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105화 (105/260)

EP.105 105─Andante

이른 아침, 여러 대의 마차가 저택 안으로 들어선다.

그 시끄러운 소리에 곤히 잠을 자던 유페미아는 천천히 두 눈을 떴다.

‘……’

분명, 새벽에 잠깐 일어났을 때는 그가 자신의 곁에 있었는데.

흐릿한 눈으로 바라본 옆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녀린 손을 뻗어 빈자리를 더듬어 보니, 따뜻한 온기가 느껴진다.

침상에서 일어난 시간은, 얼마 되지 않았다는 뜻.

‘그러면……’

조금만 더 누워 있었으면 안되었던 걸까.

약속대로 유리엘과 몸을 섞고 자신의 곁으로 돌아 와준 건 고마웠지만, 역시 눈을 떴을 때 혼자인 건 상당히 씁쓸했다.

특히, 어제는 섹스까지 해서 그런지 공허함이 더하다.

화려하게 타오르던 모닥불이 곁에 앉은 이들을 따뜻하게 데워주고.

재만 남은 채로 식어갈 때, 미련 없이 떠나가는 이들을 바라볼 때의 느낌이 이러할까.

괜스레 페르젠에게 야속한 마음을 품으며, 상체를 일으킨 유페미아는 시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

그러자 볼 수 있었다.

창가 앞에 서서, 조용히 창밖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그……”

조심스레 한 마디를 꺼내기도 전에, 고개를 돌린 페르젠이 시선을 마주쳐오자 유페미아는 몸을 움찔했다.

“나는……”

“……”

“너와의 약속을 한 번도 어긴 적이 없을 텐데. 얼굴에 드리운 그 실망스러운 기색은 조금 섭섭하구나.”

“그, 그게……”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하려던 찰나, 다가온 페르젠이 침대 끝자락에 편히 걸터앉고 손을 뻗는다.

스륵.

손등으로 쇄골 부근을 야릇하게 쓸어내리는 커다란 손.

그 간질간질한 감각에 유페미아는 얼굴을 붉히며 입을 열었다.

“잠깐, 일어났을 때는…… 분명 당신이 곁에 있었는데…… 없어서……”

“그걸 또 확인을 했었나.”

“다, 당신을 못 믿어서는 아니에요……! 그냥…… 단지…… 기, 기분…… 상했어요?”

이어나가려던 변명을 그만두고, 유페미아는 페르젠의 눈치를 살폈다.

“글쎄.”

그에 페르젠은 애매모호한 답변을 내뱉었다.

그러자 특유의 금색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며 안절부절 못하는 유페미아.

처음에는 가식인가 싶었으나, 저 몸짓에 뒤섞여 흘러나오는 불안감에 거짓은 없었다.

딱히, 이 정도로 눈치를 보게 만들 생각은 아니었는데.

새삼스레 유페미아가 자신에게 얼마나 의존하고 있으며, 착실히 길들어져 있는지를 알게 되는 대목이다.

루에르그를 악착같이 이끌어가던 그녀의 자취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았지만, 그래도 이러한 유페미아가 페르젠은 싫지 않았다.

아니, 싫어할 수가 없으리라.

그녀를 이런 식으로 만들어낸 건 다름 아닌 자신의 작품이었으니까.

스륵.

이윽고 눈썹을 파르르 떨던 유페미아가, 네글리제의 어깨끈을 살짝 붙잡아 내린 뒤……

“가슴, 만질래요……?”

라는, 엉큼한 제안을 건네 온다.

“벼, 별로에요……? 그러면 내, 내가 당신 그거…… 입으로, 빨아 줄게요……”

“……”

“다, 다른 걸 원해요……? 마, 말만해요…… 내, 내가 들어줄게요……”

“유페미아.”

“응……”

“나는 기분이 상한 게 아니니, 이럴 필요는 없다.”

“그, 래요……?”

안도 섞인 표정을 지으나, 확신은 하지 못하겠다는 듯.

유페미아는 자신의 품으로 아기처럼 꾸물대며 살포시 안겨왔다.

그런 그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준 뒤, 몸을 일으킨 페르젠은 입을 열었다.

“가지.”

“어디를요……?”

“형님이 내 생일 선물을 보내온 것 같더군. 아마 그때 말한 대로라면…… 아이를 위한 여러 물품들일 것이다. 사실상 너를 위한 것들이지.”

