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13 113─Presto
소란스러움 속에서 탈출한 리지는, 더 이상 그 어떠한 기척도 느껴지지 않을 때쯤 내달리는 시신을 제자리에 멈춰 세웠다.
그리고는 무척이나 조심스레, 자신을 안아들고 있는 시신의 품으로부터 내려와 몸을 기대어 섰다.
이미 한 번 이곳이 환몽 결계 내부라는 걸 인지하기 위한 과정에서 겪어 보았던 일이었으나, 두 다리로 올곧게 선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도 낯선 것이 되어버렸기에.
리지는 조금 전 느꼈던 경험과 감각을 미련하게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망가진 자신의 왼쪽 다리는 재활로 극복이 가능한 수준이 아니었으며.
모든 의원들이 가망이 없다고 고개를 내저은 것이었으니까.
심지어 이서진이 살았던 현대에서도, 관절과 신경 부분은 의학이 정복하지 못한 분야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잠시나마 두 다리로 서있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곳이 육체가 존재하지 않는, 정신체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두 팔을 움직일 수 없는 사람을 앞으로 밀어 충격을 주었을 때, 과연 그 두 팔이 움직인다거나 할까?
당연히 그럴 수 없었다.
생존 본능에 따라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코가 깨지거나 이빨이 나갈 터.
하지만 환몽 결계 내부는 육체가 존재하지 않기에.
결계가 간섭하지 못하는 무의식적 부분에서 그것을 바란다면.
얼마든지 망가진 신체라도 움직이는 것이 가능했다.
물론, 무의식이 정신체를 지배하는 상태에서 빠져 나오게 되는 순간 원점으로 되돌아가지만.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그녀는 이미 이곳이 환몽 결계 내부라는 걸 인지하고 있었기에, 멀쩡한 왼다리를 망상하여 구현하면 끝이었다.
그리고 그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던 리지는 곧장 자신의 정신력을 대가로 바쳤고.
“……”
짧은 심호흡 끝에, 시신에게 기대어 오른발로만 서있던 몸을 떨어트려 조심스레 왼발을 땅에 내딛었다.
사근.
“아……”
부드러운 풀밭 위.
갓 태어난 송아지처럼 후들거리며 떨리는 왼발이, 자신의 오른발과 함께 온전히 체중을 지탱한다.
그 광경을 두 눈에 담은 순간, 리지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사를 토해냈다.
아니, 그 감탄사에는 명백히 울음도 뒤섞여 있었다.
유아 시절을 제외하면, 두 발로 걸을 수 있었던 시간 보다 걷지 못했던 시간이 더 많은 그녀였기에.
18살이라는, 이제는 어엿한 여인이라 할 수 있는 성숙한 나이에 어울리지 않게 처음으로 걸음마를 뗀 아이처럼 순수히 기뻐했다.
시간으로 환산하면 70,080시간.
시일로 환산하면 2920일.
년으로 환산하면 8년.
그 오랜 시간 끝에, 설령 이것이 한여름 밤의 꿈에 불과할지라도.
두 발로 걸을 수 있게 된 낯설면서도 익숙한 감각은, 리지에게 아주 커다란 의미를 부여했다.
그것은 마치 병아리가 알을 박차고 세상 밖으로 나오려 하는 태동(胎動)과도 같았고.
내리친 번개가 나무를 직격해 인류에게 처음으로 불을 가져다 준 태초(太初)와도 같았다.
그래,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그녀는 지금 모종의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꿈틀거리는, 가슴 속 한가운데 오랜 시간 응고 되어 있던 마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려는 기미를 보이는 것이다.
그에 리지는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틀림없이, 지금 이 순간──아니 오늘!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그의 정신체를 죽일 수 있게 된다면……
‘나는……’
분명, 드높은 벽을 몇 차례나 뛰어넘을 수 있게 되리라.
그 확신은 리지에게 부러지지 않을 자신감을 복돋아주었고.
그 어느 때 보다도 총명한 보랏빛 눈동자에 굳건한 결의를 새겨주었다.
이윽고 온전해진 자신의 두 다리를 이용해 숲속을 내달리는 리지가 중앙으로 나아간다.
‘일단……’
최우선적인 과제는 겉모습을 바꾸는 것이리라.
두 다리로 서있는 자신을 페르젠이 목격하는 순간, 틀림없이 그도 이곳이 실존하는 세계가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될 테니.
때문에 적어도 페르젠, 그가 모를 여인의 모습으로 스스로의 외형을 바꾼 리지는 머지 않아 숲의 중앙으로 도달했다.
하지만 조심스레 숨어 바라본 그 자리에는, 커다란 거울만이 남겨져 있을 뿐 페르젠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미 전투가 발생해서 자리를 옮겨버린 걸까.
흐릿하게 남아 있는, 그의 발자취가 어디로 향했는지를 알려주는 짓밟힌 풀밭의 흔적을 보고서 리지는 조용히 걸음을 내딛었다.
굳이, 자신이 페르젠을 죽이지 않아도 된다.
이 사단을 벌인 적이 페르젠을 죽이기만 해도, 리지는 충분히 만족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가 페르젠을 죽이지 못한다면……
‘내가, 죽여야 해.’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언제나 여유 있어 보이는 그일지라도.
적의 목덜미를 물어뜯기 위한, 사냥을 하려는 그 순간만큼은.
