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37화 (137/260)

< 137화 > EP.137

하아……

조용히 퍼져나가는 자신의 입김을 보며 라우라는 걸음을 옮겼다.

루에르그의 추위는 확실히 옷을 껴입지 않으면 금방이라도 동상에 걸릴 것 같았으나, 말라죽을 더위에도 긴 옷을 입어야 하는 자신의 몸뚱이를 생각하면 차라리 이게 훨씬 나았다.

‘아……’

복도를 거닐기 한참, 저 멀리서 단란히 걸어오는 유리엘과 페르젠을 보고서 라우라는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아, 안녕하세요.”

가까운 거리에서 슬그머니 풍겨오는 비릿한 냄새.

무척이나 옅었지만, 유독 그 냄새는 라우라의 코끝을 간지럽혔다.

아직 해가 중천에 떠있는 시각인데 서로 교접이라도 하고 온 건지.

심심하면 맡게 되는 이 냄새에 라우라는 유페미아, 유리엘, 페르젠이 얼마나 짐승처럼 몸을 섞어대는지 싫어도 어림짐작 할 수 밖에 없게 되었다.

“그래. 내일 출발 시각을 숙지하고 있거라.”

“네.”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을 한 뒤 슬쩍 유리엘과 시선을 마주하는데.

그녀의 눈매가 제법 날카로운 기색을 머금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내가……’

무슨 잘못이라도 했던가?

최근들어 살갑게 자신을 대해주었던 그녀였기에 라우라는 괜히 몸을 움찔하며 안그래도 자그마한 어깨를 움츠렸다.

그렇게 뱀 앞에 놓인 쥐의 심정을 짧게나마 느낀 뒤, 라우라는 쓸데없이 돌아다니지 않기로 마음을 먹고 자신의 방에 틀어 박혔다.

직감적으로 유리엘과 홀로 마주했다가는 좋지 않은 꼴을 볼거라고 느꼈기에.

딸칵.

그러나 침대에 앉아 책을 펴기 무섭게 굳게 닫힌 문의 문고리가 돌아간다.

벌컥.

이윽고 열리는 문 너머, 또각또각 발걸음 소리를 내며 들어서는 건 유리엘.

“……”

이쯤 되니 정말 자신이 의도치 않게 결례를 저지른 게 있나 싶은 라우라였으나, 아무리 생각해도 스스로가 결백하다는 확신은 굳고했기에 뻣뻣이 치켜든 고개를 숙이지 않았다.

안 그래도 매번 저 어린 여인에게 꿀리는 느낌을 받으며 굽신 거려야 하는 게 적잖이 자존심 상하는데.

딸칵!

하지만 유리엘이 아무런 말없이 문을 걸어 잠구고, 특유의 높다란 키로 자신을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리자 라우라는 확고했던 자신의 마음에 순식간에 균열이 가는 걸 느꼈다.

“앙큼한 짓을 했더라?”

게다가 그녀는 그녀 나름대로 확실한 근거를 가지고 있는 듯 했기에, 결국 라우라는 뻣뻣이 치켜든 고개를 밑으로 떨구고 말았다.

그리고 그 모습을 언제나처럼 여전히, 곁에 앉아 있는 새하얀 토끼 인형이 지켜보고 있었다.

* * * * *

“……”

다음 날, 라우라와 단 둘이 마차를 타고서 루에르그를 떠나며 페르젠은 그녀를 쳐다보았다.

아니, 쳐다본다기 보다는.

마주한다는 것이 맞을 것이다.

먼저 뚫어져라 자신에게 시선을 건네오던 건 라우라였으니까.

그리고 그 다홍색 눈동자에 새겨진 억울함은, 역시 유리엘에게 단단히 주의를 받거나 혼이 나지 않았나 싶었다.

“사전에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건 미안하다고 생각을 하나, 명분 마련을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는 걸 너도 알지 않느냐.”

“……”

“한참 일을 진행하고 있는 이 때, 네 괴벽에 먼저 초점을 맞춰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안다.

알고 있다.

그래도 구구절절 옳은 말만 내뱉으며 무어라 한마디라도 하고 싶은 자신의 입을 틀어 막는 그가 어찌이리도 미운지.

자연스레 두 손에 힘을 주며 무언가를 꾸욱 누르는 시늉을 하는 라우라였으나, 이번에는 토끼 인형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걸 눈치 채고 허해진 두 손을 꼬옥 말아쥘 뿐이었다.

‘……쓸모없는 토끼.’

