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8화 > EP.148
관계를 가지고 난 뒤, 보통 그 여운을 즐기며 잠을 자는 것을 선호하는 페르젠이었으나.
이번에는 그녀의 유즙으로 인해 침대 시트와 옷이 많이 젖어 들었기에, 페르젠은 부득이하게 시녀들에게 유페미아를 맡긴 뒤 자신 또한 한 번 더 깔끔히 목욕을 했다.
그리고는 잠깐 남는 여유로운 시간을 확인 하고서, 유리엘이 자고 있을 4층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원래는 유페미아를 케어해준 뒤 유리엘을 한 번 보고서 내려올 생각이었는데, 의도치 않게 그녀를 뒷전으로 미룬 감이 없지 않아 있는 것 같아 페르젠은 약간의 미안함을 머금었다.
‘……여기였었지.’
유리엘이 자고 있을 방 앞에 서서 페르젠은 조심스레 문고리를 잡아 돌렸다.
솔직히 그녀가 홀로 4층에 자리를 잡고 있는 의도를 파악해보자면, 미안한 감정은 약간이 아니라 상당히 많이 깊어진다.
이것은 단순하게 유페미아와 동일한 층을 쓰기 싫다는 유치한 어리광 따위가 아니라, 그녀 나름대로 거리를 두는 것일 터.
유리엘은 본인 입으로 유페미아와 친해지는 건 힘들다고 말을 했기에, 애초부터 서로가 계속 불편한 관계가 되게끔 상황을 조성하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게 인간은 보통 친분이 없는 사람 보다, 친분이 있는 사람에게 잘못을 많이 저지르게 되는 생물이었으니까.
한 마디로 관계가 서먹서먹 할지 언정, 자신이 걱정하는 불상사는 오히려 일어나기 힘들게 되는 것이다.
유페미아의 배려와는 거시적 측면에서 많은 차이가 나는 유리엘의 배려.
그것을 인지하며 안으로 들어선 페르젠은 곤히 자고 있는 유리엘의 곁에 조심스레 앉았다.
‘이건……’
그녀의 옆자리에 놓인 종이 뭉치.
무엇을 작성하다가 잠이 든 걸까 싶어 페르젠은 손을 뻗어 그것을 읽어 내렸다.
“……”
그리고 해당 내용을 간략하게나마 파악한 순간, 그대로 말문이 막혀버린다.
「 메리로젠의 소실. 」
──그가 인상 깊게 읽었을 대목은 높은 확률로 저택의 밀실 살인 사건!
::: 대화를 이어 나갈 때, 정말 마법 없이 이러한 밀실 살인이 가능할까를 주제로 던지는 것이 좋아 보임.
::: 도중에 한정판 양장본을 가지고 있느냐고 스치듯이 물어보기! ( 꼭! )
……메리로젠의 소실.
페르젠이 무척이나 즐겨 읽었던 추리 소설의 제목이다.
특유의 강박증 때문에 페르젠은 가능하면 깊게 집중 할 수 있는 취미를 좋아했는데, 그 중에서도 추리 소설을 읽는 걸 가장 선호했다.
범인이 누구일지, 소설 전반부에 나오는 증거들을 통해 어떻게 이러한 사건을 일으켰을지.
그러한 생각을 하다보면 무척이나 빠르게 시간이 흘러 갔던 터라, 그야말로 제격인 취미였다.
그리고 유리엘은 메리로젠의 소실 뿐만이 아니라, 페르젠이 읽었던 대다수의 소설과 보았던 연극에 관해서 요점을 정리해놓았다.
이걸 필두로 자신과 이야기를 나누는 상황을 연습 했을 걸 생각하니, 기특하면서도 애틋한 마음이 차오른다.
그렇기에 페르젠은 고개를 숙여, 진심에서 우러러 나오는 애정을 담아 유리엘의 뺨과 입술에 상냥히 키스를 건넸다.
쪽.
쪽……
창문을 두드리는 빗소리 밖에 들려오지 않는, 고요한 방 안에서 울려 퍼지는 그 소리는.
다른 의미로 무척이나 야릇한 분위기를 조성해나갔다.
“으, 으응…… 아……?”
