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99 099─일상
“으응……”
오랜 낮잠 끝에, 유페미아는 눈을 떴다.
그리고는 곧장 자신의 옆에 페르젠이 있는지 없는지부터를 확인 했다.
“푹 잤느냐.”
다행히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 어느 때처럼 한점 흐트러짐 없는 자세로 책을 읽고 있었다.
“응…… 푹, 잤어요……”
꼬물꼬물.
몸을 기어 그의 다리 위로 머리를 얹힌 유페미아는 배시시 웃었다.
“……”
하지만 그 미소는 얼마 가지 않아 서서히 가라앉았다.
왜냐하면 그의 몸으로부터, 익숙하면서도 낯선 여인의 향기가 풍겨왔기에.
이것은 분명,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그녀의 체취다.
“왜 그러지. 어디 아픈가.”
“아니에요……”
매번 자신의 속내를 그에게 간파 당했던 유페미아이기에, 살짝 몸을 돌려 얼굴을 보여주지 않았다.
사실 일어났을 때 옆에 있어 달라는 부탁을 지켜주기는 했으니 더는 투정을 부려서는 안되는 거리라.
‘아침도, 점심도…… 독점을 하기는 했었으니까……’
자고 있던, 그 시간 동안 유리엘이 페르젠을 낚아채간 걸로 질투를 하면 안되겠지.
“몇시…… 에요?”
“6시 40분이다.”
도대체 얼마나 오래 잔 건지.
유페미아는 슬며시 몸을 일으켰다.
“잠깐…… 바람 좀 쐬면서, 잠 기운을 날려 버리고 올게요. 그 다음…… 밥 먹으러 가요.”
“몸이 아프면 식사를 가져 오라고 하마.”
“으응…… 아니에요. 아픈 건 아니야.”
지나친 욕심은 화를 불러올 걸 알았기에, 유페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침실을 나섰다.
밖에서 대기 중이던 시녀가 따라나서려 했지만 가볍게 물린 뒤, 뒤편의 화단으로 향한다.
여름 날, 해가 길어지는 시기라 그런지 어렴풋하게 달이 떠있음에도 하늘은 아직 밝았다.
“……”
그러나 뒤편의 화단에는 먼저 온 손님이 있었다.
페르젠과 똑같은 검은색 머리카락, 굳이 앞으로 가서 얼굴을 확인 하지 않아도 유리엘이리라.
“……”
그녀 또한 자신의 인기척을 눈치챈 건지, 슬며시 고개를 뒤로 돌린다.
“……즐겨 앉던 자리에요?”
“아니요.”
먼저 입을 여는 유리엘의 질문에, 유페미아는 부정하며 그녀의 옆으로 가서 앉았다.
“다행이네요. 허리가 아파서 일어 나기 싫었는데.”
“……”
자신이 자는 사이, 페르젠과 몸을 섞었다는 사실을 은연중에 부각 시키는 그녀의 모습에 유페미아는 눈썹을 꿈틀했다.
“그이가 고생을 시켰나 보네요. 저랑 할 때는 처음도 무척이나 상냥했었는데.”
“……”
사랑으로 안는 것과.
육욕의 해소로 안는 것은.
취급이 다를 수 밖에 없는 것이라고.
유페미아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비수를 날렸다.
……물론, 처음은 상냥하지 않았다.
말 그대로 강간이었으니까.
다만, 유페미아는 그 초야를 억지로 뇌리에서 지워버렸다.
“그래요?”
“그래요.”
“……”
“……”
잠시 침묵이 맴돈다.
자신에게 스스로, 은근한 가학적인 성향이 있다고 했던 페르젠.
그런 그가 그런 모습을 한 번도 유페미아에게 드러내지 않았다면, 그 선 조차 넘지 않을 만큼 그녀를 소중히 다루고 있다는 거겠지.
내심, 그가 부정적인 부분은 자신에게 모두 배설하고.
