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23화 (123/260)

< 123화 > EP.123

시간이 되어 성실히 조사에 임하기 위해 아카데미로 나아가던 페르젠은, 문득 눈에 들어오는 거리의 가게를 보고서 마차를 멈춰 세웠다.

“이곳에 볼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예정에는 없었는데 그리 되었군.”

마차의 문을 열고 내리는 페르젠의 뒤를 따라 동석했던 세 명의 기사들이 내린다.

‘분명……’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그녀도 오늘 조사에 참석을 하겠지.

하지만 자신이 찾으려 다니지 않는 이상 마주칠 일은 거의 없으리라.

왜냐하면 그녀가 자신을 필사적으로 피해다닐 테니까.

때문에 페르젠은 굳이 찾아가지 않고 그대로 내버려 둘 생각이었다.

다만……

‘착한 아이에게는, 상을 주기로 했었지.’

아카데미 내에서 그녀에게 어떤 포상을 쥐어주기는 하리라.

하지만 그것은 자신이 주는 상이라 할 수는 없었기에, 페르젠은 눈앞의 신발 가게 안으로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남성 쪽이 아닌, 여성 쪽 구두가 화려하게 진열 되어 있는 쪽으로 향하니 어렴풋하게 현재 사교계에서 어떤 것들이 유행하고 있는지 대번에 알 수 있었다.

“……”

그리고 그 중에서도, 페르젠의 눈길을 사로 잡는 건 오직 하나의 구두.

‘이건……’

슬그머니 입꼬리가 올라간다.

귀족들, 그러니까 사교계에서의 유행은 그 수명이 짧다.

길게 잡아도 1년이니 말을 다한 거리라.

그렇게 유행이 끝난 것들은 뒤떨어진 것이라 천대를 받으나, 아이러니하게도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나 고전이 되어버린다면 다시 각광 받는 경우가 허다했다.

“주문하지.”

“예! 구매하신 물건은 포장하여 가지고 가십니까? 아니면 배송입니까?”

“배송이네.”

곁으로 다가온 점원에게는 눈길도 주지 않고, 페르젠은 허리를 숙여 과거를 불러 일으키는 구두를 쥐어들었다.

“사이즈는 210mm. 그리고…… 편지지를 하나 주게. 주소도 그곳에 적도록 하지.”

“네. 편지의 작성은 이쪽에서 하시면 됩니다.”

창가 쪽에 자그마하게 마련된 잉크와 깃털펜.

그곳에 앉은 페르젠은 어린 양에게 보내는 한 마디를 섬세하게 적은 뒤, 점원에게 돈과 함께 건네주고서는 마차에 올라탔다.

이미 신념이 꺾여버린 리지를, 별다른 일이 있지 않은 이상 더 압박할 생각은 없으나……

스스로가 나쁜 아이라고 일컬은 해당 과거를, 반면교사로 일삼게 해줄 매개체 정도는 쥐어줘도 괜찮으리라.

* * * * *

‘……’

엘리자베스 황녀는 물끄러미 리지를 바라보았다.

조사에 임하는 태도는 성실했지만, 아무리 봐도 그녀가 무언가를 숨기고 있는 것 같았다.

특히나 안절부절 못하는 저 모습은, 얼른 이곳을 나가고 싶은 걸로 보이지 않나.

그래서 질문을 통해 속내를 엿들어 보았지만, 제한시간 동안 들려온 것이라고는……

「 빨리 돌아가고 싶어…… 빨리 돌아가고 싶어…… 」 라는, 간절한 외침 뿐이었다.

사실 황실은 클로디아 가문과 브뤼테인 가문 사이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고 있었다.

브뤼테인이 은닉하려 했어도, 황실이 그만한 소동을 알아채지 못하는 게 이상할 터.

때문에 클로디아 가문의 영애인 리지가, 페르젠을 구하기 위해 환몽 결계 안으로 자진해서 뛰어들었다는 점은 고스란히 믿기 힘들었다.

