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8화 > EP.138
깊숙이 가라앉았던 심해 속에서 몸이 천천히 떠오르는 느낌을 받으며, 라우라는 귀여운 기침을 했다.
“크브……!”
으슬으슬하다.
그래서 그런지 무척이나 가까운 곳에서 느껴지는 온기를 찾아 더욱 파고드려는 것인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 온기는 현재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대번에 알아차린 듯, 커다란 손으로 허리를 감싸안으며 품안으로 편히 안착시켜주었다.
‘아……’
턱끝으로 흐르는 침을 닦아주는 손수건.
뻐근한 턱의 고통을 해소시켜주듯 입에 틀어박혀 있는 무언가를 빼주는 손길.
서서히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된 라우라는 두 눈을 깜빡이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얼음으로 이루어진 아담한 집.
그 가운데서 밝고 화려하게 피어오르는 불길.
또, 자신이 편히 자리 잡고 앉아 있는 사내의 무릎.
“좋은 아침이구나.”
“……콜록!”
괴벽의 여파로 몸이 뜨거운건지.
아니면 정말 감기 기운으로 인해 몸이 뜨거운건지.
좀처럼 분간이 가지 않는 가운데, 라우라는 자신에게 아침 인사를 건네오는 페르젠을 보며 몸을 움찔했다.
“감기에 걸린 듯 하군.”
“……”
“도중에 돌아갈 명분으로 이만한 것도 없겠지. 지금 출발해서 빠르게 움직이면 해가 저물기 전에 도착할 테니, 루에르그로 돌아가서 진찰을 받고 편히 쉬도록 해라.”
너무나도 태연히 평소처럼 자신을 대해주는 페르젠의 모습에 라우라는 어떤 반응을 보여줘야할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그래도……
“죄, 죄송…… 해, 해요……”
이 한마디는 확실히 건네야만 하겠지.
“무엇이.”
“아……”
그러자 페르젠은 스스로가 어떤 잘못을 했는지를 읊어보라는 듯, 짓궂은 어투로 물어왔다.
“기, 기다리지 않고…… 마, 마차를 나선 거……”
“또.”
“……”
우물쭈물, 도저히 떠오르는 게 없어 페르젠의 품에서 라우라는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보이는, 그의 목덜미에 새겨진 자신의 이빨 자국.
깊은 상처로 보이지는 않으나, 핏딱지가 앉아 있는 상처는 제법 흉해 보였다.
멋대로 마차를 나선 것 외에는 딱히 짚이는 게 없으니, 목덜미──정확히는 쇄골 부근의 이 상처가 자신이 잘못한 또다른 이유가 아닐까 싶어……
할짝.
라우라는 대답 대신, 얼굴을 가까이 붙여 괴벽에 잠식된 자신이 새겼을 상처를 자그마한 혀로 정성스레 핥아 주었다.
과거 손가락에 새긴 상처에 이런 식으로 행동하기를 그가 요구했으니, 이번에도 이것이 그가 바라는 사죄가 아닐까 싶었으나 그 의도는 확실히 빗나갔다.
‘더듬지 않고, 내게 애송이라 칭했던 말은 기억에 남아 있지 조차 않는 건가.’
쇄골을 핥아나가는 간질간질한 설육의 감촉에 페르젠은 어이없는 실소를 옅게 흘리며 라우라의 엉덩이를 두 손으로 받친 뒤 몸을 일으켰다.
“앗……”
그녀가 모른다면, 그건 그것 나름대로 재밌는 헤프닝이기도 하겠지.
이윽고 당황하는 라우라를 한층 편하게 품안으로 안아든 페르젠은 얼음으로 이루어진 자그마한 집을 무너트리고, 밝고 화려하게 타오르는 불길을 마력으로 되돌려 흐트러트렸다.
그리고는 조심히 본래의 관에 차디찬 밤을 지켜주었던 전대 가주를 모신 뒤 아공간으로 회수하고는, 북부의 아름다운 풍경을 눈에 담으며 걸음을 옮긴다.
