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20화 (120/260)

EP.120 120─막간

그다지 한 게 없는 것 같은데, 시계는 벌써 오후 7시를 넘어가고 있었다.

수도로 복귀하는데 반나절 정도가 걸렸고, 아카데미 내에서도 1 ~ 2 시간 정도를 소모했으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리라.

그렇게 목욕을 하고 식사를 마친 페르젠은, 저택 내의 호위로 차출된 인원들에게 추가적인 사안을 전달한 뒤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딸칵.

문고리를 붙잡아 돌린다.

어느덧 비는 그쳤어도, 우중충한 먹구름은 여전했기에 방안은 많이 어두웠다.

하지만 그 어둠 속에서도, 유페미아의 금빛 눈동자는 왜 이리도 밝게 빛나는 것 같은지.

‘마치……’

밤바다를 비추어 주는 등대 같지 않은가.

그에 살포시 걸음을 내딛어 곁에 앉자, 유페미아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자신의 품으로 안겨들었다.

특유의 부드러운 몸이 얇은 옷자락 너머로 야릇한 감촉을 전해온다.

‘이건……’

저돌적인 유혹이라기보다는, 불안과 걱정이 안도라는 물에 뒤덮여 흘러나오는 수증기 같은 것이라 할 수 있으리라.

그래, 그녀에게 있어서 자신의 죽음이란……

벌써 이만큼이나 감정을 소모시키고, 궁지로 내몰아버릴 요소가 되어버린 것이다.

의도하지는 않았어도, 목숨을 대가로 무언가를 확인하는 건 상당히 비겁한 일인데.

페르젠은 속으로 넘쳐흐르는 기쁨을 감출 수가 없었다.

“그, 그런 상황에…… 앞으로, 다시는 놓이지 말아요……”

“내가 괜한 걱정을 시켰구나.”

“조금의 위험도…… 감수하지 마요……”

“그건……”

가능한 일이기나 하련지.

확신할 수 없는 약속을 선뜻 내뱉는 건 어려웠기에, 페르젠은 말끝을 흐렸다.

악(惡)으로 뒤엉킨 실타래다.

그것을 풀어내려할 때, 조금의 막힘도 없으리란 거의 불가능한 일일 터.

그리고 거절에 가까운 페르젠의 망설임을 느낀 유페미아는, 그의 옷자락을 꼬옥 말아 쥐었다.

“당신 아이…… 더 많이 낳아 줄게요……”

“……”

“모자란 게 많지만…… 앞으로는 노력도 해서…… 당신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내가 될게요……”

“……”

“그러니까…… 내 곁에 있어 주지 못할 일은, 절대 하지 마……”

울음만 없을 뿐이지, 그녀가 눈물을 머금고 있다는 건 조금씩 젖어드는 옷을 통해 선명히 알 수 있었다.

“어려운 게 아니잖아요…… 불과, 불과 몇 달 전만 해도……”

“유페미아.”

“시엘이 살아 있었을 때는……! 어디서든 나를 눈에 두고 싶어 했잖아…… 뱃놀이 가는 것조차 허락해주기 어려워했잖아……”

“……”

페르젠은 겉으로 티를 내지는 않았으나, 속으로 당혹을 금치 못했다.

분명 잘 감추었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그녀가 해당 접점을 알아차릴 수 있었던 걸까.

물론, 유페미아로서는 희미하게 직감만 하고 있었을 뿐이다.

왜냐하면 시엘 미드포드가 사망한 이후로, 페르젠의 행동과 분위기는 많이 달라졌기에.

“지금의 당신이 좋아요…… 상냥하고, 자상하고, 배려가 넘치는. 사랑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하지만.

“아주 가끔은, 그때가 그리워요…… 단순히 씨받이로써 당신의 정액을 받아내기만 했었을 뿐이라도…… 나를 향한 소유욕을 결코 감추지 않았으니까……”

“……”

“지금도 변치 않았다면, 배려 때문에 당신의 감정을 억누르지 말아요……”

언제나, 어디서든.

