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43화 (143/260)

< 143화 > EP.143

무거우면서도 난잡한 분위기.

오고 가는 고성은 서로가 거리만 유지하고 있을 뿐, 말로 처절하게 물어뜯고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는 와중, 한가운데 상석에 앉아 있는 로벨리움 왕국의 국왕은 그저 겉절이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을 뿐이다.

단 한마디조차 하지 못하는 그를 굳이 이 자리에 앉혀둔 건, 에르네스 제국이나 엘마르크 제국이 감히 어느쪽도 서로를 상석에 앉혀둘 수 없다는 얄팍한 욕심 때문일 터.

그리고 페르젠은 가만히 저 앞쪽에 앉아 있는 로에르를 보고서는 눈을 감았다.

어차피 여기에 모인 이들은 진작 말로 끝낼 생각 따위를 하고 있지 않을 터.

그러니 단순한 전초전에 가까운 이 회담에서 기력을 소모할 이유 따위는 없으리라.

‘각자가 지지하는 왕자를 왕위에 올리는 조건은 오직 하나……’

손해를 감당할 수 없는 쪽이 먼저 물러나는, 지극히도 간단한 치킨 게임(Chicken Game).

다만, 앞서 들었듯.

엘마르크 제국은 자신들이 내세우고 있는 제 2 왕자,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을 왕위에 올리는 것 뿐만 아니라.

전쟁의 시작을 울리는 단초가 될 명분을 마련하는 것도 고려하고 있겠지.

‘전쟁이라……’

솔직히 해당 단어에 대한 무게감을 페르젠은 좀처럼 걷잡을 수가 없었다.

페르젠이나 이서진의 기억에 남아 있는 전쟁은, 모두 역사의 산물이었으니.

그럼에도 그것이 국가라는 존재가 탐해서는 안 될 쾌락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인간이 술과 연초, 그리고 마약에 취해 쾌락을 얻으려 한다면 자신의 수명을 대가로 지불하듯.

국가 또한, 전쟁을 통해 이득을 취하려 한다면 몰락의 시기를 앞당기는 것으로 대가를 지불하는 법이니까.

‘어차피 이것을 모르는 이들이 있겠는가.’

과거도.

현재도.

미래도.

공존을 싫어하는 이들이 대체할 것으로 선택하는 건 공멸이었고.

인간은 그 수단을 전쟁으로 삼을 뿐이다.

‘프리기아 후작.’

평화로울 때는 자식이 부모를 땅에 묻지만, 전쟁이 일어났을 때는 부모가 자식을 땅에 묻는 법이다.

‘그대는……’

어디 자신을 묻어줄 부모가 있기는 한가.

눈을 떴을 때 잠깐 마주친 프리기아 후작과의 시선을 통해, 페르젠은 소리 없이 속으로 비웃음을 머금었다.

* * * * *

“고생하셨습니다.”

“……고생한 것도 없었네. 그저 의미 없는 열변만을 서로가 토해내었을 뿐이지. 자리를 옮기세.”

"예."

제 2 황자, 레이몬드의 뒤를 따르며 궁을 나온 페르젠은 힐끔 거리를 돌아 다니고 있는 이곳 주민들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가장 활기가 넘쳐야 할 시장조차 모두가 숨죽인 채 고개를 숙이고 광경.

그래, 그들도 아는 것이다.

우리들이 자신네들 나라의 왕위를 두고, 이곳에서 합법적인 패악질을 부리려 한다는 걸.

“불편한가?”

“그렇지는 않습니다.”

로벨리움 왕국이 에르네스 제국의 속국으로 살아온 시간은 무척이나 오래되었으니, 저들의 반응도 크게 이상할 건 없는 것이다.

브뤼테인의 핏줄이라는 게 이곳에서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자국에서의 명성이 높을수록, 그것은 도리어 타국의 악명이 되는 법인데.

애당초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돌아가는 자금의 흐름, 그 기반을 닦은 것이 브뤼테인이다.

봉건제의 특성상 수도는 거의 상징적인 의미에 지나지 않지만, 로벨리움 왕국은 어찌 수도가 국가의 심장 노릇을 하고 있겠나.

바로 왕국 내의 돌아다니는 자금줄을 모조리 틀어잡고, 일부러 각 귀족들이 다스리고 있는 영지를 말라 비틀어 죽인 것이다.

우물이 없다면 강까지 가서 직접 물을 길어올 수밖에 없을 테니까.

그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로벨리움 왕국 내의 모든 주민들도 적잖은 피해를 겪었다.

수도가 아니고서야 자생이 불가하게 만들었으니, 얼마나 많은 그들의 통곡이 울려 퍼졌겠는가.

다른 의미로 영원한 겨울을 맞이했다고 할 수 있겠지.

하지만 그 점을 고려하더라도……

“적대감이 상상 이상이군요.”

고개를 숙인 이들을 지나칠 때면, 등이 따가우리만큼 증오가 가득 담긴 그들의 시선이 느껴지는 듯 했다.

“엘마르크 제국 입장에서 현재 제일 사용하기 편한 수단이 무엇이겠느냐.”

양산을 쥐어 든 엘리자베스 황녀의 조곤조곤한 목소리가 옆에서 들려온다.

그에 잠깐 머리를 굴린 페르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입을 열었다.

