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85화 (85/260)

EP.85 085─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

페르젠보다 먼저 본관의 4층으로 올라와놓고, 유리엘은 화장실에서 손을 씻는 걸로 살짝 시간을 끌었다.

그리고는 조용한 복도 너머에서 그의 걸음소리가 들리자, 손에 묻은 물기를 탈탈 털어내고 자연스레 밖으로 나선다.

저벅.

잠깐 걸음을 멈춰서는 페르젠.

힐끔 자신을 쳐다보고, 마저 걸음을 옮기기에 유리엘은 그 뒤를 따랐다.

저번에도 느꼈지만 흑마법사답지 않게, 쓸데없이 다부진 체격이다.

저것을 보고 있자하니, 그 날 저 체구로 자신을 깔아뭉개고 자신의 몸을 더듬고 핥았던 기억이 떠올라 유리엘은 얼굴을 붉혔다.

“당신 아내는…… 어쩐 일로, 오늘 안 보이네요.”

그리고는 페르젠이 문고리를 잡아 돌리기 전, 내심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유리엘은 교수실 안으로 들어서려던 그에게 질문을 던졌다.

그에 페르젠은 별거 아니라는 듯, 짧게 눈을 마주치더니……

“몸이 아파서 쉬라고 했다.”

라는, 간단히 답변을 해주고는 안으로 들어가 자취를 감추어 버린다.

‘아프다고……’

저번에 자신이 아팠을 때는, 당직이 끝난 후에도 간호를 해주지 않았던가? 내심 끙끙 앓으며 홀로 집에 있을 그 볼품없는 여자를 상상하니 유리엘은 희미한 우월감이 치솟는 걸 느꼈다.

‘병신……’

그러다 뒤늦게 스스로를 자책하며, 한숨을 토해낸다.

시기와 질투만큼 사람을 추해지게 만드는 건 없다더니.

고개를 젓고, 유리엘은 오전 강의를 위해 준비를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은, 그 사람도 오전 강의였던가.

* * * * *

오전 12시.

강의를 마치고 강의실을 나온 유리엘은, 자신의 교수실 앞에 잠깐 섰다가 404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문고리를 붙잡고 슬그머니 돌려보았으나……

딸칵!

잠겨 있었다.

“……”

하기야 아내가 아프다는데.

볼일을 마쳤으면 바로 돌아갔으리라.

무슨 쓸데없는 기대를 했나 싶어, 유리엘은 손을 내린 뒤 자신의 교수실로 들어와 교재들을 내려놓고 점심 식사를 위해 본관을 나섰다.

그리고는 정문으로 향하려던 찰나, 유리엘은 바보 같은 행동이라는 걸 스스로 인지하고 있으면서도 이마를 짚은 뒤 한숨을 내쉬며……

뒤편의 주차장으로 향했다.

“……”

그리고 그곳에서 유리엘은 보았다.

브뤼테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를.

교수실에는 없고, 주차장에 마차가 있다면……

역시나, 식사를 위해 거리로 나갔을까.

유리엘은 살짝 걸음 속도를 높였다.

A 교육관에서 강의를 듣는 귀족 자제들 또한 점심시간이라, 식당이 즐비한 거리에는 평소보다 사람이 바글 거린다.

수많은 식당 중, 페르젠이 식사를 하고 있을 장소를 찾아내는 건 객관적으로 보자면 어려워보였으나……

범위를 좁혀나가는 건, 유리엘에게 있어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 사람이 선호하는 음식──미각은 자신이 제일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염소 고기를 통한 메인 요리로 가장 유명한 식당 앞에 서서 유리엘은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얼마 되지 않는 좌석 가운데.

“……”

유리엘은, 식사를 하고 있는 페르젠의 뒷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죄송합니다. 현재는 모든 좌석이 만석인 상황이기에……”

“저 사람.”

“예?”

“저 사람에게…… 합석 의사를 물어 보세요.”

허리를 꾸벅 숙인 종업원은, 유리엘의 손끝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아…… 지인이신가 보군요? 알겠습니다. 조금만 기다려 주세요.”