나를 안고 싶다면 말해요.

“주저 없이…… 치마를 걷어 올릴게요……”

또, 목소리를 듣고 싶다면.

“목이 쉬어버릴 때 까지…… 당신을 사랑한다고 말할게요……”

그러니까……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약속해줘……”

유페미아가 고개를 더욱 깊게 묻는다.

그 애잔한 몸부림에, 줄곧 침묵을 유지하던 페르젠은 커다란 손을 뻗어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상냥하게 쓸어내렸다.

“그래…… 내가 네 곁에 있어줄 수 없는 일은, 결코 하지 않으마.”

24년.

어쩌면 페르젠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그는 선의를 위한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 유페미아를 보고 있자하니……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 * * * *

많이 피곤했던 걸까.

누운지 얼마 되지 않아, 페르젠은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하지만 점점 밤이 깊어지고 있음에도, 잠이 오지 않는 유페미아는 조심스레 몸을 꼼지락 거렸다.

얼굴을 묻고 있는 페르젠의 탄탄한 가슴팍, 집중해서 귀를 기울이면 그의 심장 고동소리가 들려온다.

그에 그 주변을 가느다란 손으로 매만지며, 유페미아는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그리고는 반듯하게 누운 뒤, 천천히 손을 뻗어 자신의 배 위에 얹힌 페르젠의 손을……

스륵.

옷자락 안으로 집어넣는다.

“응……!”

그러자 미약하게, 자신의 가슴을 움켜쥐는 페르젠의 손길이 느껴졌다.

이곳은 자신의 심장과 가장 가까운 장소.

때문에 유페미아는 마치 자신의 심장이 그의 손에 붙들린 듯한 느낌을 받았다.

한 때는 무서웠던 이 손길에, 어찌 이리도 안도 섞인 평온함이 느껴지는 건지.

고개를 살짝 기울여 페르젠의 심장 소리를 들으며, 유페미아는 눈을 감았다.

신기하게도 졸음이 마구 몰려온다.

‘이 또한……’

그와의 추억으로 남게 될까.

추억이란 단어에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려웠으나.

적어도 유페미아는 일 년이라는 시간이 지났을 때, 해당 365일 중 선명히 기억할 수 있는 날들을 추억이라 믿었다.

그러니 조금이라도 더,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로서 간직해온 추억 보다.

페르젠의 아내로서 자신의 뇌리에 각인 될 날들을 많이 만들고 싶었다.

* * * * *

‘하……’

오후 9시.

라우라는 쓴웃음을 지으며 자신의 무릎 위에 얹힌 토끼 인형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해당 마법을 구사할 때는……”

미친년.

자연스레 라우라는 속으로 거친 욕을 읊조렸다.

자신의 방에서 함께 자지 않겠냐고 했던 유리엘의 제안을 받아든 게 실수였다.

어느 정도의 친분을 미리 쌓아두는 건 나쁠 게 없다 싶었는데.

이 여자는 적의 습격과, 실기 시험, 오랜 시간에 걸쳐 이동한 피로는 생각도 하지 않는 건지.

자신을 붙잡고 원소 마도학의 이론에 대해서 알려주고 있었다.

최연소로 아폴리온 등급의 원소 마법사가 되었던 사람에게 도대체 무슨 가르침을 주려는 걸까.

사실 거기까지는 참을 만 했으나, 이 망할 토끼 인형은 노골적으로 아이 취급을 하는 것 같아 굉장히 불쾌했다.

아니, 사실은 유리엘이 왜 이러는지 라우라는 어렴풋하게 알고 있었다.

동침 상대로 간택 되지 않았다는 사실을 억지로 부정하고 싶은 거겠지.

자신을 가르치고 있는 덕분에 어차피 페르젠과 함께 잘 수가 없었다는……

그런 조잡하고 구차한 변명으로 스스로에게 위안을 안겨주려는 발버둥.

‘도대체……’

라우라는 속으로 짙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수수하고 보잘것없는, 또 가장 실용적인 책상과 의자라는 물건을 조합해 똥이나 만들어내는 여자가 뭐가 그리 좋다고.