당연히 그의 품에 안긴 라우라는 어찌해야 할바를 모르고 한참을 머뭇거리다, 어설프게 그의 목에 두 손을 두르고는 고개를 묻었다.
“……”
솔솔 잠이 쏟아지는 피로함과 전신이 안정되는 안도감.
사근.
사근.
규칙적으로 눈밭 위를 즈려밟는 그의 발걸음 소리는 왜 이리도 듣기 좋은 자장가처럼 귓가로 스며드는지.
새근……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라우라는 페르젠의 품 속에서 곤히 잠에 빠져 들었다.
* * * * *
“로젠베르크 아가씨를 데리고 제가 돌아간다면, 주인님은 어찌……?”
“말 한필이면 충분하다. 걱정하지 마라. 그리고 오랜 세월 그대를 곁에 두었던 건 입이 무거워서라는 걸 알아주었으면 하는 군.”
“저는 제 분수를 잘 알고 있습니다. 주제 넘지 않도록 할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래. 그러면 수고 하도록 하게.”
마차 안에서 깊이 잠이든 라우라를 힐끔 보고서 페르젠은 털에 윤기가 흐르는 듯한 백마 위로 올라타 단단히 고삐를 말아 쥐었다.
그녀의 괴벽을 통제하며 밤을 지새운 것에 대해 피로가 조금 남아 있기는 하나, 이 정도 피로에 무너질 만큼 어수룩한 몸뚱이는 아니었다.
히힝!
이내 페르젠을 태우고 달리는 말이 옅게 쌓인 눈밭 위에 거침없이 발자국을 새기며 달려 나가기 시작한다.
* * * * *
드문드문 주위에 놓인 바위에 이끼가 서려있고.
조금만 고개를 돌리면 덤불로 구성되어 있는 관목들이 눈에 보인다.
미약하지만 생기가 가득한 대지.
그 너머에 어렴풋하게 보이는 건, 아스란 백작가의 성벽.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중앙에서 고립되어 있다는 점을 제외하면, 북부의 고충을 단 하나도 공감할 수 없는 곳에 자리잡은 이가.
어찌 북부의 수장 노릇을 하고 있는 건지.
동상이 걸릴까봐 급급한 그들의 생활을 알까.
치워도 치워도 녹지 않는 눈의 높이를 보기는 했을까.
그게 아니라면, 먹구름이 끼었을 때 우박이 내릴까봐 두려움에 떠는 심정을 느껴 보았을까.
“그만 달리도록 하자꾸나. 걸어가도 충분할 것 같으니.”
안장에서 내려와 그동안 고생한 말의 갈기털을 부드럽게 쓰다듬어주며, 페르젠은 고삐를 쥐어든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 * * * *
땅거미가 내려 어둑해진 북부의 밤.
자신의 침실에서 조용히 시간을 보내던 아스란 백작은 창밖으로 고개를 내밀어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평소와 다르게 붉게 물들어 어둠을 내려비추는 달.
개기일식이 일어난 현상을 보며 그는 특유의 아름다움에 감탄을 토해낸다기 보다는, 묘한 불길함을 머금었다.
페르젠의 주도하에 곧 북부에서 거대한 규모의 공사가 시작된다는 소문은, 시기가 너무 적절하여 단순한 소문인지 아니면 정말인지 좀처럼 분간이 가지 않았다.
물론, 루에르그의 땅은 비좁기 그지 없었고.
해당 공사를 통해 어떠한 사업을 페르젠이 시작할거라 해도, 북부의 깊숙한 곳은 환경과 지리적 특성상 막대한 운송비를 잡아 먹는다.
때문에 아무리 브뤼테인의 이름값을 빌린다 하더라도 성공할 확률은 한없이 0에 수렴하리라.
그러나 그 단점을 상쇄할 만큼의 이윤을 발생시킬 수 있다면?
