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화 > 19
소문이 무성한 북부의 풍경과는 좀처럼 어울리지 않는, 따스한 햇볕이 내려쬐는 자신의 영지를 바라보며 아스란 백작은 다려진 차를 마셨다.
“아버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조급해 할 것 없다.”
눈살을 찌푸리고 있는 제라드를 보며 아스란 백작은 자신의 아들을 달래는 어투로 사근사근 말을 이었다.
“확실히 브뤼테인에서 열리는 경매에 참석할 수 있는 초대장의 값어치는 굉장한 미끼다. 하지만 현재 브뤼테인의 가주가 작정하고 페르젠이라는 애송이를 지원해 북부를 삼키려 했다면 고작 5장의 초대장만 건네주지 않았겠지. 앉을 수 있는 좌석이 한정되어 있는데 모든 북부의 귀족들이 그 애송이 곁에 서겠느냐?”
“그건 알고 있습니다.”
“여기서 더욱 중요한 건, 그 점을 제외하면 그 애송이에게는 아무런 메리트가 없다는 것이다.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 그래. 개인의 전력은 감히 폄하할 수가 없겠으나 루에르그라는 영지를 다스리는 가주의 직책만을 보았을 때 미래의 청사진이 그려지기는 할까.”
물론, 말은 이리 했어도.
중앙으로 이어지는 연줄, 그 중에서도 브뤼테인이라는 이름의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기에 아스란 백작은 속으로 쓴웃음을 지었다.
더군다나 이번에 루에르그로 같이 따라온 한 영애가 로젠베르크의 여식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솔직히 이번 세대에 한해서 북부의 균형이 어느정도 기울거나 비등해지지 않을까라고 아스란 백작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이번 세대에 한정하는 것이다.
자신이 죽고, 페르젠이 죽고.
각자의 자식이 영지를 물려 받게 되는 시기가 다가온다면, 북부에서의 입지는 자연스레 자신들 아스란 가문이 움켜쥘 수 있을 터.
틀림없이 페르젠 쪽으로 슬그머니 붙는 귀족들이 나오겠지만, 그 정도 일탈은 감히 눈감아 주기로 했다.
눈앞의 달콤한 과실조차 건드리지 못하게 압박을 넣기에는 이쪽에서 감당해야 할 리스크가 적지 않아 보였으니까.
‘망할……’
그리고 북부로 올라와 자신의 아버지에게 가르침을 받으며 지내던 제라드는, 자연스레 그 과정에서 내면에 자리잡고 있던 페르젠의 위압감이 희미해졌다.
그래서 그런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느껴져 주먹을 거세게 움켜쥐고는 입술을 짓씹었다.
고작 그러한 사내에게 유리엘을 빼앗기고, 알프레드의 노괴에게 수모를 당했단 말인가.
똑똑.
기이한 방향으로 제라드가 자신의 자존감을 키워나가고 있을 때,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아스란 백작은 들어오라고 짧게 대답했다.
그러자 꾸벅 허리를 숙이며 곁으로 다가선 시녀는 아스란 백작에게 루에르그의 문장이 찍혀있는 서신을 건네주었다.
“허……”
이 시점에서 그 망할 애송이가 무슨 생각으로 자신에게 서신을 보내왔을까.
도저히 예상가는 점이 있지 않아 아스란 백작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봉투를 뜯었다.
그리고 안에 자리 잡고 있는 서신을 꼼꼼히 읽어 내렸을 때, 아스란 백작은 곧바로 꾸깃꾸깃 편지를 짓뭉개버리고서는 근처의 초에 가져다 댄 뒤 깔끔히 불태워버렸다.
움찔!
화르륵 타들어가는 종이가 희미한 탄내와 재를 사방으로 휘날리니 제라드는 일순간 몸을 떨며 자신의 아버지를 쳐다보았다.
“……왜 그러십니까?”
“거인을 등지고 있는 핏덩이 주제에 건방짐이 아주 하늘을 찌르는 구나.”
사실 꼼꼼히 읽을 마음이 없었으나, 필체가 너무나도 더러워 의도치 않게 아스란 백작은 서신의 내용을 파악하기 위해 집중을 해야만 했다.
허면 그렇게 읽어낸 서신의 내용이 값어치가 있었느냐?
당연히 그러지 않았다.
애당초 서신을 쓴 장본인 조차 페르젠이 아니니 아스란 백작은 기가 찰 노릇이었다.
