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87화 (87/260)

EP.87 087─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꽈악!

아름다운 드레스에 주름이 생길 만큼, 유리엘은 치맛자락을 움켜쥐었다.

10년 전 그날이 재현되는 것만 같아서 괴로웠다.

아니, 재현도 아니었다.

적어도 10년 전 그날은, 얼굴이라도 마주보았으니까.

그 때문인지 자연스레 불길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페르젠이 아스란 백작가와 모종의 거래를 한 건 아닐까하고.

그도 그럴 게 페르젠이 이번 혼약에 끼어든 이유 자체가, 아스란 백작가에 추가적인 힘이 실리는 걸 방지하기 위함이다.

그렇다면 문제를 빚을 요소가 없도록, 서로 협상을 했다면……

브뤼테인의 피가 흐르는 페르젠이.

굳이, 알프레드의 피가 흐르는 자신을 첩으로 삼으려 들까.

‘……’

해당 자문(自問)에 돌아오는 자답(自答)은, 온통 부정적인 것들뿐이었다.

실제로 자신의 할아버지, 콜레오네의 심기가 극도로 불편해진 것도 이러한 점을 예상했기 때문이리라.

“또한……”

그리고 무거운 분위기 속, 압박감을 이겨낸 제라드가 하나둘 제시하는 조건들이 너무나도 좋았기에 유리엘은 시간이 흐를수록 자신의 예상에 확신이 더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마치 알프레드 가문을 상대로 짜고 치는 계획된 경매를 하게 된 것에 대하여 죄송하다는 마음을 담아, 부풀린 대금을 내놓는 것 같았기에.

‘아니야……’

그런 식으로 이중적인 소비를 할 이유가 있을까?

나름 합리적인 근거를 들어 불안한 마음을 애써 달래보려는 유리엘이었지만, 그럴 때 마다 치맛자락을 움켜쥐고 있는 손은 자신이 없다는 듯 서서히 힘이 풀려 나갔다.

‘……’

「 너는 내게…… 충분히 여자로 보인다. 」

「 유리엘. 다음번에는, 데리고 가도록 하마. 」

귓가로 아른거리는 페르젠의 목소리.

이제는 거의 사라지다시피한, 그가 남긴 흔적들을 손으로 더듬거리며 유리엘은 입술을 짓씹었다.

보육원에 버림받은 어린 아이의 심정이 이러할까.

돈을 많이 벌면 찾으러 올게라는 부모의 말을 굳게 믿고, 기다리고 또 기다리며 아직 자신을 데리러 오지 않는 것은 돈을 많이 벌지 못해서라고 생각하지만……

결국, 나중에 가서는 완전히 버림받았다는 걸 깨닫게 되는.

‘모셔가지 않아도 괜찮아……’

여전히 열리지 않는 문.

그곳을 바라보며, 유리엘은 속으로 읊조렸다.

‘그러니…… 나를, 데리고 가줘……’

현재 시각은 오후 8시.

입찰자가 한 명뿐인 경매가 계속 이어진다.

* * * * *

만찬이 끝났다는 걸 알리듯, 시녀들이 분주하게 움직이며 커다란 식탁 위에서 하나둘 음식을 치우기 시작했다.

남아 있는 건 오직, 와인과 손질된 과일들 뿐.

그에 제라드는 편하게 와인을 마시며 콜레오네를 바라보았다.

준비해왔던 건 모두 제시를 했으니, 낙찰 소식만을 기다리면 되리라.

애당초 입찰자가 한 명뿐인 경매.

결과는 정해져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실례…… 하겠습니다.”

“어디가십니까?”

“……”

몸을 일으키는 유리엘을 보며 제라드는 웃으며 물었다.

이러한 자리에서 여인이 실례를 구하고 몸을 일으키는 경우는, 화장실을 가기 위함이라는 걸 알았지만 굳이 제라드는 그녀에게 의문을 표했다.

대놓고 수치심과 모욕을 주려는 의도였으나, 콜레오네가 나서지 않자 유리엘은 침묵으로 일관하며 문고리를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보며 조금 더 몰아붙여 볼까하는, 그러한 생각을 품었던 제라드였지만 어차피 함께 돌아가고 난 뒤에 해도 늦지 않을 거라 판단하며 얌전히 사과 한 조각을 입에 베어 문다.

