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102 102─가면 무도회
조금 무거웠던 주제 이후로도, 리지는 페르젠과의 대화를 계속 이어 나갔다.
말을 주고받을 때 마다, 그의 앳된 목소리에 조금씩 깊게 빠져 들었다.
사실 페르젠은 남을 사로잡는 특별한 말재간 같은 게 있지는 않았다.
보통 습관처럼 배어 나오는 카리스마가 상대방을 경청하게 만들 뿐이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의미로, 페르젠은 리지를 무척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어린 양의 모습으로도, 그녀를 자신의 거미줄에 무리 없이 옭아맸다.
가해자가 피해자에게 건네는 카운슬링(Counseling)은 아이러니하게도, 그녀의 심상을 가볍게 쥐고 흔들었다.
그리고……
두 시간에 걸친, 연회의 끝이 서서히 다가오고 있을 때.
리지는 넌지시 페르젠에게 말했다.
아니, 그의 의견을 물었다.
“만약……”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을, 반드시 해야만 할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그 말에 페르젠은 웃었다.
“이미 답을 알고 있지 않습니까.”
“놀리지 마세요.”
“놀리는 게 아닙니다. 말 그대로.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이라면 당신은 제게 묻지 않았을 테니까.”
“……”
“그것이 이룰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아니라, 이룰 수 없는 일임을 알기에 자문을 구하는 게 아닙니까?”
“그건……! 아니, 에요……”
“만약 이룰 수 없을 것 같다는, 단순히 가능성이 희박할 뿐이라면…… 낮은 가능성의 수단은 알고 있다는 것일 텐데.”
페르젠의 말에 리지는 어깨를 움츠렸다.
긍정하기 싫었지만.
부정하고 싶었지만.
“그래요……”
“……”
“그러면, 이룰 수 없는 일을 반드시 실현시켜야 할 때…… 당신이라면 어떤 식으로 행동할 건가요……”
“포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노력만으로 계란을 던져 바위를 부술 수 있는 세상이라면…… 또, 그 만큼 부조리 한 게 없겠죠.”
노력은 자기 자신을 배신하지는 않으나.
품었던 꿈과 이상은 배신하기 마련이다.
언제나 노력이 그리던 이상과 꿈을 보답해주었다면……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 되지 않았겠지.
“포기할 수 없다는…… 전제가 깔려 있어요.”
“세상에 그런 전제는 없습니다.”
“……”
“정말로 포기할 수 없었다면, 진작 당신이 쥐고 있던 계란은 바위에 들이 박혀 터트려졌을 테니까.”
“……”
“아직 그것을 쥐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당신은 망설이고 있는 겁니다. 그런 점에서…… 포기할 수 없다는 전제라 하는 건, 모순이지요.”
이 대화에 깊이 빠져 들수록.
리지는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늪 속으로.
저 아득한 수심 밑으로.
온 몸이 가라앉는 기분.
또, 불쾌하기도 했다.
그는 마치 현실을 마주보게 해주는 거울 같았기에.
그리고 거기서 리지는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잔혹한 현실로부터 등을 돌리고 있었는지.
‘오빠는……’
로에르는.
이러한 현실을 언제나 마주보고 있었던 걸까.
“고마워요.”
“……”
“당신 자문에 거부감이 느껴지는 만큼…… 내가 얼마나 아이처럼 굴었는지 느껴져.”
“……”
“몸에 좋은 약이 쓰다는 말은, 이럴 때를 두고 하는 말이겠죠.”
11시 55분.
조금 있으면 12시가 되어 이 연회가 끝을 내린다.
그에 페르젠은 자신의 말에 비 온 뒤 단단히 굳어지는 땅처럼, 그녀의 심지가 굳세어지는 걸 보고서 손을 뻗었다.
가녀린 손을, 자그마한 손으로 마주잡았다.
“당신은…… 잃을 게 없는 사람인가 보군요.”
“무슨, 뜻인가요.”
“이룰 수 없는 일에 도전 하려는 사람은, 자신 말고는 잃을 게 없는 사람일 테니까.”
