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32화 (132/260)

< 132화 > EP.132

슬그머니, 로베론 남작 부인이 다려준 차를 마시며 라우라는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이 조촐한 티타임에 유페미아는 없었다.

몸이 피곤하다는 이유로 빠진 것인데, 그것이 거짓말은 아니겠지만 본질적인 이유는 타인에게 계속해서 은은한 젖냄새를 풍기기 싫었던 것일터.

‘오히려 잘 되었지.’

한 자리에 유페미아가 없다면 유리엘의 심기는 한층 누그러드리리라.

그리고 라우라와 동일하게 남작 부인이 대접해준 차를 마시며 따스하게 몸을 데우던 유리엘은 피로함에 입가를 가리고 작게 하품을 했다.

오래토록 마차를 타고 이동했으니 그간 쌓인 여독이 얼마나 크겠는가.

몸살이 오려는 건지 온 몸이 뻐근했고, 특히나 결리는 어깨가 오늘 따라 팔조차 제대로 가누기 힘겹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리엘은 의외로 그것들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있는 중이었다.

왜냐하면 이건 꼭 몸이 피로해서만이 아니라, 임신 극초기에 나타나는 현상의 일부 이기도 했으니까.

‘벌써……’

7월의 끝자락.

그럼에도 불구하고 달거리는 오지 않은 상태.

분명, 틀림없이.

그의, 페르젠의 아이를 태내에 품게 된 것이리라.

생각해보니 평소와 다르게 아랫배가 살짝 무겁고, 불룩 튀어나온 느낌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그에 유리엘은 한손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덮고서는 홀짝홀짝 따뜻한 차를 마셔 나갔다.

정말 임신이 맞다고 한들, 극초기라 할 수 있는 지금은 절대 체감할 수 있을리가 없을 진데.

벌써부터 그녀는 모성애가 넘치는 어머니의 자애로움을 은연중에 묻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영향을 가장 크게 받고 있는 사람은 당연하게도 라우라였다.

“가, 감사합니다……”

입가에 살짣 묻은 과즙을 손수건으로 닦아주는 유리엘.

그 상냥함이 부담스럽기만한 라우라는 애써 난처함을 숨기고는 미소지었다.

페르젠도 자신을 아이 취급을 하나, 정확히 따지자면 그것은 주인이 노예를 관리하는 격이지만……

유리엘은 정말로 자신을 미숙아 취급을 하며 모성애를 풀어낼 인형으로 삼고 있는 것 같아 적잖은 불쾌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로젠베르크라는 가문과 알프레드라는 가문의 차이는 메꿀수 없는 벽이 존재했기에.

라우라는 이 시답잖은 소꿉놀이를 차마 거부하지 못했다.

그녀가 정말 임신을 했든, 아니면 하지 않았든.

토끼 인형 신세는 벗어날 수가 없는 것이리라.

‘사내의 씨를 받아 자식을 낳는 게 그리도 행복한 일인가.’

제노바 가문에 내려오는 저주를 알게 되고, 또 오랜 세월 그것을 앓아왔던 라우라이기에.

그녀는 좀처럼 유리엘의 심경 변화에 커다란 공감을 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자신에게 있어서 사내의 씨를 받아 자식을 낳는 건, 저주를 되물려주는 죄악을 범하는 것이었으니.

그렇게 곁에서 이야기를 나누며 유의깊게 라우라와 유리엘의 관계를 살피던 로베론 남작 부인은 옅은 아쉬움을 머금었다.

‘내 아들이 약혼만 하지 않았더라면……’

물론, 문화와 예술의 성지라 할 수 있는 로젠베르크와 자신들 가문은 격이 맞지 않는다.

그래도 천성적으로 몸이 허약하니, 아이를 낳기도 힘들 것이고 유산 가능성도 높을 터.

심지어 말까지 더듬는 아가씨이니, 로젠베르크라는 성이 아까우리만큼 흠집이 많은 편이었다.

그렇다면 넘보지 못할 것도 없지 않겠나.

