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80화 (80/260)

EP.80 080─흐릿한 만월

다음 날, 아카데미로 유페미아와 함께 출근한 페르젠은 이른 아침부터 꽤나 많은 사람들의 인사를 받아야만 했다.

평소라면 명패에 쓰여 있는 페르젠의 이름에 멀찍한 거리감과 더불어 어려움을 느꼈던 사람들도, 그것을 애써 무시하며 노크를 해댔다.

이유야 지극히 간단했다.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인 페르젠에게, 명계의 3층을 열고서 거래를 주선 해달라고 부탁하기 위함이었다.

각 가문에서 개별적으로 보유하고 있는 3층의 괴이에 대한 정보 말고도, 보편적으로 알려진 신체의 결손이나 상처를 치유해주는 괴이는 돈이 부족하지 않은 이들에게 있어서 유일한 희망이었으니까.

단순히 외상, 특히 신체의 결손을 제외하더라도.

현재 이 세계의 의학 수준으로 치유할 수 없는 병이라면……

그래, 암이라고 한다면.

그것도 해당 괴이를 통해 고칠 수 있었다.

질병은 해당 괴이의 관할 영역이 아니었지만, 전이된 장기의 모든 부분을 일시에 도려내고 해당 괴이를 통해 수복 받게 된다면 말끔히 완치 될 수가 있었으니까.

“피곤하군……”

하지만 페르젠은 그들 하고의 만남을 모두 거절했다.

희소성을 유지하고 싶었기 때문이기도 했고.

스스로의 가치를 올리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앞으로, 급전이 필요하면……’

이를 통해 짧은 시간에 많은 거금을 들일 수 있으리라.

“화장실에 다녀오마.”

“응. 갔다 와요.”

교수실에 찾아 왔던 이들은 하나 같이 축하의 의미를 담아 꽃다발과 화분을 주었기에, 유페미아는 그것들을 교수실 내부에 가지런히 놓으며 웃음을 짓고 있었다.

나중에 그 배치들이 대칭이 맞지 않으면, 정리해야 하는 건 자신의 몫이라는 걸 그녀는 알고 있을까.

딸칵.

문을 열고 복도로 나온다.

그리고는 화장실로 들어서려던 찰나.

페르젠은 옆쪽의 여자 화장실에서 나오는 유리엘과 마주했다.

“축하, 해요. 아폴리온 등급으로 승격 했다던데.”

“그래. 고맙게 받아들이지. 그 보다…… 집을 나갔나. 어제 의원이 찾아갔는데 응답이 없어서 그대로 돌아왔었다.”

“자, 잤어요.”

당신이 새기고 간 흔적을 되짚고 있었다고.

그리 말할 수는 없었기에, 유리엘은 말을 더듬으며 거짓말을 내뱉었다.

“그런가.”

묻고 싶었던 건, 그것 하나뿐이었기에.

페르젠은 무심히 그녀를 지나치려 했다.

하지만 유리엘이 페르젠의 손목을 붙들었다.

상대적으로 키가 큰 사람은 모르겠지만, 키가 작은 사람은 서있는 페르젠 앞에 가까이 있으면 그의 목 쪽에 있는 키스 마크가 보였기에.

“할 말이라도 있나.”

“……”

유리엘은 잠시 말이 없었다.

자신의 체취에 녹아들어, 들끓었던 그 감정을 그대로 가진 채.

집으로 돌아가 아내인 볼품없는 그 여자에게 욕망을 해소했던 걸까.

“넥타이, 느슨하게 맸네요.”

손을 뻗어 유리엘은 페르젠의 느슨해진 넥타이를 붙잡고 조여 주었다.

그러자 옷깃이 그의 목덜미에 가까이 달라붙어, 어젯밤 관계를 가졌다는 그 흔적을 그대로 가려준다.

“……고맙군.”

“됐어요.”

떨떠름한 페르젠의 감사 말에 유리엘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그를 지나쳐 자신의 교수실로 들어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옆의 거울을 마주보며 스카프를 잠시 풀어 헤친 뒤 목에 새겨진 붉은 흔적과 이빨 자국을 천천히 되짚었다.

“나쁜 놈……”

역시, 좋은 말은 나오지 않았다.

* * * * *

유페미아로부터 출석 체크의 명단을 넘겨받고, 오전 강의에 들어선 페르젠은 칠판 앞으로 다가가 분필을 쥐었다.

“사람을 진취적으로 만드는 데는 여러 방법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가장 확실한 방법은 목표에 보상을 쥐어주는 것이겠지.”

