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1화 > EP.131
수도에서 출발한지 어느덧 20일이 훌쩍 넘어가던 때, 페르젠은 창문 밖으로 슬며시 변해가는 풍경과 한 눈에 들어오는 커다란 성벽을 확인했다.
저 영지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유추할 필요가 없으리라.
성벽의 꼭대기에 꽂혀 휘날리는 매의 깃발은, 현 북부의 수장──아스란 가문의 영역임을 알려주고 있었으니까.
“통과한 뒤에 쭈욱 나아가도록. 이 영지는 그대로 지나칠 것이다.”
“알겠습니다.”
마부에게 의견을 전달한 뒤 페르젠은 편히 등을 기댔다.
“……말로만 듣던 곳 치고는, 상당히 살만해 보이네.”
“살만한 곳에 살고 있는 것이니까.”
북부는 넓다.
하지만 좁았다.
면적의 크기는 어마어마했지만, 제대로 된 터전은 얼마 되지 않는 장소.
그러한 곳에 루에르그를 포함하여 총 12가문이 존재하고 있으니, 어찌 고이고 고인 썩은물이 되지 않을까.
호랑이가 없는 굴에서 여우가 왕이 되는 곳.
작금의 북부를 정확히 비유하자면 그럴 수 있겠지.
“유페미아. 몸은 괜찮나.”
“응. 아무렇지도 않아요.”
나름 배려하면서 속도를 올렸기는 했으나, 고된 마차 생활에 그녀의 몸이 덧나는 게 아닐까 싶었는데.
혈색은 좋아 보였다.
‘나름 들뜬 것 같기도 하고, 오랜만에 루에르그로 돌아가는 것이니 기쁜 건가.’
떠나간 시간이 상당히 길었으니, 바뀌어져 있는 루에르그의 광경을 보면 상당히 놀랄 테지.
자신이나 그녀나 주기적으로 루에르그의 상황을 서신으로 보고 받기는 했지만, 읽는 것과 보는 것의 차이는 어마어마 했으니까.
‘이제……’
반면, 유페미아가 기뻐하는 이유는 페르젠의 추측과 달랐다.
물론, 오랜만에 루에르그에 발을 내딛는 것에 대한 막연한 기대와 기쁨도 있기는 했으나.
조금더 그녀가 느끼는 즐거움의 본질적인 근원은, 드디어 12주차에 들어서면서 그와 몸을 섞어도 괜찮다는 것이다.
과격한 섹스는 여전히 기피해야하지만, 한 몸이 될 수 있다는 것 자체가 어디인가.
……그 기쁨 속에서 내심 걱정되는 점이 있다면.
이제 7월이 끝나가는데도, 유리엘이 달거리를 하지 않았다는 것.
마차를 통한 이동이 꽤나 힘들기도 했으니, 제대로 된 여독을 풀 때 갑자기 달거리가 시작 될 수도 있으나.
혹시 그녀가 임신을 한 건 아닐까하고, 유페미아는 은연중에 그녀를 평소보다 더욱 경계하고 있었다.
“아스란 가문에서 의외로 아무런 반응도 없네.”
들어선지 10분도 되지 않아 유유히 영지를 빠져나가고 있는데.
아스란 가문은 기이하리만큼 조용했다.
그리고 그 기이함을 페르젠은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어차피 당장은 무슨 일이 터지지는 않을 테니까.
‘8월 11일……’
황비가 되는 것이 확실히 내정된, 아스란 가문의 영애의 생일날.
그 기한에 맞추고, 또 사전 준비를 하기 위해 페르젠은 서둘러 북부로 올라온 것이다.
‘제라드.’
그 때 내게 만찬을 대접하고 싶다던 그 말을.
어떤 의도가 되었든.
어떤 그림이 되었든.
비로소 지킬 수가 있겠구나.
여름임에도 선선하게 불어오는 북부의 차디찬 바람이 마차 안을 휘저으며 지나간다.
그 상쾌함에 페르젠은 입꼬리를 슬쩍 말아 올렸다.
* * * * *
슬슬 해가 저물기 시작한다.
겉으로 피로를 드러내지 않았던 유페미아, 유리엘, 라우라 또한.
