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42화 (142/260)

< 142화 > EP.142

“하나 같이 에르네스 제국의 색에 물들어 있군요?”

“……시간이, 오래 되었으니.”

2 왕자,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과 식사를 하던 프리기아 후작은 읽고 있던 왕국의 서류를 식탁 위로 내려놓았다.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오고가는 돈들의 흐름을 쫓아가다보면, 하나 같이 에르네스 제국의 색이 섞여 있어 자연스레 웃음이 나온다.

“뭐…… 이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그만큼 편히 손댈 곳이 많다는 뜻이니.”

“듣던 중 다행이로군.”

나름 높은 위치에 있는 이가 올 것이라 예상은 했으나, 설마 그레모리 여제의 측근이라 할 수 있는 프리기아 후작이 직접 행차할 줄은 몰랐기에 이나스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의 언행은 어딘가 격식 있고 품위 있다고 하기 보다는, 어딘지 모르게 천박하고 시시껄렁해보였으나 좀처럼 그것이 어색하게 느껴지지 않는다.

마치, 밑바닥의 인생을 살아가고 있는 사람들로 쌓아 올려진 권좌에 앉은 이 같다고 해야 할까.

“시간이 되었군요.”

“……그래, 가지.”

그동안 지진부진하게 시간이 많이 끌렸다.

하지만 그것도, 이번 회담 이후로는 끝이 나리라.

그에 먼저 몸을 일으키는 프리기아 후작의 뒤를 이나스가 따라 걸었고.

그것이 마치 신호라도 된 듯, 다른 가게에서 식사를 마쳤던 이들이 하나 둘 나와 뒤쪽에 따라 붙는다.

유하게 흐르던 물이 순식간에 불어나 거센 기세로 쏟아지는 듯한 광경.

하지만 누군가는 의아하게 느낄 것이다.

그들이 정말로 여기서 상당한 영향과 대접을 받고 있다면, 어찌 왕실이 아닌 곳에서 식사를 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에 대한 답변은 실로 간단했다.

엘마르크 제국은 로벨리움 왕국의 왕실을 제집처럼 쓰는 것이 아니라, 로벨리움 왕국의 수도 자체를 제집처럼 쓰고 있는 것이다.

그도 그럴 것이 오랜 세월 에르네스 제국의 속국으로 보내왔던 시간 덕에, 로벨리움 왕국은 모든 기반이 수도에 집중되어져 있다.

각 귀족들의 영지를 비롯해 그들의 경제력을 뒷받침 하는 모든 근간의 틀이 말이다.

이래야 쓸데없이 왕국의 귀족들의 동태를 살필 필요도 없고, 다스리는 것이 간단했으니까.

때문에 프리기아 후작의 방식은 나름대로 현재 로벨리움 왕국에서 자신들의 위치를 과시함과 동시에 에르네스 제국에게 도발을 하는 것이다.

아무렴 이나스가 왕위에 오르기만 한다면, 오랜 세월 그들이 구축 해온 결실을 모조리 엘마르크 제국이 넘겨받는 것이기도 했기에.

‘우리 여제께서는, 그것을 부차적인 이득 정도로 생각하고 계시기는 하지만……’

프리기아 후작은 역시, 물질적 이득도 상당히 탐이 났다.

그렇게 걷고 걸어 로벨리움 왕국의 수도, 왕실이 위치한 곳에 다다른 프리기아 후작은 참으로 가식적인 미소를 얼굴에 덧대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흘러내리던 강물이, 결국에는 동일한 곳에서 만나 바다로 뒤섞여 들어가듯.

높다란 계단을 두고 입구에서 마주친 에르네스 제국의 2 황자.

“날씨가 무척이나 좋지 않습니까.”

“그렇군. 듣기로 엘마르크 여름에도 상당히 선선한 기후가 지속 된다던데, 그래서 그런지 땀을 지나치게 많이 흘려 냄새가 풍겨오네.”

“얼마나 귀중한 이들과 만난다고, 땀 냄새 풍기는 걸 신경 쓰겠습니까.”

차근차근, 계단을 오르며 주고받는 대화에는 당연히 날이 잔뜩 서있었다.

그리고 그 뒤에서, 자신의 오빠인 제 2 황자──레이몬드를 따라 걷는 엘리자베스는 아름다운 눈살을 가득 찌푸렸다.

제 1차 회담에서 아주 예민한 주제를 꺼내어 그와 대화를 이어 나가던 중 속내를 읽었을 때의 기억이 시기각각 떠오르는 건 그만큼 불쾌했기 때문이리라.

