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09화 (109/260)

EP.109 109─Allegratto

“또 불려 가는가. 인간은 고쳐 쓰기도 힘들 텐데.”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그녀는 자신의 처소로 돌아가는 길에, 어딘가로 불려가는 오베른 왕국의 제 3 왕녀를 보며 혀를 찼다.

“황녀 전하도 제게 물들어 가십니까.”

“불쾌한 소리를 하는 구나.”

곁에 따라 붙은 가신, 프리기아 후작의 한 마디에 그레모리는 가볍게 눈살을 찌푸렸다.

에르네스 제국 사이에 존재하는 세 개의 왕국.

그 중 두개의 왕국은 거의 포기하다시피 어설프게 대응했던 엘마르크 제국이지만, 오랜 세월 오베른 왕국만큼은 꿋꿋이 사수를 해왔다.

그 때문에 대외적인 이미지는 오베른 왕국이 친(親) 엘마르크의 형세를 뛰고 있지만, 실상을 들여다보면 그렇지는 않았다.

오베른 왕국의 귀족들은 모두 부패했으며, 백성들의 고혈을 쥐어짜기 바빴고.

그것을 바로 잡아야 할 왕족들은 모든 수단이 엘마르크 제국에게 넘어 간 상태라 왕실이라는 무늬만을 간신히 유지하고 있을 뿐이었으니까.

물론, 그 무늬조차도 성치 못했다.

휘하의 왕자들과 왕녀들은, 엘마르크 제국의 고위 귀족들의 노리개에 지나지 않았으니.

특히 최근 들어서는 그 취급이 더욱 심해졌다.

에르네스 제국의 아카데미, 그곳에 습격을 감행한 것이 뒤로 몰래 빼돌린 오베른 왕국의 왕자가 저지른 일이었기에.

“오베른의 왕실을 보고 있을 때면, 인간이란 참으로 아름다운 존재라는 것을 가끔씩 느끼고는 합니다.”

“……네 입에서 인간찬가를 들을 때면, 그 괴리감 때문에 불쾌함만 솟는 구나.”

“전하도 그리 생각하지 않습니까?”

뒤로 몰래 빼돌려 간자로 심은 왕자.

그것 말고도 몇 안 되는 자신들의 충실한 심복이라 믿고 있을 가신들.

그 모든 정보를 엘마르크 제국은 이미 알고 있었으며, 또 자신들이 거짓된 충성을 맹세하게 시킨 것이었다.

혹여나 모를 사태에 대비를 하기 위해?

아니다.

정확히는 오베른 왕국이 전쟁이라는 수단을 통해 부패한 귀족들과, 깊게 뿌리를 내린 자신들의 그림자를 쳐내고 싶어 한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레모리는 오베른 왕국의 그러한 간절한 염원을 들어주고 싶어 했다.

자신들이 아니라 오베른 왕국이 나서서 명분을 제공한 다음, 물귀신처럼 함께 끌어들여주기를 바랐다.

마음 같아서는 이런 복잡한 일을 진행하고 싶지 않지만, 전쟁은 혼자하는 것이 아니었기에 억지 명분으로 전쟁을 일으키게 되면 병사들의 사기가 급속도로 떨어진다.

그러니 오베른 왕국이 전화(戰火)를 피우고.

그 불씨가 떨어져 억울하게 에르네스 제국에 맞서는 그림이 제일 이상적이라고 할 수 있겠지.

괜히, 가사 상태에 빠져들게 하는 약물의 개발을 오베른 왕국에서 진행한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을 끌어들여줄 빌미를 마련해줘야 했으니까.

더불어 오베른 왕국의 왕족들.

그들의 취급이 짐승만도 못해진 것 또한 그레모리의 작품이었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전쟁을 반기는 이들은 거의 없었고.

반대를 할 때 마다 귀족들은 버릇처럼 백성들을 위해야 한다는 같잖은 간언을 올렸다.

실상은 자기 밥그릇에 흠집이 갈까봐 두려운 것이 본심일 텐데.

그에 그레모리는 그러한 가식적인 도덕심을 자신 앞에 들이밀지 못하도록 하기 위해, 왕족이라는 탐스러운 혈통을 지닌 이들을 노리개로 제공한 것이다.

인권이 없어진 오베른 왕실의 왕자들과 왕녀를 유린하며 짐승처럼 쾌락을 탐하는 자들이.

어찌 자신의 면전에다 대고, 백성들을 위해 전쟁을 하지 말자는 도덕적 잣대를 들이밀 수 있겠는가?

인간이라는 생명체의 극의, 오러 나이트의 한계에 도달한 괴물답지 않게 그녀는 사람의 심리를 다루는 것에도 능통했다.

물론, 끝까지 그 가식을 유지하는 이들도 있었다.

예컨대 오래 자신을 보필한, 옆의 프리기아 후작처럼 말이다.

“그보다 황녀 전하께서는 어찌하여 이리도 전쟁을 바라십니까.”

“……”

“저는 너무나도 두려운데 말이죠.”

“흥. 사내들이 손에 넣기 어려운 여인이라고 다가가지 않더냐?”

“……”

“어떻게든 그 여인을 자신 밑에 깔고 씨를 뿌려 아이를 품게끔 하고 싶어 하지.”

으쓱.

어깨를 들썩이며, 프리기아 후작은 무언의 긍정을 했다.

“그것과 다를 바 없는 이치다. 정복해야 할 땅이 있으니, 정복하고 싶은 것뿐이야.”

“궁금하기는 하군요.”

“무엇이.”

“후세의 역사에 기록 되어져 있을, 황녀 전하의 평가가.”