삼켰을 때 쓴맛이 없는 건 아니겠지만,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인 유리엘과 브뤼테인의 적자인 페르젠하고도 인연이 깊은 듯 하니 그것을 덮고도 남을 달콤함이 퍼져나가리라.

당장은 그럴 여력이 되지 않으니 의미없는 미련만이 남아 발목을 붙잡을 뿐.

똑똑.

“……이야기가 끝났나 보네요.”

문밖에서 들려오는, 한적한 분위기를 깨트리는 노크소리.

벌컥.

문을 열며 모습을 드러내는 건 상당히 기쁜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로베론 남작의 모습이었다.

어찌보면 오두방정을 떤다고 할 수 있는 그 모습에 로베론 남작의 부인은 부끄러움이 밀려왔으나, 내심 어떤 대화가 오고갔을지 너무나도 기대가 되었다.

“대화는 전부 끝났습니다. 백작님께서는 잠시 생각하실 것이 있다고 하여 집무실에 남아 계시나, 곧 나오실듯 하니 미리 식당으로 함께 이동하지요.”

“알겠어요.”

로베론 남작의 말을 듣고 찻잔을 내려둔 유리엘은 라우라와 함께 몸을 일으켰다.

그 모습을 보고 자신의 남편 곁으로 다가가려 했던 남작 부인은 잊은게 있다 싶어 유리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루에르그 아가씨에게는 제가 시녀를 보내두도록 하겠습니다.”

유페미아를 부르는 호칭에 무척이나 신경을 쓰며 조심조심 말을 내뱉는 남작 부인.

그리고 그런 식으로 자신의 심기를 거스르려 하지 않는 모습이 마음에 들어 유리엘은 옅게 웃으며 대답했다.

“음, 괜찮아요. 제가 가서 말을 전할테니 부인은 먼저 이동해 계세요.”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럼…… 여보.”

”알겠소.”

평소 나누던 어투로 자신의 부인과 말을 섞으며 방을 나가는 로베론 남작.

그렇게 라우라와 단둘이 남은 유리엘은 유페미아가 현재 머무르고 있을 방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으, 음……”

복도의 찬바람을 맞게 되어서 일까.

걸을 때 마다 아려오는 몸살의 기운에 유리엘은 자신도 모르게 자그마한 신음을 입밖으로 흘려보냈다.

“의, 의원에게 마, 말을 하시고…… 쉬, 쉬시는게……”

“……”

흘러가는 상황상 전혀 이상하지 않은 라우라의 말이었으나, 유리엘은 넌지시 미간을 찌푸리며 입을 닫았다.

현재 유페미아 곁에는 수도에서부터 데려온 솜씨좋은 의원이 붙어 있었고, 그 의원에게 진찰을 받는 게 가장 좋다는 걸 유리엘이라고 모르겠는가.

단지, 그 진찰 도중 혹여나 현재의 이 몸상태가 임신으로 인한 영향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래, 유리엘은 상당히 슬플 것 같았다.

아이를 가져본적이 없으니, 잃어 본다는 슬픔을 알지 못하지만.

아이를 가지고 싶은 마음이 가득한 상태에서, 아이를 가지지 못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그것이 아이를 잃게 된 슬픔과 어찌 다르다고 할 수 있으랴.

“……”

뒤늦게 라우라 또한 자신이 무언가 실수를 했나 싶어 조용히 그녀의 눈치를 살피며 품안의 토끼 인형을 꾸욱 끌어 안았다.

또각.

그리 잠시 뒤, 먼저 걸음을 내딛는 유리엘의 뒤를 조심스레 따라 걷는 라우라이지만……

흠칫.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을 떨며 걸음을 멈춰섰다.

복도로 스며드는 희미한 달빛 아래로 잠깐 동안 비추어졌던 선홍색의 피.

‘내가……’

헛것을 본 걸까.

아니, 헛것을 봤다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선명하지 않았나.

특히 유리엘의 몸에서 꽤나 짙게 풍기는 향수 냄새에 뒤섞인 이 비릿함은, 결코 헷갈릴 수가 없는 피의 내음이다.