원래 로에르가 기사단에 입단하려 했을 당시, 아슬아슬하게 기준이 미달이었지만 굳이 합격을 시킨 것도.

브뤼테인을 향한 클로디아 가문의 분노를 가까운 곳에서 통제하기 위함이었으니까.

“성실한 태도로 조사에 임해주어서 고맙구나…… 그만 나가봐도 좋으니라.”

줄곧 기다리고 있던 총장, 엘리자베스 황녀의 허락이 떨어지자 리지는 꾸벅 고개를 숙인 뒤 휠체어를 돌렸다.

그리고는 혹여나 이곳에 있을 페르젠과 마주할 수 없도록, 빙글빙글 돌아 본관의 주차장으로 향한다.

최대한 동선이 겹치지 않도록 움직이고 있지만, 그럼에도 리지는 어째서인지 그의 시선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하지만 결코 고개를 뒤로 돌리지는 않았다.

혹여나 정말로 자신을 어디선가 내려다보고 있는 그와 시선이 마주친다면……

움찔!

상상만으로도 오한이 피부 깊숙이 스며든다.

꿈속에서 겪었던 생생한 감촉이 되살아나는 것 같았다.

페르젠의 커다란 손이 움직이지 못하는 자신의 몸을 더듬고.

흉물스런 물건이 오므리고 있는 다리 사이로 파고 들어와 굳게 다물린 음부를 잔인하게 유린하는……

“아윽!”

아프다.

고간 사이로 통증이 올라오는 것 같았다.

단순 환각통이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리지는 토할 것만 같은 거북함과 아픔을 느끼며 필사적으로 휠체어를 이끌었다.

그렇게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도착한 마차 앞, 힘겹게 안으로 들어선 리지는 좌석에 철푸덕 주저 앉았다.

이제부터 3개월 동안 시작 되는 방학.

‘적어도……’

당분간은 그의 얼굴을 볼 수 없을 것이고.

또, 그의 목소리도 들을 수 없겠지.

그러한 생각이 들자 리지는 온 몸을 옥죄던 긴장이 서서히 풀어지는 느낌을 받았다.

더 이상 자신의 몸을 더듬는 페르젠의 손길도 느껴지지 않았고.

음부에서부터 찌릿하게 올라오던 통증도 자취를 감춘다.

그리 수도 내에 위치한 저택으로 돌아온 리지는 자신의 방에서 잠깐 숨을 고르며 시녀들을 불렀다.

“아가씨.”

헌데 부름을 받은 시녀들 중 한 명은 빈손으로 들어오지 않았다.

아름답게 포장된 상자 하나를 들고 있었다.

“아가씨 앞으로 선물이 도착했어요.”

“선물……?”

생일도 아닌데.

도대체 누가 무슨 연유로 대뜸 자신에게 선물을 보내온단 말인가.

혹시 클로디아 가문의 값어치를 높게 잡고 있는 누군가가, 자신의 환심을 사기 위해 보내온 걸까?

평소라면 기뻐했을지도 모르겠지만, 이제는 쫓는 걸 포기하고 숨기에 급급해진 자신에게……

정략 결혼을 통한 가문의 부흥은 아무런 별다른 의미를 가지지 못했다.

애당초 근무 때문에 자세한 이야기는 오늘 마저 하자고 했던, 자신의 첫째 오빠인 로에르에게도 무슨 말을 해야할지 모르겠는데.

“뜯지 않으실 거라면, 일단 보관을 해둘까요?”

“아니…… 괜찮아.”

굳이 본인들의 영지로 돌아갈, 방학 기점에 선물을 보냈다는 건.

오랜 시간 고민을 한 뒤에 답장을 해줘도 괜찮다는 거겠지.

하지만 리지는 그러고 싶지 않았기에, 일단 보낸이가 누구인지 알기 위해서 정성스러운 포장을 뜯었다.

스륵.