유페미아에게는 상냥하게 대해주는 모습을 생각하니…… 울컥하는 마음이 들기는 했다.
하지만 반대로, 유페미아가 그 점을 끝까지 눈치채지만 못한다면 페르젠이 자신의 침실에 발을 끊을 이유는 없지 않을까.
그에 유리엘은 차분히 마음을 가라앉히고, 유페미아에게 싱긋 웃어 주었다.
“……”
그리고 유페미아는 유리엘의 저 여유로운 미소를 볼 때면, 매번 추악한 열등감이 고개를 치켜 들었으나…… 다행히 이번에는 그러지 않았다.
왜냐하면 욕실에서, 무려 페르젠이 자신에게만 해주는 일이라고.
그의 평소 모습과는 절대 어울리지 않는 애무를 해주었으니까.
또, 눈앞의 이 여자가 그의 입에서 사랑한다는 말을 들어 보기는 했을까.
그래,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그녀는 그의 성욕 해소 수단에 지나지 않았고.
그것을 구태여 자신에게 자랑하는…… 창녀일 뿐이다.
그러니, 그의 아내 답게.
유페미아는 유리엘을 마주 보며, 화사한 미소를 지었다.
그리고 그 미소를 바라본 유리엘은 주먹을 살짝 말아 쥐며 몸을 일으켰다.
“이만…… 식사, 하러 가죠.”
“먼저 올라 가세요. 저는 잠 기운을 좀 떨치고 갈 테니.”
웃음과 미소.
언제나 그랬듯, 그것은 여인들에게 있어서 최고의 방패이자 최강의 무기였다.
* * * * *
다음 날, 강의가 없는 페르젠은 혼자 마차를 타고 황궁으로 향했다.
어제 이곳에 들려 제 2 황자와의 만남 일정을 잡은 게 바로 오늘이기 때문이다.
‘바로 다음 날로 잡은 걸 보면, 사안이 꽤나 급박하기는 한 모양인데.’
엘마르크 제국과 얽히게 된 로벨리움 왕국이 그만한 골칫거리가 된 걸까.
나름 머리를 굴려 보지만, 역시 아무런 정보가 없는 상태에서 이어지는 추측은 의미가 없었다.
때문에 슬슬 보이는 황궁의 정문을 눈에 담으며, 페르젠은 옷매무새를 올곧게 정돈했다.
* * * * *
“왔는가.”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황자님을 뵙습니다.”
“……겉치레는 되었네. 일단, 앉도록 하지. 백작.”
“예.”
응접실이 아닌, 제 2 황자의 침소.
여기서 말을 하려는 걸 보면, 사안의 무게가 상당하다는 걸 뜻하겠지.
“어디 부터 말을 해야 할까……”
“경청하겠습니다.”
“그래, 백작. 자네는 어째서 그 당시 연회에 우리가 엘마르크 제국의 여제를 비공식적으로 초청 했는지 아는가.”
“……”
솔직하게 말을 하자면, 페르젠은 그 점 만큼은 도저히 유추해낼 수가 없었다.
“속내를 캐묻기 위함이었네.”
“……”
캐묻는 다고, 순순히 내뱉을 여인이 아닐 텐데.
하지만 페르젠은 여기에 관해서 질문을 던지지 않았다.
황실은 브뤼테인의 혈통을 의심할 필요가 없고.
브뤼테인의 혈통 또한 황실을 의심할 필요가 없었으니까.
이것은 오랜 역사가 증명해온 신뢰의 고리였다.
“엘마르크 제국이 오랜 시간 남동쪽의 우환을 제거하는데 집착했던 이유가 무어라 생각 하나.”
“……영토 확장, 아닙니까?”
“그것은 부수적인 이유네. 정확히는 그곳에, 막대한 양의 금맥이 잠들어 있지.”
“……”
이상하다.
이 정도 정보라면, 밖으로 새어 나오는 게 이상했고.
