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86 086─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꿈은 보통 무작위의 형태를 자주 띠지만, 그 외의 사례는 일반적으로 본인의 심리 상태를 반영하는 경우가 잦았다.
‘……’
그리고 유페미아는, 자신의 자각몽 속에서 잠시 넋을 잃었다.
왜냐하면 아름다운 창가 너머의 보름달, 그곳에서 내리비추는 달빛이 방안의 따스한 불빛과 어우러져 몽환적인 풍경을 자아내고 있었고……
의자에 앉아 있는 자신은, 무려 만삭에 가까운 상태였기에.
이것은 겉으로 내색하지는 않았어도, 페르젠이 알프레드의 차녀를 첩으로 들이는 것에 불안해했던 심리의 보상 반영일까.
그리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미래의 자신이 입가에 옅은 미소를 머금고 마치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듯 상냥히 바라본다.
‘그러면……’
그이는 어디에 있는 걸까.
문득 든 생각이었으나, 꿈은 마치 그것을 반영 해준 듯……
열리는 방문 너머로 페르젠이 들어서더니, 미래의 자신에게로 천천히 다가가 애정 가득한 손길로 만삭에 가까운 배를 어루만지며 상냥한 키스를 건네주기 시작했다.
쪽.
울려퍼지는 낯 뜨거운 소리.
충분히 부끄러워 할 법도 했지만, 미래의 자신은 그러한 애정을 받는 게 익숙하다는 듯 얼굴조차 붉히지 않고 오히려 요염한 미소를 짓더니 그의 등을 두 손으로 끌어안았다.
흘러넘치는 여유와 특유의 요염한 성숙미는, 정말로 자신인걸까 싶어 일순간 이질감이 드는 유페미아였으나……
“흐, 응……”
네글리제의 치맛단을 끌어 올린 뒤, 새하얀 배위로 입맞춤을 해주는 페르젠의 행동에 야릇한 신음을 흘리는 모습을 보고는 말끔히 해소되었다.
그렇게 한참 달뜬 신음을 흘리던 미래의 자신은, 색기 가득한 얼굴로 페르젠의 머리를 애틋하게 끌어안더니 해당 광경을 지켜보고 있는 자신과 조용히 눈을 마주하고서……
걱정할 거 없다고.
그는 이 순간까지 여전히 좋은 남편이라고.
입 모양으로, 사근사근 알려준다.
움찔!
“……”
꿈은 거기서 끝이 났다.
정확히는 이후의 행복한 순간까지는 더 염탐하지 말라는 듯, 마치 내쫓기듯 정신이 현실 세계로 돌아왔다.
밤이었던 꿈속과 다르게 따스한 햇살이 내리비추는 방안.
조심스레 고개를 돌려보니, 곁에 앉아 있는 페르젠이 보인다.
“열은 좀 내렸나.”
듣기 좋은 중저음의 목소리.
자신의 이마를 짚는 특유의 커다란 손.
그곳에 스며든 애정에, 유페미아는 잠시 멀뚱멀뚱 그를 바라보다 이마에 위치한 손을 자신의 뺨으로 옮기고서는 아이처럼 비비적거렸다.
“응……”
어렴풋하게 남아있던 근심이, 말끔히 사라지는 느낌이 들었다.
* * * * *
6월 9일.
오후 5시 30분.
유리엘은 페르젠이 마련해주었던 집 바깥으로 알프레드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정차하는 모습을 보고서는, 조용히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이 집에서 챙겨갈 물건 같은 건 딱히 없었기에, 그녀는 자신이 살았던 흔적을 고스란히 남겨둔 채 문을 열고 밖으로 나섰다.
“오랜만이네요.”
“격조하셨습니까. 유리엘 아가씨.”
“네. 가요……”
마부에게 빙그레 웃어주고서, 유리엘은 마차 안으로 올라탔다.