* * * * *

조금씩 추위가 매서워지는 걸 느끼며 페르젠은 마차의 창문을 닫았다.

수많은 새하얀 구름이 떠다니고 있는 하늘 위로 천천히 저무는 노을.

조금 있으면 틀림없이 그녀의 괴벽이 발현하리라.

그것을 라우라 본인도 눈치 채고 있는지, 아까부터 시선이 좀처럼 창밖의 풍경으로부터 떨어지지 않았다.

“……”

그리고 서서히 다가오기 시작하는 8월 7일의 밤을 마주하며, 라우라는 새하얀 입김을 뱉어 마차의 창문에 희미한 얼룩을 새겼다.

전생에서 자신은 괴벽을 극복하지 못했고, 그 저주는 족쇄가 되어 이번 생에서도 자신의 발목을 붙잡고 있다.

이 괴벽은 밤이 찾아와 달이 떠오르는 세상의 순리와도 연관되어 있기에, 이것을 극복하는 건 돌려 말하자면……

세상의 순리를 거슬러야 한다는 게 아닐까.

‘이 세상 어딘가에는…… 밤이 찾아오지 않는 곳이 있다고 하던데.’

전생에서 읽었던 책이라 내용이 가물가물 했으나, 그 책의 저술자는 그것을 백야(白夜)라 불렀던 기억이 난다.

시간적 여유가 생기면 한번 그곳을 수소문하여 찾아가보고 싶었지만, 과연 저 남자가 자신을 따라와주기는 할지.

‘하기야……’

정말 백야가 저무는 곳을 찾고, 그곳에서 괴벽이 발작하지 않는다 해도.

그가 자신을 얌전히 놓아 주기는 할지.

틀림없이 어림도 없다며 자신을 붙잡아 끌고 가지 않을까 싶었다.

로젠베르크는 그 만큼 먹음직스러운 먹이였으니까.

생각해보면 여우를 내쫓기 위해 늑대를 불러온 격이 아닐까도 싶었지만, 이제와서 그런 고민은 하등 의미가 없었기에 라우라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끼익!

“앗……!”

쿵!

갑작스레 멈추어서는 마차에 관성을 이기지 못한 라우라의 몸이 쏠리며 창가에 머리를 찍는다.

“무슨 일이냐.”

그에 몸을 일으킨 페르젠은 마부석에 앉아 있는 마부에게 말을 건넸다.

“……눈이 꽤나 높게 쌓여 있습니다. 제설하지 않는 이상 이대로 지나가기에는 상당한 무리가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런가.”

지금 밖은 눈이 내리고 있었다.

여름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어처구니없는 기상 징후였지만, 애초에 우박이 내리지 않는 게 어딘가 싶을 정도로 이 정도는 북부에서 흔한 일이었다.

벌컥.

때문에 마차에서 내린 페르젠은 자신의 발목이 잠겨 들어가는 눈의 높이에 잠시 눈살을 찌푸리고서는 왼손의 반지, 제단을 쓰다듬어 아공간을 열었다.

“죄송합니다. 결례를 용서해주십시오.”

고작 제설 행위에 전대 가주를 일으켜야 한다는 것이 무척이나 송구스러워 페르젠은 짧게 용서를 구하고는 마력을 방사하여 시신을 사역했다.

저 너머에 어렴풋하게 오늘 머무르려 했던 영지가 보이니 제설 범위가 그렇게 넓지는 않으리라.

때문에 마력을 불로 형질 변환시켜 눈을 녹여 나가던 페르젠은, 아까와 다르게 훨씬 거칠어진 눈보라에 우뚝 걸음을 멈추어섰다.

“……”

뒤늦게 불길한 직감이 드는데.

그 직감이 들기 무섭게 뒤로 고개를 돌리니, 순식간에 강해진 눈보라가 세상을 새하얗게 뒤덮는다.

제설을 한것이 의미가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쌓여가기 시작하는 눈.

게다가 하얀색은 그 특징상 빛을 반사하는 성질이 있기에 페르젠이 바라보는 세상은 어느새 지평선조차 사라진 새하얀 세계가 되었다.

‘큰일이군.’

이른바 백시현상, 화이트 아웃.

제대로 된 방향감각 조차 잡을 수 없는 새하얀 풍경에 페르젠은 형질변환 시킨 불에 고체의 특성을 추가해 자신의 주위에 자그마한 장벽을 만들었다.

화이트 아웃은 그리 오래 지속되지는 않으나, 문제는 밤이 다가오기 직전에 이러한 현상이 발목을 붙잡았다는 것이다.