분필로 칠판을 툭툭 치며, 페르젠은 고개를 힐끔 뒤로 돌렸다.

“아마 이 중에서는, 오후 5시. 모든 일과가 끝나고 내게 따로 찾아올 학생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페르젠의 말에 몇몇 학생들은 조용히 몸을 움찔했다.

“그리고 그건 의미가 없을 테니 그만 두도록 해라.”

“……”

“아무한테나 명계의 3층을 열어서 거래를 주선 시켜줄 생각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년도 강의가 전부 끝나고. 1학기와 2학기를 통틀어 가장 높은 학점을 터득한 학생 1명에게는 해당 가문에…… 명계의 3층을 열어서 거래를 주선 시켜달라고 요청할 수 있는 권리를 쥐어주마.”

페르젠의 말에 장내가 어수선하게 술렁였다.

“교수님.”

“말하도록.”

“그건…… 불공평 하지 않습니까.”

“무엇이.”

“성적을 신경 쓰는 행위에 우월감이나, 비난할 생각은 없지만…… 그것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해당 학생의 말에 페르젠은 딱히 부정 하지 않았다.

아카데미의 성적을, 차후 인생 설계의 밑거름으로 삼으려는 학생들도 있지만 그러지 않고 사교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학생들도 있었으니까.

애초에 이 아카데미 자체가, 황실이 각 영지의 자제들을 볼모로 붙잡아 황실의 권력을 나타내는 상징에 불과하다는 걸 페르젠 자신부터 진작 꿰뚫어 보지 않았던가.

“하다못해, 그런 이들에게도 동기 부여를 해줄 거라면…… 학기를 나누는 게 어떠한지요.”

페르젠이 내주었던 과제를 소홀히 했던 이들도 있으니.

지금 필사적으로 해봤자 뒤집기에는 무리가 있으리라.

“나는 교수다.”

“……”

“상대적으로 절박한 학생에게, 조금 더 나은 보상을 준다는 게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나. 일부 귀족들은 열심히 살아가는 평민들을 보고서 그래봤자 가난의 굴레를 벗어나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지.”

“주제가 조금 어긋난 것 같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그러하다.”

“……”

“노력은 스스로를 배반하지 않지만, 바랐던 목표나 꿈은 배신하지.”

노력으로 0.001%라도 어제 보다 조금 더 나은 자신이 되지만.

결국 목표나 꿈은 이루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다.

“그래서 누군가는 별거 아니라고, 하찮게 여기는 것들에 열심히 노력하는 이들이 조금쯤은 확실한 보상을 받았으면 한다고 생각했을 뿐이야.”

페르젠은 소매를 걷어 올리며 주변을 잠깐 훑었다.

그리고는 시선을 리지에게 고정했다.

말은 이리 번지르르하게 했지만……

겉과 다르게 속은, 그녀를 한 번 옥죄어 보려고 했던 것이다.

시간이 꽤 지났어도, 그녀는 자신에게 찾아오지 않았다.

그 말은 당시 학회에서의 요구를 거절했다는 게 되리라.

허면, 이런 식으로 목표를 제시했을 때 그녀는 어떤 반응을 보일까.

하던 대로 열심히 학점을 관리하려 들까?

그게 아니라면 열심히 노력할수록, 자신이 내건 자비를 향해 발버둥치는 꼴이라 생각 되어 딜레마에 빠질까?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그가 구상하는 건 일종의 귀신의 집과 같았다.

탈출하는 길목에 놓여 있는 여러 함정 요소들에 그녀가 굴하지 않고 밖으로 나서는데 성공한다면, 해당 트라우마를 극복한 게 되어 자신 보다 격이 높은 흑마법사가 될 수 있겠지.

하지만 그러지 못하고 도중에 굴하게 된다면.

버티지 못하고, 내보내 달라고 소리치게 된다면……

“강의를 시작하마.”

상념을 접고, 페르젠은 등을 돌렸다.

* * * * *

“지금까지 강의를 이어 오며, 내가 요점을 두었던 건 어디까지나 사람이었지. 하지만 흑마법사는 굳이 사람이 아니라도, 사체라 한다면 전부 사역할 수가 있다.”

리지는 강의를 이어 나가는 그를 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서두를 장식했던 그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어렴풋하게 깨달았기에.

“그래서 오늘은…… 흔히들 말하는 괴물, 몬스터들의 사체에 관해서 강의를 해볼까 한다. 아마 몇몇 이들은 의아해 할 것이다. 특히 원소 마법사나 오러 나이트의 길을 걸었던 시신을 보유하고 있는 자들이라면 더더욱.”