당초 목적지라 할 수 있던 북부에 입성하고 나니 긴장이 풀린건지, 온 몸에서 피어오르는 피로함에 창가에 머리를 대고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각자가 그러고 있으니 대칭을 위해 페르젠 또한 자신의 창가에 머리를 맞대고서는 바깥의 풍경을 바라보다……
‘도착했군.’
오늘 밤 머무를 곳으로 예정하고 있던, 로베론 남작의 영지를 확인하고서는 가볍게 창가를 두드린다.
그 소리에 하나둘 자세를 바로 잡으며 졸린 두 눈을 끔뻑이는 여인들.
"다 왔으니, 내릴 준비를 하지."
간단한 검문을 마치고 로베론 남작의 영지로 들어선 페르젠은, 곧장 그가 머무르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고.
마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서니, 긴장이 역력한 표정으로 어색하게 미소를 지으며 환대 해주는 로베론 남작이 보인다.
과거, 저 뒤편에 놓여 있던 한 쌍의 꽃병을 던져 부수었던걸로 기억하는데.
지금은 다른 걸로 교체되어 있다.
당시 브뤼테인 가문 앞으로 요금을 청구하라고는 했었는데, 과연 하기는 했을까.
그리고 페르젠의 그 추측대로, 로베론 남작은 요금을 청구하지 않았다.
감히 브뤼테인 가문에 그런 시도를 할 수 있는 깜냥도 없었거니와.
귀족들의 사치품이라는 기준에서 보자면 가격이 그리 비싼건 아니었기에, 혹시나 쫌생이라는 수식어가 뒤따라 다니지 않을까 싶었기 때문이다.
……물론, 귀족들의 사치품이라는 기준에서야 헐값이었지.
로베론 남작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커다란 거금이었다.
“장소를 조금 옮길까. 단 둘이 이야기를 나누고 싶군.”
“그러면 부인들과 따라오신 아름다운 영애는 제가 모시도록 할게요.”
남작 옆에서 맡겨달라는 듯 우아하게 허리를 숙이는 부인.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래 걸리지는 않을 것이다. 금방 끝내고 나올테니 그 때 저녁을 먹도록 하지.”
“……다녀와요.”
“기다리고 있을게.”
그렇게 로베론 남작의 집무실로 들어선 페르젠은, 누추한 광경을 스윽 훑어보고서는 근처의 의자에 앉아 그가 건네주는 담요를 무릎에 덮었다.
나름 북부 깊숙한 곳으로 들어와서 그런지, 초입 때와 비교도 되지 않을 만큼 선선한 기운이 방안에 맴돌고 있었다.
그나마 여름이라 이 정도지, 겨울이었다면 담요 하나로는 어림도 없었으리라.
“남작.”
“예, 예……!”
“그대는 분명 제 2 황자 전하를 지지하고 있었지.”
“명목상으로는 그렇습니다.”
누가 누구를 지지할 것인가에 대한 것은 애당초 아스란 가문이 점지해준 것이니.
로베론 남작은 그것을 고려해 올바르게 말한 것이었다.
그리고 페르젠은 그의 솔직한 태도가 제법 마음에 들었다.
“그 당시 내가 깨트렸던 꽃병…… 요금을 청구하기는 했었나.”
“……아니요. 그러지는 않았습니다.”
“역시 그런가.”
작게 웃으며 페르젠은 주섬주섬 품안에서 서신 한장을 꺼내어 앞으로 내밀었다.
“이건……?”
그것을 공손히 두손으로 받아든 로베론 남작은 의아한 얼굴로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그에게 술을 권유하고, 호쾌하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던 모습은 온데간데 없고.
눈치를 살피는 온화한 양 한마리가 쭈글쭈글한 모습으로 앞에 있을 뿐이다.
“뜯어 보게. 궁금하면 내용을 봐야하지 않겠나.”
“그, 그러면 실례하겠습니다.”
떨리는 손으로 서신을 열어 내용물을 읽어 나가던 로베론 남작은, 그 간략적인 내용을 파악했을 때 두눈을 부릅떴다.
10월, 브뤼테인에서 열리는 경매의 초대장!
지리적 특성상 북부의 귀족들은 거의 손가락만 빨며 그런것이 있고, 또 브뤼테인에서 그러한 것이 열리는구나 하며 매번 넘겨왔었는데.