또, 아폴리온 등급에 도달한 흑마법사의 잠재력은 미지수였다.
그래서 허황된 것 같으면서도, 그러지 않은 것 같아 아스란 백작은 주먹을 움켜쥐었다.
현실을 내다보는 군주보다, 손에 잡힐 듯 잡히지 않을 것 같은 이상을 쫓는 군주 곁에는 항상 수많은 신하들이 몰려든다.
똑똑.
하지만 그 불안감은, 잠시 뒤 자신의 방으로 들어선 뒤 연회에 참석한 귀족들의 명단을 넘겨주는 집사 덕에 순식간에 해소되었다.
‘그러면 그렇지.’
자신의 딸의 생일 연회에 참석한 이들의 총 5명.
그 5명 모두 자신의 주도 하에 오랜 시간 제 1 황자를 지지해왔던 이들이다.
페르젠이 대놓고 제 2 황자를 지지하는 쪽에 섰으니, 똑같이 제 2 황자를 지지해왔던 이들은 발걸음을 돌렸을지 모르겠으나 그 반대편에 놓인 이들은 아니었던 것이다.
‘어수룩하구나. 어수룩해.’
5 : 5 의 비율은 아스란 백작 입장에서도 전혀 손해 볼것이 없는 그림이었다.
솔직히 자신이 페르젠의 입장이었다면 초대장의 갯수를 감추지 않았을까.
그걸 대놓고 5장이 있다고 언급한 시점에서 멍청한건지, 아니면 거짓말조차 못할 정도로 순진한건지.
‘애송아. 정치에 발을 딛기에는…… 10년은 이르다.’
멋깔나게 자라난 자신의 수염을 쓰다듬으며 아스란 백작은 연회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음?”
그러나 자신에게 명단을 전해주고서 내려갔던 집사가, 연회장의 입구에서 다시금 명단을 작성하고 있는 모습을 보고 아스란 백작은 의아함을 품었다.
“설마 5명이 끝이 아니라, 이번 연회에 더 참석한 이가 있는가.”
“아…… 예! 그렇습니다. 그런데……”
“하, 하하하!”
5 : 5 의 비율 조차 아니고.
세대가 바뀌기 전에 벌써 4 : 6 의 비율이라.
무어라 더 할말이 있어 보이는 집사였지만, 아스란 백작은 가볍게 손을 저은 뒤 연회장의 커다란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나 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딛는 순간, 아스란 백작은 모종의 위화감을 느꼈다.
어째서 이리도 떠들썩하지 않고 고요함이 맴도는가.
연회의 흥을 돋구어야 할 음악은 어디로 갔고.
그 감미로운 리듬에 묻어 풍겨야 할 와인의 냄새는 자취를 감춘 건지 맡아지지 않는다.
“왔는가. 백작.”
그리고 머지 않아 그 의문을 해결해주는 목소리에, 아스란 백작은 삐그덕 고개를 돌렸다.
“병상에 누웠다고 들었는데. 잘 회복된 모습을 보니 다행이라는 생각이 드는 군.”
부릅!
그의 눈동자가 커다래진다.
어째서 지금쯤 루에르그에 있어야 할 그가, 지금 이 자리에 앉아 있단 말인가!
“백작도 온 듯 하니, 이만 연회를 시작하지.”
미약한 웃음을 머금고 말하는 페르젠의 목소리가, 만찬이 차려진 고요한 연회장 안에 울려 퍼지자……
♩~
뒤늦게 악단들이 연주를 시작했고.
어느곳에 시선을 두어야 할지 몰라 고개를 숙이고 있던 북부의 귀족들은 페르젠을 따라 함께 나이프와 포크를 쥐어 들었다.
그래, 분명 이 연회의 주인공은 아스란 백작의 딸인데.
정작 그 주인공은 잔뜩 얼굴을 붉힌 채 입술을 까득 깨물고 있었고.
오히려 페르젠이 주인공처럼, 이 성대하게 가꾸어진 연회를 지휘해나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