이윽고 잠이 들었던 유리엘이 눈을 뜨고, 초점이 맞지 않는 흐릿한 눈동자로 자신의 모습을 담으려 하자……
페르젠은 한 번 더 그녀의 입술을 덮으며 쥐고 있던 종이 뭉치를 그녀 옆에 내려둔 뒤 이불로 덮어 주었다.
이것을 자신에게 들켰을 거라 생각한다면, 분명 적잖은 창피함과 부끄러움을 머금을 게 분명했기에.
“읏…… 하…… 어, 언제…… 와, 와써?”
눈가를 비비며 어눌한 목소리로 대답을 하는 유리엘의 말을 듣고서 페르젠은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조금 전이다.”
“그, 래……?”
오늘은 그가 유페미아와 동침을 하는 날이지만, 도착하자마자 바로 자신을 찾아온 것이라면.
어차피 그 여자는 세상물정 모르고 자고 있을 테니, 조금은 욕심을 부려도 괜찮지 않을까.
“손이 상당히 차갑네……”
“찬물에 목욕을 해서 그런 것이겠지.”
“가, 감기에 걸리면 어쩌려고.”
혹여나 그가 자신의 얼굴만 보고 내려갈까 싶어, 슬그머니 손을 뻗어 페르젠의 손을 붙잡은 유리엘은 따스한 체온이 머무르고 있을 자신의 가슴 쪽으로 가져다댔다.
향과로 변질된 자신의 체향을 가리기 위해 향수를 뿌리진 않은 터라, 조금만 시간을 끌 수 있다면……
스륵.
“앗……”
하지만 이러한 응큼한 의도가 무색하리만큼, 페르젠은 스스럼없이 이불을 들추며 자신의 옆에 누웠다.
가깝다 못해, 조금의 빈틈도 없이 밀착한 거리.
자신의 뺨에 얼굴을 묻은 그가 내뱉는 숨결이 어찌나 간지러운지.
본능적으로 고개를 도리질치자, 특유의 커다란 손을 뻗어 부스스하게 흐트러진 앞머리를 정리해준다.
“으, 으응……”
어째서일까.
자신의 몸을 짐승처럼 탐하며 수컷으로서의 욕망을 거리낌 없이 부딪쳐 오는 그도 좋았지만……
이렇게 애정을 잔뜩 실어 자신을 보살펴주는 그의 몸짓을 보고 있자하니, 유리엘은 평소보다 더욱 깊은 행복함을 느꼈다.
때문에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의 교태보다는, 지금 느끼는 감정이 이끄는대로 그의 품에 살포시 안겨들었다.
자신의 몸 정도는 어렵지 않게 품고도 남는 넓은 가슴팍.
그 너머에서 들려오는 페르젠의 느릿한 심장 소리를 들으며 유리엘은 눈을 감았다.
아이가 엄마의 품에 안겨 안도감을 느낀다면, 틀림없이 여인은 사내의 품에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겠지.
‘기분, 좋아……’
아주 어릴적, 그를 만나지 못했을 적에.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결혼이라면, 페르젠이라는 사내가 자신에게 이리 해주었으면 좋겠다고 망상하며 잠들고는 했는데.
지금 이 순간, 그것은 더 이상 망상이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유리엘은 감았던 눈을 다시 뜨고서 페르젠을 올려다보았다.
두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천천히 더듬어보았다.
혹여나 꿈이 아닐까 싶었기에.
“하고 싶은 말이라도 있느냐.”
조곤조곤한 목소리로 감미롭게 들려오는 그의 한 마디.
일순간 미리 작성해두고 예습을 해두었던 대화 주제들이 뇌리를 스치듯 지나가나……
“나를…… 사랑해……?”
유리엘은 여인으로서 사내에게 물을 수 있는, 어쩌면 가장 흔해빠진 질문을 던졌다.
물론, 관계를 가지고 난 이후 그의 입에서 몇 번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보기는 했으나.
한번쯤은 성욕으로 점철 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의 입으로 내뱉는 말을 들어보고 싶었던 것이다.
……몸을 섞을 때 만큼, 사내가 거짓말을 많이 하는 순간은 없다고들 하였으니.
“……”
그리고 페르젠은 정작 자신이 질문을 던져 놓고, 길어지는 침묵 속에서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유리엘을 보며 고개를 숙였다.
