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4 074─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의원하고 대화를 나누는 페르젠을 잠시 쳐다보다, 유리엘은 고개를 숙여 자신의 몸 상태를 살폈다.
“……”
열은 내렸다.
두통도 사라졌다.
남아 있는 건 옅은 몸살 기운과 달거리로 인한 젖몸살뿐.
고간 쪽에 낯선 느낌은 천 같았고.
옷은 새것으로 갈아 입혀져 있었다.
정신을 잃기 전, 다 치워 놓으라고 한 마디를 했던 걸 기억 하기는 하는데…… 생각해보니 환기가 제대로 이루어졌었던가?
분명, 밀폐되어 있던 걸로 기억을 한다.
그러면 자신의 체향이 방안을 가득 드리우고 있었을 텐데.
페르젠은, 자신의 몸을 어디까지고 손대고 봤었을까.
‘스카프는 왜……’
더듬더듬, 목 주변에 답답하게 채워진 스카프에 유리엘은 그것을 풀어내려 했지만 의원하고 대화를 끝마친 페르젠이 자신에게로 걸어오자 손을 내리고 그를 말없이 올려다보았다.
“유리엘.”
“……
“지낼 곳이 없나.”
“기말 고사 준비한다고…… 잔업 했을 뿐이야.”
“네 교수실에 생활의 흔적이 남아 있던데. 주차장에는 마차도 없고.”
페르젠의 심문 아닌 심문에 유리엘은 퉁명스레 대답했다.
“그래서 어쩌라는 거야. 당신이 그걸 왜 신경 쓰는데?”
“콜레오네 그 노괴가 참으로 유치한 벌을 주었구나 싶었다.”
“신경 꺼……”
병상에서 내려오는 유리엘이 비틀거리며 중심을 바로 잡는다.
“유리엘.”
“최근에는 지적을 안했는데. 친한 척 이름으로 부르지 마.”
“유리엘 교수.”
“왜요. 페르젠 교수.”
“해줄 말이 있다. 그러니 시간을 좀 내지.”
“여기서 하면 되잖아.”
“그럴 안건이었으면 그랬겠지. 생각이란 게 없나.”
“퇴근이나 하세요. 당직해서 피곤 할 텐데.”
사적으로 더 이상의 말은 섞기 싫다는 듯 고개를 돌리는 유리엘.
그에 페르젠은 그녀의 손목을 붙잡고 억지로 병실을 나섰다.
“아, 아파……! 놔!”
“엄살 피우지 마라. 세게 붙잡지도 않았다.”
“내 몸이 당신 몸이랑 같은 줄 알아!”
생각 보다 힘이 들어가 있어서 그런지, 유리엘은 눈물을 훌쩍이며 페르젠의 팔뚝을 붙들어 보았지만 꼼짝도 하지 않았다.
“거, 걸음이라도 좀 천천히……! 나 가슴 아프다고!”
빠른 걸음걸이에 유리엘의 가슴이 천박하게 출렁 거린다.
그럴 때 마다 느껴지는 젖몸살로 인한 통증에 유리엘은 남은 한 손으로 페르젠의 등짝을 후려 갈겼다.
“……”
그제야 서서히 걸음 속도를 늦추는 페르젠.
그 끝에 도착한 곳은……
본관 뒤편의 주차장.
“타라.”
“하……”
그리고 거기에 놓인 브뤼테인의 문양이 새겨진 마차, 그 안으로 들어가라는 페르젠의 턱짓을 보고 유리엘은 헛웃음을 지었다.
“어디 가려는 건데. 당신 저택으로 데려 가려고? 당장 지낼 곳이 없어도 거기서 살고 싶지는 않아.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내 저택이라고는 한 마디도 안했다.”
“그러면 말을 하면 되잖아. 도대체 어쩌고 싶은 건데. 나한테 갑자기 왜 이래? 쫓겨 난 거 같으니 없던 동정심이 치솟아? 그랬다면 연회장에서 그러지 그랬어. 그 때 동정심을 잔뜩 베풀어 줬다면 기꺼이 받았을 텐데.”
“……원치 않는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서있는 유리엘을 내버려 두고, 페르젠은 마차에 올라탔다.
“30초 주마.”
그리고는 마차의 문을 열어 둔 채, 시계탑을 힐끔 쳐다보았다.
“……”
그 독촉 아닌 독촉에 유리엘은 어이가 없었지만, 오히려 이쯤 되니 자신에게 하고자 하는 말이 무엇인지 궁금해져 15초 정도가 지났을 때 스스로 걸음을 내딛어 마차 안으로 올라타 앉았다.
“일을 피곤하게 만드는 재주하나는 탁월하구나.”
“비꼬지 마.”
