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8 118─D.C
끼릭.
가까이, 조금 더 가까이 휠체어가 나아간다.
그리고 바로 코앞에서 자신의 보랏빛 눈동자에 스며드는 페르젠의 모습에……
“끄으…… 흐끅!”
리지는 세차게 딸꾹질을 하며, 이불을 뒤집어쓰는 아이처럼 두 손을 들어 몸을 웅크렸다.
그것은 생존 본능에 따른, 반사적인 방어 기제.
“……”
그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태연자약하게 시계를 힐끔 쳐다보았다.
이미 그녀에게 제대로 된 시험을 치를 여력 따위 남아 있지 않다는 걸 확인했으면서도, 잔인하게 모르는 척을 하는 것이다.
“리지.”
“아…… 하으……! 으, 끄흑!”
“시험을 시작하지.”
페르젠의 목소리는 귓가로 들려오지만, 리지는 그의 말을 하나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저 경련하듯 몸을 떨며, 비명 없는 비참한 눈물만을 끊임없이 쏟아낼 뿐.
꿈틀!
그리고 자신 앞에서 이리도 애처롭고 나약하게 구는 리지의 모습에, 페르젠은 차마 입꼬리가 말려 올라가는 걸 막을 수가 없었다.
활짝 열려 있는 창문 너머로 사람들이 지나다니고.
문밖에는 기사들을 포함한, 시험을 끝낸 학생들이 떠들썩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발작한 트라우마가 그녀를 집어 삼켰다는 건, 원래 보다 더욱 깊은 곳에 자신이라는 존재가 뿌리를 내렸다는 거리라.
‘인정은 해야겠지.’
그동안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페르젠은 리지가 적잖게 거슬렸다.
왜냐하면 높은 확률로 그녀는 시엘 미드포드를 도와 악당의 심장을 꿰뚫는데 이바지할 요소였을 것이고.
그러한 점 때문에 자신이라는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는 순간, 다가서기도 힘들 만큼 찬란한 광채를 흩뿌리는 빛이 되었을 터.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라는 소녀에게서 불편함은 느껴지지 않았다.
오히려 애틋함이 느껴지는 듯 했다.
알을 부수고 나오지 못한 병아리.
나비가 되지 못한 번데기.
그래, 자신의 손으로 철저힌 망가트린 끝에 더는 이빨을 들이밀 수 없다는 것을 확인하고 나서야……
비로소 페르젠은 눈앞의 소녀를, 한 명의 인간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다.
“시간이 더 필요 하느냐.”
“끄흡……!”
자상함이 가득 담긴 페르젠의 말에도, 리지는 아무런 반응을 하지 않고 눈물만을 흘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이 상황에 익숙해지기는 커녕, 자신을 무참히 범했던 페르젠의 모습이 뇌리에 끊임없이 떠오르고 있었으니까.
때문에 페르젠의 목소리와 은은하게 풍겨오는 고급스런 향수 냄새는, 해당 악몽을 더욱 선명히 되새겨주는 촉매 역할에 지나지 않았다.
기절하지 않은 것이, 어쩌면 하나의 기적이라고 볼 수 있을 터.
“이상하구나. 너는 분명, 내가 교수로서 행동해주길 바랐을 텐데.”
그게 아니라면.
“여기서 내가 너를 학생이 아니라…… 클로디아 가문의 영애로 봐주길 원하는 것이냐.”
“아…… 아……”
조곤조곤.
귓가로 스며드는 페르젠의 목소리를, 리지는 처음으로 이해했다.
그에 허겁지겁 자신의 제단을 통해 아공간을 열고, 아카데미에서 지급 받았던 시신이 담긴 관을 꺼낸다.
쿠웅!
바닥으로 떨어지는 충격에 반쯤 열리는 관.
그곳에 누워 있는 시신을 불안정한 마력으로 사역하는 리지.
공포에 물든 보랏빛 눈동자는, 자신의 몸을 감싸주고 있는 두 손 너머를 통해 그의 발끝에 간신히 머물렀다.
“……”
그 모습을 보며, 느긋하게 자신의 마력을 방사한 페르젠은 연결된 흐름으로 파고들었다.
수치화를 통해 보이는 구현율은, 앞서 시험을 치른 13명의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가장 압도적이고 우수한 수치.
하지만 탈취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체감상 고작 1초.
연결이 너무 불안정했기에, 이리도 한심하고 허무한 광경이 연출되어버린 것이다.
그러나 리지는 화를 내지 않았고, 항의도 하지 않았다.