……페르젠은 유리엘에게 오지 않았던 걸까.

여자인 자신이 봐도 유리엘이 훨씬 매력적인데.

참으로 기구한 결과였다.

어찌되었든 이것으로 알 수 있는 하나의 사실은……

페르젠이 유리엘과 동침하는 날은 편한 밤이 될 것이고.

페르젠이 유페미아와 동침하는 날은, 아주 불편한 밤이 될 것이란 거리라.

“그래서 해당 원소 마법을 조합할 때는……”

“……”

꾸국!

무릎 위에 얹힌, 새하얀 토끼 인형의 두 귀가 가녀린 손에 붙잡혀 길게 늘어졌다.

* * * * *

밤 11시가 넘어 가는 시점.

주절주절 말을 더 이어나가려던 유리엘은, 폴싹 쓰러져 잠든 라우라를 보며 자조 섞인 웃음을 머금었다.

“미안해……”

라우라의 추측대로 그녀는 추하더라도 위안을 삼을 변명거리가 필요했다.

그래서 알프레드 가문이라는 직위로 은연중에 압박을 가해 부탁을 거절할 수 없게 만들었다.

또, 이토록 예쁜 아이가 페르젠 곁에 달라붙어 있었으니 겸사겸사 미리 견제를 한 것도 있었다.

변방의 루에르그에서 자라난 그 여자는 로젠베르크의 이름값에도 벌벌 떨며 어려워 할 테니.

‘정말…… 추하다.’

사랑을 하는 여자는 아름다워 진다더니.

그것은 틀림없이 새빨간 거짓말이리라.

‘갑갑해……’

인형을 꼬옥 끌어안고 잠이든 라우라에게 이불을 덮어준 뒤, 유리엘은 발코니로 나섰다.

가벼운 산책이라도 하기 위함이었다.

굳이 복도로 나가지 않는 건, 혹여나 페르젠과 그 여자가 몸을 섞는 과정에서 흘러나오는 신음을 들었다가는.

제자리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못할 것 같기 때문이었다.

폴짝!

이윽고 발코니에서 뛰어내린 유리엘은, 자신의 마력을 소비해 대기에 간섭하여 아무탈 없이 착지를 완료했다.

후웅!

그러자 마력에 의해 인위적으로 얽혀든 공기의 흐름이 원래 상태로 돌아가며 상당히 거친 바람을 일으킨다.

그에 근처에서 호위를 서던 기사 한 명이 검을 빼들고 달려왔다가 도로 집어넣었다.

“어디가십니까?”

“산책 좀 나갔다 올 거예요. 호위는 필요 없어요.”

“……”

“잠깐만 나갔다가 올 테니 걱정 말아요. 그이한테 문책 받는 일 없게 할 테니.”

“알겠습니다.”

꾸벅, 고개를 숙이며 물러나는 기사였으나.

그는 근처의 동료에게 해당 사정을 설명한 뒤 은밀하게 유리엘의 뒤를 따랐다.

겉옷을 걸쳐 입고 저잣거리로 걸어가는 유리엘.

그녀는 페르젠에게 문책 받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했지만…… 세상일은 모르는 것이었다.

그리고 뒤를 따라 붙고 있는 기사는 죽어도, 브뤼테인의 혈통에게 미움 받고 싶지 않았다.

도중에 운이 나빠 들키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차라리 그게 마음이 편하리라.

이내 비가 그쳤기 때문인지 활발히 장사를 하고 있는 노점들 사이로 유리엘이 걸어가자, 기사는 한숨을 내쉬며 인파에 섞여 들었다.

다행히 놓치지는 않았고, 어떤 노점 앞에 걸음을 멈춘 유리엘을 확인할 수 있었다.

귀를 기울여 보니……

“이 팔찌만 사면 사랑을 관장하는 여신님께서 연인에게는 영원한 사랑의 축복과, 부부에게는 사랑스러운 아이를 내려주신다네!”