한낱 경비대장이 자신의 생일 연회에 참석을 해달라고 초청을 하는 시대가 왔단 말인가?
특히나 그 시기가 8월 11일로 내정 되어 있는 건, 대놓고 자신들과 힘겨루기를 해보자는 그림으로 비추어졌다.
무려 차기 황후로 내정되어 있는 딸의 생일 연회다.
그러한 자리가 고작 경비대장의 생일 연회에 파묻힌다?
언어도단이요, 어불성설이었다.
문제는 감정이 아닌 이성으로 생각했을 때, 불쾌하다고 무시할 사안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페르젠이 바보가 아니고서야 판을 이런식으로 벌렸다면, 브뤼테인에서 열리는 경매의 초대장을 그 자리에서 뿌리지 않겠나?
‘명성이 자자한 브뤼테인의 핏줄치고는 하는 행동이 정말 추잡스럽고 유치하구나.’
하지만 아스란 백작은 이내 격앙된 감정을 가라앉히고 비릿하게 웃었다.
자신의 체면을 차려주는 선에서 건방지게 굴었다면 모를까.
이런 식으로 상황을 조성하면 중간에 끼이게 된 귀족들이 얼마나 불편한 가시 방석에 앉게 되겠나.
‘그래, 진흙탕 싸움을 해보자면 그러지 못할것도 아니지.’
선택의 무게가 올라가는 만큼 견고한 모래성에 불과한 루에르그에 몸을 의탁하는 이들은 적어지리라.
“나는…… 당분간 몸져 누워야겠구나.”
꾀병이라는 것쯤이야 모두가 알 것이다.
실속은 모종의 압박을 가하는 것이라는 걸 어찌모르겠는가.
본디 이럴 생각이 없었으나, 판돈을 올려 볼테면 올려 보라고 도발한 건 페르젠이라는 애송이었다.
‘아직 어려서 무얼 모르나 본데……’
인간의 수명은 한정되어 있더라도, 권력에는 수명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
그저 변덕스레 섬길 주인을 매번 바꾸어 다닐 뿐이지.
‘길어봤자 50년……’
필멸자에게는 길어도, 역사에서는 개미만큼이나 짧은 시간이다.
앙금을 품지 않기로 했는데.
굳이 그 독이든 성배를 먹고 취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결코 곁에 품지 않으리라.
* * * * *
“딱히 감춰야 할 필요는 없어 보였는데……”
싸늘한 추위가 맴도는 집무실.
의자를 가지고와서 페르젠의 옆에 앉은 유리엘은 넌지시 입을 열었다.
북부에 한정하여 모든 세금을 면제 받는 지역에 관한 말은 쏙 빼먹고 브뤼테인의 이름만을 빌려 일을 진행하고 있는 페르젠은……
솔직히 대외적으로 봤을 때, 가문을 등에 업고 설치는 오만한 애송이로 비추어지고 있으리라.
“별로 체면을 구기는 것도 아니다. 그리고 왜 직접적으로 말하지 않았는지 너라면 알고 있지 않느냐.”
“응……”
페르젠이 2 황자에게 약속 받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로벨리움 왕국에서 에르네스 제국이 지지하는 왕자를 왕위에 올렸을 때 받는 보상이다.
그러니 괜히 사전에 언급을 하여 로벨리움 왕국 내에서 아군을 적으로 만들고 싶지 않은 것이겠지.
현재 바라는 그림을 그리는데 있어서 브뤼테인을 미끼로 내걸기만 해도 충분하기는 했으니까.
“게다가…… 완전히 감추어 둔 것은 아니다.”
현재 루에르그에서 일을 하고 있는 인부들은 중앙에서 계약을 하여 데려온 이들 뿐만 아니라, 다른 북부 영지에 있는 인부들을 데려 왔기도 했다.
때문에 대부분의 완공 작업이 끝나가고 있는 지금, 페르젠은 며칠전에 그들을 각자의 영지로 돌려보낸 상태였다.
가공할 면적의 설계도를 보여주고 이 작업을 할 수 있겠냐는 질문을 마치고서 말이다.
그러니 해당 인부들을 통해 루에르그의 상황을 엿들은 북부 귀족들은 긴가민가하겠지.
그 정도 규모의 공사라면 절대 루에르그 내에서는 진행이 불가능하고, 다른 곳에서 진행을 하자니 북부의 땅은 척박하기 그지 없는 곳이니까.
