 없이 눈을 감고 싶어지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