그렇게 은은한 달빛만이 내리비추는 어두컴컴한 복도.

한참 그곳을 거닐던 유리엘은, 힘없이 벽에 몸을 기대어 섰다.

“아……”

그러다 바라본 창 밖.

저택의 정원 쪽에 주차된 두 대의 마차를 보며, 유리엘은 특유의 흑요석 같은 눈동자를 크게 떴다.

좌측의 마차에 새겨진 문양은 비상하는 푸른 매.

그리고 우측에 새겨진 마차의 문양은……

균형을 상징하는 천칭(天秤)이었다.

그래.

그것은 브뤼테인의 증표.

또각.

동시에 고요했던 복도 너머로, 발걸음 소리가 울려 퍼진다.

복도의 어둠이 짙어 마치 커튼에 가려진 사람처럼 윤곽만이 드문드문 보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리엘은 선명히 눈동자에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일률적이고.

규칙적으로.

한 점의 흐트러짐도 없이.

기품 있고.

품격 있게.

걸어오고 있는, 어둠조차 잠식하지 못하는 사내의 붉은 눈동자를.

“유리엘.”

이윽고 은은한 달빛이 내리비추는 장소.

자신의 앞으로 당도한 그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이름을 부른다.

“……”

유리엘은 대답할 수 없었다.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에, 오히려 말문이 막혔다.

“어째서 여기에 가만히 서있나.”

욕지거리를 한가득 쏘아 붓고 싶기도 했고.

왜 이렇게 늦었냐고 추궁을 하고도 싶었다.

“입술은 왜 그러나.”

하지만 결국, 유리엘이 선택한 건……

까득!

자신의 입술을 걱정스레 매만져주는, 페르젠의 손가락을 입으로 깨물며 불안 속에서 참아왔던 눈물을 흘려보내는 것이었다.

“……”

다행히도 힘 조절을 한 건지, 파르르 떨리는 입술 너머로 깨물린 손가락은 고통을 느끼지 못했기에 페르젠은 아무런 말없이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스륵.

그리고는 분위기와 어울리지 않게, 마치 아기에게 젖병을 물려주듯.

반대쪽──오른손의 검지를 그녀의 입가로 가져다댄다.

순간 어이가 없고, 또 화가 나서.

유리엘은 이빨에 강하게 힘을 줬지만, 결국에는 그가 다치는 걸 원치 않았기에 얌전히 부드러운 입술로 감싸 안아주었다.

“흑……!”

그리고 그 모습을 보며 옅게 웃는 페르젠은, 훌쩍이는 그녀를 달래주듯 눈가의 눈물을 닦아주고서 가녀린 허리를 끌어안았다.

“아……”

그리고 그제야 유리엘은 확인할 수 있었다.

페르젠의 뒤에 서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을.

“가지.”

곧이어 허리를 끌어안은 손에 힘을 주며 걸음을 내딛는 페르젠.

자연스레 사역 중인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 또한 뒤를 따른다.

현재 시각은 오후 9시.

벌컥!

문이 열리고.

페르젠이 당도했다.

* * * * *

또각.

언제나처럼 별다른 치장 없이,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임을 나타내는 휘장만을 넥타이에 장식한 그가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차려 입고 안으로 걸음을 내딛는다.

그 모습을 보며 제라드는 이를 악 물었다.

콜레오네의 기백에 한층 익숙해진 상태였는데, 두 시간 만에 모습을 드러낸 페르젠의 존재감이 자신의 머리를 찍어 누르는 것 같았기에.

실제로 방안에 있는 모든 시녀들도, 자연스레 고개를 숙인 채 최대한 숨소리를 죽이고 있었다.

말 그대로 숨을 멎게 만드는 고요함.

세상이 조용해진다.

그의 걸음 소리를 잘 들으라는 듯이.

그리고 그 압박감속에서 유일하게 자유로운 콜레오네는……

“오, 오오……”

두 눈을 크게 뜨고, 광기서린 희열을 머금었다.

페르젠의 뒤를 따르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 6명.

그는 전부 알고 있었다.

모를 리가 없었다.

