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9 119─막간
우산을 펼쳐들고, 페르젠과 함께 빗속의 거리를 걷던 라우라는 힐끔 그의 발치를 내려다보았다.
‘어울리지 않게……’
무척이나 자연스레 자신에게 보폭을 맞추어 주고 있다.
물론, 이 정도는 기본 소양이라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흔하게 찾아볼 수 있는 배려였으나……
이틀 전, 자신을 막다른 곳으로 몰고 노예를 자처하라던 그 음흉한 애송이가 맞나 싶어 라우라는 적잖은 괴리감을 느꼈다.
아니, 피어오르는 건 비단 괴리감뿐만이 아니었다.
달갑지 않은 동질감.
정확히 수정을 하자면, 익숙함이라고 하는 게 옳으리라.
페르젠이 고압적이고 독선적이며, 한편으로는 음흉하기도 했던 늑대의 면모를 인간의 탈 아래에 감추고 있는 것이라 한다면.
자신들, 제노바 백작가의 혈통들은 뒤집어쓴 인간의 탈 아래에 괴물을 숨기고 있었으니까.
흠칫!
일순간 우산을 쥐어들고 있는 라우라의 가느다란 손이 미약하게 떨려왔다.
고운 눈가도 함께 찌푸려졌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 머금고 있던 실없는 상념이 비극적인 전생의 회상으로 이어지려 하자 본능적인 거부감을 느낀 것이다.
‘짜증나게……’
분명, 닮은 점 하나 없어 보이는데.
어딘지 모르게 닮은 점이 있는 듯한 오묘한 기시감.
흉측하게 얼굴이 일그러진 사람에게 억지로 거울을 들이밀면 이런 기분일까.
음흉하고 짓궂은 눈앞의 애송이가 오늘 따라 왜 이리도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라우라는 속으로 페르젠을 천천히 곱씹었다.
“흐앗……!”
그러나 그 곱씹음도 얼마 가지 못한 채, 라우라는 귀여운 비명을 내질렀다.
왜냐하면 아무런 예고도 없이, 페르젠의 두터운 팔뚝이 자신의 허리를 난폭하게 끌어안았기 때문이다.
“무, 무슨……!”
주도권 하나 없는 주종 관계라 해도.
타인의 눈이 많은 밖에서 이리 함부로 손을 대는 건 지나친 무례일 터.
보기 드물게 얼굴을 붉히며 화를 내려는 라우라였으나……
“아……”
찰박!
상당히 급한 일이 있어 보이는 한 남성이, 우산도 쓰지 않은 채 거침없이 자신의 옆을 내달려 지나간다.
필시 페르젠이 손을 써주지 않았다면, 자신은 방금 전의 남성과 부딪친 끝에 꼴사납게 엉덩방아를 찍었겠지.
“가, 감사…… 하, 합니다……”
“걸을 때는 앞을 보거라.”
“네…… 죄, 죄송해요……”
“이런 걸로 사과할 필요는 없다.”
제법 키 차이가 있었던지라, 페르젠의 품에 안겨 두 발이 살짝 떠올라 있던 라우라는 그가 자신을 내려주자 두 손으로 우산을 꾸욱 붙들었다.
“가지.”
별거 아니라는 듯.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무심하게 앞으로 고개를 돌린 그가 다시금 걸음을 내딛는다.
그에 쫄래쫄래, 어미 새의 뒤를 따라 걷는 아기새처럼 라우라는 페르젠의 등을 보며 뒤따라 걸었다.
‘……’
의식하지 않으려 해도, 아직까지 선명히 남아 있는 두터운 팔뚝의 감촉이 허리 부근에서 맴돈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리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사내의 품에 안겨 어린아이처럼 몸이 부웅 떠올랐던 기분은, 무언가 여리고 나약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시켜주는 것 같았으니까.
……물론, 현재의 나이를 생각하면.
또, 그가 교수고 자신이 학생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상할 건 없으리라.
다만 그것을 알고 있어도, 보호를 받는다는 상황 자체가 라우라는 너무나도 낯설었다.
전생의 자신은 직면하는 모든 일들을, 오직 스스로의 힘만으로 해결을 해야 했으니까.
도움을 청할 사람?
한 명도 없었다.
주변에 있는 건, 현실에 굴복한…… 피를 나눈 괴물들뿐이었으니.
찰박.
건너가야만 하는 도로 앞, 6대의 마차가 줄지어 이동한다.
그에 페르젠과 함께 걸음을 멈춰선 라우라는 괜히 우산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렸다.
‘고작……’
사내의 품에 상당히 거칠게 끌어 안겼을 뿐인데.
