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9화 > EP.139
초대장을 보내기는 했지만, 정말로 그가 참석할지도 몰랐거니와.
조금만 생각을 하면 거기에 담겨 있는 명백한 조롱의 의미를 알 텐데도 참석한 뻔뻔함에 아스란 백작은 어처구니가 없었다.
더군다나 식탁 위에 보란듯이 놓인 두 장의 봉투는, 굳이 뜯어 보지 않더라도 저 안에 무엇이 담겨 있는지 어렴풋한 짐작이 가게 만든다.
애초부터 수중에 7장의 초대장이 있었던 건지.
그게 아니라면 갈등을 조장하기 위한 눈속임인 건지.
살짝 목이 타는 듯하여 아스란 백작은 목부근을 추레한 손으로 매만졌다.
이 상황을 해결해주길 바라듯, 자신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딸과 아들.
또, 난처한 표정으로 자신을 힐끔힐끔 곁눈질 하는 북부의 귀족들.
기어코 걸음을 내딛은 아스란 백작은 여유로운 기색을 뽐내고 있는 페르젠 곁으로 다가갔다.
“루에르그 백작. 잠시 자리를 옮기지.”
“……인심 한 번 야박하군.”
부드럽게 고기를 썰고, 그것을 포크로 찍어 한점 먹기도 전에 말을 꺼내는 아스란 백작을 보며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차려진 만찬을 음미할 시간조차 주지 않는가.”
나이프와 포크를 접시 위에 내려두는 페르젠이 작게 혀를 찬다.
그 건방짐에 아스란 백작의 눈썹이 거칠게 꿈틀 거렸으나, 내뱉는 목소리만큼은 평온함을 잃지 않았다.
“너무 배를 채우면, 리베라를 제대로 맛 보지도 못할 걸세.”
“허……”
아르망 디 리베라.
부가적 설명없이 직설적으로 언급하자면, 제국 내에서 가장 비싼 와인이다.
텅텅 비어버린 병만으로도 상당한 값어치를 지니고 있는 그것을 자신에게 대접하겠다니.
애당초 깊은 이야기는 그와 나눌 생각이었기에 페르젠은 식탁을 두어번 손가락으로 두드린 뒤 몸을 일으켰다.
“이렇게 까지 말을 하니, 염치 없지만 사치스러운 입가심을 하고 오겠소.”
“물건은 챙기지 않는가?”
“어차피 다시 돌아올 것인데 무얼 하러.”
파란은 이대로 종지부를 찍게끔 둘 생각이 없었기에.
페르젠은 능청스레 웃으며 대답했다.
그에 속으로 잠시간 짧은 갈등이 치밀었던 아스란 백작이나, 페르젠을 치워낸 상태에서 자신의 아들인 제라드가 뒷수습을 하지 못할 만큼 부족한 자식이라 생각하지는 않았기에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발을 억지로 내딛어 페르젠과 함께 연회장을 벗어났다.
그러자 무척이나 자연스레, 앉아 있는 북부의 귀족들은 차려진 만찬이 아닌…… 페르젠이 떠나간 자리 위에 놓인 두 개의 봉투를 향해 시선을 건넸다.
* * * * *
또각.
저벅.
고요한 저택의 복도를 거닐으며 페르젠과 아스란 백작은 단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그 침묵이 가져다주는 무게에 당장이라도 집어 삼켜질것만 같은 느낌을 받는 건 아스란 백작이었다.
딸칵.
이윽고 자신의 침실의 문을 열고, 리베라 한명을 쥐어든 채 페르젠과 마주보며 앉은 아스란 백작은 새파란 애송이의 얼굴을 또렷이 마주했다.
“연극은 즐겁나?”
“……”
먼저 서두를 올리는 아스란 백작의 한 마디에 페르젠은 대답하지 않고 잔에 따라진 리베라를 조용히 음미했다.
연극이라는 단어에 담긴 속뜻은 별 다른 게 없으리라.
연회장에 올려두고 온 두 장의 봉투.
그것이 브뤼테인의 경매에 초청한다는 초대장이 아닐 텐데, 괜한 허세를 부리고 있느냐고 꾸짓는 거겠지.
