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2 072─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으음……”
강의를 마치고,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다 싶어 의원에게 약을 처방 받고 한숨 잤던 유리엘은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두통은 가라앉았지만, 전신에 맴도는 무기력함은 여전했다.
‘벌써……’
오후 4시 40분.
잠깐 눈을 붙였다고 생각했는데, 6시간이나 자버렸다.
“괜찮으십니까?”
“네…… 고마워요.”
안부를 묻는 의원에게 감사말을 전한 뒤, 유리엘은 병상에서 내려와 본관의 4층──자신의 교수실로 올라왔다.
그리고는 소파에 앉아, 이마를 짚고 잠시 숨을 고른다.
똑똑.
그러기를 얼마나 지났을까.
문을 두드리는 노크소리에, 유리엘은 감았던 눈을 뜨고 고개를 돌렸다.
똑똑.
자신을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잠시 의문을 품었으나, 아침에 아스란 백작의 아들과 나누었던 대화가 희미하게 떠올라 유리엘은 몸을 일으켜 문을 열어주었다.
딸칵!
아니나 다를까, 단정한 차림새의 제라드가 희미한 웃음을 머금고 서있다.
“유리엘 교수님. 저녁식사…… 같이 하시겠어요?”
“……”
병든 몸, 괜히 굶어봤자 악화일로만 걷겠지.
“그래…… 나가자.”
때문에 유리엘은 제라드의 제안을 거부하지 않고, 승낙해주었다.
그렇게 아카데미를 나와 비가 오는 수도의 거리를 걸으니, 저기압이었던 분위기가 조금은 해소되는 느낌이 들었다.
특히 쓸데없이 말을 걸어오지 않는 제라드가 고마웠다.
이런저런 질문을 던져봤자, 받아줄 기력 따위는 없었으니까.
“여기에서 식사를 대접해드리고 싶은데, 괜찮으실까요?”
이윽고 제법 유명한 식당 앞에 멈추어선 제라드가, 처음으로 유리엘을 물끄러미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괜찮아. 그리고 미리 말하지만…… 지금 입맛이 없어서, 사주는 사람이 미안해할 만큼 깨작거릴지도 몰라.”
“몸이 아프시니까. 어쩔 수 없는 거겠죠.”
“……”
아프다는 말을, 해준적이 있었나?
“환자라고 티를 풀풀 내고 계시는데, 모르는 게 이상한겁니다.”
“눈치는 좋네.”
……그 남자랑은 다르게.
원치 않게, 마음속으로 비교를 하며 유리엘은 식당 안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자리에 착석하니, 자신에게 대뜸 종이 한 장을 내민다.
“뭐야?”
“수도에 괜찮은 저택 하나를 소유하고 있다고, 아침에 말씀 드렸던 걸 기억하십니까. 그곳의 주소입니다. 침실에는 옷과 돈도 구비를 해놓았어요.”
“……”
꾸깃, 잠시 그 종이를 쥐어든 유리엘은 제라드를 쳐다보았다.
“동정으로 보인다면 죄송하지만, 이게 유치해도 교수님의 상황상 환심을 사기 제일 좋을 거라고 판단했습니다.”
“솔직한 건 좋은데……”
“문제라도 있습니까?”
“아니, 됐어…… 대신에 침실에 있는 옷과 돈만 받을 게. 아직은 네 약혼녀도 아니고, 아내도 아니야. 벌써부터 사람들 입방정에 오르락내리락 거리기는 싫어. 나중에 갚아 줄 테니 걱정은 하지 말고.”
“저희 아버지는, 거절하시지 않을 겁니다.”
“나도 알아.”
“늦든 빠르든의 차이인데, 혹시 마음에 두고 있으신……”
“없어.”
유리엘은 고개를 저으며, 빗물이 추적추적 흘러내리는 창가를 바라보았다.
“제라드.”
“네.”
“조바심 내지마. 네 말대로 변수는 없을 테니까. 나는 네 아내가 되어 아스란 백작가의 후계자를 낳아 줄 테고…… 아닌 척 간간히 쳐다보는 내 가슴도 때가 되면 원하는 만큼 주무를 수 있을 거야.”
