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41화 (141/260)

< 141화 > EP.141

‘돌아, 가야겠지……’

북부로 올라온 게 엊그제 같은데, 훌쩍 지나버린 시간은 어느새 페르젠이 로벨리움 왕국으로 향할 시간이 왔다는 걸 알려준다.

그리고 유리엘과 다르게 제 몸 하나 간수할 능력이 없는 유페미아는, 아이까지 품은 상태에서 정쟁이 휘몰아칠 로벨리움 왕국으로 따라가는 게 엄청난 욕심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틀림없이 페르젠에게 민폐가 되겠지.

때문에 그가 없을 때 가장 안전한 장소인 브뤼테인에 몸을 의탁하는 게 맞으리라.

‘밤에…… 내가 먼저 말을 꺼내야겠네.’

분명,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겠지만.

이것은 결코 부려선 안 될 욕심이라는 걸 누구보다 잘 알았기에, 유페미아는 조용히 자신의 아랫배를 쓰다듬었다.

‘내가 그이의 돌아올 곳이 되는 것도, 나쁘지는 않을 거야.’

어차피 반년도 되지 않는 시간이다.

물론, 그 반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의 작별에 두려움을 느끼는 자신이 한심해보였으나……

어차피 한 번 사는 인생, 작별조차 두려워 할 사랑을 하고 있는 자신이 유페미아는 싫지 않았다.

어쩌면 처음으로 떳떳하게 느껴지는 자신의 나약함에, 작게 웃는 그녀가 살짝 발을 뗀다.

그러자 오래된 흔들의자가 태내에 있는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듯, 규칙적으로 삐걱대기 시작했다.

* * * * *

“안 돼!”

드물게, 식사 자리에서 유리엘은 언성을 높이며 페르젠을 또렷이 쳐다보았다.

움찔!

그에 입맛을 돋우는 향긋한 음식의 냄새에 굶주린 배를 달래려 했던 라우라는 아랫입술을 살짝 깨물고서는 손을 내려놓았다.

왜 하필이면 식사 자리에서 지랄을 하는 건지.

언성을 높이는 유리엘보다, 이러한 상황의 발판을 마련한 페르젠이 더욱 얄미워 라우라는 힐끔 그를 노려보고서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네 방으로 가거라. 식사는 다시 따로 준비 하라고 일러두고.”

“……네, 네.”

드물게 반가운 소리에 라우라는 주저 없이 몸을 일으켰다.

드디어 자신을 배려하는 법을 터득하기라도 한 건지, 기특한 꼬마의 모습에 잠깐이나마 기분이 좋아진 라우라였으나.

애당초 이번 식사 자리에서 예민한 대화 주제를 꺼낼 것이었다면 미리 언질을 주고 혼자 저녁을 먹으라고 하면 되었던 게 아닌가.

‘흥……’

그래, 어차피 어른이라고 한들 20대의 청년이다.

배려하는 법조차 어설픈 게 당연한 것이다 싶어 라우라는 얌전히 식사 자리를 빠져 나왔다.

그리고 라우라가 나간 직후, 페르젠은 간단히 목을 축인 뒤 유리엘과 시선을 마주했다.

“이유는 듣지 조차 않는 것이냐.”

“이유가 뭐든……! 당신 답지 않게 왜 그래?”

“나, 나도 당신을 따라 가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해……”

처음이자 마지막일지도 모르는, 유리엘과 유페미아의 의견일치.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너스레 웃었다.

“지금 웃을 때가 아니잖아……!”

제 한 몸 간수할 능력도 없고, 심지어 아이 까지 품은 상태이니 유페미아는 틀림없이 그의 걸림돌이 되리라.

단순히 유페미아를 걱정하는 것이 아니라, 유페미아의 존재가 페르젠의 발목을 붙잡아 역으로 그가 위험에 빠지는 것이 유리엘은 싫었다.

“내가 그런 기본적인 생각도 하지 않았을 것 같나.”

안다.

알고 있다.

유리엘은 그래서 더더욱 분함이 차올랐다.

잠시간이라도 유페미아와 떨어지고 싶지 않다는 마음에, 그가 이리 제멋대로인 욕심을 부리는 건지.

만약, 상황이 반대였어도 그는 이랬을까.

“유리엘.”

“……”

“브뤼테인은 확실히 안전한 곳이다.”

소중한 누군가를 반드시 의탁해야 한다면, 일말의 망설임도 머금지 않고 그곳을 택할 만큼.

“그러면……!”