대외적으로 알려진 초대장의 갯수는 5장.
하지만 그 두 장이 진실이라면 도합 7장이라는 소리가 되고, 애초부터 과반수 이상을 포섭하기 위해 초대장을 받아 올 것이었다면 10장을 받아 오는 게 맞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을 터.
“백작.”
“……”
“그대도 그러하고, 다른 북부의 귀족들 또한 내가 권력에 눈이 먼 것으로 보이나?”
옅게 웃으며 페르젠은 잔을 내려 놓았다.
“만약 그러했다면, 둥지를 틀 곳으로 루에르그를 고르지 않았겠지.”
당신들이 생각하는 사고의 대전제부터가 잘못되었다고 꼬짚으며 페르젠은 느긋히 두 손을 모아 깍지를 꼈다.
“허…… 이제와서 어쭙잖게 브뤼테인의 역사로 자신을 포장하는 것이냐?”
자신이 가진 북부 수장의 자리를 게걸스레 탐내고 있는 주제에 무어라 지껄이는 것인지.
“그대도 알지 않나? 정말로 내가 그 허물어져가는 권좌를 탐낼 것이었다면, 10장의 초대장을 받아 왔을 거라는 걸.”
“5장이 마지노선이었다는 걸 알고 있다. 네 놈과 다르게 제레미아 후작은 현 브뤼테인의 가주니, 감히 권력을 탐내는 동생을 지극정성으로 돌봐줄 수는 없었던 게지.”
“……”
“이 척박한 북부의 땅에서 대규모 공사를 시행할 것이라는 과장된 소문도, 제발이 저려 퍼트린 게 아니던가?”
“그대 영지에서 인부를 빌렸던 적은 없는데, 꽤나 세심하게 알아보고 있군. 그래.”
“애송이가……”
말끝마다 은은하게 묻어 나오는, 자연스레 자신을 하대하는 듯한 느낌이 드는 어투에 아스란 백작의 주름이 제법 노여움을 머금고 일그러진다.
“보아하니 체스를 상당히 즐기는 듯 하군.”
옆쪽 창가에 놓인 체스판과 가지런히 정리 된 장기말들을 보며 페르젠은 손을 뻗었다.
탁.
특유의 커다란 손으로 쥐어든 건, 병사의 역할에 해당하는 폰(Pawn).
“백작. 어째서 체스의 룰에, 폰은 뒤로 돌아보는 것도…… 뒤로 움직이는 것도 허락 되지 않는지 알고 있나?”
“……”
“원리는 어려울 게 없네.”
내려다 본다는 것이 하대를 의미하고.
마주 보는 것이 동등함을 의미한다면.
자연스레 병사가 전장에서 택할 수 있는 선택지는 오직 그것 뿐이기 때문이다.
고개를 돌려 왕의 용안을 올려다 보거나, 감히 전장에서 후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허락이 떨어졌을 때 뿐.
그도 그럴 게, 인간들 또한 올려다 본다는 의미에서 억지로 하늘의 태양을 시선에 담으면 얼마 가지 않아 고개를 숙이지 않나.
“창공을 날아 다니는 새들 조차 자신들의 주제를 알고 고도를 높여 태양 가까이 가려 하지 않지.”
“하……”
“그런 의미에서 그대는 그러한 새들 보다 못하다는 생각이 들어.”
쾅!
“주제 넘지 말도록 하게!”
불쾌하다는 감정을 가득 담아 책상을 내려치는 아스란 백작의 주먹을 따라, 서로의 잔이 엎어져 값비싼 와인이 뚝뚝 흘러내린다.
하지만 그것 보다 더더욱 페르젠의 심기를 거슬리게 만드는 건, 목청을 높이는 그의 목소리와 함께 손등으로 튀겨진 침이었다.
“참으로 격조 없는 울림이군.”
스륵.
품안에서 손수건을 꺼낸 페르젠이 천천히 자신의 손등을 닦는다.
추잡한 그의 행동도 짜증이 나는데, 하필이면 튀겨진 침이 왼쪽 뿐이라는 것이 또 얼마나 거슬리는지.
그렇다고 자신의 오른쪽 손등에 마저 침을 뱉으라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기에, 페르젠은 차오르는 강박증의 발작 증세를 강제로 억누르며 그를 쳐다보았다.