설령 새어 나왔다고 한들, 브뤼테인의 정보력으로 입수하지 못했을리가 없을 텐데.
물론, 페르젠이 속으로 당황하는 것도 당연했다.
그는 아직 엘리자베스 황녀가 타인의 속내를 읽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으니까.
“백작.”
“……”
“엘마르크 제국에 황금의 비가 쏟아질걸세.”
“……”
“그리고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그녀는 전쟁을 고려하고 있지.”
여기까지가, 당시 연회장에서 읽어낸 그레모리의 속내.
“두 제국을 가로 지르는 교두보인 삼 왕국. 이번 시대에 꼽는 깃발의 균형이 깨지면…… 높은 확률로 전쟁이 발발할거야.”
“그렇군요.”
“설령 우리가 균형을 앞지른다 한들, 무슨 일이 일어 날지 장담은 못하겠군.”
근심이 가득한 그의 얼굴을 보며 페르젠은 편안히 등을 기댔다.
“당장 미래를 확답 드릴 수는 없으나, 일단 로벨리움 왕국에 관해서는 형님에게 말해 더 많은 지원을 받을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고맙군.”
“그리고, 너무 걱정하지는 마십시오. 혹시 이런 말을 들어 보셨습니까?”
“음?”
“아주 머나먼 미래에는…… 단순 종이 쪼가리가 금화, 은화, 동화의 가치를 대신한다는 군요.”
“……최근에 발표된 논문인가?”
“저는 아주 불가능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사람이 살아가는 사회에서, 물건의 가치는 매번 부여된 것이니 말이죠.”
그리고, 그 가치를 부여하고 조절하는 위치에 서있는 이들에는…… 틀림없이 브뤼테인도 있었다.
그런 이들이 담합을 하여 식량의 가치에 손을 대면 설령 황금의 비가 쏟아 진다 하더라도, 우물 조차 채울 수 없겠지.
금맥이 있다고 한들, 그것을 주조하고 유통하는 데는 시간이 걸린다.
더불어 에르네스 제국에는, 북부──식량을 저장하기 위한 천해의 장소가 있지 않은가.
적어도 가을과 겨울이 아닌, 봄과 여름의 사이에 전쟁의 기미가 보인다면…… 그 결과는 단언컨데 승리라 말할 수 있으리라.
“안심이 되는군……”
“……”
“황실이 마음 놓고, 언제나 기댈 수 있는 벽…… 제관의 핏줄이란 이러한가.”
“얼굴에 너무 금칠하시지 마십시오.”
“금칠이 아니네. 어깨가 많이 무거워. 내가 만약 황자가 아닌 황녀였다면 기꺼이 그대에게 추파를 날렸을 걸세.”
“……”
“어차피 그대들은 황실과 피를 섞지 않으니 의미가 없겠지만.”
“……듣지 못한 걸로 하겠습니다.”
제 2 황자가 쓰게 웃는다.
그러다……
“아, 줄게 있었는데 깜빡했군.”
주섬주섬 품안에서 무언가를 꺼낸다.
자그마한 서신이었다.
“다음주에 가면무도회가 열리네. 수도에 있는 귀족들에게는 내일 안으로 발송이 될거고, 그러지 않은 이들에게는 미리 발송을 해놨지.”
“아……”
“잊고 있었나 보군.”
“예.”
가면 무도회.
일반적으로는 정체를 가리고 참가하는 연회지만……
황위 쟁탈전이 시작하기 전의 가면 무도회는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다.
왜냐하면 그곳에서 유일하게, 황위 계승권을 가진 황자들은 자신들의 정체를 가리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 한 마디로 자신들을 지지해주는 귀족들의 속마음을 면전에서 온전히 듣는 자리였다.
그런 만큼 명계의 1층에 서식하는 흉내쟁이의 능력을 빌려 참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았다.
완전히 성별을 위장한다거나.
일부러 휠체어에 앉아 장애를 가진 흉내를 낸다거나.
