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9 089─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시녀들에게 대기를 하고 있지 말라고 미리 언질을 준걸까?
안으로 들어선 저택은 고요했고,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어둠을 은은하게 몰아내는 야광석이 장식된 샹들리에는, 열린 창문 너머로 불어오는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고.
그 때문인지 발광하는 빛이 아지랑이처럼 넘실거리며, 호화로운 분위기 보다는 조금 더 음습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마치, 이 세상에 페르젠과 자신만이 남은 듯한 느낌.
그게 싫지만은 않아서 유리엘은 잠깐 걸음을 멈추고, 페르젠의 팔에 자신의 머리를 슬그머니 기댔다.
“……”
그러자 그는 아무런 말없이 자신을 내려다보다, 손을 뻗어 흐트러진 앞머리를 부드럽게 정리 해주고는 마주 잡은 손을 끌어당겼다.
사내가 여인을 이끌어 준다는 건 얼핏 보면 로맨틱 했지만, 유리엘은 그가 무형의 목줄을 잡아당기는 것만 같아서 오히려 복속된 느낌을 받고 야릇한 기분을 머금었다.
저벅.
또각.
계단을 타고 올라가는 서로의 발걸음 소리가 선명히 들려온다.
옆에서 올려다본 페르젠의 모습은 살짝 위험한 냄새를 풍겼다.
사로잡은 먹잇감을 은신처로 은밀히 옮기는 늑대가 이러할까.
하지만 유리엘은 저항하지 않았다.
사로잡힌 양이 울지 않고 고분고분하게 구는 건, 모순적인 일이었다.
‘아……’
그렇게 저택 어딘가에 있을, 자신의 침실로 이동하던 중.
유리엘은 고급스런 문양이 새겨진 어떤 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는 페르젠을 올려다보고는 입술을 앙 다물었다.
그녀도 눈치가 없는 건 아니었기에, 직감적으로 이곳이 그 보잘 것 없는 루에르그의 여인이 머무르는 침실이라는 걸 알아차렸다.
“오늘 밤…… 당신이 곁에 있어야 하는 건 나야.”
“그래.”
“……”
“결례를 범했구나. 미안하게 되었다.”
페르젠이 사과를 하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유리엘은 적잖게 놀랐으나, 한편으로는 불쾌하기도 했다.
페르젠이 사과를 했다는 건, 정말로 그 여인의 눈치를 봤다는 거기에.
하지만 유리엘은 그 대목에서 위화감을 느꼈다.
애당초 그가 누군가의 눈치를 본다는 게 우스운 일이었으니까.
아니, 눈치를 본다고는 해도……
이미 자신을 첩으로 들여 버린 시점인데 그럴 이유가 있나?
게다가 굳이 자신의 초야를 앞두고 이렇게 보란 듯이.
‘아……’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유리엘은 짚이는 게 있다 싶었다.
“기분이 상했나.”
일단은, 이대로 어울려 주는 게 나을까.
“알면서 묻지 마.”
적당히 연기를 하며, 유리엘은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페르젠은 토라진 척 하는 자신을 다그치듯 입을 열었다.
“유리엘…… 질투를 하게 되면 너만 피곤해질 것이다.”
라고.
그 말을 듣고 유리엘은 속으로 웃었다.
하기야 그도 결혼을 한지 1년이 채 되지 않았고, 가정 내에서 다수의 아내를 거느린 적도 없으니 이런 점에서는 어수룩한 게 당연하리라.
“있잖아. 눈치가 보이면 말하고와.”
“……”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어서 일까.
굳은 듯 경직된 그의 표정이 유리엘은 신기했다.
이렇게 다양한 감정을 내비치는 페르젠은, 좀처럼 드물었기에.
‘그래도 불쾌하기는 했으니……’
조금은 그가 싫어할 행동을 하기로, 그녀는 마음먹었다.
“지금 나랑 섹스 하러 간다고.”
“……”
“당신 자지, 다른 여자에게 넣으러 간다고. 하지만 바람 같은 건 아니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와도 괜찮아.”
“유리엘.”
“천박한 단어는 듣기 싫지?”
“알면서 그러나.”
“당신도 지금 나쁜 짓 하고 있잖아. 여자는 생각보다 이런 거에 민감해. 금방 눈치를 챈단 말이야. 나하고 그 여자하고 은연중에 차별을 하면서 서열 정리를 시켜주려는 거 아니야?”
유리엘의 말에 페르젠은 몸을 움찔했다.
그 말이 사실이었기에.