뚜껑을 여니, 새하얀 포장지에 감싸져 있는 물건 위로 자그마한 편지지가 보인다.

가장 먼저 그것을 들어 올린 리지는 겉면을 살폈다.

보낸 이의 이름은 보이지 않았다.

‘안쪽에 적혀져 있나……’

조심스러운 손길로 편지를 펼치며, 리지는 동시에 선물을 감싸고 있는 새하얀 포장지도 함께 들어 올렸다.

그리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가 일차적으로 훑어 내리는 편지 속의 내용은, 보낸 이의 성격을 어림짐작 할 수 있을 만큼 단정한 필체로……

「 그릇된 길로 빠지지 않게, 반면교사로 삼을 수 있는 물건을 준비해봤다. 」

라는, 하나의 문장을 이루고 있었다.

“아……”

그 내용을 읽은 순간, 리지는 떨리는 손으로 쥐고 있던 편지를 놓쳐 버렸다.

그러자 시야를 가리던 그 너머, 아름다운 상자 안에 놓여 있는 화려한 구두가 선명히 눈에 들어온다.

어찌 잊을 수가 있을까.

어찌 잊을 수가 있으랴.

8년 전, 자신은 저 구두를 신고 페르젠과 춤을 추었는데.

“아가씨?”

“나, 나가……!”

“아가씨!”

“나가라고──!”

높아지는 리지의 목소리와 다르게, 파르르 떨리는 그녀의 손은 필사적으로 팔걸이를 붙잡고 있었다.

그리고 서로 눈치를 보던 시녀들은 한참을 머뭇거리다, 조심스레 복도로 퇴장했다.

“흑…… 흐윽!”

그렇게 문이 닫히는 소리를 들으며, 홀로 남게 된 리지는 무릎 위에 얹힌 상자를 바닥으로 떨어트리며 휠체어를 뒤로 이끌었다.

투욱!

상자와 함께 바닥으로 떨어지는 구두가 제멋대로 널브러진다.

그 모습이 어찌 이리도, 처참하게 널브러져 울고 있던 과거의 자신을 투영 시키는지.

……흐아앙! 흐아아아앙!

그 날, 울부짖던 자신의 울음소리가 들려오는 듯 하다.

하지만 리지는 억지로 몸을 웅크린 채, 귀를 막고 그 소리를 외면했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달려가 아른거리는 과거의 환영을 끌어안아주고 싶었지만……

「 저 아이는, 어떤 아이 같으냐. 」

어느새 귓가로 속삭이는 늑대, 아니 괴물의 목소리는 그것을 저지했다.

분명, 그는 자신의 곁에 없는데.

목덜미를 타고 쇄골로 내려오는 듯한 그 손길의 감촉은 어찌 이리도 생생한 건지.

결국 페르젠이 없음에도, 그에게 대답하듯.

리지는 입을 열었다.

“나, 나쁜…… 아, 아이에요……”

그러자 칭찬하듯, 자신의 쇄골 부근을 더듬던 페르젠의 손길이 점차 물러나며 희미해진다.

그 끝에 리지는 다시 한 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들 클로디아 가문은 페르젠을 벼랑 끝으로 어떻게든 내몰아 보기 위해 발버둥을 치고 있던 게 아니라.

애초에 「 그 」 라는 절벽에 매달려, 아득바득 기어 올라가고 있을 뿐이었다는 걸.

이내 고개를 밑으로 내려, 해당 절벽의 높이를 실감한 리지는 실소를 지으며 흐르는 눈가를 손바닥으로 가렸다.

찔끔, 흘러나오는 소변으로 인해 속옷이 축축해진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 앞에서의 자신은 예나 지금이나, 힘없는 어린 아이에 불과한 것이다.

* * * * *

꾸구국!

복도를 거닐며 라우라는 안고 있는 새하얀 토끼 인형을 찌그러트렸다.

잠시 다과회를 가지자던 유리엘의 말은 얼핏 보면 의사를 묻는 듯 했지만, 거기에 거부권이 있을리가 없었다.