“너는 아폴리온 등급에 도달한 흑마법사가 어떠한 위력을 품고 있는지 알고 있느냐.”

“몰, 라……”

유리엘은 입을 다물며 고개를 슬며시 돌렸다.

자신이 모르는 것에 대해 어설프게 대답을 할 만큼 미숙하지는 않았기에.

실제로 황실, 브뤼테인, 알프레드를 비롯한 몇몇 공작가에서 보유하고 있는 비밀 서고.

그곳에 기록된 3층 이상의 괴이에 대한 정보를 모조리 합해도 가짓수가 서른 개를 넘지 않을 것이다.

“나는…… 바보가 아니다.”

“……”

“대부분의 사람들은 항상 잃고 나서야 소중하다는 것을 깨닫는 질 나쁜 습관이 있지.”

하지만 자신은 그러지 않았다.

이미 유리엘과 유페미아가 자신에게 얼마나 소중한지 절실히 인지하고 있었다.

“봄, 눈이 녹고 초목이 드리우는 광경을 보며 아름다움에 취하고 싶은 것이지…… 슬픔을 되새기고 싶지는 않다.”

얌전히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던 유페미아가 몸을 움찔한다.

저것은 틀림없이 자신을 빗댄 것임을 은연중에 눈치를 챘기에.

“여름, 따스한 차 한 잔과 놓인 복숭아를 먹으며 그 달콤한 냄새와 맛을 음미하고 싶은 것이지…… 그리움에 사무치고 싶지는 않다.”

“……”

고개를 돌렸던 유리엘이 다시금 페르젠과 시선을 마주한다.

그리고는 그의 눈동자에 새겨진 애정과, 옅은 웃음을 머금고 있는 얼굴을 보며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

왜 이리도 심장이 철없이 두근거리는 건지.

“최대한 주관을 배제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한 것이다. 한 두 번이 아닌 수십 수백 번을 궁리했다. 그 끝에……”

안심하고 너희들을 맡길 수 있는 곳은.

황실도, 그렇다고 브뤼테인도 아니라.

“역시, 내 곁이더구나.”

브뤼테인에 의탁을 하게 된다면, 목숨이 위중한 상처를 입었을 때 해결해줄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바로 곁이라면, 세상 모든 금화를 녹여 3층에 서식하는 괴이들을 하나둘 끄집어내면 된다.

시간이 촉박하다면, 죽음에 이르는 상처를 스스로에게 새겨 그 날의 광경을 재현하면 되리라.

“그러니 내가 어리석은 욕심을 부리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아다오.”

오랜 고민 끝에, 그것은 흔들리지 않을 확신이 되었다.

그리고 흔들리지 않을 확신은 곧 신념이 된다.

“더불어, 유리엘.”

“으, 응……”

“상황이 반대였어도……”

유리엘 네가 제 한 몸 지킬 능력도 없이, 아이를 품었더라도.

“이 시간, 이 장소에서 나는 동일한 선택지를 골랐을 것이다.”

“……”

“자, 이의가 없는 것을 보니 동의한 것으로 알겠다. 식사를 시작하지. 음식이 식겠어.”

페르젠이 식사를 시작한다.

하지만 유리엘과 유페미아는 차마 식기를 들지 못했다.

‘치사해……’

이러면 언성을 높인 자신만 이상해지지 않나.

어느덧 간질간질한 심장의 감촉이 아랫배 근처까지 내려와 유리엘은 허벅지를 음란하게 문질렀다.

식탁 아래이기에 보이지는 않을 테지만, 저 너머 유페미아도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다는 걸 깨닫고 기가 찬다는 듯 실소를 머금는다.

오늘 밤 그와 동침을 하는 건 자신이 아니라 그녀일 텐데.

그 잠시도 참지 못하는 걸까.

‘음탕한 년……’

여유를 가지기로 했어도, 부러운 건 부러운 것이었고.

역시, 질투 나는 건 질투 나는 것이었다.

* * * * *

입김이 새어 나온다.

페르젠을 따라 로벨리움 왕국으로 향할 준비를 하기 위해 루에르그로 도착한 다섯 명의 귀족들은, 각자가 이끌고 온 초라한 수준의 저력을 보고 속으로 그만 부끄러움을 머금었다.

그리고는 동시에 자기 자신에 대한 화도 치솟자 거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분명, 자랑스러운 자신들의 병사들이자 가신들인데.

어째서 그것을 타인 앞에 내세워야 할 때는 한없이 작게만 느껴지는 건지.