그렇게 상당히 오랜 시간 떠나 있었던, 수도에 위치한 저택으로 돌아온 유리엘은 언제 그랬냐는 듯 공손히 뒤를 따르는 시녀들과 함께 욕실로 들어가 정성스런 시중을 받았다.
향유는 뿌려지지 않는다.
초야가 될 오늘 밤은, 자신의 체향만큼 매혹적인 게 없을 테니.
“흑! 뭐, 뭐하는 거야?”
“뭉치거나 굳은 근육을 풀어주기 위함입니다.”
“안하던 짓을 하고 그래. 할아버지가 시켰어?”
“예.”
허리와 고간 부근에 손을 뻗어 마사지를 해주는 시녀들의 손길에 유리엘은 당황하면서도 몸을 움찔했다.
“고관절이 부드럽게 풀려있을수록, 감도가 높아진다고 합니다.”
“지랄도 가지가지네……”
어처구니가 없어서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물론, 그러려니 말건 시녀들은 유리엘의 몸을 마사지해주며 고관절 근처의 굳은 근육을 부드럽게 풀어주었다.
이후, 욕실에서 나오니 시각은 오후 6시 30분.
곧장 드레스 룸으로 향한 유리엘은, 새하얀 드레스로 갈아 입혀졌다.
아마 단정한 검은색 정장을 선호하는 그였으니, 거기에 조화롭게 어울리기 위한 색감의 선택이리라.
더불어 장신구를 이용한 치장은 하지 않았다.
제라드는 모르겠으나, 페르젠은 그러한 걸 싫어했기에.
그래, 사실상 경매라는 형태를 띠고 있어도.
유리엘 자신은, 오직 페르젠만을 위해 포장 되고 있는 것이다.
“끝났습니다.”
오랜 시간 끝에, 시녀들이 손을 내린다.
그리고 반쯤 감았던 눈을 뜬 유리엘은, 옅은 화장까지 곁들인 거울 속 자신의 모습을 보며 한 동안 아무런 말을 하지 않았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이라도 있으신가요?”
“아니…… 가자.”
시녀의 물음에 고개를 저으며, 유리엘은 드레스의 치맛단을 살짝 들어 올린 뒤 걸음을 내딛었다.
첩실로 들어가는 경우, 보통 식을 거행하지 않는다.
유일하게 식이 거행되는 경우는, 남편이 대놓고 처보다 첩을 대우해주겠다는 상황 하나뿐이었으니까.
‘그러니……’
식은 바라지 않더라도.
그 때, 오래전 거리에서 보았던 그림 한 폭처럼.
유리엘 자신 또한, 페르젠과 단란히 새겨지고 싶었다.
* * * * *
끼익.
수도 중심에 위치한, 알프레드 가문의 명의로 매입된 저택 앞으로 고급스러운 마차 한 대가 멈추어 선다.
새겨진 문양은 비상하는 푸른 매.
누가 봐도, 북부의 수장──아스란 가문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저벅.
아니나 다를까, 조용히 열리는 마차의 문 너머에서 모습을 드러내는 인물은 특유의 은색이 맴도는 회색빛 머리카락을 가진 사내──제라드였다.
그는 아젤리아에서 주문 제작한 푸른색 정장을 단정히 차려 입고 있었으며, 얼굴에는 티를 내지 않으려 해도 긴장한 기색이 가득 드리워 있었다.
어찌되었든 경쟁의 상대가 브뤼테인의 적손이었으니까.
‘시간은……’
오후 7시가 되기 10분 전.
나쁘지 않은 시간에 도착했다고 생각하며, 제라드는 옷매무새를 정돈한 뒤 저택 안으로 들어섰다.
하지만 시녀들의 안내를 받아 도착한, 화려한 저녁 만찬이 차려진 장소에서 제라드는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왜냐하면 차려진 만찬이, 그 당시 식당 안에서 페르젠이 말해주었던 것과 너무나도 확연히 일치했기 때문에.