또각.

또각.

하지만 아무런 위화감없이 걸음을 내딛고 있는 유리엘의 뒷모습을 보고 있자하니, 라우라는 자신의 판단에 좀처럼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리고 그 판단이 결코 잘못된 것이 아니었다는 걸 알려주듯.

잠시 구름에 가려졌던 달이 모습을 드러내고, 은은한 빛을 다시금 드리우며 유리엘을 비추자……

“……”

라우라는 확연히 볼 수 있었다.

그녀의 새하얀 다리를 타고서 흘러내리는 붉디 붉은 피를.

또각……

동시에 유리엘 또한 걸음을 멈추어 서더니, 자신의 가슴 부근을 부여잡고 벽쪽에 몸을 기댄다.

“아, 으……”

스며드는 익숙함.

특유의 커다란 가슴에서 올라오는 통증은 그녀가 지금 상당한 젖몸살을 앓고 있다는 걸 알려주었고.

평소의 달거리와 다르게, 이번에는 적잖은 통증을 유발하는 아랫배 때문에 주저 앉다시피한 유리엘은 입고 있는 속옷이 질척하게 젖어들어 착 달라붙는 촉감에 일순간 복받치려는 울컥함을 참기 위해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가렴.”

“……”

가만히 멈춰서있는 자신에게 짧은 한 마디를 내뱉는 유리엘.

이럴게 아니라 당장 방으로 간 뒤 휴식을 취하며 의원을 불러야 하는 게 아닐까 싶었으나, 라우라는 유리엘의 말대로 멈춰서있는 걸음을 내딛어 조용히 곁을 지나쳤다.

자신으로서는 공감할 수 없는 정신적 아픔이다.

그러니 어쭙잖은 위선의 마음으로 위로의 손길을 건네봤자 악효과만 날 터.

실제로 다른 누군가가 만월의 괴벽을 앓고 있는 자신을 이해한다는 어투로 위로를 전해온다면 역겨움만 치솟지 않겠나.

때문에 힐끔, 고개를 푹 숙인채로 주저 앉아 있는 유리엘을 보고서 라우라는 유페미아의 침실로 걸음을 내딛었다.

* * * * *

……어느정도 염두에 두고 있던 결과이기는 했다.

쌓이고 쌓인 여독으로 인한 피로 때문에 달거리가 멎은 걸 수도 있다고.

하지만 애써 외면하고 있던 것을 이리도 갑작스레 마주해버리니, 유리엘은 당황스럽기 이전에 지독한 슬픔이 밀려들었다.

물론, 알고는 있었다.

아이는 가지고 싶다고 해서 덜컥 생기지 않는다는 걸.

페르젠에게는 문제가 없어 보였고.

분명, 자신에게도 커다란 문제는 없으리라.

그러하다면 시간이라는 순리 앞에 모든 것이 자연히 해결 되겠지만, 애당초 인간이라는 족속들은 언제나 정해져 있는 순리조차 갈망해오지 않았던가.

타인이 자신을 페르젠의 아내로서, 정실로 받아들이고 있다 하여도.

실상은 첩실에 불과했다.

이토록 대외적인 인정과 시선에 은근히 집착을 하는 건, 질투심에 뒤섞인 지나친 자격지심 때문일 터.

하지만 그 누구도, 감히 한 아이의 어머니를 부를 때 정실이나 첩실이라는 호칭을 가져다 붙이진 않는다.

그래, 그래서.

또, 그렇기에.

‘나는……’

당신 아이의 어머니가 되고 싶었어.

“흐, 끄흡……!”

억세게 깨물고 있는 입술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오는 울음소리가 고요한 복도를 물들였고.

떨어져 내리는 눈물은 차디찬 공기와 만나 새하얀 서리가 되었다.

그리고 여기, 한 아이의 어머니가 되지 못한 여인의 슬픔이 머무를 곳을 찾지 못한 채 외로운 미아가 되어 홀로 맴돌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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