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24화 > EP.124
성실히 조사에 임한 뒤 저택으로 돌아온 페르젠은 북부로 올라갈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준비라고 해봤자 별게 있지는 않았으나, 페르젠은 일부러 빠르게 처리해야 할 일이 있다며 자신의 집무실에 틀어박혔다.
이 정도면 출발 시일을 미루는 게 어색하게 보이지는 않으리라.
‘하루 뒤……’
7월 3일.
29일의 주기로 찾아오는 만월의 밤.
북부로 올라가는 도중 라우라의 괴벽이 발작한다면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기에, 페르젠은 미리 손을 보고 출발 할 생각이었다.
그녀와 단둘이 올라가는 것이라면 눈치 보일 게 없지만, 유페미아와 유리엘이 함께 동석 할 테니 비밀을 감추는 게 상당히 어려울 터.
‘그러고 보니……’
가사상태에 빠트리는 약물의 제조법을 수중에 넣을 수 있다면.
제노바 백작가에 전해지는 괴벽을 수월히 관리할 수 있지 않을까?
괴벽이 발작하는 동안은 극도의 각성 상태를 유지하기에, 죽음이 아니고서야 현존하는 수단으로 정신을 잃게 만드는 건 불가능하다.
그러니 거짓이기는 해도, 생물학적 죽음에 빠트릴 수 있는 해당 약물이 있다면 만월이 뜨는 밤마다 굳이 자신의 도움을 받을 필요는 없겠지.
목줄이 조금 느슨해지기는 하겠으나, 어차피 그녀의 비밀을 알고 있는 제 3자는 자신뿐일 테니 갑을 관계가 변하지는 않을 테고.
똑똑.
명목상으로 쥐어 든 서류를 바라보며 고뇌에 잠기던 찰나, 들려오는 노크 소리에 페르젠은 고개를 들었다.
“들어오지.”
벌컥.
허락이 떨어지자 조심스레 문고리가 돌아간다.
그리고 열린 문 틈새로 가장 먼저 모습을 드러내는 건, 양쪽의 귀가 축 늘어진 새하얀 토끼인형이었다.
“저……”
생김새만큼이나 힘이 없는 여린 목소리.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그녀가 쭈뼛쭈뼛 안으로 들어서더니 토끼 인형을 꾸욱 끌어안은 채 말을 잇는다.
“내, 내일이……”
“알고 있다. 그래서 있지도 않은 일을 이렇게 만들어서 하는 게 아니더냐.”
“아…… 호, 혹여나…… 이, 잊고 계신 줄……”
“잊지 않았다. 그러니 밤이 가까워질 때 몰래 내 집무실로 오도록 해라. 들켜서는 안 된다. 일찍 잠자리에 들겠다고 하고, 침실의 문도 단단히 잠구어 두도록.”
“네, 네.”
해야 할 말은 이게 전부였으므로, 라우라는 꾸벅 허리를 숙인 채 페르젠의 집무실을 나왔다.
그리고는 뒤늦게 딱딱했던 그의 어조를 떠올리며, 퉁명스러운 얼굴로 닫힌 집무실의 문을 슬그머니 노려보았다.
‘들키고 싶지 않은 건…… 나도 매한가지야.’
의외로 페르젠이 여인들의 관계에 깊숙이 개입하여 서로의 사이를 조율하고 있는 듯했지만, 사각지대는 얼마든지 존재하는 법이었기에.
라우라는 괜히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 유리엘에게 도둑고양이로 낙인 찍혀 오해를 사고 싶지 않았다.
물론, 발버둥 친 끝에 이번 생에서도 괴벽을 벗어 던질 수 없다는 확실한 판단이 든다면.
페르젠의 첩실이 되어 일생을 보낼 생각이기는 했으나…… 그건 어디까지나 차선책.
그리고 그 차선책을 선택하려 할 때도, 시기는 유리엘이 임신하거나 출산을 하고 난 이후가 가장 좋으리라.
사람은 언제나 여유를 가지게 되는 순간 자애로워지는 법이었으니까.
* * * * *
서서히 황혼이 저무는 하늘.
밤이 찾아오고 있었다.
넷이서 함께 저녁 식사를 마친 뒤, 페르젠은 유페미아와 가벼운 산책을 하고서 침실로 돌아왔다.
어제는 그녀와 동침을 했으므로, 자연스레 오늘은 유리엘의 침실로 가서 동침을 해주는 게 공평한 수순이겠지만……
페르젠은 좀처럼 그것을 직접적으로 언급하기 어려워했다.