“저러지 말라고 몇 차례 경고를 했었는데……”

어떤 신을 믿고, 어떤 신을 존경하는 지는 자유이나.

해당 신과 관련하여 특정 교단이 형성될 수도 있는 행위를 제국은 일절 금하고 있었다.

이것은 비단 에르네스 제국뿐만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 법을 너무 엄격히 제정할 수는 없었기에, 이처럼 노점상이 단순한 물건의 홍보로 신을 들먹이는 건 처벌하는 게 굉장히 애매했다.

그래서 이따금 경고를 주는 선에서 끝이 났는데……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릴 뿐이다.

때문에 기억만 해뒀다가, 나중에 한 번 더 주의를 줘야겠다고 생각한 기사는 이동하는 유리엘을 재빨리 뒤따랐다.

아니, 뒤따르려는 순간이었다.

“……!”

대충 얼굴을 가린 유리엘이 다시금 뒤로 걸음을 돌리자 기사는 황급히 고개를 숙인 뒤 자연스레 옆으로 이동했다.

그리고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니, 그는 미신일 게 분명한 해당 팔찌를 몰래 구매하는 유리엘을 볼 수 있었다.

‘허……’

그 광경을 뇌리에 새겨 넣는 순간, 기사의 머리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하나.

‘개 좆됐군.’

알프레드 가문의 여식이 저런 노점품을 왜 구매했는지는 모르겠으나.

그는 술을 먹으면 남의 비밀을 주절주절 마음대로 발설하는 안 좋은 버릇이 있었다.

그래서 동료들도 가급적 사적으로 중요한 말은 해주지 않는 편인데……

‘하……’

술을 처먹은 다음 이것을 발설하게 되는 순간 어떤 후환이 뒤따를까.

그녀는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였으며, 동시에 브뤼테인의 적자인 페르젠의 아내였다.

아마 발설하게 되어 유리엘이 모욕을 느끼게 되는 순간, 상상도 하지 못할 후환이 뒤따르겠지.

‘차라리……’

나오지 말걸 그랬나.

기사는 울상을 지으며 후회했다.

그렇게 여름, 어느 날의 밤.

한 애주가는 어쩌면 평생토록 이어질, 강제적인 금주를 하게 되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일단, 업로드를 먼저 하고 계속 쓰기는 하겠지만…… 완성되는 대로 막간 마지막 부분을 업로드 해보겠습니다 ㅠ.ㅠ

적어도 내일 까지는 올 수 있다고 확신을 드리고 싶으나 그러지 못하는 저를 용서해주세요.

* * * * *

노벨티콘 관련하여 질문이 있어 안내를 드립니다.

오픈 스토어 등장시 등록할 예정이며

순애를 더럽히지마! 라는 해당 콘은 대사가 수정 되어 정수기 아니야! 로 수정될 예정입니다.

이런 건 순애가 아니야 라고 울상을 짓고 있는 리지 까지는 괜찮다고 생각하지만

버럭 화를 내며 순애를 더럽히지마! 라고 하는 리지의 콘은 혹여나 분쟁의 소지가 있을 것 같기 때문입니다.

더불어 유페미아가 울면서 끄아앙! 거리는 콘과 라우라의 콘 1종이 추가 될 예정입니다.

창고님의 일정에 따라 지체가 될 수도 있습니다.

* * * * *

찻잔의 손잡이를 만지는 페르젠이 한쪽 밖에 없는 손잡이에 불편함을 느끼지는 않을까? 라는 질문을 주셨는데.

강박증이라는 게 절대적인 기준이라는 게 없어서 더 짜증이 납니다.

어떤 것에는 강박을 느끼고, 또 어떤 것에는 강박을 느끼지 않고.

그 기준이 제멋대로이기에 더욱 화가 나는 것이죠.

그러니 그리 받아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정말 불변할 절대적인 기준으로 강박을 묘사했다가는.

자지가 앞쪽에는 달렸는데 왜 뒤쪽에는 안달렸지? 부터 거슬리지 않겠어요……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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