걱정인지 아닌 건지.
애매모호한 그의 말에 리지는 쓰게 웃으며 답했다.
“아니요. 그건 아니에요. 단지…… 모든 걸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포기할 수 없다는 각오를 머금는 거죠.”
11시 58분.
연회장 내부로 황실 마도 병단 소속──세 명의 흑마법사들이 들어선다.
그들이 거래를 통해 능력을 빌린 괴이는 부끄럼쟁이.
그리고 11시 59분.
“특이하군요.”
페르젠은, 본래의 발성으로 입을 열었다.
“네?”
방금까지만 해도 계속 듣던 그의 목소리와 약간의 차이가 있는.
하지만 그 약간의 차이에서 낯섦을 느낌과 동시에 익숙함을 건네받은 리지는……
“모든 걸 잃어도 좋다는 각오를 한 사람들 중에, 정말로 모든 걸 잃었을 때 후회를 하지 않는 사람은 없던데.”
라는, 마지막 그의 한 마디에 몸을 굳혔다.
떨리는 눈동자가 급속도로 수축한다.
이윽고 자신의 손을 쥐고 있지 않은, 자유로운 반대쪽 손을 드는 그가 어린 양의 가면을 벗으려 할 때……
파앗.
밤 12시.
세상이 암전 되었다.
소리도.
빛도.
모든 것이.
심지어 자기 자신의 심장 소리조차 들려오지 않는다.
이것이 명계의 1층에 서식하는 괴이, 부끄럼쟁이의 능력.
특정 영역을 구성하고, 그 영역 내에서 모든 빛과 소리를 차단시키는.
그리고 이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일부 사람들은 자신들의 위장 자체를 바꾸기 시작했다.
혹여나 연회장을 나섰을 때, 정체를 캐내기 위해 따라 붙는 미행을 따돌리기 위함이다.
이것은 일종의 황실에서 건네는 배려.
또, 유일하게 촉각은 차단이 되지 않는 만큼.
리지는 자신의 손을 쥐고 있는 자그마한 손이, 서서히 커지는 걸 느꼈다.
“아……”
직후, 짧은 시간 동안 모든 걸 뒤덮어주던 장막이 걷혀졌을 때.
그녀는 볼 수 있었다.
단정한 검은색 정장, 새하얀 셔츠, 그 가운데 자리 잡은 무늬 없는 심플한 넥타이.
그리고, 자신을 내려다보는 소름 끼치는 늑대의 가면을.
두근!
차단되어 듣지 못했던, 터질 것처럼 뛰기 시작하는 자신의 심장 소리가 귀로 들려온다.
“아…… 아아……”
리지는 본능적으로 알았다.
아니, 자신의 몸이 알려주었다.
눈앞에 있는, 양의 탈을 쓰고 있던 이 늑대가 누구인지.
“리지.”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부른다.
잊으려야 잊을 수가 없는 목소리다.
“싫어, 싫어…… 싫어……”
마력을 소모한다.
하지만 주위에는 통제할 시신이 존재하지 않았다.
끼릭.
억지로 몸을 일으키는 페르젠의 손길을 따라,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게 된 리지가 온 몸을 파르르 떨었다.
문 앞에 있는 시녀가 이상함을 눈치 채고 나서려 했지만.
잠깐 고개를 돌려 마주한, 가면 너머에서 붉게 빛나는 그의 눈동자에 겁을 집어 먹었다.
연회가 끝이 났기에, 잠시 테라스로 나와 공기를 쐬려던 다른 귀족들조차도.
고압적이고, 폭력적이며, 위협적인.
페르젠의 시선과 분위기를 감당하지 못하고, 조용히 문을 닫았다.
“어린 양이 잡아먹히려 하는데도……”
다른 양들은, 울어주지 조차 않는 구나.
그 양들의 침묵 속에서.
페르젠은 비명조차 내지르지 못하는, 리지의 가면을 손수 벗겨 내렸다.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오른 그녀의 겉모습을 덮어 쓰고도, 울음으로 얼룩진 가엾은 표정.