이런 식의 합석은 자주 있었던 상황이라, 종업원은 밝게 웃으며 조용히 식사를 하고 있는 페르젠에게 다가가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나이프를 내려두고, 힐끔 고개를 뒤로 돌리는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유리엘은 괜스레 몸을 움찔하며 시선을 피했다.

이후, 종업원이 돌아왔을 때……

유리엘은 손에 땀이 찼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거절당하면 거절당하는 거지, 고작 이런 걸로 긴장이나 하다니.

“손님.”

“뭐라고…… 하던가요.”

“흔쾌히 허락하셨습니다.”

“그래요……?”

멋쩍게 땀이 찬 주먹을 스윽 풀고서, 유리엘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페르젠이 있는 테이블로 다가가 앉았다.

그리고는 아무런 말없이 멀뚱멀뚱 바라만 보자, 그는 나이프로 고기를 썰던 손을 멈추고 무덤덤한 어투로 물었다.

“식사 하러 온 게 아니었나. 주문이나 하지.”

“메뉴…… 고민하고 있었거든요.”

“그런가.”

유리엘의 대답에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식성은 같을 테고.

여기가 어떤 음식을 메인으로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 터.

메뉴를 고민한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었다.

“웃기는 왜 웃어요. 기분 나쁘게……”

실제로 틱틱 대면서도, 결국 그녀가 주문한 음식은 페르젠과 같은 것.

유리엘 본인도 딱히 할 말은 없는지, 냉수만을 무단히 들이킨다.

“그 보다 당신 강의는 11시에 끝났을 텐데……”

“기말고사와 관련하여 처리할 일이 남아 있다.”

“……”

“별 다른 일이 없다면, 돌아갈 때 마차를 태워주마. 남은 일은 식사 하고 30분 정도가 걸릴까.”

페르젠의 말에 유리엘은 시큰둥한 척 턱을 괴었다.

‘아……’

그러다 처음 당직을 함께 했을 때, 그가 이 행동을 싫어했다는 걸 깨닫고 슬며시 손을 내린다.

그러자 살짝 찌푸려져 있던 페르젠의 미간이 풀리는 모습을 보고, 유리엘은 속으로 투덜거렸다.

‘당신의 기호에……’

내가 이리 신경 쓰고 있다는 걸, 알고 있기는 할까.

“……거절 하지는 않을게요. 식사마저 해요. 귀찮게 말 안 걸 테니.”

취미, 즐기는 문화생활 등.

모든 게 같았기에 대화를 이어 나가려면 충분히 그럴 수 있었지만, 유리엘은 그러지 않고 편히 등을 기댔다.

그리하여 10분 정도가 지났을까.

옆 테이블에 앉아 있던 손님들이 나가고, 애피타이저가 나온다.

약간의 신맛으로 입맛을 돋워 주는 샐러드.

얌전히 포크로 그것을 찍어 먹다……

“아……”

유리엘은 저 너머 입구에서, 자신의 친우들과 함께 들어서는 제라드의 모습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하필……’

못 보기를 바라고 싶어도, 비어 있는 자리가 옆자리뿐이니 마주치는 것은 시간문제이겠지.

아니나 다를까……

“어…… 안녕…… 하세요. 페르젠 교수님. 유리엘 교수님.”

그의 친우들이 먼저 자신과 페르젠을 발견하고는, 세상에서 가장 어색한 인사를 조심스레 건네 온다.

그리고는 곧장 자리에 앉지 않고, 무리의 리더 격이라 할 수 있는 뒤쪽의 제라드를 돌아다보며 눈치를 보듯 엉거주춤 서 있는다.

“……”

그에 표정이 순식간에 똥 씹은 듯 구겨지는 제라드.

“그래. 즐거운 식사시간을 가지도록.”

반면, 그것을 신경 쓰지 않고 묵묵히 식사를 이어 나가는 페르젠.

두 남자 사이에 끼어있는 이 상황이, 유리엘은 편치 않았다.

적어도 페르젠이 끼어들었다는 것은 제외하더라도, 자신과 혼약이 오고 가고 있다는 사실 정도는 본인의 친우들에게 말을 했을 텐데.