그 여운은 어찌 이리도 오래 남아 맴도는 건지.
‘……’
모르겠다.
자신이 사내를 모르는 탓에 호들갑을 떠는 걸까.
그게 아니라면, 보호를 받았다는 그 상황 자체가 안겨주는 평온함과 안도감이 너무나도 달콤했던 걸까.
킁킁……
“아……”
상념에 빠져들길 잠시, 라우라는 몸을 움찔했다.
제법 가까운 거리에서 풍겨오는 페르젠의 고급스런 향수 냄새를 쫓아, 자신도 모르게 한걸음 다가갔기 때문이다.
주변에 멈춰선 사람은 상당히 많은데, 어찌 코끝으로 풍겨온 향수의 냄새가 페르젠의 것이라는 걸 한 번에 알아차렸는지.
라우라는 스스로가 조금 경박하게 느껴져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을 해보자면, 모르는 게 이상한 거리라.
괴벽의 발작이 끝나고 아침이 밝아 왔을 때, 자신의 몸에는 언제나 그의 냄새가 진하게 묻어 있었으니까.
“……”
옆에 서있는 페르젠을 힐끔 올려다보다, 라우라는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눈에 들어오는 것은 식당, 정확히는 해당 가게의 반투명한 유리.
그리고 그곳에 비추어지는 현재 자신의 모습에……
스륵.
라우라는 두 손으로 쥐어들고 있는 우산을 살짝 내려, 투영된 자신의 모습을 가렸다.
‘정말……’
나이에 맞지 않은 주책이 따로 없었다.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아니,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
그녀는 소녀인 자신이 너무나도 낯설었다.
* * * * *
페르젠의 도착 일정이 하루가 더 지체되고, 그 이유에 관해서도 자세히 알 수가 없자 유페미아는 적잖은 불안을 느꼈다.
과거, 아니 과거라 하기에도 미묘했다.
고작 몇 달 전에 불과했으니까.
정말 최소한의 명분만을 쥐어들고 루에르그로 올라와 자신을 겁탈했던 남자.
그 이후로도, 사실상 씨받이로 다루어지며 그의 정액을 강제로 받아내야만 했다.
분명 그러한 시작으로 묶여진 사내가 곁에서 없어진 것인데.
해당 이틀의 시간은 오히려, 그의 빈자리를 이제는 더 이상 그 무엇으로도 대체할 수 없다는 걸 선명히 알려주기만 했다.
그래, 본래의 자신──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라는 정체성 보다.
이제는 명확히, 페르젠의 아내라는 정체성이 더욱 깊고 짙게 자신을 잠식하고 있는 것이다.
실제로 페르젠이 아카데미에 도착하여 곧 돌아올 거라는 소식을 전해 받았을 때는 얼마나 기뻐했던가.
‘조금만 있으면……’
손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어루만지며 유페미아는 비가 추적추적 내리고 있는 창밖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기쁨도 잠시, 혹시 가장 먼저 저택으로 들어선 페르젠이 자신이 아니라 유리엘의 방으로 가면 어떻게 해야 할까.
‘아니야.’
유페미아는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페르젠이라면 틀림없이 자신의 방으로 먼저 오리라.
그리 흔들리지 않을 듯한 믿음을 품고, 조용히 페르젠을 기다리는 유페미아였으나……
막상 그가 수많은 호위들을 데리고 정문을 지나치는 광경을 보자, 앉아 있던 의자에서 다급히 일어나 복도로 나오고 말았다.
“……”
“……”
그리고 우연이라 하기에는, 지나치게 필연 같은.
한적한 복도에서 정확히 마주치는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혹시 그녀도 자신과 같은 심정이었을까.
가진 것 없고, 초라하고, 미색도 뛰어나지 못한 자신에게 완벽에 가까운 그녀가 질투를 하고 불안함을 내비친다는 것은 상당히 기분이 좋았지만……
그런 그녀에게 자신 또한 동일한 불안함을 느끼고 질투를 하고 있는 상황이, 적잖은 비참함을 얹혀주었다.
그에 먼저 마주친 시선을 피하는 유페미아였으나, 그 모습을 지켜보고 있던 유리엘은 일말의 우월감도 느끼지 못했다.
어찌 이것을 기세에서 찍어 누른 결과라 볼 수 있을까.
오히려 유리엘은 죽을 만큼 부끄럽고 수치스러웠다.
이럴 거면 차라리 방 안에 있는 게 나았을 텐데.
그 찰나의 시간 동안 얼마나 많은 생각이 들던지.
‘정말……’
저 보잘것없는 여자에게, 여유를 품고 일관하지 못하는 자신이 싫었다.
