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96화 (96/260)

EP.96 096─일상

오전 강의를 시작하기에 앞서, 페르젠은 자신의 강의실에 들려 이사벨의 시신을 꺼내 들고 내부의 공기를 시원하게 순환 시켰다.

마석 같은 편의적 설정을 지닌 물체가 없는 세계다 보니 이러한 점에서 적잖은 불편함이 느껴진다.

물론, 그 덕분에 마력을 품고 태어난 자들의 가치가 높은 거겠지.

아마 오러 나이트가 아니라 마법사의 자질을 지니고 있다면 굶어 죽을 일은 없을 것이다.

마력과 연이 없는 귀족들이 자신들의 편의를 위해 마법사를 갈구하는 수요는 언제나 존재했으니까.

딸칵!

“……”

그렇게 강의실 내부의 후덥지근한 공기를 식히며, 조용히 휴식을 취하던 페르젠은 누군가가 문을 열고 들어서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감았던 눈을 떴다.

아직 20분이나 되는 여유로운 시간이 남아 있는데.

굳이, 일체형 책걸상으로 포진된 이 쓰레기 같은 강의실에 미리 발을 내딛은 이가 누구 일까 싶어서.

“아……”

인기척을 느끼고, 놀라 내뱉는 희미한 목소리가 아름답다.

“아, 안녕…… 하, 하세요……”

소녀라 하기에는 성숙했고.

여인이라 하기에는 풋풋한.

마치, 만개하기 전의 꽃처럼.

그 경계선에 서있는.

라우라 드 샤를 로젠베르크.

그녀가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으며 다소 곤히 인사를 건네 온다.

“그래.”

그 인사를 가볍게 받아준 페르젠은, 교탁 앞을 지나쳐 자신의 자리로 걸어가는 라우라를 조용히 쳐다보았다.

확실히 더위에 약하기는 한 건지, 기숙사에서부터 시작해 이 강의실까지 걸어오는 짧은 시간 동안 흘린 땀이 적지 않아 보인다.

그녀의 걸음걸이를 따라 특유의 체취가 잔향을 남기고.

새하얀 피부가 옷 너머로 얼핏 비추어지고 있었으니까.

“하아……”

이윽고 자신의 자리에 착석한 라우라는 짜증 섞인 손놀림으로 걸치고 있는 겉옷을 벗어 의자 쪽에 걸었다.

아침 6 ~ 7시 정도라면 모르겠지만, 9시가 가까워지는 이맘때는 햇살이 강해져 밖으로 나갈 때는 반드시 피부를 보호해야 했다.

그 때문에 짧은 거리의 이동에도 더위에 허우적거리는 것이다.

‘안 보나……?’

턱 끝에 고인 땀방울을 닦고, 라우라는 페르젠의 시선을 확인한 뒤 치맛단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그리고는 나풀나풀, 치맛자락을 펄럭인다.

경박한 행동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내부의 시원한 공기가 치마 안으로 들어오자 저절로 축 늘어진 몸에 활력이 샘솟았다.

‘기구해……’

전생의 자신이 베푸는 편의를 받고 있는, 현생의 자신이라니.

페르젠의 옆에 서있는 이사벨을 바라보며, 라우라는 말로 형용하기 힘든 오묘한 감정을 느꼈다.

“말은 해놓았느냐.”

“네……?”

그러다 대뜸,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페르젠의 목소리에 라우라는 황급히 손을 놓고 되물었다.

허벅지에 남아 있는, 어설프게 메마른 땀.

그곳에 다시금 달라붙는 치맛자락의 감촉이 무척이나 불쾌하다.

“시험이 끝나고, 루에르그로 올라갈 핑계 말이다.”

“이, 일단은요……”

“뭐라고 했느냐.”

“루, 루에르그의 영지…… 마, 마법사가 되, 되기 위해…… 겨, 경험을 쌓을 겸…… 오, 올라가겠다고……”

“그런가.”

확실히, 유리엘도 있으니.

루에르그 쪽에 마도 병단을 편성하는 것도 나쁘지 않아 보인다.

“괜찮구나.”

짧게 대답을 마친 페르젠이 시선을 돌린다.

그에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던 라우라는, 잠시 뒤 신경을 끄고서 쇄골 부근에 달라 붙은 머리카락을 정돈했다.

그러자 팔뚝의 땀이 겨드랑이를 타고 흐르는 게 느껴진다.