마차의 문이 닫히고, 마부에게 출발 신호를 보내는 페르젠.
비는 잠시 그쳤지만, 머지 않아 다시금 내릴 것만 같았다.
장마가 확실해 보이는 창밖의 풍경, 그것을 잠깐 바라보다 유리엘은 자신의 체향이 고이지 않도록 창문을 열고서 페르젠을 쳐다보았다.
“이제…… 말해.”
“제라드 렌 밀레인 아스란.”
“……”
“그가 그러더군. 내게 식사 대접을 하며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 봐도, 나는 아스란 백작 가문에게 도움이 될 만한 일은 한 적이 없어. 그러면 했던 일이 원치 않게 그들에게 호재로 작용했다…… 이런 뜻이 되겠지.”
제라드, 생각보다 입이 가벼웠구나.
“아마도…… 아니, 너는 분명 아스란 백작 가문의 아들과 결혼을 하라고 콜레오네 그 노괴한테 명을 받았겠지.”
별로 부정할 이유도 없었기에, 유리엘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게…… 어쨌다고. 당신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잖아.”
“어째서 상관이 없다고 생각하지.”
“이제 와서 당신 때문에 내가 원치 않은 정략결혼을 하게 되었다는 것에 죄책감이라도 느껴? 정말…… 웃기네.”
“그것에 죄책감을 느낄 정도였다면, 네 말대로 애초에 연회장에서 조용히 일을 키우지 않고 넘어 갔을 것이다.”
“당신하고…… 수수께끼를 풀 생각은 없어.”
본론을 말해달라는, 유리엘의 말에 페르젠은 잠시 뜸을 들이다 나지막한 목소리로 대답해주었다.
“북부의 머리를 갈아 치울 예정이다.”
“……”
“때문에 아스란 백작 가문에 힘이 실려서는 곤란해.”
“하……”
페르젠의 그 말을 듣자마자, 유리엘은 이마를 짚으며 눈가를 가렸다.
“아하하……”
“……”
그리고는 서글픈 음색이 담겨 있는 실소를 터트렸다.
“종합하자면…… 당신이 밀어주려는 북부 가문에 시집을 가라는 거야?”
“유리엘.”
“웃기지 마. 바라는 대로 팔려 다녀야 할 만큼 걸레는 아니야. 아니라고! 지긋지긋해! 당신들 눈에는 내가 유리엘이라는 인격체가 아니라 씨를 쑤셔 받고 애를 낳을 수 있는 자궁으로만 보여?”
“새로운 북부의 머리는 내가 될 것이다.”
“꺼져……”
“……”
“이제 와서 무슨 개수작이야? 이럴 거면 10년 전 그날을 갈아엎지 말지 그랬어? 브뤼테인은 엎지른 물도 주워 담을 수 있나 보네. 대단해.”
“담을 수 있다.”
유리엘의 비아냥거림에도, 페르젠은 태연히 굴었다.
“담을 수 없었다면, 이 사실을 굳이 네게 말을 했을까.”
“……”
“콜레오네 그 노괴는 거부할 수 없을 것이다. 내 몸에 흐르는 브뤼테인의 직계 혈통의 피를 탐내고 있으니까. 너도 알고 있지 않나.”
“내가…… 거절할 거야.”
“그 때도. 지금도. 네 의사는 상관이 없을 것이다.”
“……”
“유리엘. 그걸 아느냐. 모든 물건은 만들어지기 전 주인이 될 판매자를 특정 한다. 그러한 점에서 너라는 존재는 애초부터 나를 위한 것이 아니었나? 어렴풋이 알고는 있었다.”
“물건 취급…… 하지 마. 나는……!”
“가축들도 살아 있는 생명이지만, 목장 주인의 소유물이지.”
“……”
“밭만 갈던 농부에게 검을 쥐어주는 격이었다면 신경 쓰지 않았을 것이다. 제대로 사용하지도 못할 테니까. 아니…… 설령 기사의 손에 들어간다 하더라도 그것이 나와 대립할 이들만 아니었다면 괜찮았겠지. 하지만 그게 아니지 않나? 버렸던 검이 적의 손에 들리는 꼴을 볼 바에야 회수를 하는 게 옳은 방안일 터.”
붉게 빛나는 눈동자로, 페르젠은 올곧게 시선을 마주하며 말을 이었다.
“유리엘. 네가 무얼 하든 뒤틀 수 있는 건 없을 것이다. 이것은 통보라도 해도 좋겠지. 그러니 체념하도록 해라.”
“오물이라고…… 10년 전, 그날 내뱉었던 말을 기억하지 못해? 당신에게 정치적인 이익을 선사해주는 대가로 할아버지는 당신의 피가 뒤섞인 자손을 원할 거야. 그토록 혐오하던 알프레드 가문의 여식을 보고 당신이 자지는 세울 수 있을까.”