‘또……’
아랫배를 조심스레 쓰다듬는다.
유페미아 입장에서는 그저 무의식적인 행동이었지만.
유리엘 입장에서는 그것이 자신의 심사를 뒤틀리게 하려는 괴롭힘처럼 보였다.
그래서 유리엘도 그만 고개를 돌리고 말았다.
힐끔, 시선을 내려 자신의 아랫배를 바라본다.
아이를 품어본 경험은 없는데도.
스며드는 이 허한 느낌은 무엇일까.
아마 자신과 다르게 그녀는, 따뜻한 충만함을 느끼고 있겠지.
차마 외면할 수 없는 질투심에 유리엘은 이를 악물었다.
또각.
그리고 잠시 뒤, 천천히 위로 올라오는 페르젠의 발소리가 들려오자 유리엘은 억지로 표정을 풀었다.
하지만 무언가 이상했다.
페르젠 혼자서 내는 발소리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이윽고 그 의문을 해소시켜주겠다는 듯, 자신들 앞으로 모습을 드러낸 그의 곁에는……
“……”
“……”
만개를 앞두고 있는, 아름다운 소녀가 서있었다.
* * * * *
거리를 거닐어 도착한, 화려하고 웅장한 저택 앞.
아름다운 꽃들과 싱그러운 나무들로 이루어진 화단이 각자의 매력을 뽐내며 시선을 빼앗는다.
꽃은 제법 좋아하는 편이었기에, 라우라는 아름답게 가꾸어진 화단을 구경하며 저택의 문 앞으로 페르젠과 함께 당도했다.
“그대들은 잠시 1층에 대기하고 있게. 시녀들이 내려와서 안내를 해줄 테니.”
“알겠습니다.”
우산을 접고 안으로 들어서는 페르젠이 곧장 자신을 데리고 위로 올라간다.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인 유리엘과, 쓰레기 같은 책걸상 따위를 만들어낸 녹색머리의 여인에게 자신을 소개시켜주기 위함이리라.
가장 먼저 들리게 될 방은 어디일까.
라우라는 내심 속으로 무척이나 궁금해 했다.
그것을 통해 이 사내가 가장 애정을 주고 있는 여인이 누구인지 어림짐작 할 수 있을 터.
역시, 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그녀일까?
또각.
하지만 위층의 복도로 올라온 순간, 라우라는 흥이 식어버렸다.
왜냐하면 유페미아와 유리엘, 두 여인이 모두 방에서 나와 페르젠을 기다리고 있었기에.
“그 아이는……”
“로젠베르크로 내려가지 않고…… 왜?”
“루에르그의 영지 마법사를 지원할 생각이 있다고, 이번 기회에 한 번 들리고 싶다더군. 그럼…… 라우라.”
“네, 네……”
페르젠의 부름에 앞으로 다가선 라우라는 치맛자락을 살짝 들어 올리며 허리를 숙였다.
병약한 가녀림과 위화감 없이 어우러지는 기품 있는 예의.
“이, 이번에…… 다, 당분 간…… 시, 신세를 지게 된…… 라우라 드…… 샤를, 로젠…… 베, 베르크라고 합니다……”
가능한 천천히, 더듬지 않도록.
라우라는 호흡을 길게 끌며 다소 곤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유리엘과 유페미아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응대를 해준 뒤, 슬그머니 페르젠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들어 올린 라우라는 그 틈에, 제법 편한 차림으로 옷을 입고 있는 그녀들을 스윽 훑었다.
아카데미 내에서 차려 입은 복장이 아닌, 한결 가벼운 저택 내에서의 복장은.
솔직히 말해서 음탕한 몸매를 아주 적나라하게 부각시켜주고 있었다.
‘저 정도면……’
출산에 무리가 없다 못해, 아이를 서너 명 정도는 거뜬하게 낳을 수 있지 않을까.
저러한 여인들이 곁에 있으니, 더는 어떠한 방안도 없다 싶어 그의 첩이 되어 생을 보내게 되었을 때.
아이를 가지기 싫다 해도 아무런 불만이 없겠지.
그 생각에 확신이 들자, 라우라는 희미한 기쁨이 차올랐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118화 마지막 단락에 마차를 타고 올것처럼 서술을 해놨는데.
생각 해보니 해당 호위 인원들을 대동한 채, 페르젠과 라우라만 마차를 타는 것도 이상하고.
그렇다고 기사들이 마차 속도에 맞추어 달렸다가는.....
그래서 118화 마지막 단락에 마차를 타고 가지 않는 걸 선택하는 페르젠의 대사와 서술이 추가 되었습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