움찔!
수줍게 구름에 가려진 붉은 달이 본연의 모습을 드러내고, 뒤편의 창가에서 여명을 내리며 페르젠을 감싸 안는다.
얼핏보면 참으로 숭고하다는 감상이 들만한 광경이었으나, 현재 떠오른 하늘의 달을 그대로 투영한 듯한 페르젠의 소름끼치는 붉은 눈은 오히려 모종의 불길함만을 자아냈다.
“그대 말대로, 내가 보유하고 있는 초대장은 5장일세.”
“……”
“그리고 지금 연회장에는 그 5장 중, 한 장의 초대장과 아무런 내용도 적혀 있지 않은 백지가 놓여 있지.”
“멍청하게 제 살을 깎아 먹을 생각이었더냐?”
“우습군.”
5장이 진실이고.
그 중 한장이 이곳에 있다면.
당연히 페르젠이 자신의 품으로 끌어 안을 거라 믿고 루에르그로 올라간 5명의 귀족들 중 한명은 낙오가 되는 것이 아닌가?
그렇게 까지 해서 이득을 볼 게 무엇이 있다고.
“말하지 않았나. 나는 그 낡아 빠진 권좌에는 하등 관심이 없다고.”
아스란 백작의 침을 닦아낸 손수건을 바닥에 처연히 던지며 페르젠은 몸을 일으켰다.
“세상에서 가장 높은 산의 정상에 올라 손을 뻗어도, 태양에는 닿을 수 없지.”
“……”
“가장 기초적인 진리인데도, 그대는 어정쩡하게 높아진 건물 위에 앉아 그것을 망각했더군.”
자신 쪽에서 한 명.
그리고, 백지를 거머쥔 이쪽에서 한 명.
그렇게 어느 쪽에도 끼기 힘든 신세가 되어버린 두 명은 북부에서 중립이 된다.
그래, 페르젠은 애초부터 세력을 둘이 아닌 셋으로 쪼개 놓을 생각이었다.
북부가 자신들 끼리 밥그릇 싸움을 해야지만, 감히 이번처럼 중앙에 눈독을 들이며 건방지게 압박을 하지 않을 테니.
생각해보면 이서진이 살던 세계에도 이러한 상황과 연관된 신화가 있었다.
분명, 바벨탑이라고 불리었지.
그 탑을 쌓아 올린 인간들은 탑이 무너져 내림과 동시에 제각기 다른 언어를 품어 원활한 교류가 되지 않는 벌을 받았고.
작금의 경우에는, 그가 쥐고 있던 권력을 뿔뿔이 조각 내는 것이 상응하는 벌이 되리라.
“오랜 세월이 지나서 그런지, 배가 너무 불러 매는 비상하는 법을 잊어 버렸네.”
“하……”
“그러니 백작.”
찢고.
부수고.
쪼개어 놓은 이 권력의 쪼가리들을 다시금 쫓아 움직이게.
그리고 오랜만에 날게 되는 창공에서 똑똑히 되새기게나.
“주제 넘게 태양을 올려다 보며 기싸움을 하지 말고.”
또.
“허락 없이, 가까이 다가서면 안된다는 것을.”
애당초 매는 먹이를 구하기 위해 지상으로 하강한다.
넓고 푸르른 창공에 감히 자신의 본분으로 탐낼 것이 무엇이 있다고 고도를 높이는 것인지.
“북부가 좁게 느껴졌다면 이번 기회에 제대로 둘러 보게.”
그대 분수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 무척이나 넓은 곳이니.
그리고 황제 폐하에게 눈치를 주지 말고.
그대를 따르는 귀족들의 눈치나 보게.
탁.
말을 마치고 와인으로 얼룩진 책상 위로 자신이 쥐었던 장기말──폰을 내려 놓으며 페르젠은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페르젠이 나간 그 자취를 뒤늦게 쫓는 아스란 백작은, 눈앞에 보이는 리베라의 병을 들어 거칠게 집어 던졌다.
채앵!
그러자 산산이 조각나 흩어지는 병의 조각들과 함께, 아직 남아 있던 와인이 쏟아지며 방 안 가득히 특유의 그윽한 향을 피워나간다.