그저 얼른 이 지옥 같은 방을 조금이라도 빠져 나가고 싶은 간절한 생각뿐.
하지만……
“미리 말해주는 건 공정하지 않을 수도 있겠으나, 축하한다. 가장 우수한 성적이구나. 리지.”
예상을 벗어난 페르젠의 말에, 리지는 입술을 까득 깨물었다.
“도, 도, 동정……”
“……”
“하, 하지 마……”
작금의 자신이 얼마나 비참하고 비굴한지, 말하지 않아도 스스로가 더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페르젠으로부터 받고 싶은 건 멸시와 조롱이지, 동정 같은 게 아니었다.
애초에 남을 가엾게 여길 수 있는 자가, 이리도 잔혹한 짓을 할리가 없을 터.
‘하…… 아하하……’
하기야 그런 식의 위선으로, 자신을 옥죄는 것만큼.
가장 고통스럽고 치욕적인 모멸의 선사가 없으리라.
“마음대로……”
“……”
“하, 하세요……”
결국, 그것조차 얌전히 받아들인 리지는 그의 발끝에 간신히 머무르던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그 말에 속으로 웃던 페르젠은,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흠칫!
“이것이 동정에서 비롯된, 불합리한 처사라고 생각하느냐.”
“흐…… 흑! 흐끅!”
가까이 걸음을 옮긴 페르젠이 리지의 휠체어──팔걸이 부분을 짚는다.
그의 손길이 닿을 듯 말 듯한 숨 막히는 거리.
“착각하지 마라. 이 시험은 애당초…… 설계부터 네게 불합리했으니까.”
자신이 덧입힌 트라우마가, 얼마나 강력한 목줄이 되어 그녀를 구속하고 있는지.
그 결과를 알고 싶었기에, 페르젠은 이러한 자리를 마련했다.
물론, 뤼펠트 숲이 날아간 만큼 당장 진행 가능한 시험 방식이 이것밖에 없다는 점도 있었지만.
엄연히 그것은 부가적인 이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때문에 페르젠이 직접적인 결과가 아닌, 자신만이 알고 있는 수치화를 토대로 읽어낸 구현율로 성적을 매긴 것은.
불합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균형을 맞춘 합리적인 처사라고 볼 수 있을 터.
“이 정도면, 만족스런 설명이 되었느냐.”
“으…… 흡! 끄흑……!”
더는 도망칠 곳이 없음에도.
끼릭!
리지는 등을 내보이듯, 잔뜩 몸을 웅크려 그가 없는 곳으로 파고들려 했다.
“너는, 가장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지 않는구나.”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그녀의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린 페르젠은 리지의 두 팔목을 부드럽게 움켜쥐었다.
“아…… 아아……!”
화들짝!
경련하듯, 소스라치게 놀라는 리지가 입가를 뻐끔 거린다.
그만큼 자신의 살결에 닿은 페르젠의 손길이 공포스럽고, 또 두려운 것이다.
이윽고 한계까지 내몰린 와중에도, 어디서 그런 힘이 나오는 건지.
싫다는 한 마디를 내뱉을 기력조차 아껴, 리지는 발악에 가까운 저항을 펼쳤다.
끼릭!
끼릭!
흔들리는 휠체어를 따라, 여리고 새하얀 손목이 붉게 물들어간다.
“흐읍! 아……! 아……”
하지만 그녀의 두 팔은, 그 저항이 무색하리만큼 너무나도 간단히 그의 손아귀에 이끌려 천천히 벌어졌다.
그 끝에 두 팔로 애써 감싸 안고 있던 제 몸이 페르젠 앞에 드러나자……
질끈!
리지는 두 눈을 감았다.
그러나 시각을 차단한 만큼, 청각은 더욱 예민해지는 법이었기에.
“리지.”
그녀의 귀는, 그 어느 때보다도 선명히 페르젠의 목소리를 받아들였다.
“대화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며 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지키려 들지 않는다면.
“나는…… 너를 나쁜 아이로 볼 수밖에 없을 것 같구나.”
“하…… 으, 아으…… 흑……!”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가 말하는 옳고 그름은, 그저 한 소녀를 희롱하기 위한 가변적이고 주관적인 잣대에 지나지 않았다.
굳이 따를 필요가 없는, 무가치의 기준점.
하지만 이미 그것을 자신의 잣대로 판단할 신념조차 없어진 리지는, 단순히 페르젠에게 나쁜 아이로 새겨지고 싶지 않았기에……
파르르 떨리는 눈가를 억지로 떠서,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로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 하읍!”