“생, 일……?”

“아……”

그러고 보니, 자신의 생일이 언제인지 유페미아에게 언급했던 적이 없었다.

“6월 30일이다. 어차피 이 때는 시험 감독으로 인해 집에 없을 테니, 별 다른 준비를 하지 않아도 돼.”

“그, 그렇구나……”

준비, 하고 싶은데.

만약, 유리엘이 페르젠의 생일을 모른다면.

자신 혼자, 페르젠을 축하해줄 수 있다면.

얼마나 분함을 속으로 삭힐까.

하지만 이리 요란스레 마차가 들어섰으니, 좋든 싫든 그녀가 페르젠의 생일을 모른다 해도 알게 되겠지.

때문에 그 생각은 고이 접어 두고서, 유페미아는 페르젠을 따라 침상에서 일어났다.

“아……”

주륵.

어젯밤, 페르젠이 자신의 질내에 사정했던 정액이 흐른다.

“왜 그러지.”

엉거주춤 일어난 자세로 멈춰선 자신을 보며 의아한 표정을 짓는 페르젠.

그에 유페미아는 팬티를 살짝 내린 뒤, 네글리제의 치맛단을 두 손으로 붙잡아 수줍게 들어 올렸다.

그러자 매끈한 음부 사이로 흘러나오는 걸쭉한 정액이, 팬티의 가운데 부분과 끊어질듯 말듯 이어진 채로 길게 늘어지는 음탕한 광경을 절실히 연출한다.

“당신 정액이…… 흘러요……”

부끄러웠다.

하지만, 페르젠과 단 둘이 있을 때라면 얼마든지 음란해질 수 있었다.

알프레드──대귀족가의 여식인 유리엘은 이런 모습을 취할 수 없겠지.

섹스에 대해서도 무척이나 고지식하고 보수적일 것이다.

“닦아…… 줄래요……?”

“……”

보다 높은 자극에 익숙해진 인간은, 그 아래의 자극에 감흥을 느끼지 못한다.

그러니 페르젠이 유리엘과 몸을 섞을 때 마다, 자신과 비교를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유페미아는 조심스레 품었다.

“흣……”

곧이어 아무런 말없이, 수건을 가지고 온 페르젠이 살짝 무릎을 구부려 자신의 음부를 살살 닦아준다.

아이 취급당하는 것 같아 기분이 묘했지만, 소중하게 보살핌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어 헤실 거리는 웃음만이 새어 나올 뿐이었다.

* * * * *

“……”

아침 식사를 하고, 저택의 창고 쪽으로 함께 이동한 유리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내심 유페미아보다 자신이 더 우월하다는, 그런 생각을 기본적으로 하고 있었지만.

페르젠의 형.

브뤼테인의 가주.

아주버님인, 제레미아에게만큼은 예쁨을 받지 못할 걸 알고 있었기에 자그마한 주먹을 꼬옥 말아 쥐었다.

당장은 쓰지도 못할, 아이를 위한 물품들.

그것들의 용도가 뭐가 그리 궁금한지, 유페미아는 꼬치꼬치 캐물으며 시녀들과 페르젠의 시간을 잡아먹었다.

페르젠은 자신이 들어오기 전에 약속했던 일이라며, 별다른 의도가 없을 거라고 했지만.

기간을 고려하면 자신이 첩이 되었다는 소식쯤이야 익히 전해 들었을 터.

때문에 역시, 자신을 빌미로 할아버지인 콜레오네가 귀찮게 접근 해오지 않을까 싶어 미리 선을 긋는 것일 가능성이 높으리라.

방계로 갈라질 페르젠과 다르게, 제레미아는 직계의 혈통을 이어 나갈 테니까.

‘여기서는…… 끼어들 틈도 보이지 않네.’

한숨을 내쉬며, 유리엘은 걸음을 돌렸다.

어차피 아카데미에 출근을 해야 할 시간이었으니, 굳이 여기서 유페미아의 저 눈꼴시려운 모습을 지켜 볼 필요는 없으리라.

그렇게 가벼운 눈짓으로 페르젠과 인사를 나눈 유리엘은 마차에 올라타 편히 등을 기댔다.

“출발해요.”