“나는 모르겠지만, 네 놈은 아마 충절 가득한 신하로 남아 있겠지. 그 가식적인 가면은 가히 일류라고 할 수 있으니까.”

오베른 왕국의 제 2 왕녀에게 억지로 가사 상태에 빠져드는 약물을 먹인 뒤 범하고.

왕자들을 불러 학대적인 윤간을 시키며 즐기는 등.

추악한 욕망을 주저 없이 해소하면서도.

그것과 반대로, 대외적으로 일삼는 선한 행동에 괴리감을 느끼지 않는 추잡한 위선자.

“이런 말이 있더구나.”

“어떤 말입니까.”

“악마라는 존재의 뜻만을 보았을 때, 그것에 가장 가까운 존재는 인간이라고.”

“……”

“분명, 네 놈 같은 인간을 보고 누군가가 뱉은 말이겠지.”

여제, 그레모리의 말에.

프리기아 후작은 대답 없이 옅게 웃었다.

* * * * *

6월 30일.

아침이 밝았다.

오늘은 페르젠의 생일이다.

현재 그는 실기 시험을 위해, 라미아에 가있는 터라 선물들은 대부분 저택으로 배송되었다.

그리고 누가 선물을 보내왔는지, 그 명단을 작성하고 있던 유페미아는 일순간 뒤에서 느껴지는 인기척에 고개를 돌렸다.

유리엘이었다.

시험 막바지, 해야 할 잔업이 남아 있는지 오늘도 출근을 하는 모양이다.

“……같이 가죠.”

“……?”

유리엘은 몸을 움찔했다.

안 그래도 어떻게 유페미아를 아카데미로 데려갈 수 있을지 고민을 하던 찰나였는데.

본인 스스로가 저 말을 먼저 꺼내주니 고마울 따름이었다.

“그이 교수실 앞으로 선물을 보내온 사람들도 있을 테니까요.”

“뭐…… 그렇기는 하겠죠.”

겉으로는 태연히 굴며, 유리엘은 속으로 조용히 웃었다.

유페미아의 말이 아주 틀린 건 아니겠지만.

이럴 경우, 보통은 교수실 앞에 물건을 둔다고 하기 보다는……

“옷 갈아입고 와요.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서는 유리엘의 걸음걸이가 상당히 가볍다.

그렇게 아카데미로 도착한 유페미아는 먼저 본관의 4층으로 올라가는 유리엘을 뒤로하고, 1층에 위치한 학과 사무실에 들렀다.

혹여나 여기에 근무를 서고 있는 조교에게 사람들이 선물을 맡겼을까 싶어서.

하지만 학과 사무실에는 선물이 하나도 존재하지 않았고, 뒤따라 4층으로 올라온 유페미아는……

“그러면 페르젠 교수님에게 잘 전달해주십시오.”

“네. 염려치 마세요.”

복도에서, 그의 선물을 전해 받고 있는 유리엘을 볼 수 있었다.

한두 명이 아니었다.

적어도 현재 4층에 있는 다른 교수들은 모두, 유리엘에게 페르젠의 생일 선물을 맡기고 있는 듯 했다.

“아……”

눈을 마주친 유리엘이, 난처하다는 듯 웃는다.

하지만 유페미아는 그것이 가식이라는 걸 알았다.

모를 수가 없었다.

처는 자신이고.

그녀는 첩일 뿐인데.

주변 사람들은 오히려, 그녀를 페르젠의 부인으로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페르젠이 현재 아카데미에 없으니 자신 또한 출근을 하지 않을 거라 생각을 했을 수도 있지만……

그러지 않았다고 한들 이 사람들의 발걸음이 과연 자신에게로 향했을까.

“……”

또각.

자신으로부터 등을 내보고 있는 이들에게 잘 들으라는 듯.

유페미아는 구두 소리를 선명히 내며 페르젠의 교수실 앞으로 다가섰다.

그제야 주변의 다른 교수들이 어색한 표정으로 인사를 건네 온다.

딸칵.

그 인사를 받아 주지 않고, 유페미아는 페르젠의 교수실 안으로 들어갔다.

타악.

조용히 문을 닫고, 배치되어 있는 소파에 앉는다.

‘……애도 없는 게.’

주변 시선을 신경 쓰고 싶지 않아도, 사람 마음이라는 게 그리 간단하지가 않았다.

적어도 이러한 점에서, 유리엘과 자신의 차이는 메꿀 수 없는 간격일 것이다.

그 점을 인정을 하고는 있지만, 인정을 하는 것과 별개로.

열등감이 샘솟는 건 어쩔 수 없는 일.

스륵.

놓여 있는 담요를 들고, 유페미아는 조심스레 자신의 코로 가져다댔다.

묻어 있는, 페르젠의 향수 냄새가 은은하게 풍겨온다.

얼른 그를 보고 싶었다.

이건, 그리움일까.

아니면 단순한 분리불안 증세일까.

잠시 침묵이 맴돌던 문 바깥이었지만, 금세 하하 호호 거리는 웃음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다음 달…… 달거리나 해버리라지.’

그에 유페미아는 속으로 유리엘을 향한 악담을 퍼부으며, 교수실에 남겨진 페르젠의 자취를 조용히 쫓았다.

그가 돌아오면, 아이의 이름에 관해서 상의를 해봐야겠다.

해당 주제에 관해서 유리엘은 끼어들 자리 조차 없을 테니, 가능하면 식사 자리가 좋으리라.

그렇게 늑대가 자리를 비운 목장에서 길러지고 있는 두 마리의 양들은, 오늘도 무탈한 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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