옆트임 된 가슴부근으로 시원한 공기가 스며 들어온다.

“흣……”

그 오싹한 감각에 라우라는 몸을 살짝 떨었다.

원치 않은 자극에 반응한 몸이 분홍색 유두를 꼿꼿이 일으킨다.

땀에 젖어든 새하얀 민소매 원피스는 움찔거림을 따라 그녀의 앙증맞은 유두를 스치듯 희롱했다.

그 끝에 새하얀 백지에 떨어진 물감처럼, 그녀의 아담한 가슴 가운데로 야릇한 분홍색이 번져나간다.

‘아……’

가려야 하는 게 옳을 텐데.

라우라는 자신도 모르게 몸을 앞으로 살짝 숙였다.

만월의 괴벽에 시달리며 극상의 쾌락을 겪었던 몸이, 고작 옷자락에 유두가 스치는 간질간질한 감각을 쫓는 건 의아한 일이었다.

“으응……”

꼬옥 다물린 입술 사이로, 달뜬 신음이 흘러나온다.

움찔!

라우라 본인도 스스로가 이리 색정적인 목소리를 낼 수 있었나 싶어 뒤늦게 적잖은 당황을 머금었다.

혹시 들었을까.

불안한 마음에 라우라는 슬그머니 고개를 치켜들었다.

다행히도 그는 여전히 다른 곳에 시선을 두고 있었다.

하기야 이 정도 거리라면, 애초에 들리지도 않을 테고.

설령 들렸다고 한들, 지금 자신의 상태를 확인할 수는 없으리라.

그러한 안도와 확신이 들었기 때문일까.

자연스레 라우라는 그의 듬직한 체격과, 커다란 손을 눈에 담았다.

그날 밤, 이성이 잔존하는 만월의 괴벽 때도 느꼈지만……

확실히, 애송이가 아니라 어엿한 사내이기는 하다.

현생의 몸뚱이는 체구가 작으니, 저 커다란 손에 어루만져졌다간 전희가 아니라 일종의 유린이 되겠지.

“아……”

불결한 생각이 뇌리를 물들이던 찰나, 페르젠과 시선이 마주치자 라우라는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자신의 가슴 부근을 팔로 슬며시 가린다.

육체가 어려서 그런지, 정신도 함께 어려지는 걸까.

주책이 따로 없었다.

그렇게 잠시 뒤, 하나 둘 학생들이 강의실 안으로 들어서며 빈자리를 채워 나간다.

하지만 한자리 만큼은, 9시가 가까워지고 있음에도 끝끝내 채워지지 않았다.

“……”

직후, 정확히 9시가 되자 페르젠은 몸을 일으켰다.

출석부를 들고,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그녀의 이름 옆에 체크를 한다.

그래, 그녀는 지각이었다.

아니, 강의가 끝날 때 까지 돌아오지 않는다면 무단 결석이 되겠지.

타악.

출석부를 내려두고, 페르젠은 소매를 걷어 올린 뒤 분필을 쥐었다.

“강의를 시작하마.”

* * * * *

페르젠이 오전 강의에 들어갔을 때, 유페미아는 그가 맡겼던 업무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기말고사의 장소, 선별된 조 인원을 본관과 기숙사의 게시판에 부착하고.

시험 당일 안전을 위해 황실의 마도 병단과 기사단에 인원 차출을 부탁한다는 공문서를 작성하여 제출한다.

그렇게 일을 마치고 교수실로 돌아오니, 시각은 어느 새 오전 9시 40분.

조금만 있으면 페르젠의 강의가 끝날 시간이기에, 유페미아는 주섬주섬 집으로 돌아갈 채비를 마쳤다.

물론, 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아니, 유리엘 웨인 데이나 루에르그.

그녀가 오후에 퇴근을 하는 만큼, 점심 정도는 함께 하는 게 어떠냐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유페미아는 그러고 싶지 않았다.

적어도 그녀가 가임기인 동안은 페르젠과 자주 동침을 할 터.

이러한 시간을 독점하는 게 결코 욕심이라 할 수는 없으리라.

딸칵.

생각을 마치고, 화장실로 향한다.

손을 씻고,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정돈한다.

“……”

그러다 문득, 그녀는 손을 멈추었다.

거울 속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이리 섬세하게 몸단장을 하는 행동 자체가 무척이나 낯설었기에.