“……”
“왜? 천박한 단어라서 싫어? 그러면 더해 줄게. 아니! 더해 줄 거야. 내 보지에 당신의 자지를 넣을 수는 있겠어? 내 자궁에 당신의 정액을 가득 채울 수는 있겠어? 알프레드와 브뤼테인의 혈통이 뒤섞인 아이를 이 세상에 탄생시킬 수 있겠어?”
꽈악!
말아 쥐는 주먹에 혈관이 울퉁불퉁 샘솟는다.
유리엘의 천박한 단어 하나하나가 거슬리기도 했고.
실제로, 그녀가 언급하는 모든 게 조금은 역겹게 느껴졌으니까.
하지만 원래의 페르젠이었다면, 애당초 연회장에서 그러한 선택을──아니 처음부터 참석조차 하지를 않았겠지.
그래. 여기 있는 건…… 페르젠이지만 페르젠이 아니었다.
“10년 전. 너를 모독한 건 사과하마.”
끼익!
마차가 멈추어 선다.
창문 밖으로 보이는 건 아담한 집 한 채.
벌컥.
마차의 문을 열고 페르젠이 내린다.
그 뒤를 유리엘이 따라 나섰다.
딸칵.
열쇠로 문을 여는 페르젠이 안으로 들어선다.
똑같이 유리엘이 그 뒤를 따랐다.
“……사과 따위를 듣고 싶은 게 아니었어.”
“당분간 여기서 지내 거라. 일 처리는 늦지 않을 것이다.”
“내가 했던 질문에 대답해.”
“돈도 주마. 사고 싶은 게 있다면 원하는 대로 사도록.”
침대 위로, 금화 다발이 쌓인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
하지만 유리엘은, 조용히 그의 풀 네임을 불렀다.
그리고는 입고 있는 옷을 그 자리에서 벗어 내린다.
마력을 물로 형질 변환해, 고간 쪽의 핏자국을 없애고.
적나라한, 아름다운 나신이 되어.
그녀는 페르젠의 앞으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내게 욕정 하지 못할 거라면…… 나를 안을 각오도 없다면. 그런 어쭙잖은 각오로 패악질 부리지 마. 손바닥 뒤집듯…… 간단하게 뒤집으려고 하지 마. 제대로 봐! 똑바로 봐! 이게 당신이 품어야 할 알프레드 가문의 여식의 몸이야.”
“……”
“개자식아…… 제대로 보지도 못하면서, 무슨 수로 나를 첩으로 받아들이겠다는 거야? 웃기지 말라고…… 도대체 내가 얼마나 가볍게 보이고 하찮게 보이면…… 그래, 버렸던 물건을 다시 회수한다고. 그러면 그 물건을 사용할 수는 있어야 할 거 아니야. 향과로 변질된 내 체향을 맡고 자지조차 세울 수 없는 주제에……”
고개를 숙이는 유리엘을 보며, 페르젠은 짙은 한숨을 내쉬고서는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목에 걸려 있는 스카프를 풀었다.
그리고는 거울 앞.
그곳으로 천천히 그녀를 이끌고 간 뒤, 뒤에서 턱을 붙잡아 올렸다.
“보이나.”
“……”
“내가 네게 욕정을 했다는 증거다.”
“아……”
“충분히…… 너를 여자로 볼 수 있다.”
“나가……”
손을 뒤로 뻗어, 페르젠을 밀어내는 유리엘.
“방이 좁다. 환기를 시키도록 해라. 아니면 향수를 사던지.”
“나가라고……”
“간간히 들리마. 몸조리 잘하도록 해라.”
바라는 대로, 페르젠이 문을 열고 나선다.
그에 유리엘은 침대 위에 앉아,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았다.
인테리어가 삭막했다.
“……”
다시금 비가 내리기 시작하는 건지, 빗소리도 들려온다.
삐걱.
침대 위로 눕는 유리엘.
‘당신 말…… 듣지 않을 거야.’
닫힌 창문 그대로, 유리엘은 자신의 목을 더듬었다.
페르젠의 말을 듣지 않는다고 해놓고, 정작 집을 떠나가지 않는 건 아이러니한 모순이다.
돈까지 있으니, 나름대로 갈 곳은 있었으니까.
막말로…… 교수실로 다시 돌아가도 된다.
하지만 간간히 들리겠다는, 페르젠의 그 한마디가.
그녀를 이곳에 붙잡아 두었다.
창문 너머, 비에 젖어 들어가는 꽃이 보인다.
하지만 방 안에 점점 그득히 채워지는 그녀의 향기는 젖지 않았다.
그래…… 꽃은 젖어도.
향기는 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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