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30화 > EP.130
“……자, 잘못된 건가요?”
“아니에요.”
고개를 내젓는 눈앞의 여의원을 보며 유페미아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색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모유라기 보다는 유즙에 가깝고…… 주로 임신 중기에 나타나는 현상이기는 하나 초기에도 드물게 있답니다.”
“아……”
“물론 임신 중에 유즙이 나오지 않는 경우가 따지고 본다면 더 많기는 하지만, 나쁘다기 보다는 긍정적인 현상이라고 할 수 있어요.”
“……어째서요?”
“임신 중에 유즙이 나오는 산모는 평균적으로 출산 이후 모유가 다른 산모에 비해 많이 나오거든요.”
의원을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자신이 많이 설레발을 쳤구나 싶은 유페미아는 미안하다는 얼굴로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고작 서너시간 밖에 잠들지 못한 그는 드물게 겉으로 피로함을 호소하고 있었지만……
그래도 자신이 걱정 되어 곁에 함께 있어주는 이 다정함이 얼마나 좋은지.
“만져서 짜낼때 통증이 없었기에 염증에 의하여 나오는 유즙은 절대 아니니, 차후 아릿한 느낌이 들면 절반 정도를 짜낸다는 느낌으로 배출하시면 괜찮을 거예요.”
“절반…… 이요?”
“네. 너무 많이 짜내면 새로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계속 통증이 느껴지니까 주의하셔야 해요.”
“그러면 더 들어야 할 말은 없는 건가.”
“네.”
고개를 끄덕이는 의원을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자신의 미간을 꾸욱 누르고서는 품안에서 서류 한장을 꺼내들었다.
정확히는 계약서라고 보는 게 옳을 터.
“이건……?”
“지금까지 네가 주기적으로 유페미아의 담당 의원이었지 않나.”
“예. 감사하게도……”
“요 몇달간 수도를 떠날 예정인데 따라오도록 해라. 북부에는 일이 생겼을 때, 곧바로 의원을 찾기가 어려우니.”
“……”
북부?
잠시 의아한 표정을 지은 의원이었으나, 곧이어 현재 페르젠과 유페미아의 성이 루에르그라는 것을 깨닫고 사색이 된다.
‘아, 안되는데……’
브뤼테인의 혈통을 연줄로 두고 있는 것은 더할 나위 없는 호재였다.
실제로 유페미아의 담당 의원을 하는 동안 그 덕을 본적이 많았으니까.
하지만 북부 최악의 영지인 루에르그까지 따라가는 건……
“……”
어떻게 거절해야 좋을지 몰라 계약서를 읽는 척 시간을 끌던 의원은, 문득 명시된 계약금을 보는 순간 두 눈을 파르르 떨었다.
‘이, 이, 이 정도면……’
유페미아가 출산하고, 따로 1년만 더 일을 하면 개인 의원을 차리는 게 가능한 수준.
의원들에게 있어서 최적의 인생 루트가 무엇이었던가.
황실 소속 의원이 되어 돈과 경험, 연줄을 쌓은 뒤 정년 때 퇴직을 하여 개인 의원을 차리는 것!
……연줄은 넓지 않으나, 그래도 굵직한 브뤼테인의 적자가 있지 않나.
게다가 운이 좋게도 자신은 주로 산모들을 자주 돌보았다.
산모를 환자로 돌본 경험이 많은 여의원은 그 수요가 상당히 높았으니, 개인 의원을 차릴 수만 있다면 행복한 나날을 보낼 수 있으리라.
부족한 연줄의 넓이는 그 때가면 자연스레 채워질 터.
“바, 받들겠습니다!”
“……침묵이 꽤나 길었는데, 불만인 점이라도 있는가.”
“아, 아니요! 제가 읽는 속도가 무척이나 느려서……”
“그런가. 출발은 오늘이니, 오후 2시까지 채비를 마치고 오도록.”
“오늘이요……?”
“그래.”