뻔뻔하게 웃는 얼굴로 그럴싸한 말을 지껄이는 입과 다르게, 속내는 얼마나 질척하고 음흉했던지.

자신을 강간하고 싶었다는 본심은 둘째 치고, 발정난 개들을 풀어 교미를 시키고 싶었다는 속내를 읽었을 땐 자신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표정 관리를 하지 못했었다.

만약 와인에 입을 대었다면, 틀림없이 그 자리에서 순간적으로 뺨을 때리고 말았을 터.

……그레모리 여제는 어째서 저런 사내를 자신의 측근으로 삼고 있는 걸까.

하기야 왕국으로 내려와 보여주었던 그의 처세술과 현란한 말솜씨, 임기응변 등을 보아하면 능력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아니, 그토록 썩어 문드러진 마음을 품고 있는 사내가 아무런 흉문도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뛰어난 능력을 보이고 있다는 것을 입증하는 증거일 터.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그대는 참으로 다루기 힘든 양날의 검을 쥐고 있구나.

쥐고 있는 손바닥에 상처가 생기는 순간, 순식간에 그 안으로 파고드는 병균이 제 살점을 갉아 먹을 텐데.

또각.

그렇게 짙은 상념에 빠져 계단을 모두 올라온 엘리자베스 황녀는, 어느새 불쑥 자신의 앞으로 다가온 프리기아 후작을 보며 냉랭한 표정을 지었다.

“무엇이, 할 말이라도 있는가.”

“아름다운 꽃을 보고 입을 여는 자가 있습니까.”

“……”

“조용히 감상을 하다, 문득 조심스레 손을 뻗어 볼 뿐이지요.”

잘생긴 그의 얼굴과, 제법 듣기 좋은 목소리, 대외적인 평판이 어우러진다면 현재 감히 가슴이 설레지 않을 여자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엘리자베스 황녀는 그가 자신의 더러운 속내를 감추기 위해 도대체 몇 개나 되는 가면을 쓰고 있는지 알고 있었기에, 자신의 손을 붙잡고 손등에 입술을 맞추려는 그를 보며 일말의 주저도 없이 손을 뒤로 내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장갑을 끼는 것이었는데.’

주변에 보는 눈이 많은 게 아쉬울 따름이다.

그와 단둘이 있었다면, 면상에 장갑이라도 던져주었을 터.

“프리기아 후작, 내 동생에게 천박하게 굴지마라.”

“가능한 취할 수 있는 모든 예의를 취했으나, 매몰차게 거절당한 건 제가 아닙니까?”

살짝 말아 올려진 그의 입꼬리가 낄낄 거리며 자신을 비웃는 듯 하다.

선을 넘는 듯, 또 넘지 않는 듯.

방종함과 예의 사이에서 살살 약을 올리는 그의 행동이, 2 황자는 좀처럼 참을 수 없을 만큼 화가 났다.

회담 자리를 가질 때 마다 분위기를 주도하기는커녕, 은근스레 그의 페이스에 이끌려 다니는 이 감각은……

황실의 핏줄 이전에, 사내로서의 자존심이 처절히 갉아 먹히는 듯한 분함을 불러일으킨다.

“자. 그만…… 들어가도록 합시다.”

표정이 굳어 있는 제 2 황자를 힐끔 보고서, 걸음을 돌리는 프리기아 후작.

그러나 그는 몇 걸음 걷다 발을 멈춰 세웠다.

저벅.

저벅.

틀림없이, 계단을 타고 오르는 발걸음 소리.

심지어 혼자가 아닌 다수였다.

이 얼마 높지도 않은 계단을 허덕여 아직 까지도 올라오지 못한 이가 있는가.

그것이 에르네스 제국이라면 조소를 품어 줄 것이고.

자신들, 엘마르크 제국이라면 창피를 준 대가를 치르게 해야 하지 않을까 싶어 고개를 돌린 프리기아 후작은 본능적으로 오소소 돋는 소름을 느꼈다.

급속도로 수축하는 근육은 몸이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알려주었고.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더위로 인한 땀은 어느새 식은땀으로 변질된다.

마치, 자신보다 상위의 포식자를 눈앞에 두고 결코 약해 보이지 않기 위해 잔뜩 경계를 하는 짐승의 태세.

그리고 높이 떠오른 태양조차, 감히 그를 배려하듯 구름이라는 이불을 덮어 본연의 자취를 숨긴다.

직후, 한 걸음 한 걸음.