인간의 감정은 지극히 주관적이기에 좀처럼 객관성을 지닐 수 없지만, 역설적으로 부모가 아이를 위하는 모성(母性)과 부성(父性)을 부정 하는 사람은 없듯이.
행동의 주어가 얼마나 많이 ‘자신을 위함’에서 ‘누군가를 위함’으로 바뀌었느냐를 통해 어렴풋한 증명을 할 수 있는 것이리라.
그러한 점에서 유페미아와 유리엘은……
시작은 자신을 위함이었을지 몰라도.
나아가는 현재는 마냥 그렇다고 할 수는 없었기에.
페르젠은 확신에 가득찬 목소리를 머금고, 그녀의 귓가에 속삭였다.
“사랑하고 있다…… 유리엘.”
애당초 인간은 흥미를 가진 것에 대해서 더욱 알고 싶어하는 생물이니.
가장 잘 알고 있는 물건이 애용품이 되는 것이고.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이, 제일 소중한 이가 되는 것일 터.
그렇다면 어찌 그녀가 자신을.
또, 자신이 그녀를 사랑한다는 것에 있어서 부정할 수가 있으랴.
“응. 나도…… 나도 많이 사랑해…… 페르젠.”
자신의 가슴을 옥죄이게 만든 침묵 따위는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는 듯, 화사하게 웃는 유리엘이 페르젠의 품에 얼굴을 묻고 비빈다.
저 한 마디가 무엇이라고.
이리도 심장이 뛰고 기분이 좋아지는 걸까.
당장이라도 그를 위해 무언가를 해주고 싶은 마음이 샘솟는다.
그의 흉물스런 자지를 목구멍 깊숙이 넣고 핥아주고 싶었으며.
자신의 질 안에 삽입한 다음 최선을 다해 꼬옥 조여주며 봉사를 해주고 싶었다.
항문에 넣고 싶다고 말을 한다면, 기꺼이 두 손으로 그 수줍은 곳을 벌린 뒤 그의 성기를 받아주고 싶어진다.
은근스런 가학심을 충족하고 싶다고 울어보라 한다면, 유리엘은 기꺼이 그를 위해 울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수컷을 유혹하기 위한 암컷처럼 굴지 않아도.
연인처럼.
부부처럼.
그에게 사랑 받고 있는 여인으로 있을 수 있으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러웠다.
* * * * *
체감상 20분 정도가 지났을까.
자신의 품에 안긴 채로 새근새근 숨소리를 내뱉고 있는 유리엘을 보고서, 페르젠은 천천히 그녀로부터 떨어졌다.
하지만 스르륵 흘러내리던 그녀의 손이 자신의 옷자락을 움켜쥐고 놓아주지 않으려 하자.
페르젠은 한 동안 어정쩡한 자세로 서있다, 그녀의 손을 억지로 떼어냈다.
그러자 이번에는 자신의 옷자락이 아닌, 마주닿은 자신의 손가락을 꼬옥 움켜쥐는 유리엘.
그에 페르젠은 너스레 소리없는 웃음을 짓고서, 끼고 있는 왼손의 반지──자신의 제단을 빼어 그녀에게 쥐어주었다.
흑마법사에게 있어서 지정된 제단이란 가히 목숨과도 같은 것.
제단이 없다면 명계와의 거래가 불가능하고, 아공간 내에 시신을 보유하고 있다면 적을 마주했을 때 대응할 수단이 없어지니 평범한 일반인에 지나지 않게 된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 모든 점을 알고 있음에도, 자신의 제단을 유리엘에게 쥐어준 채 조용히 방을 나왔다.
툭.
투두둑!
여전히 거칠게 쏟아지는 빗물이 복도의 창문을 두드린다.
그에 해당 창문으로 가까이 걸어간 페르젠은 흘러내리는 빗물로 얼룩진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며 깊은 상념에 잠겨 들었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져.
터무니 없을 만큼 허접하고, 조악하고, 미완성인 세계.
하지만 그런 세계일지라도, 어울리지 않을 만큼 과분한 보물을 품고 있으니.
나름대로 의미가 있지 않을까 싶었다.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유리엘과 유페미아가 더욱 소중히 느껴지는 것이겠지.
또각.
이내 복도를 걷는 페르젠의 발소리만이, 시끄러운 빗소리에도 파묻히지 않고 아무도 없는 복도를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