일사천리로 진행되는 속도에 의원은 잠깐 몸을 움찔했지만, 고개를 붕붕 저으며 알겠다고 고개를 숙인 뒤 방을 나섰다.
‘도, 동상 좀 몇번 걸리면 어때…… 관리만 잘하면 되니까……’
그리고 여름인 지금이라면, 루에르그도 들었던 소문 만큼 춥지는 않으리라.
그렇게 머릿속으로 행복한 미래의 청사진을 그리며 여의원은 춤추듯 뛰어갔다.
* * * * *
“미, 미안해요…… 괜히 자는데 깨워버렸네……”
“미안 할 필요 없다.”
어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이틀 동안 이 말을 몇번이나 하는 건지.
“천을 덧대어 가리개를 하라고 했었나.”
“응……”
지금은 뚝뚝 흐르지 않지만, 그래도 약간 힘을 주면 유두 끝에서 묽은 애액이 흘러나온다.
이내 가슴 가리개에 덧댈 천을 가지고 곁으로 오는 페르젠을 보고, 유페미아는 머뭇머뭇 거리다 입을 열었다.
“조, 조금만…… 짜줄래요?”
“방금 의원이 하고 가지 않았나.”
“그렇기는 한데, 힘이 약해서 그런지…… 아직은 조금 무거운 느낌이 있어요……”
“……”
괜스레 그가 아무런 말을 해오지 않자 유페미아는 민망해져 얼굴을 붉혔다.
“피, 피곤한데 쓸데없는 부탁을 했네…… 내, 내가 할게요. 당신은 가서 조금이라도 잠을…… 응!”
횡설수설 말을 이어가던 유페미아는 갑작스레 자신의 가슴에 손을 뻗어오는 페르젠 때문에 흠칫 몸을 떨었다.
“아까 한번 짜내기는 했으니, 따로 어딘가에 받아야 할 만큼 나오지는 않겠지. 그러니 네 손으로 천을 대고 있어라.”
“흑…… 으응!”
부드럽게 밑동을 어루만지다 커다란 손바닥을 이용해 가슴을 부여잡고, 유두 끝을 손가락으로 꾸욱 누르는 페르젠.
그러자 묽은 색의 애액이 짓눌린 유두 끝에서 뚝뚝 떨어지며 대고 있는 천을 흥건히 물들여가기 시작한다.
그 와중에 꼿꼿이 일어서려는 자신의 유두가 어찌 그리나 민망한지.
“앙…… 아응!”
움찔움찔 몸을 떨며 수차례 신음을 흘리던 유페미아는 이윽고 한층 가벼워지는 가슴의 느낌에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 이만하면…… 돼, 됐어요……”
물가에 한 번 담갔다가 꺼낸것처럼 흠뻑 젖어든 천.
왠지 모르게 포근한 느낌을 주는 달짝지근한 냄새가 유페미아의 체취와 뒤섞여 방 안을 뒤덮는다.
그리고 얌전히 물러나 손을 닦는 페르젠을 가만히 보고 있자, 유페미아는 순간 엉큼한 생각이 떠올라 고개를 푹 숙였다.
……어째서, 그에게 자신의 가슴을 한 번 물려주고 싶은 건지.
하지만 한 번 맛보았을 때, 정말 맹물이라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밋밋했던 터라 유페미아는 얌전히 그 욕구를 접어서 깊숙이 묻었다.
‘그래도……’
언젠가 한 번, 그가 깊게 잠이 든다면.
저 고압적인 분위기를 풍기는 사내를 아이처럼 다루듯, 젖을 물려주고 싶었다.
* * * * *
역겨워.
웃기지도 않아.
나아가는 마차 안에서 유리엘은 유페미아를 힐끔 바라보았다.
환기를 하고 있어도 마차 안을 은은하게 채우는 젖비린내.
그래, 페르젠이나 라우라에게는 그것이 포근한 느낌을 선사하는 달짝지근한 냄새로 받아들여지고 있으나.