숨이 턱하니 막혀온다.
잠깐 맞추었던 초점은 순식간에 흐트러졌다.
오버랩 되는 끔찍한 악몽.
당장이라도 자신의 두 손을 붙들고 있는 그가, 흉물스런 성기를 꺼내 자신의 소중한 비처를 끔찍하게 망가트릴 것만 같았다.
“하…… 학……! 하…… 하악!”
과도할 정도로 불규칙해지는 리지의 호흡.
“……”
잡다한 지식을 많이 섭렵했던 페르젠이었기에, 깊지는 않아도 얕지는 않은 의학적 지식으로 그것이 과호흡 초기 증세라는 걸 알아 차렸다.
리지의 경우 신체적 문제라기보다는 정신적인 문제일 터.
때문에 페르젠은 그녀의 두 팔을 붙들고 있던 손을 떼어내고, 뒤쪽에 위치한 원래의 의자로 돌아가 살포시 앉았다.
그러자 리지의 호흡이 아주 천천히, 원래의 규칙을 되찾아간다.
“으…… 흐…… 하…… 하아…… 하아………”
과도할 정도로 긴장된 몸에 찾아오는, 가뭄의 단비와도 같은 평온한 이완.
그리 축 늘어지는 리지의 모습을 보며, 페르젠은 옆의 찻잔에 따라진 다 식은 홍차를 한 모금 마신 뒤 입을 열었다.
“리지. 어릴 적 내게 춤을 신청해보라고 권유했던 네 아비는.”
“……”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느냐.”
흐릿한 초점으로 바닥을 응시하던 리지의 눈동자가 순간적으로 페르젠의 모습을 두 눈에 담으려다 멈춰 선다.
“사교계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던 내게, 처음으로 친구가 되어주라고 했느냐.”
달그락.
찻잔을 내린 페르젠이 피식 웃었다.
“그럴 리가 없겠지.”
“……”
“아마도 네 아비는, 권력욕에 눈이 멀어 너를 내게 보냈을 것이다.”
“……”
“그도 그럴 게, 이미 춤을 신청했던 무수한 영애들이 거절 당한 것을 보지 않았느냐?”
“……”
“그 날 나를 올려다보던 네 눈동자는…… 마치 곧 굶어 죽을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음식을 구걸하는 어미 같았지.”
그러니, 연회가 있었던 그날 밤.
어찌, 너의 아비가 네게 배수의 진을 선사하지는 않았더냐.
입가에 은은한 비웃음을 머금은 채, 페르젠은 악마가 속삭이는 것처럼 말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이미 죽은 시점이기에, 진의여부를 판단할 수 있는 건 오직 기억하고 있는 서로의 과거뿐.
때문에 페르젠은 이런 식으로 그녀의 마음 한편에 암귀를 심어 놓았다.
전개와 과정, 그리고 결말은 개입할 여지가 없다.
하지만 발단만큼은 그러지 않았기에, 페르젠은 늘 해오던 대로 악당이 살아가는 방식을 이행한 것이다.
이미 신념이 꺾여 버렸고.
가족이 죽는 것이 두려운 그녀는 폭풍우 속을 나아가는 항해를 그만두고 싶을 터.
그러니……
‘언제든 원한다면, 이 속삭임에 귀를 기울이거라. 리지.’
세상에 멈출 수 없는 인생의 열차는 없다.
그저, 멈추지 않을 뿐.
물론, 그녀가 자신의 오라비들에게 제동을 걸 수 있을 거란 기대는 하지 않는다.
하지만 가장 중대한 동기를 빼앗고, 남게 되는 것이 악에 받친 아집뿐일 때.
그것을 쓰러트리는 것이 얼마나 간단하겠는가.
“그럼…… 시험은 종료다.”
뒤죽박죽, 온갖 혼란스러움이 뇌리를 어지럽혔지만.
그 와중에도 나가봐도 좋다는 페르젠의 선언이 떨어지자, 리지는 곧바로 불안정한 연결을 통해 시신을 사역한 뒤 자신의 휠체어를 밀었다.
끼릭!
아니, 그대로 휠체어를 밀어 방을 나가려던 순간이었다.
“그대로 나가게 되면, 주변 일부를 진공으로 만든 보람이 없지 않느냐.”
“아……”
“자. 훌쩍임을 멈추고, 고개를 더욱 숙이거라.”