체면이 적잖게 박살나는 상황 일터.

자존심에 상처를 입지 않았을까.

“식사는 다른데서 하자.”

역시, 약간의 침묵 뒤에 제라드는 자신의 친우들을 밖으로 내보내고는 곁으로 걸어와 은은한 화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사적인 관계를 발전시키는 건, 하등 의미가 없다고 제게 말씀해주시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이러고 있다는 건…… 제가 질 것이라는 무언의 긍정입니까? 교수님이 염소 고기를 좋아하는 건 처음 알았군요. 페르젠 교수님에게는 이런 것까지 알려주시고.”

제라드의 그 말을, 유리엘은 완전히 부정하지는 않았다.

그가 무슨 카드를 꺼내들든, 설령 100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어도.

페르젠이 추가로 10을 얹히면, 자신의 할아버지는……

“제라드 렌 밀레인 아스란.”

“……”

“유치하게 굴지 마라.”

깔끔하게 마지막 고기 한 점을 먹은 뒤, 페르젠은 냅킨으로 입술을 닦고 제라드를 향해 무심히 말했다.

“유치, 하다고요……”

“그러면 유치하지 않다고 생각 하나. 그리고 네 말에 관하여 하나 정정을 해주자면, 나는 유리엘의 기호에 대해서 알아낼 필요가 없다.”

“……”

특유의 고압적인 붉은 눈이 자신을 바라보자, 제라드는 자연스레 고개를 돌릴 뻔 했으나 주먹을 꽈악 말아 쥐고 또렷이 응시했다.

“가장 좋아하는 요리는 염소 고기를 조리한 것. 과일은 단 맛이 덜 나는 모든 것. 책에 대해서는 세르반테스의 모든 작품. 악기로 간다면 바이올린. 연극은 태동 등일까.”

“이미 조사를 다 끝마쳤다는, 그런 뜻입니까.”

제라드의 대답에 페르젠은 웃었다.

정말 자신도 모르게 크게 웃을 뻔한 걸, 간신히 억누르는 수준으로.

“전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이다.”

“……”

“그리고 유리엘은 내가 좋아하는 것들을 좋아하는 것이지. 나는 그녀에 대해서 알 필요가 없다. 그녀라는 존재 자체가 나를 위한 것이니.”

페르젠의 말을 듣고, 제라드는 그 당시 이해하지 못했던 유리엘의 한마디가 뇌리에 스쳐 그녀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자 유리엘은 조용히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무언의 긍정이라는 뜻이리라.

“언젠가 내게 식사 대접을 하고 싶다고 했지. 이걸로 전속 요리사에게 어떤 메뉴를 지시하면 될지 고민할 필요는 없겠군. 제라드.”

비웃기라도 하는 듯한, 페르젠의 말에 제라드는 입술을 깨물었다.

“맛있게 드십시오. 그만 가보겠습니다.”

그리고는 여전히 주먹을 풀지 않은 채, 거칠게 걸음을 돌린다.

그 뒷모습을 힐끔 쳐다보며, 유리엘은 이마를 짚었다.

“당신도, 충분히 유치해……”

“틀린 말이라도 있었나.”

“그건, 아닌데……”

“유리엘.”

“왜요.”

“음식이 나왔을 때는, 식탁에 가슴을 얹히지 마라. 경박하다.”

“……”

“이상한 버릇이 있었구나.”

페르젠의 지적에 유리엘은 몸을 움찔하며, 자신의 커다란 가슴을 살포시 식탁에서 치웠다.

“인간은, 언제나 편함을 추구하는 생물이거든……”

“집에서는 뭐라 하지 않을 테니, 밖에서는 그러지 말지.”

“……”

“메인 요리가 나왔구나. 먹고 있도록. 네가 다 먹을 때쯤이면 나도 일을 끝마쳤겠군. 그 때 데리러 오마.”

“마음대로 해……”

몸을 일으키는 페르젠을 유리엘은 굳이 붙잡지 않았다.

그렇게 홀로, 페르젠이 떠나간 자리를 바라보며 식사를 하는 유리엘은 대략 40여분 뒤 가게 안에서 몸을 일으켰다.