왜냐하면 새벽 때 자신이 유리엘과 몸을 섞었다는 걸, 유페미아가 이미 알고 있는 상태였으니까.
‘차라리……’
동침의 주기를 일주일로 잡는 게 좋을까.
그런 방책을 궁리하던 찰나, 페르젠은 물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유페미아와 시선을 마주했다.
“신기하네요.”
“……”
“당신이, 내 눈치도 다 보고……”
함께 했던 시간이 나름 오래 되어서 인지.
아니면 여인의 직감이란 것이 이토록 날카로운 것인지.
정직하게 속내를 읽혀 아무런 말을 하지 못하고 있자, 유페미아는 새침한 표정을 지으며 손을 뻗어 왔다.
“새벽에 그 여자와 정을 통한 게 마음에 걸리는 거라면…… 이번에는 나를 안고 가요.”
불이 꺼진 방안에 스며드는 달빛처럼.
은은한 색기를 흘리는 유페미아가 자신의 가슴을 팔뚝에 지그시 눌러온다.
임신의 영향으로 원래보다 커다래진 가슴의 부드러운 감촉이 어찌 이리도 음란할 수가 있는 건지.
스륵.
더군다나 은근슬쩍 두 다리를 벌리며 허벅지 사이의 새하얀 속옷을 드러내는 교태는, 원래의 그녀답지 않은 음탕함을 자아내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자신의 발을 붙잡아 두기 위해, 본디 순수했던 여인이 스스로의 의지로 천박한 강에 발을 담그는 광경.
그것이 페르젠은 몹시도 마음에 들었다.
그녀가 얼마나 자신에게 예속되어져 있는지를 알려주는 이정표와도 같았으니까.
때문에 이마에 부드러운 키스를 건네며, 밑으로 손을 내린 페르젠은 어설프게 말려 올라간 그녀의 치맛단을 허리 부근까지 끌어 올렸다.
그리고는 자연스레 등을 손으로 받치고 침대에 뉘이려던 찰나……
“……아니, 아니에요.”
“무엇이 아니란 말이냐.”
“읏!”
스스로가 먼저 유혹을 해놓고.
이제 와서 저지를 하려는 그녀의 몹쓸 행동에 페르젠은 유페미아의 목덜미를 가볍게 깨물었다.
그러자 고기를 베어 물었을 때 흘러나오는 담백한 육즙처럼, 매혹적인 체향이 그윽하게 풍겨온다.
“화, 화내지 말아요…… 안정기까지는 아직 3주 정도가 남았으니까, 당신은 아마 최대한 절제를 하며 나를 안겠죠?”
“……”
“그렇게 어설프게 끝내버리면, 그 여자에게만 좋은 꼴이 되잖아요. 나는…… 시, 시정마 노릇 따위는 하고 싶지 않은걸.”
유페미아의 고백은 상당히 적나라했으며, 또 진솔했다.
때문에 페르젠은 욕심을 부리지 않고, 그녀의 목덜미에 옅은 숨결을 뱉은 후 얌전히 손을 치웠다.
“아……”
하지만 그것이 자신을 향한 관심을 거두는 것만 같아, 얼른 상체를 일으킨 유페미아는 강아지처럼 기어 페르젠에게 다가갔다.
애초에 하려던 말은 이게 끝이 아니었으니까.
“나…… 그, 그래도 이제는 입과 손으로 하는 게 많이 익숙해졌어요……”
감싸 쥔 손바닥 안에서 껄떡거리는 그의 성기가 낯설지 않았고.
입으로 머금었을 때, 어디를 훑어주면 좋아하는지……
오랜 시간의 경험으로 유페미아는 그것들을 확실히 인지하게 되었다.
분명 얼마 몸을 섞지 않은 유리엘로서는 흉내조차 낼 수 없겠지.
하지만 그러한 어필이 무색하리만큼, 페르젠은 바지춤을 더듬는 자신의 손목을 붙들어 올렸다.
강한 힘이 실려있지는 않았으나, 유페미아는 조금 충격을 먹은 듯한 표정으로 그의 손아귀에 붙잡힌 자신의 손목을 쳐다보았다.
“괜찮다.”
“……”
이것은 자신을 향한 배려일까.
아니면 그럴 필요조차 없다는 단호한 거절일까.
“싫어요……”
“유페미아.”