하지만 그 누구도 취하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어둑한 밤하늘 위로 떠오른 달 만이.
그 향에 취한듯 여전히 붉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 * * * *
“……일어 나지 마십시오.”
자신의 아버지와 페르젠이 연회장을 떠난 시점.
제라드는 헛기침을 하며 간을 재는 귀족들을 향해 으름장을 놓듯 말했다.
하지만 제라드의 목소리에 실린 무게는, 그들의 어깨를 짓눌러 앉혀 두기에는 역부족이었기에.
결국, 몸을 일으킨 두 명의 귀족들이 봉투를 쥐어들고 연회장을 나서는 걸 막을 수 없었다.
그에 얼굴이 잔뜩 새빨개진 제라드는 개판이 나버린 자신의 연회에 앓는 신음을 흘리는 동생을 뒤로하고 문밖으로 뛰쳐나갔다.
마지막으로 단단히 경고라도 줄 생각이었으나, 그는 얼마 가지 않아 복도에서 자신의 걸음 소리와 함께 울려 퍼지는 구두 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려야만 했다.
“……”
벌써 이야기가 끝난 것인지.
언제나처럼 고압적이고 위압적인 기세를 풍기며, 한치의 흐트러짐도 없는 자태로 걸음을 내딛고 있는 페르젠.
꾸욱!
일순간 고개가 바닥으로 향할 뻔 했지만, 제라드는 주먹을 부릅 쥐며 꼿꼿이 치켜들어 그의 시선과 마주했다.
또각.
조금씩 가까워지는 거리.
고풍스런 향수 냄새에 뒤섞인, 은은한 와인의 향이 감미롭게 풍겨온다.
그러나 페르젠은 나름의 각오를 품은 자신을 길바닥에 굴러가는 돌멩이를 취급하듯 간단히 무시하며 지나쳐 버렸다.
그 행동이 가져다주는 수치스러움에 제라드는 피가 나올 만큼 거세게 입술을 짓씹으며 뒤늦게 페르젠을 향해 달려나가 앞을 가로 막았다.
“그 애매한 권력이…… 영원하게 지속되리라 생각하십니까?”
“……”
“언젠가 전시 상황이 되면 황실은 저희를 변경백으로 임명한 뒤 군사권을 넘길 것입니다. 지리적 특성, 가문의 위세가 그러하니까요.”
“……”
“그 때가 되면, 당신이 없는 루에르그는 처절하게 짓밟힐 것입니다.”
“용기는 가상하구나.”
칭찬이라도 해주듯, 페르젠은 제라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짧게 휘파람을 불었다.
히힝!
그러자 멀지 않은 거리에서 그 소리를 들은 백마가 곁으로 달려오더니……
“흐악!”
등에 태울 자신의 주인인, 페르젠과 만남을 방해하고 있는 제라드의 얼굴을 꼬리로 냅다 후려처버린다.
푸릉!
그리고는 콧바람을 제법 거세게 뿜으며, 페르젠이 올라타기 편하도록 몸을 대준다.
그에 말의 갈기털을 한 번 쓰다듬어준 페르젠은 안장 위에 편히 착석한 뒤 주저 앉아 있는 제라드를 내려다보며 말했다.
“적군이 북부로 몰려 오면, 가장 먼저 피를 흘리게 되는 것은 루에르그를 포함한 11개의 가문이다.”
“……”
“그러한데 잘도 너희에게 군사권을 넘겨주겠구나.”
아니, 넘겨 줄 수는 있겠지.
11개의 가문이 모두 적군에게 휩쓸리고.
아스란 가문만이 남게 되었을 때, 명예를 끌어 안고 사망하라는 듯이 말이다.
“제라드.”
“……”
“전시에서 병사는 뒤로 돌아보는 것과 후퇴하는 것이 허락 되지 않는다.”
그렇기에, 자신들 앞에 서서 등을 내보이며 이끄는 군주를 갈망하고 동경하며 따르는 것이리라.
“세월을 기다릴 필요도 없다. 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언제든지 영지전을 걸도록 해라. 명분은 무엇이건 괜찮다.”