비가오고 있어 햇살은 방 안으로 들어오고 있지 않은데도, 자신의 뒤에 선 페르젠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지며 짐승처럼 덮쳐드는 듯한 환영이 보인다.
이내 커다란 손이 자신의 머리를 꾸욱 누르자, 리지는 고분고분 훌쩍임을 삼키며 머리를 푹 숙일 수밖에 없었다.
“이 방을 나가면,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 그 누구와도 마주하지 않고. 바로 화장실로 가서 가벼운 세안을 하는 것이다.”
“흐, 흐윽!”
“어차피…… 가야하지 않느냐.”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부드럽게 옆구리를 타고 아래로 내려가는 그의 손이 자신의 아랫배를 꾸욱 누르자, 리지는 흠칫 몸을 떨며 다리를 오므렸다.
배뇨감 따위는 일절 없었는데, 바로 뒤에서 읊조리는 그의 목소리와 손길에.
리지는 찌르르하게 올라오는 배뇨감을 느끼며, 여린 손을 말아 쥐었다.
“기말 고사, 고생했다. 리지.”
딸칵.
친절히 앞으로 나선 페르젠이 문고리를 돌려 문을 열어준다.
끼이익.
나무로 만들어진 문에 달린, 경첩으로부터 울려퍼지는 듣기 싫은 소음.
하지만 지금 만큼은, 그 소음이 어찌 그리도 반가울 수가 있는 건지.
끼릭.
휠체어를 움직여, 이 지옥과도 같은 방을 나선다.
물론……
눈물로 부어오른 얼굴을 그 누구에게도 보여주지 않고.
또, 울어서 쉬어버린 목소리를 그 누구에게도 들려주지 않으며.
“……”
그렇게 리지가 자신이 읊조린 말을 고분고분 수행하며 나서는 모습을 보고, 페르젠은 몰려오는 피로에 잠시 눈을 감은 뒤 대기 중인 기사에게 말했다.
“학생들에게 아침을 먹이고, 돌아가도록 하지.”
“알겠습니다.”
“음……”
분명, 조금 전에 홍차를 마셨을 텐데.
다시금 차오르는 갈증에, 페르젠은 나서려던 걸음을 돌려 찻잔을 쥐어든 뒤 천천히 목을 축였다.
아직까지 추적추적 내리는 빗소리가 닫힌 창문 너머로 희미하게 들려온다.
‘도의적인 의미에서…… 내가 저질렀고, 또 저지르고 있는 일들은 얼마나 잔혹하다고 할 수 있을까.’
찻잔의 손잡이를 스윽 매만지며, 페르젠은 옅게 웃었다.
‘하등 의미가 없는 고민이지.’
정당한 것을 강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기에.
사람은 누구나가, 이미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어 자신의 신념으로 삼고 살아간다.
그래.
‘오직 그 뿐.’
달그락.
찻잔을 내려 둔 페르젠이 방을 나섰다.
이제는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 *
반나절의 시간에 걸쳐 수도의 아카데미로 돌아온 페르젠은, 잠깐의 쉴 틈도 없이 총장인 엘리자베스 황녀를 만나 봬야만 했다.
아마 못해도 5 ~ 6 시간 정도는 잡아먹히지 않을까 싶었지만.
적의 암살 목표가 자신이었기에, 쌓인 피로와 놀랐을 마음을 진정시키고 오라는 의미에서 조사 날짜가 하루 뒤로 미루어졌다.
내심 마음 같아서는 오늘 당장 협조를 하겠다고 말을 하고 싶었으나, 적잖은 피로감이 쌓여 있는 건 사실이었기에 페르젠은 거절하지 않고 받아들였다.
타악.
그렇게 총장실을 나오니, 어찌 그리도 많은 기사들과 마도병단 소속 마법사들이 줄지어 서있는 건지.
페르젠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필요 없다고 하면, 명을 받은 그대들만 힘들어 지겠지.”
“예. 그렇습니다……”
어차피 조사를 마치고 나면 곧바로 루에르그로 올라갈 예정이었기에, 그때까지만 참자고 생각하며 페르젠은 말끔히 받아들였다.
“가지.”
방학이 시작하여 평소와 다르게 한적한 분위기, 그곳에 스며든 고요함을 느끼며.
페르젠은 자신을 뒤따르는 호위 인원들과 함께 본관의 1층으로 내려왔다.
“……”
그러자 마차가 있는, 주차장으로 향하는 입구 쪽.
무어라 대화를 나누고 있는 리지와 로에르가 보인다.
