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88화 (88/260)

EP.88 088─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오랜 시간 끝에 백지였던 계약서는 빈틈없이 빼곡히 채워졌고.

그곳에 페르젠은 혈인을, 콜레오네는 가문의 인장을 찍어 계약서를 완성한 뒤 각자가 한부씩 소유했다.

직후, 페르젠은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몸을 일으키고는……

“유리엘.”

“으, 응……”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

이건, 3일전 데리고 가는 게 아니라 모셔가는 거라고 했던.

그 투정어린 말의 답변일까.

이미 결과가 정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의사를 묻는 듯한 페르젠의 행동에 유리엘은 수줍어하면서 손을 얹혔다.

“아……!”

그러자 곧바로 자신의 품안으로 끌어당기는 페르젠.

엉거주춤 자리에서 일어난 유리엘이 걸음을 휘청 이지만, 페르젠은 상냥히 그녀의 허리춤에 손을 휘감아 어긋난 균형을 잡아주었다.

제라드도.

콜레오네도.

가문의 시녀들도.

모두가 보고 있는데, 스스럼없이 스킨십을 하는 그의 행동에 유리엘은 순간적으로 부끄러움을 느꼈으나 페르젠의 손이 자신의 몸에 닿고 있는 그 감촉이 너무나도 좋아 얼굴을 붉혔다.

꾸욱.

가까운 거리에서 코로 스며드는 그의 체취.

페르젠의 옷자락을 살포시 움켜쥐고, 유리엘은 얼굴을 묻었다.

“가지.”

“응……”

페르젠의 걸음에 맞추어, 유리엘도 발을 내딛는다.

쾅!

“웃기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 모습을 지켜보며 제라드는 식탁을 거세게 치며 일어났다.

해당 계약서의 작성이 페르젠이 제시할 수 있는 대금일거라 생각을 하고 잠자코 지켜보았으나, 그 내용은 어처구니가 없을 뿐이었다.

아이를 낳고, 그 아이의 양육권을 넘겨주고, 거기에 대한 조율 정도가 자신이 제시했던 모든 것들보다 값어치가 있는 것이라고?

객관적으로도.

주관적으로도.

제라드는 인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페르젠은 마치 개가 짓는 걸 내버려두듯, 걸음을 멈추지 않고 이곳을 유리엘과 함께 떠나 버렸다.

그 뒤를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 6명이 조용히 따를 뿐이었다.

“어르신!”

그에 제라드는 콜레오네를 돌아보았다.

그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그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모종의 여운에 잠겨 그것을 즐기고 있는 듯 했다.

“콜레오네 웨인 바레타 알프레드──!”

기어코 제라드는 그의 풀 네임을 불렀다.

귓가로 파고드는 쩌렁쩌렁한 목소리.

순간적으로 집중이 박살난 듯 하여 콜레오네는 미간을 찌푸리며 제라드의 푸른 눈을 마주보았다.

그리고는 무심하게 한 마디를 내뱉었다.

으레 브뤼테인이 알프레드를 바라보는 것처럼.

“나가지 않고 뭐하느냐.”

길가의 돌멩이를 취급 하듯이.

“저 보고…… 이걸 받아들이라는 겁니까?”

하하!

어처구니가 없어서 제라드는 이마를 짚고 실소를 흘렸다.

제라드가 가문과 상의하여 제시한 사안에는, 자신의 누이가 황후가 되었을 때 그 전속 시녀의 인사권을 일임한다는 대목도 있었다.

지금처럼 황실의 권력이 강하고.

특히, 마도 병단과 기사단을 제외하면 오직 능력 있는 평민들만으로 구성되어 있는 구조상 어느 가문이 황실에 자신의 특정 세력을 키우기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유일하게 그럴 수 있는 틈이 있다면, 바로 황실 소속의 시녀들.

더군다나 그냥 시녀도 아니고, 황후의 전속 시녀들이었다.

이 인사권을 기반으로 다른 귀족가문에 더 큰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을 것이고, 황실 내에 자신들의 눈과 귀를 심는 것도 가능하리라.