틀림없이 화이트 아웃이 사라지는 순간 곧바로 라우라의 괴벽이 발현하겠지.

어쩌면 그치기도 전에 마부를 죽이고 마차를 뛰어나와 자취를 감출지도 모를 일이다.

‘어쩔 수 없나.’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고민 끝에 페르젠은 명계의 문을 열었다.

* * * * *

“이런……! 아가씨! 절대 밖으로 나오지 마십시오!”

놀라 날뛰는 말을 진정시키며 느슨해진 옷을 꾸욱 조여 입은 마부는 라우라에게 단단히 주의를 주었다.

하지만 마차 안의 라우라는 마부의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여유 따위는 일절 없었다.

“하아…… 하아……”

귓가로 크게 울려 퍼지는 심장의 고동 소리.

몸의 혈류가 무척이나 빠르게 가속하며 전신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진다.

명백히 이성이 안으로 자취를 감추고 저주에 물든 본능이 밖으로 튀어 나오려는 조짐.

라우라는 이 느낌이 너무나도 싫었다.

마치 바다에 빠져 아득한 심연 속으로 가라앉는 사람이, 투영 되어 들어오는 희미한 빛을 향해 악착같이 발버둥 치는 느낌.

그나마 일대를 뒤덮은 화이트 아웃은 명백한 자연 현상이기에.

일시적으로 튀어 나오려는 본능과 이성이 공존하고 있을 뿐이었다.

‘기다려야…… 하나?’

주르륵 흘러내리는 식은땀이 순식간에 옷자락을 물들인다.

시간 내에 페르젠이 도착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지만, 만약 그러지 않는다면 자신은 마부를 죽이고 이 마차를 탈출해 가까운 영지로 들어가 학살을 저지를 것이다.

바깥의 화이트 아웃이 가능한 오래 지속되면 모르겠으나, 그럴 기미를 보이지 않고 서서히 그치는 기색을 보였기에 라우라는 입술을 질끈 깨물고서는 자신의 제단──로사리오를 마차 안에 내팽겨 친 뒤 벌컥 문을 열었다.

제단 안에서 사역할 시신을 꺼낼 수 없다면, 괴벽에 잠식된 자신이 가까운 영지로 향하는데 성공하더라도 학살을 저지르지는 못하겠지.

휘이잉!

기세가 조금 약해졌다고는 하나, 여전히 강하게 몰아치는 눈보라는 라우라의 자그마한 체구를 휘청이게 만들었다.

사근!

그러나 굴하지 않고 순식간에 쌓여버린 눈밭 위로 걸음을 내딛은 라우라는, 마부석에 앉아 눈보라에 놀라 좀처럼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 말을 다스리고 있는 마부를 보며 고인 침을 꼴깍 삼켰다.

빨리 이 근처를 달아나야만 하는데, 바로 코앞에 살육을 저지를 수 있는 인간이 덩그러니 놓여 있으니 이성과 공존하는 본능이 키득 웃으며 그녀를 붙잡아 두었다.

“아, 아가씨……!”

기어코 인기척을 느낀 마부가 고개를 돌려 라우라를 확인하고서는 기겁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일순간 저리도 아름다운 소녀가 있을까 싶은 생각이 무의식적으로 떠오른다.

그도 그럴 게 특유의 새하얀 백발과 다홍색 눈동자, 창백한 피부는 몰아치는 눈보라와 아우러져 그녀가 마치 동화속에나 나오는 설녀처럼 보이게 만들었기에.

푸르릉……!

동시에 날뛰던 말조차 안정화되자, 마부는 자신이 덮고 있는 모포에 쌓인 눈더미를 탈탈 털어내고 헐레벌떡 마부석에서 내려 라우라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자신과 서서히 가까워지는 마부의 모습을 보며 애써 다리에 힘을 주고 있던 걸 포기하고, 라우라는 특유의 붉은 입술을 요염하게 핥았다.

제대로 힘조차 주기 힘든 가냘픈 몸뚱이지만, 사람의 몸은 너무나도 허무하리만큼 간단히 죽음에 이를 수 있는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

특히나 상대가 자신에 대한 경계도 하고 있지 않다면……

“아가씨!”

이윽고 곁으로 다가온 마부가 라우라에게 모포를 둘러준다.

무척이나 가까운 거리에서 선명히 보이는, 늙은 그의 얼굴에 자글자글한 주름.