유리엘에게는 역겨울 정도의 비린내로 느껴졌다.
‘……주인을 닮아서 그런지.’
몸조차 어떻게든 그이의 관심을 사기 위해 아둥바둥 발버둥을 치는 걸까.
도중에 가슴이 아프다고 호소하며 마차에서 내린 뒤, 모유 같지도 않은 모유를 페르젠의 손으로 짜내게 만든 일을 생각하면 웃음밖에 나오지 않았다.
‘보통은 아이를 가지고, 시간이 지남에 따라 유두와 유륜의 색소가 침착 된다던데.’
아주 거무죽죽하게 변해버렸으면 좋겠다고 유리엘은 속으로 악담을 퍼부었다.
그리고 그녀의 곁에 앉아 있는 라우라는……
“……”
몹시나 죽을 맛이었다.
유리엘이 겉으로는 태연하게 굴고 있지만, 가까운 거리에 있는 자신에게는 현재 그녀가 느끼고 있는 불쾌감이 아주 노골적으로 피부를 타고 올라왔으니까.
‘꼴을 보아하니……’
이번 달, 유리엘이 달거리를 하게 된다면.
자신이 그녀의 토끼 인형 신세가 되지 않을까 싶었다.
그렇게 되지 않기 위해서 믿어야 할 게, 눈앞에 있는 애송이의 씨라니.
농담도 이런 악질적인 농담이 따로 없으리라.
* * * * *
꽤나 강행군에 걸쳐서 5일만에 브뤼테인에 도착한 페르젠은 곧바로 자신의 형이자 가주인 제레미아를 만나러 집무실로 향했다.
“오랜만입니다. 형님……”
노크를 하고 들어선 뒤, 그를 마주보고 내뱉는 인사가 어찌 이리도 어색한지.
하지만 그 어색함을 느끼는 건 제레미아도 똑같았을까.
삐걱삐걱 몸을 일으키는 그가 헤픈 웃음을 지으며 뺨을 긁적인다.
“어서오거라. 동생아.”
“예…… 오랜만에 뵙는 것이지만 오래있지는 못합니다. 당장 내일 출발을 해야하겠죠.”
“그것을 모르겠느냐. 그리고 미안하게 되었다.”
“무엇을?”
“네 생일에 맞추어 보낸 선물 말이다. 혹시 알프레드 가문의 영애에게 독기를 품게 만들 원인을 제공한 건 아닐까 싶었단다.”
“아. 그거라면 걱정하지 마십시오. 그 정도로 속이 좁은 여인은 아니니까.”
“그래. 네가 그리 말하는 것이라면 믿어도 되는 것이겠지.”
은근히 신경쓰고 있던 점이 말끔히 해소되자 제레미아는 한층 편안해진 분위기로 페르젠을 대했다.
의식을 하고 있지 않으면 눈동자가 계속해서 페르젠과의 시선을 피하려 들지만, 그래도 이제는 마주보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다.
“필요한 것이라도 있느냐. 이번에 북부에 올라가게 된다면 귀찮은 일이 생길 텐데.”
“안 그래도 그 때문에 부탁드릴 게 한가지 있습니다.”
“편히 말하거라.”
“10월 초에 경매가 열리지 않습니까? 그곳의 참석 자리를 5개만 따로 건네주십시오. 가문의 문양을 찍어서 초대장 형식으로.”
특별한 일이 있지 않고서야 브뤼테인의 가주는 연회를 열지 않는다.
다만, 그러는 와중에도 브뤼테인의 가주와 친분을 도모할 자리가 있는데.
그것이 1년에 한번만 열리는 브뤼테인의 경매다.
야금술에 한해서는 일류라고 자부해도 손색이 없는, 대를 이어 대장간에 종사한 브뤼테인의 장인들이 심혈을 기울여 만들어낸 검이나 갑주를 선보이고.
그것의 주문제작 권리를 손에 넣는 자리.