이 뿐만이 아니라 제시했던 모든 것들이……

고작, 아이의 양육권과 그것을 기반으로 조율된 몇 개의 조항에 밀렸다는 게 제라드는 믿을 수가 없었다.

“부모의 마력은 아이에게 유전 되지 않는다는 결과가 이미 의학계에 논문으로 발표된 지 오래입니다. 그의 재능이 탐이 났습니까? 아니면 브뤼테인의 피라는 게 그리도 중요한 것입니까? 저나 그나 똑같은 인간입니다. 누가 봐도 제가 밀리는 조건들을 제시했다면 차라리 인정했을 겁니다. 하지만 이건…… 애당초 편파적인 판정이지 않습니까!”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내뱉는 제라드의 말에, 콜레오네는 구부정한 허리를 반듯이 피고서 대답해주었다.

“누가 똑같은 인간이라고 하더냐?”

“……”

“태생부터 귀족으로 태어나, 귀족으로 살아온 네가 그런 말을 하니 가소롭기 그지없구나. 인간의 가치란 개인에 따라 모두 다른 법이다.”

“……”

“그러한 점에서……“

콜레오네는 비릿하게 입 꼬리를 끌어 올렸다.

“너와 그는 종자(種子)가 달라.”

“어르신. 당신은…… 제정신이 아닙니다.”

“흐흐. 제라드 렌 밀레인 아스란. 북부의 애송아. 주제를 알거라. 알프레드가 먼저 혼인을 주선했다고 해서 뭐라도 된 줄 알았느냐? 호시탐탐 중앙으로 진출하기 위해 쥐구멍에서 고개를 내밀어 보는 천한 쥐새끼가.”

“……”

“들러리로 사용된 것이라도 감사히 여기 거라. 짧은 시간 그래도 좋은 꿈을 꾸었지 않느냐? 내 이름을 부른 것. 오늘의 무례 정도는…… 눈감아 주도록 하마. 두 번은 없을 것이다.”

절대로.

그리 말을 마치며, 콜레오네는 손을 저었다.

“자…… 이만 꺼지도록 하거라. 방해된다.”

주륵.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는 제라드의 손바닥에서 피가 흐른다.

손톱이 살점을 파고 든 것이다.

모욕, 아니 치욕에 가까운 축객령이었지만.

감히 입을 열 수는 없었다.

그렇게 제라드가 나서고, 콜레오네는 몸을 일으켜 페르젠이 자신의 손가락을 그었던 단검을 쥐어들었다.

그 끝에는 페르젠의 피가 굳어 있었다.

콜레오네는 그것을 스윽 핥아 보았다.

“하아……”

황홀한 맛이었다.

전신의 피가 아래로 쏠리는 느낌.

그리고는 그 단검을, 깨끗한 물이 담긴 잔에 집어넣고.

페르젠의 피가 퍼져나가는 모습을 보며, 콜레오네는 자신의 손가락을 슬며시 벤 뒤 피를 몇 방울 떨어트렸다.

“오……”

간접적으로나마, 알프레드와 브뤼테인의 피가 뒤섞이는 그 광경은……

정말, 아름다웠다.

* * * * *

마차를 타고 돌아가는 길.

그 안에서 여전히 유리엘의 손을 잡고 있는 페르젠은, 여름의 따스한 기온 때문에 조금씩 땀이 차는 것을 느끼고 풀어내려 했지만……

꾸욱.

마치 놓지 말라는 듯, 깍지를 껴오는 유리엘의 반응을 보고서는 작게 웃었다.

그리고 그 희미한 웃음소리를 들은 건지, 유리엘은 몸을 움찔하며 특유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려댔다.

“더, 덥네.”

그 끝에 닫혀 있는 마차의 창문을 발견하고, 그것을 열려고 했으나……

“놔두지.”

페르젠이 가볍게 저지했다.

“아……”

창가에 얹힌 자신의 반대쪽 손을 페르젠이 붙들었기에, 유리엘은 자연스레 그의 가슴팍에 갇힌 모양새가 되어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덕분에 드러나는 새하얀 목의 옆선.