틀림없이 허세인지 아닌지를 가늠하느라 진땀을 빼고 있을 것이다.
특히 지금쯤이면 서신들도 각자의 영지로 도착했을 테니, 아스란 가문이 모종의 압박을 가하고 있을 터.
“그래서…… 내일부터 출발할 거야?”
“초대장도 받았으니 참석하지 않을 이유는 없겠지.”
페르젠이 바라는 그림은 권력의 독점이 아닌 권력의 분산이었다.
그래야 다시는 북부가 단합하여 어쭙잖게 중앙을 압박하지 못할 테니.
“악질이야……”
그리고 그러한 페르젠의 모습에 유리엘은 괜스레 자신이 뿌듯함을 느꼈다.
젊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지나치게 권력을 탐내지 않는 모습.
더불어 제대로 된 경험이 없을 텐데도 능숙하게 정치를 해나가는 능구렁이 같은 여유.
‘나도…… 힘을 보태야지.’
그 볼품없는 여자, 유페미아와 다르게 자신은 알프레드 가문의 여식이었다.
특히 자신의 할아버지는 진작 북부의 값싼 세금을 노리고 대리 사업을 맡기고 있는 터라 연줄이 닿은 이들이 있었으니…… 구워 삶는 건 크게 어렵지 않으리라.
물론, 페르젠은 알프레드를 끌어들이는 걸 그다지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이 정도는 스스로가 알아서 해결할 수 있는 선이었다.
“아…… 그리고 내일 출발할 때, 라우라를 데려갈 생각이다.”
“왜……?”
싱글싱글 웃다가 뜬금없이 라우라를 언급하는 페르젠의 목소리에 유리엘은 표정을 굳혔다.
솔직히 브뤼테인의 적자인 페르젠이 루에르그를 다스린다는 말만 믿고, 이곳의 영지 마법사가 되기 위하여 견학을 지원했다는 건 좀처럼 믿기 힘든 사실이었으니까.
아니, 그럴 수 있다고는 하지만 페르젠이 갑자기 이런 말을 꺼내니 유리엘은 의구심이 피어올랐다.
“유페미아와 너만 남은 영지에서 혼자 있는 건 많이 힘들다고 하소연을 하더구나.”
“……”
“보아하니 그 이유는 따로 묻지 않아도 짐작가는 것이 있어 보이는데.”
시선을 마주쳐오는 페르젠의 붉은 눈동자를 보며 유리엘은 슬그머니 고개를 돌렸다.
물론, 어느정도 기강 잡기를 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 강도가 그리 강했다고 유리엘은 생각하지 않았다.
실제로 최근들어서는 잘 챙겨주지 않았던가?
애초에 불편했다면 자신에게 이실직고 할 것이지.
‘……’
아니다.
솔직히 알프레드와 로젠베르크의 덩치를 비교했을 때, 그러기에는 무리가 있으리라.
다만, 아무리 그래도 페르젠에게 직접적으로 고자질을 하는 건 많이 괘씸하게 느껴졌다.
‘미안하구나.’
그리고 페르젠은 시시각각 변하는 유리엘의 얼굴을 보고서 라우라에게 속으로 작은 사과를 했다.
출발 시일과 다시금 돌아오는 그녀의 괴벽 주기에 일정을 맞추기 위해서는 아무래도 직접 데려가야만 했는데, 의심을 사지 않기 위해 명분을 만드려면 이럴 수밖에 없었다.
애당초 라우라는 자신에게 따로 언급을 주지 않았지만, 돌아가는 상황상 어렴풋하게 유리엘이 라우라의 기강을 잡고 있다는 걸 눈치채고 멋대로 이용했을 뿐이다.
“선을 넘지는 않았어……”
“너를 나무랄 생각은 아니었다.”
“누가 봐도 혼내는 거면서……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었던 게 당신을 따라온 이유를 좀처럼 믿을 수 없어서야. 병약한 척 앙큼한 짓을 하려는 줄 누가 알겠어.”
“유리엘.”
“그 여자도, 내가 당신 첩실로 들어올 때 반겼어?”
“……”
“아니잖아.”
살포시 페르젠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며 유리엘은 말을 이었다.
“나도 똑같아…… 굴러온 돌의 입장이지만, 당신 곁의 첩실이 더 늘어나는 걸 원하지 않아. 솔직히 이건 그 여자도 반기고 있을 걸. 가문이 빈약하니 손을 쓸 수 없을 뿐이지.”