“해줄게요. 나, 잘해요……! 분명…… 분명 마음에 들 거야……”
힘을 줘서 손목을 빼내려 들지만, 억세게 쥐어오는 그의 손길이 유페미아는 너무나도 서러웠다.
그의 아이를 품은 아내로서 사랑받고 싶은 마음.
또, 한 명의 여인으로서 그에게 사랑받고 싶은 마음.
그것이 좀처럼 공존할 수 없는 현 상황이 어찌 이리도 야속한지.
시작은 분명 주도권을 가지고 있던 유페미아였으나, 너무나도 간단히 그것을 빼앗겨버린다.
이것은 자신의 곁에, 또 자신의 세계에 페르젠밖에 남지 않은 유페미아가 얼마나 강렬히 의존하고 있는지 알려주는 증거.
“……너는, 또 무슨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냐.”
떠오르는 동을 맞이하여 흘러내리는 새벽이슬처럼.
자신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는 유페미아를 향해, 페르젠은 다정하게 손을 뻗어 스윽 닦아주었다.
“네 요구는 분명, 질투심과 불안한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겠지.”
단순 말로만 그녀를 위로하는 것이 아니라, 페르젠은 전반적으로 유페미아의 상황을 이해하고 또 공감하고 있었다.
애당초 시엘 미드포드가 살아 있었을 때, 그녀에게 얼마나 집착했던가.
다양한 핑계로 포장을 한 뒤 거부감을 느끼는 그녀의 몸을 억지로 짓누르고, 자신의 씨를 받게 만들었지.
그래, 그 당시 자신은 은연중에 피어오르는 불안감을 그런 식으로 해소했었다.
그리고 현재, 그녀가 유리엘 때문에 과거의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비추어주는 건……
살아남기 위해.
조금이라도 더 온전히 그녀를 종속시키기 위해.
시엘 미드포드를 죽여버린 일의 후환.
그러니 피어오르는 질척한 소유욕은, 그에 대응되는 행동으로 만족시켜주는 게 올바른 수순이리라.
“네 바람을 거절하는 게 아니니, 울지 말도록 해라.”
고개를 숙인 페르젠이 훌쩍이는 유페미아에게 가벼운 입맞춤을 건넨다.
동시에 투둑, 입고 있는 자신의 셔츠──그곳의 단추를 하나둘 풀어내기 시작했다.
그러자 특유의 탄탄한 가슴팍이 어둠 속에서 희미한 윤곽을 그려내며 유페미아의 눈동자에 새겨진다.
“언제나 내가 네게 했듯이…… 이번에는 네가 내게, 좀처럼 지워지지 않을 흔적을 새기면 되는 게 아니더냐.”
“아……”
붙잡은 손목을 놓아주는 페르젠이 자신의 뒷머리를 가볍게 쓸어내리며 천천히 가슴팍으로 끌어당긴다.
……고급스러운 향수 냄새와 함께 풍겨오는 선명한 그의 체취.
그에 유페미아는 무의식적으로 두 손을 뻗어 조각 같은 탄탄한 가슴팍을 어루만졌다.
아이를 가지기 전, 매번 몸을 섞었을 때는 이리도 수컷다운 육체가 자신의 몸을 짓누르며 가차 없이 범했던 걸까.
문득 그러한 자각이 들자 유페미아는 얼굴을 붉힌 채 수줍게 되물었다.
“……정말, 이죠?”
“그래.”
망설임을 덮어주는 페르젠의 확실한 대답이 들려오자, 유페미아는 상체를 조금 일으켜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이곳에 흔적을 새기면 옷깃을 추레하게 끌어 올리지 않는 한 절대로 가릴 수가 없었으니까.
쪽.
곧이어 페르젠의 목덜미, 그곳의 살결을 자신의 부드러운 입술로 덮은 유페미아가 음란한 입맞춤을 이어나가기 시작한다.
처음에는 마치 낯을 가리듯 조심조심 페르젠의 목덜미에 자신의 흔적을 새겨나가던 유페미아였지만……
차차 시간이 흐르자, 애써 억눌러두었던 페르젠을 향한 소유욕을 가득 드러내며 그의 몸을 탐해 나갔다.
쪽.
쪽……
붉은 꽃잎이 화려하게 피어나는 목덜미.
터져 나오는 자신의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도리어 휩쓸려버리고 있다는 자각 정도는 하고 있었지만……
“하…… 응……”
애한이 뒤섞여 있는 듯한 뜨거운 숨결을 한 번 뱉어내고, 유페미아는 오히려 현재의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홍수에 몸을 맡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