“고작 해봤자 북부 변방에 있던 여자한테 질투심을 느끼고 해코지를 할 만큼, 나 스스로의 매력에 자신감이 없지는 않아.”
천한 신분.
능력도 보잘 것 없고.
미색도 뛰어나다고 하지는 못한다.
그런 여자한테 질투심을 느끼는 건, 언어도단이라 할 수 있겠지.
하지만 페르젠이 그 여자에게 더 좋은 대접을 해주거나, 신경을 쓰려 할 때면 유리엘은 반사적으로 심사가 뒤틀리는 느낌을 받았다.
“시기와 질투를 해도, 그건 당신 행동 때문이야.”
차별에 질투심을 느끼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것이었다.
물론, 어느 정도 보상 심리가 있다는 걸 유리엘은 부정하지 않았다.
삶에 투자된 세월 자체가 달랐으니까.
그것은 일종의 비틀린 애정, 아니 애증이라 하는 게 옳겠지.
태생부터 페르젠만을 위해 다듬어진 만큼, 그 과정에서 상실했던 요소들을 채우고 보답 받을 상대 또한 페르젠이 유일한 것이다.
“그러니 화목한 가정을 원한다면 차별하지 마. 당신이 처신을 잘하면 되는 거야. 이러는 건 오히려 역효과만 낼 뿐이야. 나는 차별 받고 싶지 않거든. 차별 받기 싫어. 내가 왜 차별을 받아야해? 내가 어떻게 길러졌는지, 어떻게 살아왔는지 알고 있잖아.”
“……”
“나는 당신하고 원소 마법 이론에 관해서도 심도 깊은 대화를 나눌 수 있어. 정치도 모르지 않기에 영지의 경영이나 앞날의 방향에 대해서도 고충을 나눌 수 있고. 그러다 배가 고플 때면 메뉴를 고민하지 않아도 괜찮아. 당신이 먹고 싶은 건 나도 좋아하니까.”
손을 뻗는 유리엘이 페르젠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움켜쥔다.
“대화를 나눌 때는 어색한 침묵이 맴돌지도 않을 거야. 당신이 읽었던 책, 다루는 악기, 즐겨봤던 연극 등…… 주제를 잠깐만 돌려도 나는 그 모든 것에 당신하고 교감할 수 있는 걸.”
“유리엘.”
“그 여자를 먼저 우선 해주는 건 괜찮아. 하지만 우대하지는 마. 그 여자에게 선물을 해줄 때면, 나중에 나한테도 같은 걸 해줘야해. 머리를 쓰다듬거나 하는 간단한 스킨십도 예외는 아니야.”
“……”
“당신하고의 모든 걸, 그 여자가 먼저 겪는 건 괜찮지만…… 내가 당신하고 겪어 보지 못한 걸, 그 여자가 가지고 있는 건 싫어. 유형적인 형태든. 무형적인 형태든.”
꾸깃 움켜쥐었던 페르젠의 옷자락을 정리해주며, 유리엘은 손을 내렸다.
“나를 다루는 방법 같은 건 간단해. 그러니…… 복잡하게 돌아가지마.”
많은 감정, 또 많은 의미가 담겨 있는 그녀의 말에 페르젠은 잠시 침묵을 머금고 입을 열었다.
“그러도록 하지. 내가 생각이 짧았다.”
“……”
“미안하다. 유리엘.”
“응……”
조금 전의 사과 하고는, 담겨 있는 진정성이 달랐기에 유리엘은 슬그머니 그의 가슴팍에 자신의 머리를 기댔다.
그러자 그는 자신의 머리에 커다란 손을 얹힌 채, 조금 더 깊숙이 고개를 묻게 해주었다.
그에 유리엘은 자신의 이름을 불러준 주인의 목소리에 기뻐하는 강아지처럼, 살포시 얼굴을 비비적거리며 그의 체취를 들이켰다.
상대방의 체향에 민감한 것조차, 두 사람의 공통점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어느 정도의 시간이 흘렀을까.
꽈악!
“응……!”
가까운 거리에서 짙게 풍기는 자신의 체향 때문인지,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리고 거칠게 끌어안는 페르젠의 행동에 유리엘은 조금 숨이 막혀 왔다.
특히나 자신의 가슴이 사정없이 짓눌리고 있는 터라 부끄러웠다.
아마 옆트임이 된 드레스였다면, 틀림없이 눌린 가슴이 천박하게 삐져나왔겠지.
“읏……”
하지만 그러한 상념도 곧 수그러들었다.
페르젠의 손이 허리와 등을 야릇하게 더듬거리기 시작했기에.