브뤼테인 본인들을 제외하면, 그들의 역사를 가장 잘 아는 것이.

알프레드 일 테니까.

10대 가주, 레미엘 폰 그라함 브뤼테인.

13대 가주, 데미에르 폰 마르크 브뤼테인.

17대 가주, 로이스 폰 센펠스 브뤼테인.

22대 가주, 벨저 폰 뤼펜하임 브뤼테인

25대 가주, 자벨린 폰 몰리트 브뤼테인.

27대 가주, 바이에른 폰 그라함 브뤼테인.

어렵사리 손에 넣었던, 생전의 초상화만으로 기억을 하고 있는 브뤼테인의 유구한 역사를 코앞에서 실물로 맞이하니 콜레오네는 나이에 맞지 않게 심장이 두근두근 뛰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것은 페르젠이 의도한 바이기도 했다.

이것은 일종의 퍼포먼스.

……브뤼테인의 역사 앞에서, 알프레드의 피를 받아들이겠다는.

그것만으로도, 제라드가 어떠한 조건을 제시하든 콜레오네는 눈을 뒤집고 유리엘을 데려가는 것을 승낙하리라.

0.1%의 오차도 없이, 페르젠은 100% 확신했다.

알프레드라는 가문 자체가, 끝없는 평행선을 달리며.

브뤼테인을 향한 열등감에 찌든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이었으니까.

특히, 콜레오네는 그 정도가 심하다 못해 과했다.

페르젠의 할아버지, 정확히는 42대 가주의 여동생과 닮은 이를 자신의 처로 맞이하며 결혼을 할 정도였으니.

그런 식으로라도 브뤼테인에 알프레드를 섞고 싶은 추악한 욕망.

그 점을 자극하기 위해, 페르젠은 자신이 현재 보유하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을 사역하여 등장한 것이다.

“앉지.”

“응……”

이내 식탁 앞으로 당도한 페르젠은, 너무나도 자연스레 유리엘을 자신의 옆으로 앉히며 함께 착석했다.

“……뻔뻔하군요.”

그 모습을 보고, 제라드는 꾸역꾸역 입을 열었다.

악에 바친 목소리가 페르젠의 귀로 스며든다.

“지각한 것에 자각이 없는 겁니까?”

“지각하지 않았다. 나는 정시에 맞추어 왔을 뿐이야.”

허나 제라드의 말에 페르젠은 웃으며 대답했다.

“목적은 식사가 아니니까.”

“……”

“겸상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착각하지 마라.”

주어는 없었기에.

그 대상은 제라드를 뜻하기도 했으며.

동시에 콜레오네를 뜻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욕감을 느낀 제라드와 다르게, 콜레오네는 웃었다.

오히려 기뻐했다.

애초에 물과 기름이 뒤섞이는 것인데.

반발작용이 없는 게 이상한 것이다.

때문에 페르젠이 거부감을 드러낼수록 콜레오네는 쾌감을 느꼈다.

특히, 자율 통제로 사역 되고 있는 브뤼테인의 전대 가주들.

그들 모두가 무심한 듯 하면서도, 피드백을 받은 생전의 기억에 따라 희미한 경멸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 콜레오네는 그저 황홀했다.

어차피 저런다 한들, 이 혼약은 이루어질 테고.

알프레드와 브뤼테인의 피가 뒤섞인 아이가 태어날 테니.

현 브뤼테인의 가주──제레미아를 포함 한다면 무려 44대.

그 기나긴 시간 끝에 드디어 염원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짜악!

곧이어 콜레오네가 손뼉을 크게 치자, 곁에 있던 시녀 한명이 식탁의 중앙으로 다가가 새하얀 백지 두 장을 꺼내 내려놓았다.

그 의도가 무언지 쯤이야, 페르젠은 어렵지 않게 눈치를 챌 수 있었다.

바로 이 자리에서 계약의 내용을 조율하자는 것이리라.

“먼저 말하거라. 경청하도록 하지.”

편안히 등을 기댄 콜레오네가 깍지를 낀다.

그에 페르젠은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유리엘과 잠깐 시선을 마주하고서는, 첫 번째 항목을 제시했다.

사실 이것은 고민이랄 것도 없었다.