“선동이겠지요.”

“그래. 그대가 없는 기간 동안 우리는 죽음을 각오하고 덤벼드는 이곳 주민들을 무수히 많이 제압해야 했느니라.”

“……”

“어린아이, 임산부, 몸 성한 곳이 없는 이…… 하나 같이 무력으로 제압하는 광경 자체가 눈살이 찌푸려질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지.”

과연, 현재 이 적대감은 그러한 수작질의 결과물이란 말인가.

오히려 엘마르크 제국을 끌어들여 갈등을 조장시킨 이나스 왕자가 비탄 받아야 마땅 할진데.

프리기아 후작은 보기 좋게 그 화살을 꺾어 방향을 돌린 것이다.

“죄송합니다.”

“무엇이? 어차피 이 정도는 익히 예상했던 결과였느니라.”

“담겨 있는 속뜻이 그게 아니라는 것쯤은 아시지 않습니까.”

이 상황 자체가, 그날 연회장에서 시엘 미드포드를 죽일 덫을 깔지 않았더라면 결코 펼쳐지지 않았을 그림이다.

“백작.”

그리고 페르젠의 말에 옆에서 걷던 엘리자베스는 양산을 들어 슬그머니 그를 올려다보았다.

특유의 백금발이 햇살을 맞아 밝게 어우러지고, 색정적인 붉은 입술이 가당찮다는 듯 미약한 웃음을 머금는다.

“알지도 못하는 소리를 하지 말거라.”

“……”

“그 날 우리는……”

귀가 멀어 듣지를 못했고.

눈을 감아 보지도 못했으니.

……또각.

말을 마친 엘리자베스 황녀의 걸음이 한템포 빠르게 페르젠을 앞질러 나간다.

그리고 멍하니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페르젠은, 실없는 미소를 지으며 뒤를 따라 걸었다.

“예…… 제가 실언을 했습니다.”

“그래. 알면 되었느니라.”

불어오는 바람에 엘리자베스 황녀의 백금발이 아름답게 흩날린다.

거기에 뒤섞인 향기는 생각보다 고혹적이었다.

* * * * *

로벨리움 왕국 내에 위치한, 에르네스 제국의 거점에서 페르젠이 들은 건 현재까지 진행된 일의 전체적인 경과였다.

당연히 제 2 황자──레이몬드 입장에서는 이대로 추후 일까지 함께 논의를 하고 싶었으나, 오늘 도착한 페르젠의 몸에 누적된 피로를 고려한다면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본인 입으로는 늦었다고 말을 했지만……’

모두의 예상보다 빠르게 도착을 했으니, 분명 북부의 산맥을 가로 질러 왔을 터.

자신의 신하에게 현재 제일 필요한 것이 휴식이라는 걸 알고 있음에도, 그것을 외면할 만큼 레이몬드는 모진 군주가 아니었다.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지. 다들 쉬도록 하고, 내일 만나서 본격적인 틀을 짜도록 하세.”

“알겠습니다.”

페르젠이 빈말을 하지 않는 걸 보니, 자신의 예상은 틀린 게 아니었다고 생각하며 레이몬드는 쓴웃음을 지었다.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고 있으나, 일에 집중을 하지 않으면 매번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느낌이 들어 불안함이 차올랐다.

하지만 이것만큼은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과 공유할 수가 없는 짐이었다.

아버지가 가족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이려 하지 않듯.

군주 또한, 자신을 따르는 신하들에게만큼은 약한 모습을 보일 수가 없는 것.

그래서인지……

“외람되지 않는다면, 저녁 식사를 함께 하시겠습니까?”

레이몬드는 페르젠의 저 한마디가 무척이나 고마웠다.

식사 자리에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나눌 대화가 무엇이 있겠는가.

페르젠은 자신의 배려를 거부하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이 불안함을 해소시켜줄 방안을 제공해준 것이다.

“아아…… 그러도록 하지.”

물론, 이리 되면 중간에 끼여있는 귀족들만 난처해진다.

자신들이 따르는 황자는 쉬라고 해산을 명했으나, 그 다음 실세인 페르젠이 애둘러 그것을 거부하며 따라나서겠다고 했으니 머리가 복잡해지는 것이다.

함께 가겠다고 나서기에는 페르젠의 눈치가 보이고.

그렇다고 이대로 물러나기에는, 차후 일의 논의를 페르젠과 단 둘이서만 할 테니 적잖은 박탈감과 소외감이 느껴진다.

미묘한 갈림길에 서있는, 말로 이룰 수 없는 불편함.

군주가 군주로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있다면, 신하들은 신하로서 느끼는 스트레스가 있는 것이다.

“그대들도 시간이 된다면, 함께 가지 않겠나?”

“예…… 예! 물론입니다!”

그렇기에 페르젠을 제외한, 레이몬드를 따르는 신하들은 저 한 마디가 감격스러웠다.

갈림길에 자신들을 버려두는 것이 아닌, 나아가야 할 길을 직접 제시해주는 모습이.

그래……

신하가 군주의 고충을.

군주가 신하의 고충을 서로 해소시켜준다면.

이보다 이상적인 군신 관계가 감히 어디에 있겠는가?

그런 점에서 제 2 황자, 레이몬드는 아주 좋은 덕목을 가지고 있는 군주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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