계단 너머에서 선명히 모습을 드러내는 건, 다섯 명의 북부 귀족들을 이끌며 천천히 올라오고 있는──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푸드득!

근처에 앉아 햇볕을 즐기던 새들이 다급하게 날개를 펼쳐 아주 멀리 날아간다.

동시에 그늘이 드리워 더더욱 선명히 보이는, 그의 붉디붉은 눈동자를 마주하며 프리기아 후작은 주먹을 쥐었다.

이정도로 오한이 돋는 전율을 느껴 본적이 얼마 만이던가.

장담컨대 여제,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를 제외하면 겪어본 적이 없었다.

그녀가 사내로 태어났다면 틀림없이 저런 모습이겠지.

그렇기에 그는 의문을 품었다.

어찌하여 제왕이 될 상(相)과, 그릇을 품고 있는 자가 기둥을 자처하고 있는 것인지.

특히나 그를 뒤따르고 있는 이들이, 정말 북부의 귀족들이 맞기는 한 건지 에르네스 제국 진영 쪽의 사람들 또한 헷갈렸다.

또각.

곧이어 계단을 올라와 걸음을 멈춘 페르젠은 엘마르크 제국의 선두에 있는, 프리기아 후작을 스윽 훑어보고서는 일말의 미동도 없는 무심한 표정을 유지한 채 제 2 황자──레이몬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래……

영원한 겨울을 맞이하던 이들이.

드디어 여름을 쫓아, 로벨리움 왕국으로 도착한 것이다.

* * * * *

“늦어서 죄송합니다. 황자 전하.”

“하, 하하……! 결코 늦지 않았네.”

제 2 황자는 다시 한 번 브뤼테인의 혈통이 가져다주는 가치를 실감했다.

우선하고 있는 것은 제국의 안위이기는 하나, 그도 남자로 태어난 이상 어찌 황제의 자리가 탐나지 않을 수 있을까.

다만, 그는 황실의 핏줄들이 황좌를 탐내는 것은 틀림없이 그들의 지지를 얻기 위함이라는 걸 똑똑히 깨달았다.

어스러지고 망가져 한쪽으로 기울었던 기세가, 고작 등장하여 합류하는 것만으로 순식간에 아물어 균열을 감추지 않았는가.

“가시지요. 엘리자베스 황녀 전하는 제가 보필하겠습니다.”

자연스레 팔꿈치를 내밀어 손을 걸기 좋게 팔걸이를 만든 페르젠이 엘리자베스 황녀를 마주하며 고개를 숙인다.

그에 엘리자베스 황녀는 너머의 프리기아 후작을 힐끔 보고서는 그의 단단한 팔뚝에 조심스레 자신의 손을 얹혔다.

“고맙구나……”

“별 말씀을 다하시는 군요.”

오직 한쪽에만 시간이 흘러가듯, 에르네스 제국 쪽 진영의 사람들이 하나 둘 선두에서 걷는 2 황자를 따라 왕궁 안으로 들어선다.

그리고 머지않아 페르젠이 엘리자베스 황녀와 함께 걸음을 내딛을 차례가 오기 전, 프리기아 후작은 그를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현 브뤼테인의 가주와 다르게, 그대에 관해서는 익히 말로만 들어 보았는데. 이리 뵙게 되어 영광이네.”

“……”

“음, 나와 그대는 처음 만나는 것일 텐데. 초면에 눈살을 찌푸리는 건 너무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과연, 대충 듣기로 상당히 뻔뻔한 구석이 있다더니.

그것이 틀리지는 않은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페르젠은 고개를 돌리며 대답했다.

“성벽이 뒤틀린 사내는 하나 같이 문제가 있는 법이니 말일세.”

“……”

페르젠은 그저 기생오라비처럼 생긴 그의 외모를 돌려 동성애를 탐하는 족속이라고 한번 비난을 해본 것이나, 정작 프리기아 후작은 그것을 곧이 고대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흠. 그 말은 어찌…… 누구에게 들었나?”

되묻는 프리기아 후작의 목소리와 동시에 앞줄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그에 페르젠은 엘리자베스 황녀와 함께 걸음을 내딛으며, 특유의 목소리로 한 마디를 툭 내던졌다.

“풍문으로 들었소.”

……곧이어 페르젠이 왕궁 안으로 들어서자, 구름을 덮고 있던 태양은 수줍게 모습을 드러내 다시금 화사한 햇볕을 내리 비추었고.

달아났던 새들은 제자리로 돌아와 감미로운 목소리로 지저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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