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34화 (134/260)

< 134화 > EP.134

하아……

내뱉는 숨을 따라 퍼져나가는 입김.

북부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본디 자신의 보금자리였던 루에르그를 둘러보는 유페미아는 한 동안 어린아이처럼 두 눈을 떼지 못했다.

‘이게 정말……’

자신이 알던 루에르그가 맞는 걸까.

의미가 없을 정도로 낡고 허물어졌던 성벽은 두 배 가까이 높게 치솟아 차디찬 바람으로부터 영지민들을 보호해주고 있었고.

‘저건……’

건설이 진행중이었지만, 틀림없이 눈에 들어오는 용병 협회와 마도 학회의 증표는 자신이 잘못보고 있는 것이 아니리라.

용병 협회는 황실의 승인을 받은 영지만 세울 수 있었으며, 마도 학회는 내부적인 심사를 따로 거쳐야 하는 걸로 알고 있었다.

그리고 이미 완공이 된 상태인 병원을 보고 있자하니 유페미아는 순간 눈물이 치솟을 뻔 했다.

루에르그에서 몸이 아프면 의원이 있는 근처의 다른 영지까지 걸어가야만 하고.

도착한다고 한들, 돈이 없어 진찰을 받지 못하는 이들이 부지기수였다.

그래서 실상은 알아서 상태가 호전 되기를 간절히 기도하는 게 최선이었는데……

물론, 외상을 심하게 입은 경우 특별히 무료로 진찰과 수술을 해주는 경우가 있었지만.

그것은 패러사이트에 잠식된 숙주가 아닌, 정말 살아 있는 인간의 살을 찢고 가를 수 있는 경험을 쌓기 위할 뿐이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오래토록 자리를 비웠는데…… 역시 믿기를 잘했군.”

“과찬이십니다.”

감상에 빠진 유페미아를 뒤로하고, 그 동안 영주 대리인으로서 업무를 도맡아 왔던 집사를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서류 몇장을 건네 받았다.

영지 내의 수입과 지출 적인 측면에서 -500%를 돌파한 부분을 보고 있자하니 기가 차지도 않는다.

그나마 이것은 자신의 논문 수입이 영지에 더해진 시점이었고.

시간을 거슬러 초기로 가면 마이너스 항목의 앞자리가 바뀌었던 터라 페르젠은 고히 서류를 접어 다시금 집사에게 건네주었다.

“그러고 보니 루에르그에는 경비를 맡을 만큼 젊은 남자들이 많이 있지 않을 텐데…… 개설 되어 운영된지 두 달이 넘었구나.”

“주인님께서 고용하셨던 용병들이 루에르그의 영지민으로 편입 되었습니다.”

“……그리 바보들이 아닐 텐데.”

브뤼테인의 적자인 자신이 다스린다고 한들.

여전히 지리적, 그리고 경제적인 위치에서 최악인 곳이 루에르그였다.

흔히 말하는 짬을 상당히 오래 먹은 용병단이기도 했으니, 그 정도 생리를 모를 만큼 어수룩하지는 않을 터.

“매일 매일 일은 하지만 즐길것이 없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술집조차 없고, 창관도 없으니 스트레스가 계속 쌓이고 있었지요. 그래도 영지 내에 젊은 처자들이 좀 있으니 비교적 날씨가 따스해졌을 때 주기적으로 소소한 축제를 열었습니다. 그러니 처자들이 알아서 각자 사내들의 코를 꿰어 가더군요.”

“……”

집사의 말을 듣고 있으니 페르젠은 은연중에 헛웃음이 흘러 나왔다.

그래도 가정이 없는 용병들의 경우, 최종적인 목표는 가정을 이룬 뒤 안정적인 삶을 가지고 안착하는 것이기에 서로가 좋은 게 아닐까.

“그러면 경비대장을 조금 있다 내 집무실로 불러오게. 얼굴은 한번 봐야하지 않겠나.”