“계산은 합석을 승낙하신 남성분께서 이미 하셨습니다.”

“쓸데없는 짓을……”

어차피 지금 가진 돈 또한, 본인이 준 것인데.

“잘 먹었어요.”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들려주시길.”

꺼내려던 돈을 도로 집어넣고, 거리로 나온 유리엘은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얼마 걷지 않아, 정말 말했던 대로 브뤼테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가 근처의 도로변에 정차되어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물끄러미 쳐다보니, 마차의 창문이 내려가며 책을 읽고 있는 페르젠이 특유의 붉은 눈동자로 자신을 힐끔 내려다본다.

“타지.”

“보채지마요.”

“보챈 적 없다.”

“……”

뚱하게 입을 닫고, 유리엘은 마차의 문을 열고 올라탔다.

직후, 부드럽게 출발하는 마차 안에서 그녀는 가슴 부근의 옷자락을 붙잡고 살포시 펄럭였다.

날씨가 덥고 습할 때는 가슴 밑동 부분에 자주 땀이 차는 터라 이런 식으로 환기를 시켜주지 않으면 답답했고, 제일 중요한 건 오래 방치해두면 피부에 트러블이 생겨서 어쩔 수가 없었다.

하지만 자신이 옷자락을 펄럭일 때 마다, 페르젠이 자신의 체취를 들이키듯 코끝을 움찔하는 모습이 보였기에 유리엘은 묘한 느낌이 들었다.

딱히, 유혹하려는 의도 따위는 없었는데.

이윽고 책에서 시선을 떼어낸 그가 자신을 바라보자, 유리엘은 옷자락을 펄럭이던 손을 멈추고 더듬더듬 말했다.

“더, 더워서 그래요……”

“아무 말 안했다.”

“땀 냄새가 났으면…… 미안하게 됐네요.”

유리엘의 그 말에, 페르젠은 잠시 무심한 표정으로 그녀를 쳐다보다 책으로 다시금 시선을 내린 뒤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걱정하지마라.”

“……”

“땀 냄새는 나지 않았으니까. 네 향기는 언제나처럼 달짝지근했어.”

“뭐, 뭐라는 거야…… 변태 같아.”

“풍겨오는 걸 어찌할까.”

“입으로 숨 쉬던가요……”

“맡기 싫은 향이라고 한 적은 없을 텐데.”

“채, 책이나…… 읽어요.”

“그러지.”

어찌 보면 불편해 보일만큼 올바른 정자세로 앉아,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이 책을 읽어가는 그의 모습에 유리엘은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서도 손길은 여전히 옷자락을 펄럭였기에.

창문이 열려있음에도 불구하고, 널찍한 마차 내부는 복숭아 같이 달콤한 그녀의 체향으로 가득 채워졌다.

마치 봄처럼.

이후, 임시로 마련해주었던 아담한 집 앞으로 도착했을 때 페르젠은 유리엘을 내려다주며 특유의 목소리로 넌지시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유리엘.”

“……”

“다음번에는, 데리고 가도록 하마.”

데리고 간다.

그 말을 속으로 잠시 되뇌다 유리엘은 말했다.

“말은 바로 해요. 당신이 나를…… 모셔 가는 거야.”

기다림이라는 건, 유리엘에게 있어서 지긋지긋한 요소였다.

그러한 감정에서 비롯된 반발심, 보상심리가 어우러진 한마디였기에 페르젠은 별다른 딴죽을 걸지 않고 희미한 웃음을 지은 채 떠나갈 뿐이었다.

“재수 없어……”

평소에는 잘 웃지도 않는 사람이, 왜 저러는 걸까.

“……”

이윽고 페르젠이 타고 있는 마차가 서서히 시야에서 벗어났을 때, 유리엘은 집 안으로 들어와 옷을 벗었다.

시원한 느낌.

역시, 가슴 밑동 부분에는 땀이 많이 차있었다.

그에 벗었던 옷을 들어 가슴 부근에 코를 가져다 대보니……

‘땀 냄새…… 나잖아……’

유리엘은 조용히 얼굴을 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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