“실례했습니다……”
“구구절절 변명을 하지 않는 모습은 보기 좋네. 어찌 되었든, 혼자 지낼 수 있는 시간은 지금이 유일하니까…… 뭐, 대충 그런 거야.”
“교수님의 의견을 존중하겠습니다.”
제라드의 대답에 희미한 눈웃음을 지으며, 유리엘은 곧이어 나오는 애피타이저를 조심스레 먹었다.
그렇게 40분 정도에 걸친 식사가 끝나고, 유리엘과 제라드는 함께 식당을 나와 거리를 거닐었다.
수도에 있는 제라드의 저택, 그곳으로 가기 위함이다.
“당분간은 여관에서 생활을 하실 겁니까?”
“아니…… 교수실에 그대로 머무를 거야. 여관에서 출퇴근을 했다가는 분명 보는 사람이 있겠지. 내 자존심을 스스로 긁고 싶지는 않아. 아마 주차장에 내 마차가 없다는 사실에 벌써 의아한 사람도 있을 걸.”
“저와 결혼을 하신 뒤에도…… 교수직에 얼마든지 머무르십시오. 하고 싶은 게 있다면 반대가 아니라 지지해주겠습니다.”
제라드의 말에 유리엘은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넘겼다.
그 동안은 하고 싶은 게 있다면 자신의 의지로 관철이 가능했으나,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남편의 허락이 있어야 한다.
새삼스레 그 차이점을 깨달으며, 유리엘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래…… 듣던 중 반가운 소리이기는 하네.”
이내 걸음이 멈추어 서고, 도착한 저택 안으로 들어서서 유리엘은 침실에 구비 되어 있는 돈과 자신을 위한 옷을 챙겼다.
“그러면…… 나는 그만 가볼 텐데, 너도 기숙사로 돌아갈거니.”
“아니요. 외출증을 끊은 터라, 나온 김에 여기서 혼자 잘 생각입니다.”
혼자라는 부분에, 잠시 악센트가 들어갔던 걸 유리엘은 눈치 챘다.
“……”
저택은, 시중인들이 없음에도 깔끔한 풍경을 자아내고 있다.
아니, 정확히는 시중인들을 잠시 치워 놓은 게 아닐까.
그 정도 눈썰미는 있었기에, 유리엘은 살포시 웃었다.
“보기와는 다르게, 여자들을 좀 만나고 다녔었나보네.”
“……”
“동질감 느끼도록, 불쌍한 척 하지 마. 모성애가 가슴 크기에 비례하지는 않거든. 네가 그래도 오늘 밤 여기서 같이 자줄 생각은 없어.”
샐쭉 웃으며, 침실을 걸어 나가는 유리엘을 돌아보는 제라드.
저 허리에 손을 휘감고, 걸음을 멈춰 세워 볼까도 싶었지만……
깔끔하게 포기했다.
은근스런 속내가 읽힌 시점에서, 굳이 욕심을 부릴 필요는 없으리라.
“좋은 밤 되십시오. 얼른 나으시고.”
“고마워.”
유리엘이 떠나간다.
그리고 방 안에 은은히 남은 그녀의 체향은……
역시나, 여전히 고혹적이었다.
* * * * *
꿀꺽……!
본관의 4층,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온 유리엘은 소파에 앉아 담요를 덮고 의원에게 처방 받았던 약을 먹었다.
밖에서는 비를 머금고 선선해진 바람이 체온을 식혀주고 있어서 미처 몰랐는데, 비교적 따스한 내부로 들어서니 열이 나는 게 느껴졌다.
‘내 몸이, 이리 약했었나……’
한숨을 내쉬며, 유리엘은 소파에 편안히 누워 눈을 감았다.
시각은 고작 7시 밖에 되지 않았지만, 병들어 있는 그녀의 몸은 조금이라도 빠르게 잠들어 체력을 비축하기를 원했다.
그렇게 눈을 감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단잠에 빠져드는 유리엘.
이후, 그녀가 다시 깨어났을 때의 시각은 새벽 1시 22분.
