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17화 (117/260)

EP.117 117─D.C

금방 그칠 줄 알았던 밤의 여름비는 이른 새벽까지 이어져 내리고 있었다.

그래도 빗줄기가 많이 얇아 진걸 보아하니, 아침이나 정오쯤에 그치지 않을까.

현재 시각은 오전 5시.

지나치게 빨리 일어났던 만큼, 창가로 가까이 다가간 페르젠은 그곳의 의자에 앉아 창문을 살짝 열었다.

추적추적.

거리로 쏟아져 내리는 빗소리가 무척이나 감미롭게 들려온다.

그에 잠시 묘한 감상에 빠져든 페르젠은, 천천히 손에 쥐어 든 책을 펼친 뒤……

꾸깃.

부드럽게 첫 장을 접어 보았다.

“……”

하지만 역시, 참을 수 없는 비대칭에서 비롯된 불편함이 뇌리를 가득 물들인다.

어쩌면 유전자에 각인된 생존 본능 보다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고 있을지도 모를 강박적 사고.

그것에 저항하는 것만큼 미련한 행동이 없다는 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페르젠은 수치화의 도움을 받아 옆장 또한 똑같이 접은 뒤 책을 덮었다.

그러자 자연스레 몰려오는 편안함에, 페르젠은 쓴웃음을 지으며 한숨을 토해냈다.

아마도 환몽 결계 내에서 겪었던 경험에 사로 잡혀있는 건, 리지와 자신의 공통점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러고 보니……’

여유가 생기니 되짚을 수 있는, 두 개의 의문점이 떠오른다.

환몽 결계는 대상이 처음 진입을 했을 때, 내부가 현실이 아니라는 걸 눈치 채지 못하도록 모든 인지적 요소를 왜곡시켜 버리는데……

어째서 자신은 그것을 대놓고 알아차릴 수 있도록 겉모습이 바뀌어 있었던 걸까.

더불어 낯설면서도 강렬한 익숙함을 풍겼던, 알 수 없는 기억의 편린들.

그것을 통해 구현된 괴이들은 자신을 두려워했고, 또 숭배하고자 했다.

‘브뤼테인의 서고에…… 단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은 괴이들이었지.’

물론, 수가 방대하니 단순히 소환된 기록이 없는 3층의 괴이들일지도 모르겠으나.

이 세계에 존재하지도 않는 언어로 발음 되는, 그 괴이들의 진명에서 느껴지는 불쾌함은.

결코 3층 따위에 서식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걸 절실히 알려주고 있었다.

그러면 혹시, 자신은……

명계의 아득한 깊은 곳에서 살아가고 있던 고위 괴이가 아니었을까.

어처구니가 없는 가정이었지만, 그 점에서 비추어 본다면 중증 강박 장애를 태어날 때부터 앓고 있었다는 게 말이 되기는 했다.

고작 인간의 육신으로 감당할 수 있는 격이 아닐 테니, 부작용이 없는 게 이상할 터.

외려 중증 강박 장애 하나만이 발현된 게 행운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라.

그렇게 자신도 모르는 사이, 내세운 가설에 차곡차곡 살을 붙여 나가던 페르젠은 문득 차오르는 한심함에 넥타이를 거세게 조여 맸다.

“큭……!”

숨통이 턱 막혀오는 감각에, 흐릿해졌던 정신이 맑아지는 느낌이 든다.

‘이제 와서……’

종(種)의 근간을 이루는 뿌리를 의심하고, 또 파헤치려 한들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어차피 부족한 근거를 토대로 만들어낸, 가설에 지나지 않는 비약이다.

다만, 그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순간적으로 깊게 빠져들어 집중을 했던 건……

저질렀던 악행에, 중증 강박 장애가 아닌 추가적인 이유를 덧붙일 수 있는 기회라서 그랬던 거겠지.

확실한 이유나 사연이 생기게 된다면, 마치 면죄부가 주어진 듯한 기분이 들 테니.

‘나약해졌나.’

설령, 근간이 괴물이라고 한들 달라지는 건 하나도 없을 텐데.

애당초 악마나 괴물 같은 단어의 유래는 인간이 아니었던가.

그런 점에서 뿌리의 종류는 하등 의미가 없는 것이다.

타악.

창문을 닫는다.

추적추적 흘러내리는 빗물이 달라붙은 그곳에, 자신의 얼굴이 반투명하게 비추어진다.

아무 말 없이 한참 그것을 바라보고 있자, 입김을 분 것처럼 습기가 차올라 페르젠은 손수건을 꺼내 말끔히 닦아냈다.

과거에도 그랬고.

현재에도 그랬고.

미래에도 그러하듯.

자신이 악당이고, 또 인간이라는 자각만큼은 불변할 요소이리라.

거기에 어쭙잖은 위선과, 피해자로 비추어지고자 하는 같잖은 변명 따위는 필요 없었다.

한 번 내딛은 인생이라는 길은, 결코 뒤로는 걸을 수가 없는 것이기에.

* * * * *

아침 8시 30분.

기상한 학생들이 목욕하는 걸 기다린 뒤, 페르젠은 1층의 독실로 들어섰다.

어젯밤 미리 말을 했던 대로, 뒤바꾼 방식을 통해 기말 고사를 진행하기 위함이다.

원래는 자율 통제의 수준을 보고자 했다면, 뒤바꾼 방식은 그저 순수하게 시신의 구현율을 확인하는 것.