때문에 기왕 참석할거라면 유리엘에게 조금이라도 더 잘보이는 편이 낫지 않을까 싶어 라우라는 인형을 안아든 채 이동하고 있었다.

‘그래……’

차라리 아이 취급을 당하는 편이, 나중에 첩실이 되었을 때 거부감이 덜 할지도 모른다.

그렇게 저택 내부, 약속했던 장소로 들어선 라우라는 문을 열자마자 숨이 턱 막히는 듯한 무거운 공기를 느꼈다.

아무런 말 없이 테라스 바깥을 바라보며 차를 마시고 있는 유페미아와 유리엘.

“이리와.”

자신이 들어왔다는 걸 눈치채고 나서야, 내부의 공기가 비교적 부드럽게 풀어진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친분은 유페미아보다 유리엘이 더 깊었기에, 라우라는 별다른 거부감 없이 그녀의 곁에 착석했다.

안고 있는 토끼 인형의 머리 위로 두 손을 얹히는 라우라.

죄없는 토끼인형만이 시무룩하게 뭉개진다.

“로젠베르크의 영애니…… 장신구나 보석에 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겠네?”

“네, 네…… 어, 어느 정도는요……”

“그러면 이것좀 봐주겠니?”

소매를 스윽 걸어 올리며, 유리엘은 페르젠에게 선물 받았던 한 쌍의 팔찌를 드러냈다.

그러자 자연스레 유페미아의 눈가가 움찔했다.

“정보를 좀, 알 수 있을까?”

페르젠, 브뤼테인의 적자가 구매하여 가지고 있는 장신구가 과연 일반적인 장신구일까.

분명 그럴리가 없었기에, 로젠베르크의 영애라면 무언가를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 유리엘은 넌지시 물었다.

그에 그녀의 팔찌를 자세히 들여다 본 라우라는 어렵지 않게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하늘을 흐르는 바다에 새겨 넣은 듯한 해당 팔찌의 이름은, 영원을 품은 바다.

“가격은…… 어떻게 될까?”

물끄러미, 대놓고 유페미아가 차고 있는 목걸이를 주시하며 유리엘은 추가적인 물음을 건넸다.

“모, 몰라요……”

어정쩡한 고급 장신구야 가격이 정해져 있는 게 일반적이지만.

그러지 않은 장신구는 보통 경매로 낙찰 받은 가격을 판매가로 봐야했다.

그러니 해당 장신구의 가격은 이것을 유리엘에게 선물한 페르젠만이 알고 있으리라.

“그래?”

아쉬움을 머금으며, 유리엘은 페르젠이 선물 해주었던 손목의 팔찌를 조심조심 매만졌다.

“그, 그럼…… 이건 어떤지 알 수 있을까요?”

“……”

브뤼테인의 적자를 남편으로로 둔 사람 답지 않게, 자신에게 존댓말을 써오는 유페미아를 희한하다는 듯 쳐다보며 라우라는 그녀의 목걸이를 훑어 보았다.

주요 보석은 에메랄드.

하지만 해당 에메랄드를 빛내기 위해 투자된 보석들의 값어치는 상상을 초월하는 수준이었다.

그래서인지 이번에도 라우라는 어렵지 않게 해당 정보를 떠올릴 수 있었다.

“그, 그건……”

마치 추레한 여인을 얼마나 아름답게 만들 수 있는지, 이름난 세공사들이 모여 심혈을 기울여 경매에 올린 각자의 작품들.

틀림없이 그 중의 하나이리라.

동일하게 가격은 낙찰 받은 페르젠만이 알고 있겠지.

“그런가요……”

유리엘처럼 아쉬움을 머금으며, 유페미아는 해당 목걸이를 만지작 거렸다.

그리고 두 여인은 한날 한시에, 같은 생각을 품었다.

추후 페르젠이 자신을 안을 때, 슬그머니 운을 터보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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