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3화 > EP.133
로베론 남작의 집무실을 완벽한 대칭으로 맞춘 페르젠은, 몰려오는 더위를 느끼며 복도로 걸어나왔다.
그리고는 낯선 저택의 구조를 살펴 식당으로 들어서자……
“유리엘은 어디에 있지.”
모두가 모여 있지만, 오직 한 명.
유리엘이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서는 의아한 표정으로 물었다.
이러면 인원도 홀수고, 식사를 하는 동안 수저와 나이프를 드는 손의 대칭을 맞기도 어려워 적잖은 고역을 감내해야 할 것이다.
“치, 침실에…… 의, 의원 분이랑……”
남작, 남작 부인, 유페미아 또한 정확히 유리엘의 자취를 모르는 상황이라 대답을 해줄 수 없었으나.
라우라는 그러지 않았기에 넌지시 페르젠에게 유리엘의 상황과 그녀의 거취를 알려주었다.
“몸이 아픈가.”
“……”
되묻는 페르젠의 말에 라우라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침묵으로 응수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돌아가는 상황을 어렴풋하게 눈치 챈 페르젠은 슬그머니 유페미아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페르젠의 그 시선에 서글프게 웃는 유페미아는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인다.
페르젠이 유리엘에게 관심을 보여서?
아니었다.
정확히는 아픈 사람에게 관심을 보일 때 조차, 자신을 신경써주는 그의 모습이…… 내심 그 동안 얼마나 신경을 쓰이게 만들고 욕심을 부렸는지 은연중에 느끼게 되어서다.
분명 그에게 어울리는 좋은 아내가 되어주겠다고 다짐했었는데.
역시, 자신은 그럴 그릇이 되지 못하는 걸까.
이윽고 남작과 그의 부인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일말의 양해조차 구하지 않고 식당을 나와 버린 페르젠은 유리엘이 있을 침실로 걸음을 내딛었다.
……자신의 관심을 얻기 위해 꾀병 같은 걸 부릴 여자가 아니니, 자연스레 내딛는 걸음의 속도가 빨라진다.
똑똑.
숨을 가다듬고 노크를 하니, 열리는 문 너머로 제일 먼저 자신을 맞이하는 건 유페미아를 위해 북부까지 데려왔던 의원.
“어, 어서오세요.”
꾸벅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하는 그녀를 뒤로하고, 페르젠은 침상에 누워 있는 유리엘의 상태를 눈짓으로 살폈다.
“말해라. 유리엘은 지금 어떠하지.”
“누적된 피로로 인해 가벼운 몸살이 와 계십니다. 단지, 달거리 시기와 맞물려 조금 힘들어하시는 터라 진통제를 처방해드렸어요.”
“……그게 전부인가.”
“네. 무슨 경중이 있거나 그러시지는 않으세요.”
한시름 놓을 수 있는 의원의 대답에 페르젠은 옅은 한숨을 내뱉고는 그녀를 밖으로 내보냈다.
타악.
곧이어 닫히는 문을 뒤로하고, 유리엘에게 가까이 다가간 페르젠은 침대에 걸터앉아 병약한 기색으로 누워있는 유리엘을 내려다보았다.
……그녀에게 무슨 말을 해줘야 할까.
얼마나 임신을 하고 싶어하고, 또 갈망했는지를 페르젠은 잘 알고 있었기에.
좀처럼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시간이 해결해줄 거라느니, 원래 임신이라는 것이 사람 마음대로 잘 되는 게 아니라느니.
뻔하디 뻔한 위로를 늘어 놓아봤자 하등 의미가 없겠지.
애당초 자신은 유페미아를 곁에 옭아매기 위해.
유리엘은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임신을 하나의 수단으로 밖에 여기지 않았으니까.
“가벼운 식사라도 하겠느냐. 시녀에게 말을 해두겠다.”
“아니……”
고개를 가로저으며 대답하는 유리엘의 목소리에는 옅은 슬픔이 배여 나왔다.
생각해보면 이토록 약해진 그녀의 모습은, 데리러 가던 그 날 이후로는 참으로 오랜만이라고 생각하며 페르젠은 손을 뻗었다.
“아직은 일이 많다. 그렇기도 하여…… 나는 당장 아이를 바라지 않아.”
머리카락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는 손길을 따라 귓가에 들리는 페르젠의 목소리가 오래토록 메아리친다.
일이 많으니, 당장 아이를 바라지 않는 그 말이 진심이라면.
“왜…… 어째서……”
그 여자는 당신의 아이를 품고 있는 거야.
오열하기 직전의 울상을 지으며, 유리엘은 페르젠을 올려다보았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로벨리움 왕국에 들어서는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그에게는 적이 생기게 될 테고.
지켜야 할 자식은 약점이 되어 행동에 제약을 걸게 되리라.
하지만 그것을 고려했다면, 그 여자 또한 당신의 자식을 가져서는 안되었던 게 아닌가.
“……”
그래, 페르젠의 말은 진심이었다.
하나의 가식조차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그 진심은 유리엘에게 위선으로 밖에 닿을 수가 없는 것.
“욕심이라는 걸 알아……”
“……”
“아는데, 알고는 있는데…… 내가 조급해한다는 것도 아는데……”
그래도.
나와, 내가 품을 당신의 아이가.
당신이 지켜야 할 심장이 되어, 당신의 발을 붙잡았으면 좋겠어.
……또, 첩실이니 정실이니 그런 호칭 따위는 아무런 필요가 없도록.