가장 간편한 방식이지만, 대신 성적 정정 문의가 많이 들어올 가능성이 높았다.

수치화와 비교했을 때 오차범위가 ± 5% 이내이니, 사람이 나섰을 때 체감 되는 수치는 얼마나 차이가 있겠는가.

‘……점수 등급별 커트라인을 낮출 수밖에 없겠지.’

이러면 차후 학과 사무실이 학생들로 붐비는 것만큼은 막아 주리라.

그렇게 준비를 마치고 오전 9시가 되었을 때, 페르젠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었다.

“들어오도록.”

“네, 네……!”

맨 앞자리에서 대기를 하고 있던 학생이 몸을 일으켜 쭈뼛쭈뼛 걸음을 내딛는다.

얼마나 긴장을 하고 있는지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그리 안으로 들어선 학생이 뻣뻣한 목을 돌려 자신을 바라보자, 페르젠은 문을 닫았다.

아니, 문을 닫기 전 가벼운 곁눈질로 대기 중인 학생들을 스윽 훑었다.

그러자 제일 끄트머리, 마지막 순번이 될 곳에서 휠체어에 얌전히 앉아 있는 리지가 두 눈에 들어왔다.

‘마지막 순번이라……’

저것은 최대한 자신과의 만남을 뒤로 미루고 싶다는 거겠지.

그에 옅은 웃음을 머금고, 페르젠은 문을 닫았다.

그리고 그 닫힌 문을 뒤늦게, 리지의 보랏빛 눈동자가 불안한 기색으로 뒤쫓는다.

* * * * *

하나 둘……

시간이 흐를 때 마다, 자신의 앞에 앉아 있던 학생들의 수가 점차 줄어드는 광경을 보고 리지는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당연한 것이었지만.

리지에게는 그것이 복도를 밝혀주던 호롱불들이 차례차례 꺼지며, 깊이를 알 수 없는 시꺼먼 어둠이 덮쳐드는 것 같았다.

아니, 차라리 그렇기만 한 거라면 다행이리라.

도망친다는 선택지도 없이, 자신은 그 어둠 속을 향해 스스로 걸음을 내딛어야만 했으니까.

벌컥.

이윽고 13번째 차례로 평가를 마친 학생이 문을 열고 나온다.

나름대로 시험을 잘 봤다고 생각한 모양인지, 얼굴에는 기쁜 기색이 역력했고 걸음은 들떠 있었다.

그리고 닫히지 않은, 반쯤 열린 문 사이로.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앉아 있는 페르젠의 모습이 보이자, 리지는 가녀린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손끝에서부터 시작된 떨림이, 이성의 통제를 듣지 않고 전신으로 퍼져 나간다.

그에 애써 시선을 발등으로 고정시킨 뒤, 문밖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있어 페르젠이 자신을 해칠 수 없을 거라는 논리를 끊임없이 되새겨 보지만……

끼릭.

끼릭……

내미는 휠체어가 그가 있을 방에 가까워질수록, 리지는 높다란 산의 최정상에서 숨을 쉬는 것처럼 호흡이 가빠졌다.

보들보들한 뺨을 타고, 식은땀이 주륵 흘러내린다.

……으아아앙!

기어코 저 문 너머에서, 가까이 접근하지 말라는 경고문처럼.

잊을 수 없던 악몽 속의 절규까지 들려오자, 리지는 선명히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은 절대 저 방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는 걸.

“저, 저는……”

결국 휠체어를 멈추고, 고개를 푹 숙인 채.

시험을 포기 하려고 마음을 먹은 리지였으나.

“아……”

휠체어를 붙들고 있는, 자신의 시신으로 파고드는 고농도의 마력에 안색이 파리해졌다.

질적 차이가 확실한 이 마력의 주인이 누구인지는 굳이 추리를 할 필요도 없으리라.

필사적으로 저항을 해보기는 하지만, 그것이 무색하리만큼 통제권은 순식간에 빼앗겨 버렸고.

끼릭.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휠체어는 앞으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그래, 어둠은 다가가지 않는다고 해서.

다가오지 않는 게 아니었다.

“힘내십시오. 많이 긴장한 것 같습니다.”

이내 문 앞으로 도달한 리지를 내려다보며, 그녀의 용기에 찬사를 보냈던 순수한 마음을 가진 기사는 미소를 지은 채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 그 선의가 가득 담긴 목소리에, 리지는 안간힘을 써서 숙이고 있는 고개를 들어 올리려고 했다.

공포와 두려움으로 얼룩진 자신의 표정을 보여준 뒤, 도움을 청하려 하는 것이다.

“리지.”

흠칫!

그러나 이미 반쯤 들어선 상태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들려오자 리지는 아무런 행동을 취할 수가 없었다.

토옥.

오직 눈가에 고인 눈물만이, 그 속박을 거스르고서 손등 위로 애달프게 떨어져 내릴 뿐.

어쩌면 이것이 최후이자 마지막이라 할 수 있는, 그녀의 애절한 구조 신호이리라.

타악!

하지만 곁의 기사는 그것을 알아차리지 못했고, 안으로 들어선 리지를 확인한 뒤 문을 닫아 버렸다.

아마도 그는 영원히 알 수 없겠지.

자신이 용기 있다고 찬사를 아끼지 않았던 한 소녀에게.

지옥으로 향하는 문을 열어주었고.

“네가 마지막이구나.”

“아, 아…… 하, 흐윽……!”

동시에 이승으로 도망칠 수 있는 길 또한 막아버렸다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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