그녀가 아무리 단단한 껍질을 외면으로 뒤집어쓴다고 한들, 페르젠은 이리 손쉽게 부수고 그녀의 내면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아, 읏…… 흑……”
이윽고 페르젠은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눈물을 핥은 뒤, 비릿한 조소를 머금으며 속삭였다.
“네 각오가 정말 그리 하다면 말이다. 리지.”
“아…… 으……“
“제일 먼저…… 네 개의 무덤을 파두어라.”
하나는 나의 것.
다른 하나는 너의 것.
그리고 나머지는 네 오라비들의 것.
“그 정도 준비조차 하지 못하는데, 복수란 우습지 않느냐.”
여전히 희롱하는 듯한 비웃음을 흘리며, 페르젠은 그녀의 두 손을 테라스의 난간에 얹혔다.
그리고는 등이 파인 드레스의 새하얀 살결을 더듬어 내린 뒤, 허리 부근에 부드럽게 입술을 맞춘다.
쪽.
허리 쪽에 건네는 키스의 의미는 속박.
“흐…… 끄흑……!”
가해자이자, 원수가 전해주는 그 소름끼치고 불쾌한 감각에 리지는 입술을 꽈악 깨물었다.
짓씹힌 입술에서 붉은 선혈이 흘러내리지만, 그 정도 아픔으로는 벗어날 수 없다는 듯.
여전히 리지의 몸은 페르젠 앞에서 두려움과 공포를 머금고 굴복했다.
곧이어 입술을 떼어낸 페르젠은 왼손으로 리지의 허리를 붙잡고.
남은 오른손으로 그녀의 아랫배를 지그시 누르며.
“쉬……”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무언가를 바라듯 조용히 읊조렸다.
“아, 아……”
두려움.
공포.
긴장.
모든 부정적인 감정들로 얼룩진 리지의 몸은, 귓가로 파고드는 뜨거운 숨결과 그 목소리에.
꾸욱!
애써 다리를 오므려 보아도.
주륵.
결국에는 아름다운 드레스 자락을 얼룩지게 만들고 말았다.
뚜욱.
뚜욱……
허벅지를 타고 흘러내리는 무언가가, 그녀의 구두 밑으로 자그마한 웅덩이를 만든다.
“……착한 아이구나.”
그 모습을 지켜보며, 한 마디를 내뱉은 페르젠은 조용히 물러났다.
어둠을 몰아내기 위해서는 불을 밝혀야 하는 법.
하지만, 젖어든 나무가 스스로를 불살라 불꽃을 피울 수 있기는 할까.
겁에 질려 가만히 서있는 시녀를 힐끔 바라보고서, 페르젠은 그대로 연회장 내부로 들어섰다.
그리고 늑대의 가면을 쓰고 있다고 한들, 눈썰미가 좋은 몇몇 이들은 그가 페르젠이라는 걸 곧바로 눈치 챘다.
그에 페르젠 주위로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한다.
침묵을 머금었던 양들이 환호를 내뱉는다.
그래, 늑대는.
양들의 환호 속에서.
어린 양의 흐느낌을 뒤로한 채.
유유히 퇴장했다.
“아…… 아…… 끄…… 흑……!”
그리고 여전히 울고 있는 리지의 곁에는.
페르젠이 썼던, 어린 양의 가면만이.
그녀를 조롱하듯, 바닥에 놓여 있을 뿐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조금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요즘 그 흔히 말해서 스윗해졌다고 하죠.
기존 뇌리에 조형하고 있던 페르젠의 색채가 많이 흐려져서.
이번 화를 집필하는데 쪼금 애를 먹는 바람에.
한니발 렉터 시리즈를 보고 왔습니다.
그래도 조금 먼가먼가…… 그런데.
모쪼록 만족하셨기를 바랍니다 ㅠㅠ
원래는 분할 예정이 없었으나 한컴으로 옮겼을 때 기준 9700정도가 되어서 부득이하게 분할 합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ㅠㅠ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