당연히 해당 권리가 팔렸을 때, 대장장이들은 한 번 만들어 넘긴 물품은 다시 만들어내지 않는다.
품질에 있어서는 더할 나위가 없고.
희소성은 말로하면 입이 아픈 것.
때문에 기사단을 운영하고 있는 귀족들은 가장 믿고 신뢰하는 기사에게 선물로 하사하는 경우가 잦았다.
굳이 단점을 찾으라고 한다면, 황실 소속의 기사들은 입을 수 없다는 거겠지.
황실에 소속된 이상 그 일원임을 증명하는 규격화된 갑주를 입어야 하니까.
물론, 그 이전에 해당 경매의 가치를 폭등시키는 건 무조건 브뤼테인을 이끄는 현 가주가 참석하기 때문이다.
“하, 하하……!”
그리고 페르젠의 그 말을 들은 제레미아는 기쁨이 가득 담긴 웃음을 터트렸다.
나름 격식을 차려서 돌리고 돌려 말했을 뿐이지.
직설적으로 치환하자면, 형님 얼굴 좀 매물로 팔아도 되겠느냐가 아닌가.
세상에 이것보다 고지식한 동생의 어리광 섞인 부탁이 있을까.
“절반으로 괜찮겠느냐? 손에 넣고 굴리기 적당한 비율은 6 : 4 라고 생각하는데.”
현 북부의 수장, 아스란 백작 휘하에는 총 10개의 가문이 있다.
본인은 중립을 유지하며 10개의 가문을 반으로 쪼개 제 1 황자와 제 2 황자를 지지하게끔 하고 있으니, 균형을 무너트리려면 과반수 이상은 끌어들여야 할 터.
“그렇기는 하지만, 황실 입장에서는 비등비등한 권력 구도가 제일 안심 되겠지요.”
지금 자신이 브뤼테인의 적자이기는 하나, 어차피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방계로 갈라지게 된다.
그러니 북부의 안정화를 도모한다는 명분을 충족시키려면 어느 한쪽으로 쏠리기 보다는 팽팽한 그림을 유지하고 있는 게 황실 입장에서는 도움이 될 터.
‘솔직히……’
그것에 따르지 않아도, 작금의 황실이 무어라 할 수는 없을 것이다.
다만, 계속해서 제레미아의 도움을 받기도 싫었고.
……두 개의 인격이 융화되었다고 한들, 이 몸에 강력히 남아 족쇄를 이루고 있는 브뤼테인의 근본적인 숙명은 엇나감을 허용하지 않았다.
“네 뒤를 이어 루에르그를 이끌 아이는…… 꽤나 무거운 짐을 짊어지게 되겠구나.”
당연한 것이지만, 권력을 독점하는 게 쉬우면 더 쉬웠지.
아슬아슬하게 우위를 점하고 있는 상황을 유지하는 건 그것보다 수천배는 어려웠다.
“그 짐을 감내하지 못하고 제 손으로 망쳐버리는 것도 운명이라면 운명이겠지요.”
브뤼테인과의 실은 끊이지 않을 것이다.
다만, 그 실은 이어진 것이 아니라 루에르그가 붙잡고 있는 것.
그것을 유지하기 위한 대전제는 오직 하나.
불완전한 패자(覇者)의 자리.
‘따지고보면……’
불완전하다고 수식하는 것도 웃겼다.
본인의 용맹함과 압도적인 권력을 뽐내기 위해 왕들은 자주 맹수의 가죽이나 박제한 시신을 전시하지만.
정말로 그것을 뽐내고 싶었다면, 살아 있는 것을 완벽히 통제하듯 사육시키는 광경을 보여주면 되는 게 아닌가.
그러니 언젠가 힘에 부쳐 브뤼테인 과의 연을 잘라내고.
권력을 독점하기 위해 아스란 백작가라는 맹수를 죽이려 든다면.
‘그 때가……’
브뤼테인의 방계, 루에르그의 망조가 드는 날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