“알겠습니다.”

짧은 보고를 마친 뒤, 페르젠은 고개를 돌려 유페미아의 어깨를 짚었다.

여름임에도 상당히 혹독한 추위에 적응하지 못한 라우라와 유리엘은 벌써 안으로 들어갔으니, 이제는 감상에 빠져 있는 그녀를 현실로 불러올 시간이리라.

“들어가지. 루에르그의 추위에 익숙하다고 해도, 너는 지금 홀몸이 아니다.”

“응…… 알았어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겨 자신의 곁에 달라붙어 팔짱을 껴오는 유페미아.

숙이고 있는 고개 밑으로는 훌쩍이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고마워요……”

“그래.”

* * * * *

“……”

페르젠이 고용했던 용병단의 단장이자, 현 경비대의 대장인 로엠은 무척이나 긴장된 기색으로 침을 꿀꺽 삼켰다.

페르젠을 보지 못한 시간은 무척이나 오래되었지만, 역시 뇌리에 남아 있는 그의 모습은 오싹한 오한이 절로 들게 만들었다.

“거참. 긴장 좀 풀고 다리는 그만 떠는 게 어떠하요.”

“망할 놈이 남일이라고……”

“생각을 해보시오. 단장. 우리가 그 동안 이 영지에서 패악질을 부리기라도 했소? 아니면 일을 설렁설렁 했소.”

“……”

“분명 칭찬 해주려 부르는 것일 테니 어깨좀 피시오. 믿고 따르던 단장이 이리도 겁이 많을지는 몰랐소. 설마 잠자리에서도 숫총각처럼 부인께 이리저리 끌려다니는 거요?”

“뭐라고!”

자존심에 한가득 스크래치를 내는 마지막 말에 로엠은 울컥하는 표정을 지었다.

“훨씬 보기 좋구만요. 만약 백작님께서 단장을 혼낸다면 딱 그 표정을 지으시오. 우리도 기꺼이 단장의 힘이 될 테니.”

“……”

“부당한 대우를 받을 만큼 우리가 이 영지에 헌신해온게 아니지 않소.”

“옛날부터 입만 잘 굴려서는……”

“죄다 칼질만 할줄아는데, 나처럼 입만 산놈이 있는게 어떠하다고.”

피식.

한껏 긴장된 분위기가 살포시 풀리자 로엠은 웃으며 심호흡을 한 번 한 뒤, 페르젠이 있는 집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똑똑.

──들어오지.

벌컥.

“시, 실례하겠습니다.”

집무실에 앉아 서류를 읽고 있는 페르젠의 모습은, 역시 과거와 다를 바 없이 절로 고개를 조아리게 만드는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그 동안 해왔던 고생을 전부 전해들었네.”

“고, 고생이라니요…… 다, 당치도 않습니다.”

“일단 그대만 불편한게 아니라면, 현재 경비대장의 직위를 계속 유지시켜볼까 하는데.”

“그, 그래만 주신다면 저야 감사할 따름입니다!”

“목소리는 너무 높이지 말게.”

“죄, 죄송……”

똑똑.

“들어오지.”

개인적인 면담을 나누고 있을 때 들려오는 노크소리.

누구일까 싶어 고개를 들어 문쪽을 주시하는 페르젠은, 처음 간략적인 보고를 마쳤던 집사가 들어서는 걸 확인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전달 드려야 할 것을 잊어버렸기에 긴히……”

곁으로 다가와 허리를 숙이며 품안에서 서신 한장을 건네주는 집사.

그것을 받아든 페르젠은 과연 누가 보낸 걸까 싶었으나, 찍혀 있는 가문의 인장──비상하는 매를 보고 있자하니 고민할 필요도 없어 보였다.

이 서신의 주인은 틀림없이 아스란 백작일 터.

시기를 고려 한다면 자신의 딸의 생일 연회에 초청을 하겠다는 내용이리라.