“……”
“그리 펼쳐진 영지전에서 나를 찾는 건 어렵지도 않을 테니.”
최전선의 앞에 서서, 친절히 네놈 얼굴을 찾고 있으마.
히힝!
곧이어 고삐를 움켜쥐며 엉덩이를 한 번 차자, 페르젠을 태운 백마는 빠르게 달려 나가기 시작했다.
밤이 되자 북부의 추위가 상당히 매서웠지만, 은은하게 맴도는 취기가 그것을 조심스레 몰아내고 있었다.
상당히 피로가 쌓일 만큼 무척이나 귀찮은 발걸음이었으나……
아르망 디 리베라.
그 와인을 맛본 것만으로도 소정의 가치는 있었다고 생각하며 페르젠은 루에르그로 돌아가는 길에 올라섰다.
* * * * *
길지도 짧지도 않은 시간이었으나, 결국 판단을 마쳤던 메클렌 남작은 마차 안에서 길게 숨을 내쉬고 조심스레 봉투를 뜯었다.
“……”
그러나 그를 반기는 건 브뤼테인의 문양이 찍혀 있는 초대장이 아닌, 그 무엇도 적혀 있지 않은 새하얀 백지였다.
순간 사고가 정지하여 두 눈을 깜빡이는 것 조차 못하던 메클렌 남작은 어처구니가 없어서 실소를 흘렸다.
그 자리를 박차고 나왔으니, 다시금 아스란 백작가의 밑으로 들어가는 건 말이 되지 않는 것일 터.
철면피를 깔고 한 번더 고개를 숙인다 하여도 그리 좋은 대접은 받지 못하리라.
때문에 자신을 농락한 페르젠을 향해 잠깐 분노가 치솟았으나, 메클렌 남작은 특유의 명석한 머리로 침착히 상황을 파악하려 들었다.
북부는 총, 12개의 가문이 존재하고 있으나.
오고가는 정치적 흐름은 중앙 못지 않게 격렬했으며, 또 더러웠다.
그래서 그런지 메클렌 남작은 어렵지 않게, 분을 식힌 머리로 페르젠의 의도를 빠르게 눈치 챘다.
아니, 정확히는 이 가설이 맞으려면……
‘지금 루에르그로 올라간 귀족들 사이에서도 낙오자가 한 명 있어야 할 텐데.’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는 아마 어느 가문 밑에도 속하지 않은 중립 세력을 만드려는 것이 아닐까.
그로 인해 페르젠 본인이 얻는 이득은 하나도 없을 것이다.
다만, 페르젠 본인은 이득을 얻지 못하더라도.
‘황실은 이득을 취하게 되겠지.’
물론, 그가 단순히 갈등 조장을 위해 전부 백지를 올려 놓았을 수도 있으나……
자신이 생각한 바가 맞는다면, 역시 성이 바뀌더라도 브뤼테인의 혈통은 브뤼테인의 혈통이구나 싶었다.
황실의 세력이 가장 약할 때도 충성스레 그 곁을 지키며 명맥을 이어지게 한 제관의 핏줄.
귀족들 끼리 농담삼아 하는, 황실이 몰락하여 제국이 망하는 것 보다.
브뤼테인이 부패하여 제국이 망하는 것이 훨씬 빠를 것이라는 게 이제는 마냥 농담으로 느껴지지 않는다.
“북부도 상당히 피곤해지겠구나……”
메클렌 남작은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 *
한편……
한참 루에르그 내에서 열린, 경비대장의 생일 연회.
겉으로나마 그 주연인 로엠은 당장이라도 밖으로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 가득했다.
유리엘이 페르젠의 빈자리를 대신하며 귀족들의 응대를 무척이나 능숙하게 해나가고 있었으나, 저 높으신 귀족 분들이 자신의 생일을 축하하고 있는 광경을 보고 있자하니 쉴 새 없이 오금이 저려올 뿐이다.
그도 그럴 게 이것은 진주 목걸이를 걸고 있는 돼지를 향해 잘 어울린다고 박수를 쳐주는 격이 아닌가?
아니, 차라리 정말로 이순간 자신이 돼지라면 나았을 것이다.
그러면 꿀꿀 거리기만 해도 충분했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