어린 아이의 모습으로 참가를 한다거나.
등등…… 그래도 공통점이 있다면, 가면을 쓰기는 한다는 것.
“그대는, 참가 하기는 할 건가?”
너스레 묻는 제 2 황자의 말에, 페르젠은 웃음을 지으며 답했다.
“아무래도…… 그럴 것 같군요.”
가면은, 양이 좋을 것 같았다.
그것도.
어린 양.
그래야 겁을 먹지 않겠지.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많이 늦었습니다…… 죄송합니다.
가면 무도회 파트 까지 써서 올려드리고 싶었는데.
제가 정말 글에 손을 댈 수 있었던 게 약을 처방 받은 그 다음 날입니다.
심지어 그것도 약 기운 덕분이 아니에요.
일단 먹고는 있지만 부작용은 부작용 대로 있고……
다음 날 정처없이 길을 걷다가 눈 앞에서 PC방이 보이더군요.
PC방 모니터는 전부다 좋은 거 쓰니까 괜찮지 않을까……
그런데 저도 4K 모니터를 사서 기대는 안했는데
들어선 PC방은 곡면 모니터를 쓰고 있었습니다.
커브드 모니터요.
놀랍게도 곡면 화면으로 글을 쓰니까 강박증이 발작을 안하더군요……
집의 컴퓨터랑 다른 건 평면과 곡면의 차이.
그리고 75 주사율과 144 주사율의 차이.
인치의 차이인데…… 당장은 이게 너무 비싸서 엄두를 못내고 있어서, PC방에 다니면서 꾸준히 글을 썼습니다.
16일 부터 지금까지요.
모쪼록 이 모자라고 부족한 4편이 여러분들의 마음에 드셨기를 바라겠습니다.
언제나 노력하겠습니다.
연중 없이, 완결 까지.
* * * * *
(추가)
6월 21일자 이후 후원금은 전부 사용하지 않고 놔두겠습니다.
당분간은 일단 PC방에 꾸준히 다닐 생각입니다.
제 뇌가 그곳의 환경에 아직 익숙치 않고 낯설어서 그런 건지 저 스스로도 긴가민가하기 때문입니다.
새벽 일찍 PC방에 가서 자리에 앉을 때 마다 생각합니다.
혹시 또 거슬리면 어떡하지.
그러한 걱정이 맨날 앞섭니다.
때문에 적어도 저 스스로 "아 곡면 모니터가 완전히 내 강박증을 상쇄시켜줄 수 있구나." 라는 확신이 들기 전 까지는 6월 21일 이후 독자님들의 후원금은 얌전히 놔두겠습니다.
강박증에 관해서 이리저리 말씀이 좀 있으신데.
저의 현재 강박증을 정확히 풀이하자면 문장이 치우쳐져 보인다는 것입니다.
일상생활, 글을 읽거나, 집중을 요구하지 않는 타이핑은 얼마든지 무시 할 수 있으나.
집중을 해야하는 순간에는 그게 되지 않습니다.
플롯을 짜고 그 플롯에 살을 붙이는 단어들과 여타 미사여구들의 조합은 제가 인지를 하고 사용하는 것인데.
그 선택들 사이에 강박증이 끼어 들어 조합식을 흐트러트립니다.
그래서 글을 이어 나갈 수 없는 것입니다.
저번에도 말을 했듯, 숨을 쉴 때 마다 호흡이 의식 되는 느낌.
아니면 시험 문제를 풀 때 1번씩 차례대로 풀지 않고, 다음으로 건너 뛰면 집중이 되지 않는.
그런 류 입니다.
갑작스런 고액의 후원금을 받아서 당황하는 바람에 부랴부랴 후기를 추가합니다.
당분간은 곡면 모니터에 제대로 된 확신이, 그러니까 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글을 쓸 수 있는.
그런 판단이 서면 제가 감히 독자님들의 후원금을 사용해 모니터를 교체하도록 할게요. ( __ )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