그리고 자신의 아랫배에 마주 닿은, 그의 바지춤이 서서히 부풀어 오르자 유리엘은 곧장 얼굴을 붉혔다.
사실 정장의 바지는 신축성이 그리 좋지가 않았다.
때문에 마차에서 곁눈질로 보았던 크기와, 옷을 벽으로 삼고 피부로 전해 받는 크기는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아……’
그러나 유리엘이 제대로 된 크기를 가늠하기도 전에, 이성의 끈을 살짝 붙잡은 페르젠이 몸을 떨어트린다.
이런 것에 아쉬움을 느끼는 자신이 의아하면서도, 유리엘은 슬그머니 손을 뻗어……
움찔!
그의 발기한 성기를, 바지 위로 상냥히 어루만지듯 움켜쥐었다.
“그……”
스스로의 행동에 속으로 많이 놀란 유리엘이었지만, 몸을 움찔하는 페르젠이 귀여워 자연스레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러자 살짝 찌푸려지는 그의 미간, 특유의 붉은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본다.
이미 수습하기도 늦었다 싶었기에, 유리엘은 그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며 샐쭉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애써 가라앉혔던 거, 다시 서버렸네.”
“……”
“저택 복도에서 당신을 발기 시킨 건, 내가 처음일까.”
잠시 손을 떼어내고는, 다시금 부드럽게 검지를 뻗어 페르젠의 고간을 쿡쿡 찌르는 유리엘.
스스로도 이런 여유가 어디에서 나오는 건가 싶었지만, 페르젠을 상대로 주도권을 잡은 듯한 느낌이 들어 괜스레 기분이 좋았다.
“……”
그에 페르젠은 아무런 말없이, 앞머리를 쓸어 올렸다.
약간의 땀이 묻어난다.
어설프게 주도권을 쥐고 기뻐하는 그녀의 모습을 보고 있자하면, 사랑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짓뭉개고 싶은 가학심이 피어올랐다.
“앗……!”
“가지. 멀지 않았다.”
그래서 페르젠은 유리엘의 손을 붙잡고, 멈췄던 걸음을 내딛었다.
그녀의 침실은 정확히, 유페미아의 침실에서 멀리 떨어진 대각선에 위치한 곳.
저벅.
페르젠의 걸음이 멈추어 서자, 유리엘도 이곳이 자신의 침실임을 알아차렸다.
그리고 이 안으로 들어가면 초야를 치르게 된다는, 뒤늦은 자각에 유리엘은 괜스레 잔뜩 긴장했다.
어째서 시녀들이 고관절을 풀어주는 마사지를 해주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왜 가만히 서있나.”
“뭐, 뭐가……”
“문 여는 방법을 모르지는 않을 텐데.”
“바보 취급하지 마……”
페르젠의 말에, 울컥하며 손을 뻗는 유리엘.
하지만 뒤에선 페르젠이, 자신의 엉덩이 부근에 부풀어 오른 성기를 쿡 찌르듯 가져다대자……
“힉……!”
그만 꼴사나운 신음을 흘리며, 몸을 움찔하고 말았다.
뒤이어 비웃는 듯한, 그의 목소리가 귓가로 들려오자 유리엘은 두 눈을 치켜뜨고 그를 돌아보려 했지만……
벌컥!
“아……”
자신의 뺨 너머로 뻗어지는 그의 손이, 침실의 문을 열어 버렸기에 그럴 여력을 가질 수가 없었다.
툭.
또각.
동시에 등을 떠미는 그의 몸에, 유리엘은 엉거주춤 걸음을 내딛어 안으로 들어섰다.
침실의 내부는 단조로웠다.
그리고 그러한 단조로운 구성은 페르젠의 취향이었고, 동시에 자신의 취향이기도 했다.
딸칵.
이윽고 문이 닫힌다.
“……?”
아니, 문이 잠겼다.
“무, 문은 왜 잠그는데……”
로비의 계단을 타고 오를 때 보았던, 살짝 위험한 냄새를 풍기던 그의 모습이 한층 짙어진다.
“흣!”
이내 가까이 다가온 페르젠은 아무런 말없이 뒤에서 유리엘의 허리를 거칠게 끌어안고, 그녀의 턱을 손으로 받쳐 올린 뒤 귓가에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혹여나, 네가 도망가지는 않을까 싶어…… 퇴로를 막아 놓았을 뿐이다.”
은신처로 들어선 늑대가 으르렁 거리며 이빨을 드러낸다.
그래, 양은…… 잡아먹힐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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