그렇기에 유리엘은 페르젠에게 사과를 하지 않았다.
자신과 유페미아 사이에 그가 개입하여 조율을 하려는 건 납득할 수 있으나, 그 이상은 욕심이 아닐까.
그리고 단순한 명분 마련을 위해 이야기를 꺼냈던 페르젠은 분위기가 제법 무거워지자 속으로 자그마한 당황을 머금으며 입을 다물었다.
“이 주제로 이야기를 꺼낸 건 당신인데, 분위기가 무거워지니 은근히 싫어하네.”
“……”
태연한 척, 무뚝뚝한 표정을 짓고 있는 페르젠이지만 이제는 유리엘도 상당히 익숙하게 그의 미묘한 심경 변화를 눈치챌 수 있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부부간의 유대감이라는 걸까?
은근히 기쁨이 차올라 유리엘은 빙그레 웃었다.
“분위기를 조금 환기시킬까?”
“……차라도 내오라고 하마.”
손을 뻗어 책상 옆에 놓인 자그마한 종을 쥐어 흔드려는 페르젠.
그 모습을 보며 유리엘은 필요없다는 듯 페르젠의 허벅지를 슬며시 더듬었다.
“나는…… 당신 자지나 핥을래.”
천박한 단어의 사용에 페르젠의 몸이 움찔하고, 날카로운 눈매가 순식간에 일그러진다.
“유리엘. 여기는 집무실이다. 그리고……”
“경박한 말은 하지 말라고?”
“알면서 그러나.”
“당신은 아기가 울면 젖병이나 쪽쪽이를 물리지 않고 말로 달래는 사람을 봤어?”
“네가 아이는 아니지 않나.”
“내 남편한테 어리광이나 응석을 부리고 싶을 때는 아기가 되기도 하는 거지.”
툭.
말을 하다 어느새 능숙하게 손을 움직여 바지춤의 단추를 풀고 끌어내린 유리엘이 고개를 숙인다.
발기하지 않은 자그마한 성기가 왜 이리도 귀여워 보이는지.
한편으로는 이 쪼그마한 것이 그리도 흉물스레 팽창 한다는 게 여러번 경험을 해봤어도 좀처럼 믿기지가 않았다.
할짝.
움찔!
이내 혀를 내밀어 조심스레 귀두를 핥아나가는 유리엘.
그 부드럽고 따뜻한 쾌락에 페르젠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
이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완전히 부풀어 올라 세차게 껄떡 거리는 성기가 자신의 뺨을 툭툭 후려치자, 유리엘은 고개를 밑으로 살짝 내려 고환을 부드럽게 핥아주었다.
약간 페르젠을 애태워 볼 생각이었는데, 코끝으로 스며드는 강렬한 수컷의 냄새는 괜스레 음부가 간질간질해지는 감각을 선사한다.
‘여기에……’
그의 씨가 가득 차있는 것이겠지.
흐물흐물하지 않은 것으로 보아, 아마 자신의 입에 사정을 하는 순간 가득 쏟아져 나오리라.
정액 특유의 비릿한 내음과 좀처럼 목뒤로 넘어가지 않은 끈적거림이 무척이나 불쾌하게 느껴질법도 했으나, 유리엘은 그러지 않았기에 내렸던 고개를 다시금 올려 페르젠의 성기를 입안으로 조심스레 머금고는 천박한 소리를 내며 빨아대기 시작했다.
쫍.
쪼옵……
입안에서 내미는 혀가 요도 부근을 살살 간지럽히며, 기둥 전체를 훑어 올리는 감각은 좀처럼 거부할 수 없는 쾌감을 선사했기에 페르젠의 입에서는 짙은 입김이 새어나왔다.
여름, 심지어 낮.
게다가 집안이었기에 비교적 덜 추운 상태인데 이리도 짙은 입김이 나온다는 건 그가 얼마나 뜨거운 숨결을 뱉어냈는지를 짐작할 수 있게 해주는 대목이었다.
기어코 책상 위, 종 근처에 내려두었던 왼손을 거둔 페르젠은 그것을 회수하여 유리엘의 뒷머리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자 훨씬 더 추잡한 소리를 입밖으로 내뱉는 유리엘의 괴로운 신음이 집무실을 조용히 드리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