과연, 저 대화의 내용은 무엇일까.
무척이나 궁금하고 흥미가 돋았지만, 당장은 집으로 돌아가 쉬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기에.
페르젠은 우선을 쥐어든 채, 천천히 걸음을 내딛었다.
저벅.
뒤를 따르는, 수많은 기사들과 마법사들의 발걸음 소리가 고요함을 깨트린다.
그에 자연스레 대화를 나누고 있던 리지와 로에르는 고개를 돌렸다.
자신들을 향해 걸어오고 있는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마주치는 시선 속, 리지는 특유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닥으로 내리 깔았지만……
로에르만큼은, 꿋꿋이 자신을 응시하고 있었다.
또각.
그래서인지 페르젠은 그대로 지나치려던 걸음을 잠시 멈춰 세우고, 석고상처럼 굳어 있는 로에르를 향해 무덤덤한 어투로 단 두 마디를 건넸다.
“운이 좋더군.”
“……”
“그리 생각하지 않나. 로에르 경.”
기사단 소속인 그라면, 대략적인 전말 정도야 진즉 전해 들었을 테니.
이 말에 담긴 진의쯤이야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을 터.
“수고하게.”
파앗!
가식적인 미소를 머금고, 그의 등을 몇 번 두드려준 페르젠은 우산을 펼쳤다.
그리고는 여전히 추적추적 비가 쏟아지고 있는 바깥으로, 멈춰 섰던 걸음을 내딛는다.
“이쪽은 주차장으로 향하는 길이 아니신데…… 만나실 분이라도 계십니까?”
"데려갈 아이가 한 명 있네."
"그러면 마부에게 해당 건물 쪽으로 미리 이동을 해있으라고 말을 전하겠습니다."
"굳이 그럴 필요는 없네. 마차를 타는 건 포기하기로 했으니까. 갑자기 이만한 인원을 준비도 없이 치렁치렁 달고가려면 걷는 수밖에 없겠지."
"죄송합니다."
"윗선 때문에 그대 고개만 무거워지겠어."
"하하……"
실없이 웃는 기사를 보고 페르젠은 고개를 돌렸다.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원래는 시간이 조금 더 걸릴 줄 알고, 기숙사에서 대기를 하고 있으라 했는데.
이런 식으로 일이 풀렸으니, 직접 찾아가는 수밖에 없으리라.
그렇게 A 기숙사로 향하는 길에 놓인 화단을 지나며, 비가 스며든 특유의 흙내음을 맡던 찰나……
파삭!
문득 가까운 수풀에서 들려오는 동적인 소리에, 페르젠은 고개를 돌렸다.
‘저건……’
아카데미의 정원에 풀어 놓은 다람쥐 한 마리를 통째로 잡아먹고, 깊숙이 도망치고 있는 뱀.
“제가……!”
독이 있든 없든, 학생들에게 위협이 될 수 있었기에 기사 한 명이 빠르게 나선다.
팟!
하지만 그 순간, 옅은 빗줄기를 맞으며 쏜살같이 하강하는 매 한마리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해당 뱀을 옭아맨 뒤 순식간에 공중으로 치솟아버렸다.
“……”
“하……”
허탈함에 실소를 터트리는 기사였으나, 페르젠은 우산을 조금 치켜들어 날아오른 매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눈을 떼지 않았다.
약육강식(弱肉强食).
세월이 흘러도 결코 변하지 않을.
가장 아름다운 자연의 순리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3연참이 아니라 죄송합니다 ㅠㅠ.
해당 파트 마무리에 기가 다 빨리네요……
리지와 페르젠이 얽힐 때가 제일 힘든 것 같습니다.
왜냐하면 심리 묘사를 실수 했다가는 페르젠이 중2병 처럼 보여지기 너무 쉬워서요.
* * * * *
D.C는 음악 기호에서 다카포의 줄임말입니다.
음악에 관심이 없는 분들도 이건 대부분 아실텐데.
곡의 맨 처음으로 가서 다시 연주를 하라는 뜻이죠.
전반적으로 리지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기도 했고.
105화 ( 안단테 ) 의 마지막 서술 부분이 해당 117화에서의 마지막 서술 부분과 수미 상관 구조를 이루고 있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네…… ㅎ 알아주시만 주시라구용 ㅠ^ㅠ
* * * * *
유페미아 추가 일러스트가 나올 예정입니다.
이걸 마지막으로, 엔딩 시점 때 까지 일러스트는 뽑지 않을 예정입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