염소 고기를 조리한 메인 음식.
단 맛이 지나치지 않은 과일들.
‘어르신조차도, 나를 농락하시는 건가.’
표정은 태연하게 흔들리지 않는 척을 하지만, 제라드는 주먹을 거세게 말아 쥐고서 콜레오네에게 인사를 한 뒤 의자에 앉았다.
……시각은 7시가 되기 5분 전.
여전히, 페르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정시에 맞추어 등장할 생각을 하고 있나.’
자신을 찍어 누르기 위해, 쓸데없이 유치한 기싸움을 계획했다고 생각하며 제라드는 와인으로 가볍게 목을 축인 뒤 유리엘을 바라보았다.
희고 고운 그녀의 피부와 잘 어울리는 새하얀 드레스.
기품 있게 차려 입은 듯 했으나, 특유의 커다란 가슴 때문인지 우아한 기품 사이로 뒤섞인 음탕함은 저 하얀색을 자신만의 색으로 덧칠하고 싶게 만드는 질척한 욕망을 본능적으로 이끌어낸다.
“……”
그러한 자신의 시선을 눈치 챈 건지, 눈을 마주한 유리엘이 곧바로 고개를 돌려버리자 제라드는 입 꼬리를 비릿하게 끌어 올렸다.
배려와 선의로 건넸던 마음을 농락한 건 둘째 치고.
그녀는 스스로 본인을 가문의 물건이라 칭했다.
‘그러니…… 제가 낙찰 받더라도, 후회하지 마십시오.’
사람을 다루는 것이라면 몰라도.
물건을 다루는 건 상당히 거친 편이었으니까.
그렇게 5분이 지나, 오후 7시가 되었지만……
끝끝내 페르젠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하, 하하……!’
이유는 모른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 덕분에 제라드는 한층 긴장이 풀리는 느낌이 들어 편하게 등받이에 몸을 기댈 수 있었다.
그러나 10분이 더 지나고.
추가로 30분이 지나고 나서도.
콜레오네가 입을 열지 않자, 제라드는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극단의 단원이 된 기분이었다.
주연을 맡은 배우가 오지 않아, 극을 올리지 못하고 있는 그러한 상황.
“저는…… 들러리가 아닙니다. 어르신.”
기어코 시간이라도 멈춘 듯, 가만히 앉아 입에 물 한 모금 대지 않았던 콜레오네에게 제라드는 말했다.
상대가 암흑가를 주름잡고 있는 알프레드 가문의 노괴라 할지라도, 이것은 너무 지나친 처사이고 무시였기에.
“……”
그리고 그 한 마디를 들은 콜레오네는, 열리지 않는 문에서 시선을 떼어낸 뒤 조용히 제라드를 응시했다.
꿀꺽.
반사적으로 침이 목구멍 뒤로 넘어간다.
제라드는 느슨히 풀었던 주먹을 다시 쥐었다.
고압적이다 못해, 폭압적인 콜레오네의 눈빛.
얼굴에 새겨진 자글자글한 주름 모두가 뱀처럼 기어 다니며 자신을 쏘아보는 듯 했고, 그것을 마주 하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라드는 전신의 기가 모조리 빨리는 느낌이 들었다.
오죽하면 가문의 문양이라 할 수 있는 푸른 매가, 뱀에게 잡아먹히는 환영이 눈앞에서 아른 거릴까.
“그래…… 들지.”
이윽고 억겁만 같았던 시간 끝에, 콜레오네가 짧은 한 마디를 내뱉자 제라드는 간신히 묵혔던 숨을 토해내고 호흡을 고를 수 있었다.
그리고 콜레오네가 식사를 시작하자, 제라드도 나이프를 쥐었지만 손끝이 덜덜 떨리고 있었기에 고기를 써는 것조차 제대로 해내지 못했다.
물론, 그 끝에 간신히 입에 넣은 음식도……
많이 식어 있었기에 맛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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