풍겨오는 복숭아처럼 달콤한 향기.

잔잔했던 분위기가 어느새 바뀌어, 페르젠이 뜨거운 숨을 몰아쉬고 있다는 걸 유리엘은 눈치 챘다.

그가 굳이 충동을 억누르지 않고.

점점 고개를 가까이 들이밀고 있다는 점도.

그래서 유리엘은 창가 쪽에 붙잡힌 자신의 손을 슬며시 빼낸 뒤, 목덜미를 가리는 머리카락을 뒤로 넘긴 채 고개를 옆으로 젖혀 주었다.

대놓고 배고픈 이에게 만찬을 차려주는 격인데.

과연, 그것을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있을까.

“흑!”

아니나 다를까 페르젠은 곧바로 유리엘의 목덜미에 자신의 입술을 가져다대고서는 야릇하게 지분거렸고, 유리엘은 머리카락을 뒤로 넘겼던 손을 뻗어 페르젠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움켜쥐었다.

“으, 응……”

본능적으로.

먼저 유혹을 해버렸는데.

혹여나 자신을 천박하고, 경박하게 보는 건 아닐까.

걱정이 앞섰지만, 그에 대한 정답은 알 수가 없었다.

유리엘은 그저 페르젠에게 자신의 몸이 만져지고 핥아지고.

물들여지고 범해지는 감각 자체가 좋았을 뿐이기에.

아니, 그 감각이 좋은 게 아니었다.

만들어낸 음식을 맛있다고 해주는 손님의 말에 기뻐하는 요리사처럼.

유리엘은 자신의 몸을 갈구하는 그의 모습에, 만족감을 느끼는 것이다.

“흐응……! 앙……!”

이미 두 차례에 걸쳐 수많은 흔적이 새겨졌던 곳이라 그런지, 유리엘은 저번보다 예민하게 반응을 하며 달뜬 신음을 흘렸다.

그리고 인간은 언제나 반복되는 자극에 익숙해지는 법이었기에, 유리엘은 자그마한 목소리로 페르젠에게 속삭이듯 말했다.

“깨, 깨물어도…… 괜찮아……”

라고.

“힉……!”

그에 페르젠은 내심 절제하고 있던 이성을 조금 더 내려놓고, 달콤한 맛이 나는 듯한 유리엘의 목덜미를 이빨로 깨물었다.

목은 인간의 급소.

심장에서 보내는 피가 뇌로 올라가는 경동맥이 존재하는 곳.

뼈가 보호하고 있는 다른 급소와 다르게, 제일 취약한 부위.

유페미아가 자신의 아랫배, 자궁을 마음대로 만져지는 것으로 한 때 복종의 의사를 표현했다면.

유리엘은 자신의 목덜미를 페르젠에게 무방비하게 내줌으로써, 해당 의사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흐윽……!”

그리고 유리엘은 자신의 보드라운 살결을 지그시 누르며, 가까운 곳에 위치한 정맥을 압박하는 그의 행동에 아랫배가 저릿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피부에 마주 닿은 그의 입술 너머로, 두근거리는 자신의 맥이 제대로 전해지고는 있을까.

당장이라도 화장실을 가고 싶을 만큼, 오싹오싹한 쾌감이 고간에서부터 시작해 척추를 타고 뇌리를 울린다.

조금 더, 조금 더……

부채질하는 마음이 커져가며, 마차 내부에 열락이 가득 찼을 때.

“아……”

유리엘은 수많은 꽃향기가 마차 안으로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불어오는 선선한 바람.

정신을 차려보니 마차는 어느새 고요한 정원 속에 위치한 주차장에 정차해 있었고, 마차의 창문을 연 페르젠은 자신의 목덜미에서 고개를 떼어내고 천천히 숨을 고르기 시작했다.

“……”

그제야 유리엘도 이성을 되찾고, 불어오는 바람에 열기를 식혀나갔다.

하지만 손을 뻗어 더듬어본 목덜미는…… 뜨거웠다.