갈색이 맴도는 저 눈동자를 파내고, 얼굴 가죽을 한 번 산채로 벗겨버리면 어떤 비명을 지를까 싶은 궁금증이 맴돌아 라우라는 넘쳐흐르는 살육의 욕구를 참기가 힘들었다.

“아, 아가씨……?”

당혹스러울 정도로 자신에게 가까이 달라붙는 라우라를 보며 마부는 말을 더듬었다.

몰아치는 눈보라가 선사하는 추위를 몰아낼 만큼 옷자락 너머로 희미하게 느껴지는 앳된 여인의 부드러운 몸.

정말 동화속의 설녀처럼 자신의 정신을 몽환속으로 빠져들게 만드는 착각이 들어 마부는 자신의 어깨를 타고 올라오는 라우라의 가느다란 손을 보지 못했다.

이내 늙고 추레해진 그의 얼굴에 새겨진 주름을 더듬으며, 특유의 갈색이 맴도는 눈동자에 그녀의 손톱이 파고드려던 찰나……

타악!

기세가 수그러들었다고 한들, 여전히 장막처럼 몰아치는 눈보라를 꿰뚫고 커다란 사내의 손이 그녀의 손목을 붙들었다.

“아윽……!”

그리고는 일말의 배려도 없는 힘을 주어 곁으로 끌어 당기더니, 꺾으면 당장이라도 부러질것 같은 여린 목을 뒤에서 단단히 움켜쥔다.

“켁……!”

“참을 성 없는 아이구나.”

찔끔 눈물이 흘러 나올 만큼 숨통이 막혀 괴로웠으나, 라우라는 오히려 엄청난 안도감을 느꼈다.

땀이 식어 풍기는 진득한 사내의 냄새, 거기에 뒤섞인 고풍스런 향수의 향.

부러질지언정 굽히지 않겠다는 강렬한 신념을 담고 있는 늑대의 목소리.

자그마한 자신의 몸을 간단히 감싸 안아주는 넓고 탄탄한 가슴팍.

그래, 본능적으로 라우라는 이 모든것들의 주인이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불안했더냐.”

짧은 질문을 던져오는 페르젠의 목소리에 라우라는 얼마 남지 않은 이성을 움직여 고개를 끄덕였다.

“걱정하지 마라. 이 세상에 어디에 네가 있던, 다시금 내 곁으로 데려와 줄테니.”

하…… 아하하.

참으로 그다운 발언이라고 생각하며, 라우라는 발버둥치지 않고 자신의 이성을 깊숙이 내려보내주었다.

정말이지.

“듬직한 꼬마로구나……”

“……”

감히 누가 누굴 보고 꼬마라고 칭하는 건지.

어처구니가 없으면서도, 방금 그녀가 말을 더듬지 않았다는 사실에 페르젠은 자그마한 놀람을 머금었다.

하지만 그것에 관해 생각을 할 틈도 없이, 몸을 돌린 라우라가 두 손을 뻗어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이빨을 드러낸다.

그에 페르젠은 여유롭게 그녀의 몸을 들어 올린 뒤, 주먹에 단단히 힘을 주어 자그마한 입안으로 물려다 주고서 멍하니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 마부에게 말했다.

“아침에 만나러 가도록 하마. 이 눈보라가 그치면 저 영지에서 하룻밤 머루르고 있도록.”

이미 괴벽이 발작한 그녀를 데리고 아무런 소동도 없이 타인의 영지에 진입하는 건 불가능에 가까우리라.

어차피 마차에는 아무런 문양도 새겨져 있지 않으니, 마부 혼자 들어 간다 한들 의심하는 사람은 없을 터.

“듣지 못했느냐.”

“아, 아닙니다. 알겠습니다!”

그렇게 뒤늦은 마부의 대답을 듣고, 페르젠은 라우라를 안아든 채 여전히 몰아치고 있는 눈보라의 장막 너머로 걸음을 내딛었다.

직후, 얼마 지나지 않아 지독한 눈보라가 그치고.

다시금 사라졌던 지평선을 드리우며 눈으로 얼룩진 아름다운 북부의 풍경을 드러내지만……

정말 마법보다도 더 마법처럼, 그 어디에도 페르젠과 라우라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전과 후로 나뉘어져 다른 점이 있다면, 저물던 노을은 어디로가고 어두컴컴한 밤이 내려앉아 있다는 거겠지.

그리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린 마부는, 여전히 마차가 나아가기 어려울 만큼 한가득 쌓인 눈을 보며 절망을 머금었다.

푸르릉!

오직 그동안 고생한 말만이, 눈을 핥으며 갈증이 일어나는 목을 축이고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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