틀림없이 제 3자에 대한 경계가 흐려질 터.
그리고 그 시점을 정확히 파고들기 위해, 현재 자신의 신체에 구현해야 할 망상은 정해져 있었다.
마법사로써 최고라 일컫어지는 테르미엘의 등급은 역사상 한 번도 등장하지 않았으나.
무(武)의 극한──오러 나이트로써 도달할 수 있는 극의는 역사상 몇 차례가 있었고, 현실에서도 존재하고 있었기에.
책에 서술된 내용과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의 알려진 업적을 토대로 삼아.
리지는 자신의 가녀린 몸에, 오러 나이트의 극의를 망상하여 덮어 씌웠다.
“아……!”
차오르는 고양감.
무엇이든 할 수만 있을 것만 같은 이 압도적인 힘은.
미치도록 증오스러운 남자,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의 전신을 으스러트리고.
그의 잘난 얼굴을 자신의 발밑에 둔 뒤, 자근자근 짓밟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핫……!”
그 단편적인 상상만으로도.
일순간 전신을 휘감는 짜릿한 쾌락과 희열에 리지는 작게 몸을 떨었다.
이윽고 감각이 극한으로 치닫은 오러 나이트의 극의를 덮어 쓴 신체가, 멀지 않은 곳에서 시끄러운 소음을 감지해낸다.
틀림없이 저곳에 페르젠이 있으리라.
그것을 믿어 의심치 않는 리지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걸음을 내딛었다.
‘당신이 죽어가는 그 순간에……’
그 당시, 가면 무도회장에서처럼.
이 겉모습을 벗어 던지고, 본래의 모습을 보여준다면.
과연, 어떠한 반응을 보여줄까.
가려진 장막을 헤치듯 소음의 근원지로 나아가는 리지의 발걸음은 거리낌이 없었으며, 또 잔뜩 부풀어 오른 기대감을 머금고 있는 듯 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더욱더 선명히 들려오는 소음.
페르젠이 있을 그 장소를 코앞에 두고서, 리지는 수풀을 가림막 삼아 고개를 슬며시 내밀었다.
아니, 내미려고 하는 순간이었다.
물컹!
소름이 돋는 기분 나쁜 감각.
오러 나이트의 극의를 망상하여 뒤집어쓰고 있었기에, 그 불쾌한 촉감은 한층 더 선명히 리지의 뇌리를 자극했다.
그에 힐끔, 밑으로 시선을 내린 그녀는……
“……!”
간신히, 목소리가 되지 못한 비명을 집어 삼켰다.
땅이 만약 살아 있는 생물이라 한다면.
그 가죽, 아니 피부를 억지로 벗겨냈을 때 이러한 광경일까.
맥박 치듯 꿈틀거리는 흉측한 대지 위에서 제대로 된 사고조차 하지 못하고 있을 때, 하늘이 어두워지며 걸쭉한 검은물이 그녀의 곁으로 흘러내린다.
그리고 그 검은물에서는 수많은 벌레들이 다리를 꼼지락거리며 피어났고.
나무의 줄기, 가지, 이파리 따위를 형성했다.
그것으로 부터 오는 본능적인 거부감은 말로 형용할 수가 없는 것이었기에.
리지는 동공을 급속도로 수축한 채, 쥐고 있는 검을 뻗었다.
“아……”
하지만 그 벌레로 이루어진 나무에 닿은 자신의 검은, 흘러넘치는 마력이 형태를 이룬 오러를 머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법보다 더 마법처럼.
새하얀 백지가 떨어진 물감에 순식간에 물들어가듯.
괴이한 벌레 때로 변모해버렸다.
툭!
투둑!
직후, 바닥에 처연히 떨어진 벌레들은 서로가 모이고 모여 또 한 그루의 벌레 나무를 제자리에 형성했고.
그 나무들은 마치 번식을 바라듯, 슬그머니 리지에게 가지를 뻗어왔다.
아마도 저것에 닿는 순간, 앞서 보았듯이.
흐르는 마력과 자신의 육체──아니 정신체는, 벌레 따위로 바뀌어 또 다른 한 그루의 나무가 되리라.
그에 리지는 자신도 모르게 뒷걸음질을 치다 바닥에 볼품없이 엉덩방아를 찍었다.
그리고 볼 수 있었다.
생전 듣도 보지도 못했던 무언가들이 살아서 움직이고, 하늘을 떠다니는 것을.
무엇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았던 초월적인 감각과, 부러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자신감에 서서히 금이 가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것에 가속도를 붙이는 건……
“리지.”
“아, 아……”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만악(萬惡)들 아래에서.
언제나처럼 독선적이고, 오만하고, 고고하게 군림하는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었다.
그것은 자라나지 못한 새싹이 짓밟히는 것과 같았으며.
태어나려는 병아리가 알을 깨지 못한 것과 같았고.
나아가, 어둠을 밝히려는 양초가 불어오는 바람에 꺼지는 것과 같았으며.
모래성이 밀려오는 파도에 사라지는 것과 같았다.
이윽고 리지는 자신에게로 천천히 걸어오는 페르젠을 보며, 너무나도 선명히 깨닫게 되었다.
짧은 시간 꾸었던, 원대하고 황홀했던 꿈은.
그저 무지(無知)했기에, 품을 수 있었던 헛된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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