마치 화상이라도 입은 듯이.

그렇게 체감상 5분 정도가 지났을까.

분위기가 어색해질 만큼 가라앉은 열락에도 불구하고, 페르젠이 내릴 생각을 하지 않자 유리엘은 힐끔 그를 쳐다보았다.

설마, 그 볼품없는 여자의 눈치를 보고 있나?

‘아……’

하지만 유리엘은, 앉아 있는 그의 바지 앞섬이 불룩 솟아 있는 것을 보고서는 두 눈을 느릿하게 끔뻑였다.

그래.

페르젠이 바로 마차에서 내리지 않는 건, 발기해버린 자신의 성기를 완전히 가라앉히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순간 무얼 보고 있나 싶어 황급히 고개를 돌리는 유리엘이었지만……

싫어도 계속해서 눈이 간다.

‘저 정도면……’

그리고는 곁눈질로 부풀어 오른 그의 바지 앞섬을 훔쳐보며, 조심스레 고간부터 시작해 자신의 아랫배를 손으로 짚었다.

‘충분히, 들어갈 거 같네……’

그 때 꿈속에서 보았던 페르젠의 물건은 지나치게 크다 싶었는데.

역시 꿈은 꿈인 법이었다.

“히끅!”

그러다 페르젠과 눈을 마주치고서, 유리엘은 딸꾹질을 했다.

간신히 가라앉힌 몸의 열기가, 다른 의미로 뜨거워지는 느낌이었다.

부끄러웠다.

스륵.

하지만 페르젠은 가소롭다는 듯이, 조소를 머금으며.

고간부터 시작해 아랫배를 짚고 있는 유리엘의 손 위치를 올바르게 정정해준 뒤, 귓가에 대고 조곤조곤 속삭였다.

“여기까지 파고 들것이다.”

“거, 거짓말 하지 마……”

자신을 무슨 꿰뚫어 죽이겠다는 건지.

부끄러움 속에서도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리엘은 가까이 달라붙은 페르젠의 어깨를 밀어내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그, 그런데 자존심 같은 거…… 안 챙겨도 돼.”

“이런 것에 자존심을 챙길 만큼 자존감이 낮지는 않다.”

유리엘의 귀여운 행동에 순간적으로 맥이 탁 풀려 발기가 가라앉은 페르젠은 웃으며 마차의 문을 열고 내렸다.

“초야를 앞두고 굳이 그런 거짓말을 할 이유가 있을까.”

“……”

“가지.”

에스코트 해주듯 자신에게 손을 내미는 페르젠.

그걸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기에, 유리엘은 떨리는 손을 내밀어 그의 손을 마주잡은 뒤 함께 걸음을 내딛었다.

그러다 문득, 유리엘은 자신의 팔뚝이 눈에 들어왔다.

꿈에서 봤던 그의 물건은, 자신의 팔뚝 보다 조금 작았었던가.

‘아닐 거야……’

유리엘은 고개를 붕붕 저었다.

페르젠과 똑같은 검은색 머리카락이 흐트러지며, 달콤한 체향이 꽃향기에 뒤섞여 풀풀 날린다.

부정하고 부정해보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가짐으로.

유리엘은 고관절을 풀어주었던 시녀들의 마사지를 믿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13일…… 걸렸습니다.

9편으로 오고 싶었는데, 시간이 더 걸릴 거 같아서 일단 이렇게 부랴부랴 업로드를 합니다.

이번에는 강박증 이전에…… 제가 몸 관리를 제대로 못해서 3 ~ 4일 정도는 아예 글을 쓰지 못했습니다.

후기에는 앞으로 밝은 면만 보여드리자고 했기에, 당시 편도 밑의 염증 사진과 약 열흘 정도에 걸친 약제 조제 봉투를 증빙 자료로 첨부하여 공지사항에 업로드 합니다.

자세한 사정은 거기에 적겠습니다.

못난 작가라서 면목이 없습니다.

부디 이 6편이라도 독자님들의 마음에 드셨기를 바랍니다.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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