저벅.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열병된 자신들 앞으로 걸어 나오는 페르젠을 보고서 5명의 귀족들은 고개를 들어 올렸다.

스윽 자신들을 훑어보는 페르젠은 과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뒤에 서있는 자신들의 병사가 차려 입은 갑옷을 보고서 추레하다고 속으로 혀를 차고 있지는 않으련지.

“여기까지 오느라 고생했네.”

“아닙니다.”

현재 영지를 다스리는 가주가 직접 온 이들도 있었고, 곧 영지를 물려받기 위해 경험을 쌓고 있던 아들을 대신 보낸 이들도 있었다.

그들의 얼굴을 하나하나 기억하며, 페르젠은 말을 이었다.

“돌아가기에는 시간이 애매하니, 이대로 가로 질러 갈 것이다.”

“……그렇군요.”

돌아가도 시간은 충분하다 생각 되는데.

물론, 빠르게 도착하는 것은 좋다.

단지, 귀족들은 걱정 되었다.

밟으면 눈에 파묻히는 발을 빼내고 내딛어야 하는 병사들의 피로와, 그런 식으로 스며든 냉기가 발에 동상을 걸리게 하지는 않을지.

“걱정하지 마라.”

“예?”

“장시간 눈에 파묻혀 신발에 스며드는 냉기가 동상을 걸리게 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움찔!

북부 귀족들은 속으로 적잖은 놀람을 머금었다.

그는 북부의 생활을 잘 모를 터이고, 루에르그에서 지낸 시간도 무척이나 짧을 텐데.

“고충을 공감하지는 못하나, 충분히 이해하고는 있다.”

“……”

“따르는 인재들을 쓸데없이 학대할 만큼 모진 인간은 아니니 이상한 선입견을 품고 있다면 버리게.”

긴장된 분위기를 풀어 보려는 듯 부드러운 어투로 말하는 페르젠의 뒤로, 두 마리의 말들이 고상한 마차를 끌고 온다.

가로질러 간다는 건, 높지는 않더라도 산맥 하나를 경유해야 할 텐데.

……아니다, 틀림없이 생각이 있겠지 싶어 귀족들은 의심을 지웠다.

“잠깐 휴식을 취할 시간이 필요한가?”

“충분합니다.”

“그래, 그러면 곧바로 이동을 시작하지.”

자신을 제단을 쓰다듬는 페르젠이 고풍스러운 관 하나를 바닥에 내려놓고, 무척이나 정중히 예의를 취하더니 그 안에서 전대 가주의 시신을 일으킨다.

그리고는 나아가야 할, 눈으로 덮여진 길들을 바라보더니 마력을 소모해 불로 만들어진 길을 뻗었다.

그래, 그것은 말 그대로 불로 이루어진 길이었다.

곧이어 그 길이 자신들의 발까지 다가오자 병사들과 귀족들은 당황했으나, 머지않아 뜨겁기는커녕 안도가 되는 듯한 따스함만이 느껴지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밟을 수 있는 불이라는 게 어찌 이리도 신기한지.

푸릉!

그리고 며칠 전, 이미 해당 광경에 대해 적응을 마친 말들이 한심하다는 듯 투레질을 하며 그들을 비웃고는 당당히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발목까지 잠길 정도로 쌓였던 눈들은 어느새 새하얀 수증기가 되어 안개처럼 주변을 물들이고 있는 상태.

“……백작님은, 말을 타지 않으십니까?”

마차를 끌고 갈 자신이 있다면, 페르젠 자신 또한 굳이 걷는 게 아니라 말을 타는 게 나으리라.

특히 마법사라면, 역시 체력적인 측면은 많이 부족할 텐데.

“무얼하러.”

그러나 돌아온 페르젠의 대답은 간편하기 그지없었다.

“올려다보는 건 내 얼굴이면 충분하네.”

“예?”

“따르는 이들이, 굳이 등까지 올려다봐야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

“가지.”

페르젠이 걸음을 내딛는다.

동시에 그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은 한 마디에 이끌린 이들은 하나 둘, 그를 따라 자연스레 걷기 시작했다.

‘……나도, 아들을 보낼 것을 그랬나.’

아버지를 대신하여 참가한, 자신 아들 또래의 후계자들을 바라보며 몇몇 귀족들은 쓴웃음을 지었다.

이제는 늙은 몸으로 머금기에는 버겁고, 또 힘이 들──밤하늘의 빛나는 별처럼 순수한 동경을 품은 젊은이들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 * * * *

출발지는 북부.

그리고 향하는 곳은 로벨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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