“알겠습니다.”

흔들림 없이.

편안히.

마차가 나아간다.

그 안에서, 유리엘은 자신의 아랫배를 부드럽게 쓸어내렸다.

벌써 몇 번이나 자궁 안으로 받아낸 그의 씨.

무사히 착상에 성공하기는 했을까.

‘다음 번 달거리는…… 오지 않았으면 좋겠네.’

자그마한 소원이, 창가로 불어오는 바람을 타고 날아간다.

* * * * *

저벅.

“……”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그는 이른 아침부터 정처 없이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사실은 무아지경으로 걸음을 내딛다 보니 어느새 여기로 도착해있었을 뿐이다.

‘어떻게 해야……’

어젯밤, 자신의 아내에게 들은 충격적인 소식이자 통보는 한 번 꺾여져 버린 로에르의 마음에 대못을 박았다.

바로 클로디아 가문이 이번 황위 계승권에서 제 1 황자를 위해 활약할 무대를 로벨리움 왕국으로 낙점해버린 것.

페르젠이 증오스럽기는 했으나, 브뤼테인의 지원을 받는 제 2 황자의 세력들과 로벨리움 왕국에서 힘겨루기를 해봤자 하등 의미가 없었다.

활약을 하고, 세를 넓히고, 명성을 쌓으려면…… 로벨리움 왕국 쪽만큼은 가급적 피해야 하는 것이다.

임전태세를 갖추지도 않았는데 부딪치는 것만큼 멍청한 자충수도 없을 테니.

하지만 자신의 아내가, 아니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그 노괴의 명을 전달해주었을 때 로에르는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이것이 의도적으로 페르젠과 마찰을 일으키지 말라는 무언의 압박임을.

‘하하……’

원수를 찌르기 위해 어렵사리 손에 넣었던 검이, 반대로 자신을 옭아매기 위한 족쇄로 돌아올 것이라는 걸.

그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행복과 불행이 함께 찾아온다는 말이 사실이라면, 도대체 자신들 클로디아 가문이 느껴야 할 행복은 어디에 있는 건지 알 수가 없었다.

파삭!

“……”

그 때, 수풀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로에르는 고개를 돌렸다.

뱀이었다.

이 와중에도 기사라는 신분에 충실한 그는, 몸을 일으켜 해당 뱀이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지 않도록 붙잡았다.

채 삼키지 못한, 입가에 툭 튀어나온 쥐의 꼬리가 보인다.

그리고 문득, 그 모습이 자신들 클로디아 가문의 신세 같아 로에르는 단숨에 힘을 줘서 뱀을 죽여 버린 뒤 힘없이 벤치에 주저 앉았다.

팔목을 휘감고 있던 뱀의 꼬리가 축 늘어진다.

포식자와 피식자의 관계는, 뒤바뀔 수 없는 운명일까.

“좋은 날씨군요.”

“……”

뱀에게 집어 삼켜진 쥐로부터, 자신들 클로디아 가문의 신세를 겹쳐 보던 로에르는 자연스레 자신의 옆에 앉는 누군가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로브를 쓰고 있는 모습이 적잖이 불편해 보인다.

“그걸 아십니까?”

“무엇을.”

“뱀들에게 잡아먹히는 설치류들은, 겨울이 왔을 때 잠에 빠져든 뱀들의 굴을 찾아가 머리를 짓씹어 으깨버립니다.”

“……”

“다음 해에, 자신들의 생존율을 높이기 위해서이지요. 겸사겸사 굶주린 배를 채우기 하고.”

“……”

“봄, 여름, 가을. 세 개의 계절 간 변하지 않던 먹이 사슬이 오직 겨울에는 뒤바뀝니다.”

필멸의 세계에 영원은 없기에.

가장 이상적인 것 또한, 영원이 될 수 있는 거리라.

그리고 생전 타인이, 현재 자신의 속내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는 점에서 로에르는 신기함 보다는 의구심을 품었다.

“……너는, 누구지.”

“좋은 현상이군요. 자고로 알아가고 싶다는 마음에서 부터, 인간의 관계는 시작되니까.”

“……”

로브 속, 희미하게 보이는 얼굴.

사내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간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114화 후기에도 적어두겠지만, 그 동안 있었던 일은 공지사항으로 전해드리겠습니다.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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