이리 예상치도 못한 타이밍에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특히 그가 페르젠이 앞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온 몸을 덜덜떨며 전율하고 있는 것은.
브뤼테인의 가주들이 어떤 여인을 아내로 삼는지 그 기준을 익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권력이 약하고, 욕심을 부릴 수가 없는 영지의 영애.
변방 중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북부 만큼 그 기준에 어울리는 곳이 있을까?
때마침 자신에게는 혼기가 서서히 들어차는 딸도 있었으니……
‘아니다……’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로베론 남작은 애써 침착한 표정을 지었다.
이 세상에 대가없는 호의가 어디있겠는가.
꽃병의 변상으로 이 정도 기회를 마련해주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분명 자신에게 바라는 게 있을 터.
“제, 제가 무엇을 하면…… 이 기회를 온전히 손에 넣을 수 있습니까?”
북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최근들어 기묘한 소문이 흐르고 있었다.
브뤼테인의 적자인 페르젠이 루에르그의 성을 빌려 북부를 다스리려 한다는 것.
대다수가 반신반의 하고 있었지만, 자신에게 이러한 기회를 준다는 건 아스란 가문을 등지고 루에르그 쪽으로 붙으라는 것이 아닐까.
‘어차피 그도 제 2 황자를 지지하는 쪽이니…… 줄을 서게 된다면 눈치 보일 일도 없다.’
침을 꼴깍 삼킨 뒤, 로베론 남작은 페르젠의 대답을 얌전히 기다렸다.
“해야 할 일이라…… 그 때 보니 그대는 꽤나 술을 좋아하던 것 같은데.”
“예, 예……”
“얼굴을 아는 이들과 술 한잔을 기울이며 이야기만 나누면 되네. 초대장은 네장이 더 남아 있기도 하고.”
네장…… 그러하다면 자신의 것을 포함하여 총 5장이라는 말이 된다.
‘제 2 황자를 지지하고 있는 이들에게 전부 이 사실을 알리라는 건가.’
하지만 페르젠은 얼굴을 아는 이들이라고 말을 했으니, 북부에 있는 모든 귀족 가문에게 그 사실을 전하라는 게 아닐까 싶었다.
‘아……’
그러다 문득, 로베론 남작은 며칠 후면 아스란 가문의 영애가 생일을 맞이한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실제로 그에 대한 서신을 미리 전해 받기도 했고.
그러하다면 궁극적으로 페르젠이 노리는 것은, 해당 초대장을 빌미로 아스란 가문의 연회를 망쳐버리는 것이리라.
‘헌데 정말 그럴 생각이었다면…… 굳이 초대장을 5장만 준비할 이유가 있는 건가.’
아무리 먹음직스러운 미끼라 해도, 제한된 좌석이라면 결국 앉지 못하는 이가 나오니 고민 끝에 꿋꿋이 아스란 가문 곁에 남는 이들이 있을 텐데.
‘……됐다. 그건 내가 고민할 이유가 아니겠지.’
어찌 되었든 주어진 역할만 완수하면, 이 기회는 온전히 자신의 것이 아니겠나.
“생각은 말끔히 정리 되었는가.”
“예…… 죄송합니다. 바로 저녁 식사를 마련하도록 할테니 조금만 기다려주십시오.”
들뜬 마음으로 페르젠으로부터 전해받은 초대장을 소중하게 품안으로 넣은 로베론 남작은 몸을 일으켰다.
“백작님은…… 일어나지 않으십니까?”
“조금만 있다가 나가지. 생각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알겠습니다.”
약간 의아하기는 했으나, 아마 자신보다 페르젠이 더욱 머리가 복잡하지 않을까 싶어 로베론 남작은 꾸벅 허리를 숙인 뒤 자신의 집무실을 나왔다.
타악!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듣고, 무릎에 덮고 있는 담요를 벗어낸 페르젠은 몸을 일으켜 주위를 둘러보았다.
들어설 때 부터 생각하고 있던 것이지만, 정말 개판인 집무실이다.
시녀들이 일을 똑바로 하기는 하는 건지.
앓고 있는 중증 강박증이 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내내 불편하다고 아우성을 부려댔는데, 이제야 그 처절한 비명에 귀를 기울일 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