‘굴하지 않아……’

흘려만 듣고 싶은 페르젠의 목소리에도, 리지는 억지로 귀를 기울였다.

‘나는……’

당신을 양분 삼아, 반드시 꽃을 피울 거야.

“하지만 다수 대 다수가 붙는, 전쟁이나 영지전에서 몬스터의 사체를 활용하는 건 가성비가 상당히 뛰어 나다. 왜 그럴 것 같나?”

페르젠의 물음에 리지는 억지로 입을 열었다.

“지능이 낮은 동물은…… 행동이 한정적이고, 그 한정적인 행동조차 습관화가 되어 있기 때문에 조금의 피드백만으로도 높은 구현율을 받을 수 있기 때문이에요.”

“……그래. 정답이다. 인간은 동물 중에서도 가장 복잡한 사고를 할 수 있는 존재고. 그렇기 때문에 한 사람의 일생을 온천히 이해한다는 건 불가능에 가깝지. 하지만 몬스터들은 그렇지 않다.”

각 영지에 배정 되어 있는 용병 협회는, 근처 서식지의 몬스터에 관한 상세한 정보를 돈을 받고 파는 일도 겸하고 있다.

그 지식만으로도, 이해력은 상당히 높일 수가 있으리라.

“이러한 가성비도 가성비지만…… 특히나 단체로 무리를 짓는 경우에는 반드시 우두머리──즉, 리더가 있다.”

“……”

“그 리더를 죽이고, 시체를 사역하면 휘하의 몬스터들은 굳이 죽이지 않고 간단한 명령만으로도 영지전이나 전쟁에 투입해 전력으로 쓸 수가 있지.”

페르젠의 말이 길어짐에 따라, 시간도 점차 흘러간다.

그에 따라 일체형 책걸상에 앉아 있는 학생들은 점점 자세가 흐트러지기 시작했지만, 리지는 휠체어에 앉은 채로 일반적인 책상을 두고 있을 뿐이라 집중력이 저하되지 않을 수 있었다.

때문에 그의 지식을 뇌리에 하나하나 되새기며.

가녀린 손을 꾸욱 말아 쥐었다.

‘언젠가는……’

저 오만하고 독선적인 사내를 구성하고 있는 모든 요소를.

철저히 해체시킨 뒤, 굴복시켜서……

망가진 왼쪽 다리의 발등을 핥게 만들고.

위선으로 뒤집어 쓴 저 얼굴을, 짓밟아 주고 싶었다.

“리지 폴 리아나 클로디아.”

흠칫!

“자는 건가.”

“아, 니요……”

그러나 그런 결심이 무색하리 만큼, 리지의 몸은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페르젠의 목소리에도 깜짝 놀라며.

특히나 그 날 이후로는, 한 공간에 있는 것만으로도.

망가진 왼쪽다리가 간간히 아려왔다.

“그러면 고개를 들지.”

“네……”

그럴 때 마다 리지는, 무기력한 자신을 끝없이 원망했다.

* * * * *

강의가 끝나고 페르젠은 라우라에게 걸어갔다.

“알고 있느냐.”

“네, 네……”

많은 게 생략된 한 마디였지만, 라우라는 어렵지 않게 이해했다.

왜냐하면 오늘은 6월 4일.

장마로 먹구름이 가득 낀, 흐릿한 날이더라도.

“그러면 기다리고 있으마.”

“네……”

여김 없이 만월이 뜨는 날이었으니까.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세 편으로 뵙고 싶었는데.

처음에 유페미아를 담백하게 시작했던 건 다음편과 대조되었으면 했기 때문이었거든요.

'자연적으로' 만월이 가려졌을 때의 상황 속에서 라우라는 평소와 다른 매력을 보여줄 수 있어서……

일단 최대한 노력해서 ( 이미 2000자는 써진 상황이라 ) 얼른 찾아 올게요.

내일이라는 확답을 못드리는 건 이러면 꼭 돌아오질 못하는 징크스가 있어서……

* * * * *

유페미아가 이대로 트로피가 되는 건 아닌지 걱정하시는 분이 있습니다.

걱정 하지 말아주세요……!

모형정원에서 하나 확신을 얻었던 건, 컨트롤 할 수 있는 캐릭터들의 숫자였거든요.

* * * * *

항상 행복하세요.

* * * * *

저번에 말했던 대로 후원금은 치아파절 크라운에 먼저 사용될 예정입니다.

출금하는데 시간이 조금 걸리네요.

5월 말에 아마 영수증 업로드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감사합니다.

독자분들의 사랑은 저의 건강으로 채워지고 있어요.

사랑합니다.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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