이 혼약이 성사되기 위해서는, 필수부가결한 요소였기에.

“나는 알프레드 가문의 차녀──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를 첩실로 받아들이고, 이후 낳는 첫 번째 남아의 양육권을 포기한 뒤 해당 권리를 전적으로 알프레드 가문에 일임하겠다.”

아.

이 얼마나 기분 좋은 울림이란 말인가.

브뤼테인의 피를 이은, 그것도 당대 최고의 재능을 가진 이가 저런 말을 해주니 콜레오네는 오싹오싹한 느낌이 들었다.

만약, 이 세계에 녹음기라는 게 있었다면.

콜레오네는 페르젠의 저 발언을 녹음한 뒤, 수시로 들었으리라.

“단, 아이는 친부와 친모가 누구인지 알 권리가 있고. 아이 또는 부모가 서로 만나자고 할 때 알프레드 가문은 해당 요청을 거부할 수 없다.”

“받아들이마.”

“그러면 첫 번째 항목은, 여기까지 하지.”

어쩌면 가혹할 수도 있겠으나.

오직 한 사람에게 권력을 집중시켜 주는 알프레드 가문의 구조상, 페르젠은 그 아이에게 절대 나쁜 결과가 기다릴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다.

“자…… 둘째 항목은, 내가 말하지.”

“……”

“출산을 할 때, 모체와 아이가 동시에 위험에 처한다면 아이의 목숨을 우선시 한다. 물론, 이때는 의사의 소견 아래에 모체를 구해봤자 더는 임신을 할 수 없을 거라는 판단이 내려졌을 때다.”

콜레오네의 말을 들으며, 페르젠은 미간을 찌푸렸다.

자신의 손녀를 굳이 모체라고 칭하는 건 둘째 치고.

어투에서부터, 단순한 씨받이 취급을 하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기에.

알프레드와 브뤼테인의 피가 섞인 아이를 얻을 수만 있다면, 그녀가 죽든지 말든지 하등 상관을 하지 않겠다는 비정함.

하지만 유리엘은 익숙하다는 듯, 쓰게 웃었다.

알프레드 가문 내에서 여인의 위치란 원래 그러했으니까.

또한, 자신의 아이를 위해 죽는 거라면……

유리엘은 기꺼이 그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정정하지.”

“아……”

하지만 페르젠은 그걸 얌전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에 콜레오네의 눈썹이 꿈틀 했다.

다만, 정정이라고 했으니 뒷말을 기다렸다.

애초에 해당 상황 자체가 그리 흔한 게 아니었기도 했으니까.

“바로 아이의 목숨을 우선시 하는 게 아니라, 의원의 소견 아래에 산모와 아이가 서로 버틸 수 있는 한계 시간 동안은…… 내가 명계의 3층을 열어 신체의 결손과 상처를 치료 시켜주는 괴이와 접선을 시도한다.”

“해당 상황은 표본으로 삼을 사례가 적다. 때문에 한계 시간이 정확하다고 할 수는 없을 텐데? 3분이라 지정을 했는데 그 전에 둘 모두 죽어버린다면 어찌할 생각이냐?”

“책임은 전부 내가 지겠다.”

“알프레드의 다른 여인과 대신 정을 통하라 해도?”

“그걸 바란다면.”

“그렇다면 별다른 이견은 없구나. 받아들이도록 하마.”

무거운 분위기와 달리, 지나치게 매끄러운 진행이었던 터라 유리엘은 해당 결과를 수용하고 인지하는데 약간의 시간이 걸렸다.

그도 그럴게 저 말은, 다시 한 번 알프레드의 여인과 정을 통하게 된다 하더라도 아이와 자신의 목숨을 모두 구해보겠다는 뜻이었으니까.

‘……’

낯설었다.

조금.

그래서 유리엘은 무심코, 식탁 아래로 손을 뻗어 보았다.

페르젠의 왼손을 건드렸다.

그러자 그는 말없이 자신의 손을 잡아 주었다.

따스한 온기가 전해진다.

커다란 그의 손에 꽉 붙들린 자신의 오른손.

가문의 씨받이로, 물건으로, 도구로 다뤄지고 있는 상황이어도.

유리엘은…… 이 순간이 행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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