손마디 끝에, 그에게 조금이라도 더 여인으로써 잘 보이고 싶다는 은은한 욕망이 묻어난다.

루에르그를 악착같이 이끌어 나갈 때는 외모에 조금도 신경을 쓰지 않았었는데.

내심, 그 때 외모에 조금이라도 신경을 썼으면 어땠을까 하는 후회와 미련이 뒤를 따르자…… 유페미아는 쓰게 웃었다.

부질 없는 생각이다.

그래, 그걸 알았기에 그녀는 걸음을 돌려 화장실을 나왔다.

아니, 나오려 했다.

또각.

입구로 들어서는 유리엘과 마주하지 않았다면.

“……”

“……”

어색한 침묵이 맴돈다.

유페미아는 일단 불편한 기색부터 억지로 감추었다.

어째서인지 그녀 앞에서는 최대한 여유를 품고 일관하고 싶었다.

반면, 유리엘은 돌아갈 채비를 마친 유페미아를 보고서 속으로 혀를 찼다.

아무래도 페르젠과 함께 점심을 먹기에는 그른 것 같았다.

하지만 불쾌하지는 않았다.

자신이 페르젠에게 요구했던 건, 유페미아를 우선하되 차별하지 말아달라는 것.

아침도 혼자 먹게 만들었으니, 나중에 이걸 빌미로 무슨 요구를 해도 잠자코 들어주지 않을까.

그러한 생각에 오히려 기분이 좋아져 유리엘은 옆으로 몸을 돌려 길을 터주었다.

”나중에 봐요.”

자신을 지나쳐가는 유페미아에게 여유로운 미소를 띠며 말한다.

멈칫.

그리고 그 말을 들은 유페미아는 걸음을 멈추고, 물끄러미 유리엘을 쳐다보다……

”그래요.”

짧게 대답을 해준 뒤, 페르젠의 교수실로 돌아왔다.

타악.

희미한 소음을 내며 닫히는 문.

대칭으로 배치된 소파 앞으로 다가가, 조신하게 앉은 유페미아는 가녀린 손을 꽈악 말아 쥐었다.

억지로 여유를 부리는 것과 그러지 않은 것의 차이가 이러할까.

조금 전의 짧은 만남, 거기서 느꼈던 기류에 유페미아는 자신이 밀렸다는 생각이 들어 괜스레 울컥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가 첩을 들일 거라는 건 진작 예상하고 있었는데.

또, 실제로 첩을 들인다 했을 때도 크게 개의치는 않았었는데.

변화한 일상은 상상이상의 불편함을 그녀에게 선물했다.

사실 유리엘이 어설픈 도발을 해오기는 했어도, 견제라고 할 법한 행동은 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날을 세우는 건, 일종의 열등감이리라.

변방의 루에르그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가문, 알프레드.

그 점을 떼고 봐도, 개인의 성취는 차이가 있었고.

여인으로서의 매력은, 솔직히 말하자면 유리엘이 우위였다.

아마 마력을 품고 태어나지 않았다면, 사교계의 꽃이 되고도 남았겠지.

”……”

어쩌면 페르젠이 첩을 들인다 했을 때, 순순히 수긍을 했던 건 마음이 넓은 여인으로 보이기 위한 가면이 아니었을까.

하등 가진 게 없으니, 귀찮게 보여 미움 받고 싶지 않은.

그래, 어쩌면이 아니라 아마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생각이 거기까지 미쳤을 때, 유페미아는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사실이라는 단어 앞에 아마도를 붙여야 할 만큼, 나약한 자존감이 불쌍하고 안타까워서.

이 감정은…… 틀림없는 독점욕이겠지.

그것도 세상에서 가장 소심한 독점욕.

딸칵.

“아……”

어느덧 시간이 벌써 오전 10시 10분.

강의를 마친 페르젠이 문을 열고 들어선다.

“수고, 했어요……”

그에 몸을 일으킨 유페미아는 감정을 갈무리하고서 그를 맞이했다.

“안 좋은 일이라도 있었나.”

하지만 페르젠은 그러한 자신의 속내를, 언제나처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그런 그가 신기하면서도……

어째서 더 깊이 알아주지는 않는가 싶어,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조금 미워졌다.

많이 미워할 용기도, 자신도 없었기에.

말 그대로, 아주 조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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