‘보내오지 않을 줄 알았는데.’

자신이 있다 이건가.

하기야 이 시점에서 자신은 연회를 개최할 마땅한 명분이 없기는 했다.

아스란 백작도 아마 그 점을 고려하여 이런 배짱을 부리는 것일 터.

그러나 페르젠은 애초부터 구색을 맞추어 그와 놀아줄 생각이 없었다.

“음.”

그렇게 상념을 접고 마저 경비대장으로 임명된 로엠의 인적사항을 읽어 나가던 페르젠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그의 생일 항목에 시선을 고정했다.

“8월 11일…… 그대의 생일이군.”

“예, 예……!”

이러한 우연의 일치가 또 있을까.

페르젠은 슬그머니 입꼬리를 말아 올리며 한층 긴장된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로엠을 향해 입을 열었다.

“내 특별히 연회를 열어주도록 하지.”

“그, 그러지 않으셔도……”

“그 간의 고생을 되갚아주는 보답이라고 생각하게.”

“알겠습니다……”

부담스럽지만, 이미 한 번 거절을 했음에도 주려는 선의를 뿌리치는 건 도리어 예의가 아니리라.

“초대장을 작성 해본적은 있나?”

“없습니다. 어차피 참석할 인원도 많지 않고…… 다들 매일 부대끼며 살고 있기에 제가 입으로 전달하면 됩니다.”

“귀중한 손님들을 모셔야 하네.”

“예?”

귀중한 손님?

고작 경비대장에 불과한 자신의 생일에 초청할 귀중한 손님들이라고 해봤자……

‘백작님의 부인들이신가?’

짧은 시간 아무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마땅히 떠오르는 것은 그뿐.

하지만 무슨 이득을 볼 게 있다고 평민에 불과한 자신의 생일에 영주의 부인들이 참석을 한단 말인가.

아니, 애당초 경비대장인 자신의 생일에 영주의 부인을 초청하기 위해 초대장을 쓰는 그림부터가 우습기 그지 없는 일이었다.

“작성해야 할 초대장이 좀 많을 것이야. 경험이 없다고 했으니 기본적인 양식에 관해서는 집사인 세바스에게 도움을 받게.”

“알겠습니다……”

묻고 싶은 것이 많았으나, 그대로 페르젠이 축객령을 내렸기에 로엠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으며 잠시 뒤 오래 얼굴을 봐왔던 세바스에게로 찾아갔다.

“오셨군요.”

“예. 백작님이 무슨 초대장을 작성하는데 있어서 도움을 받으라 하셔가지고……”

“앉으십시오. 기본적인 양식을 가르쳐드리겠습니다.”

“제가 대충 글은 읽을 줄 알지만…… 이게 또 쓰는 것은 많이 서투릅니다.”

“오히려 좋습니다.”

“……”

페르젠도 그러하고.

집사인 세바스도 그러하고.

좀처럼 갈피를 잡을 수 없는 두 사람의 반응에 로엠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의자에 앉아 깃털펜을 쥐었다.

“자. 일단 초대장을 작성해야 할 11명의 명단입니다.”

11명?

더럽게 많다고 생각하며 세바스에게 전해 받은 명단을 쥐어든 로엠은 시선을 내렸다.

“?”

잘못 봤나?

아니다.

몇 번을 반복해서 읽어 보아도, 이 11명의 명단은……

“이, 이거…… 루에르그를 제외한 현재 북부의 가주들 이름이 아닙니까?”

“맞습니다.”

“아, 아니!”

“로엠, 당신은 지금부터 11개의 가문에 속한 가주들에게 초대장을 직접 작성하는 것입니다.”

“내용은 제 생일 축하에 참석을 해달라는 것이고?”

“예.”

“하, 하하하……”

루에르그의 추위에는 많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로엠은 순식간에 거시기가 콩알만한 수준으로 쪼그라드는 것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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