그저 당신 아이의 어머니라고 불리우고 싶었어.
툭.
기어코 흘러내리는 눈물이 유리엘의 뺨을 타고 천천히 흘러내린다.
그 모습을 보며 머리카락을 쓸어내리던 손을 멈춘 페르젠은, 한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다가 그녀의 곁에 누워 부드러운 몸을 상냥하게 끌어 안았다.
“아직 반년도 지나지 않았다.”
“흐…… 끄흑……!”
“내가 좋아하는 책, 좋아하는 음식, 좋아하는 연극 등…… 모든 관심사가 너와 이어져 있지.”
하지만 그것을 함께 보낸 적은 없었다.
그러니……
“연극을 보고, 책을 읽고 함께 감상을 나누어 보도록 하지 않겠느냐.”
또.
“맛있는 음식을 먹으며 하루를 보내지 않겠느냐.”
그리고.
“원소 마도학의 이론에 관하여, 가끔은 밤을 지새울 만큼 깊은 토론도 나누어 보도록 하자꾸나.”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서는.
이것들을 좀처럼 즐길 수가 없으니.
네 남편이지만, 아직은 네 남자로서.
내 아내이지만, 아직은 내 여인으로서.
부부이지만, 연인으로서.
서로가 욕심 부릴 수 있는 행복을 먼저 누리는 게 어떠하냐고.
그리 유리엘의 귓가에 달콤하게 속삭이며, 페르젠은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등을 자상히 토닥여주었다.
“흐…… 흑…… 흐아아앙!”
그러자 페르젠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고, 그의 옷자락을 꾸욱 붙든 유리엘은 응어리진 애한을 모두 쏟아내듯 애처롭게 울음을 토해냈다.
자신의 어리광을 받아주는 이 넓디 넓고, 탄탄한 가슴팍이 오늘 따라 왜 이리도 따스한지.
꾸물꾸물, 더는 들어 갈 곳이 없음에도 그의 품에 아이처럼 달라 붙은 유리엘은 페르젠을 향해 한 마디를 끊임없이 되풀이했다.
“좋아해, 좋아해…… 좋아해……”
시작은 조각된 마음이었으나.
그것이 진심을 품게 된다면, 어찌 허상이라 할 수 있을까.
“많이…… 좋아해……”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래.”
나도.
“너를…… 사랑한다.”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 * * * *
“그런가요.”
은은한 젖냄새가 퍼져나가는 방 안.
홀로 침실에 앉아 있는 유페미아는 의원에게 대략적인 상황을 전해 듣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달거리를 시작하게 된 유리엘.
솔직히 가식을 떨지 않고 말한다면, 개인적으로 은은히 차오르는 기쁨을 외면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여인된 입장에서 그녀를 바라본다면, 조금은 측은한 마음이 들기도 한다.
자신과 비교했을 때, 모든 것을 가진 여인이 유일하게 악착같이 갈구하던 것이었으니까.
물론, 그러한 여인이 시간이 해결 해줄 순리에 조급함을 느껴 자신에게 열등감을 느끼는 게 우스워보이긴 했다.
자신은 시간이라는 재화를 소모해도, 그녀가 가지고 있는 것을 손에 넣을 도리가 없는데.
그렇게 가진 자가 더하다 싶은 유리엘에게 질척한 감정을 품으면서도, 동시에 연민을 느끼던 유페미아는 쓰게 웃었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아름다워진다.
그 말은 아마 틀리진 않았을 것이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세상에서 가장 추악하고 더러운 존재가 되니.
그것을 가리기 위해 더더욱 아름다운 꽃을 피워야 하지 않겠나.
그러니 그런 식으로 가려진 가시가, 결코 페르젠을 찌르지 않도록 하는 것이 현재 할 수 있는 최선이리라.
* * * * *
북부에서 처음 맞이하는 아침.
눈을 뜬 유리엘은 눈가가 팅팅 부어오른 것이 느껴져 자신도 모르게 미약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곁에서 잠을 자고 있는 페르젠이 깨지 않도록 조심스레 몸을 일으키고는,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그의 얼굴을 내려다본다.
아직도 눈을 감고 귀울이면 사랑한다고 속삭여주던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듯 했다.
……부부이기 이전에, 연인으로서의 시간을 먼저 가지자고 했던 페르젠.
고압적이고 무뚝뚝한 이 남자의 입에서 나온것이라고는 믿기 힘들 만큼 로맨틱한 그 말이 몹시도 간지러워 유리엘은 얼굴을 붉혔다.
그 동안의 조급함이 다가오는 봄에 녹아내리는 눈처럼 말끔히 사라지는 기분이 든다.
앞으로는 조금 여유를 가지는 것도 좋을 듯 싶었다.
고작 사랑한다는 그 한 마디에 한 여름밤의 꿈처럼 품고 있던 애한이 모두 자취를 감추어버리다니, 유리엘은 그저 신기하기만 했다.
아니, 결코 고작이 아니겠지.
왜냐하면 어딘가 부족하고, 어딘가 모자라게 살아가는 필멸적 존재인 인간이 삶이라는 불확실성의 연속 속에서 유일하게 확신을 가지는 건.
언젠가 자신이 죽을 것이라는 운명과, 누군가를 사랑한다는 것을 깨닫는 순간뿐일 테니까.
“사랑해……”
미약한 목소리로 읊조리는 유리엘의 목소리에는 그윽한 애정이 담겨 있었다.
불어오는 북부의 아침 바람이, 오늘 따라 무척이나 따스하게 느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