“으, 응……”
끙끙 앓는 옅은 신음과 함께, 담요는 물론이거니와 입고 있는 옷까지 식은땀으로 축축이 젖어들어 오한을 느끼는 그녀는 간신히 상체를 일으켰다.
온 몸이 불덩이 같았다.
어째서 숙면을 취할수록 몸 상태는 더욱 나빠지기만 하는 건지.
“아, 으……”
고개를 조금만 움직여도, 눈살이 찌푸려지게 만드는 두통.
축축이 젖어든 옷의 촉감은, 피부에 닿을 때 마다 바늘로 쿡쿡 찌르는 듯한 아픔을 선사했다.
심지어 속까지 메스꺼워, 당장이라도 토할 것만 같은 느낌에 유리엘은 머리카락을 쥐어뜯으며 불규칙적인 숨을 토해냈다.
인정할 건, 인정해야만 하겠지.
이건 혼자서 감내한다고, 자연히 나을 수준이 아닌 것 같았다.
때문에 유리엘은 방안을 가득 밝히는 찬란한 불꽃을 피워 올렸다.
화르륵!
이러면 머지 않아, 순찰을 돌던 황실 기사단이나 마도 병단의 일원 중 누군가가 의아함을 품고 올라오리라.
변명 거리는 나름 준비를 해두었다.
곧 기말 고사가 다가오니, 그 일정을 준비하려다 잠시 잠들었는데 이리 되었다고 하면…… 그들도 딱히 할 말은 없을 터.
“하……”
불꽃은 더더욱 덩치를 키워나갔다.
그럴 때 마다 오한이 맴돌고 있는 몸은 그 따스함이 반가웠지만, 고열이 치솟고 있기도 해서 반대로 불편하기도 했다.
시원하면서, 동시에 따스하기를 바라는.
육체의 모순적이면서도 이중적인 욕구를, 어느 한쪽도 만족시켜주지 못한 채 유리엘은 끙끙 앓으며 몸을 뒤척였다.
딸칵.
이윽고 자신의 교수실, 그 방문의 문고리를 누군가가 잡아 돌린다.
벌컥!
그리고 열리는 문 너머, 유리엘은 흐릿한 시야로 한 사내를 바라보았다.
“기말 고사가 얼마 남지 않아서, 작업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네요…… 미안하지만, 나 좀 의원에게 데려다 줄래요?”
“……”
식은땀을 계속 흘리며, 간신히 말을 해보았으나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초췌한 자신의 모습을 감상이라도 하는 건지, 가만히 문 앞에 서있는 남자를 향해 유리엘은 짜증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뭐, 해요……! 보고만 있지 말고 좀……!”
한 마디 한 마디, 말을 할 때 마다 골이 울린다.
“유리엘.”
흠칫!
그 때, 귓가로 들려오는 너무나도 익숙한 목소리.
고열 때문에 흐릿한 초점을, 눈가를 좁혀 간신히 맞추니……
그제야 유리엘은 눈앞의 사내가, 페르젠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왜……”
지금 당신이, 내 눈앞에 있는 거야.
“몰골이 말이 아니구나.”
“나가……”
하필이면, 가장 추태를 보여주기 싫은 상대한테.
“발견한 게 나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라. 기사단이나 마도 병단들도 가십거리를 상당히 즐기는 편이니까. 지금 네 몰골을 봤다면 한 동안 자신들끼리 여러 차례 말이 오고 갔을 것이다.”
“지금 내 눈 앞에! 당신이 있다는 게 제일 최악이야……!”
지끈!
언성을 높이니 아파오는 두통에, 유리엘은 이마를 짚었다.
“네 상태를 알고 하는 소리냐. 유리엘.”
미간을 찌푸리며, 페르젠은 유리엘의 다리 쪽으로 시선을 내렸다.
……내 상태가 어떻다고.
헛웃음을 머금고, 따라서 고개를 숙이니……
“아……”
하혈이었다.
“보, 지마……”
갑작스런 달거리에, 유리엘은 다리를 오므리며 황급히 치워두었던 담요를 가지고 와서 자신의 하체를 덮었다.
“나가, 나가……!”
목소리에 울음이 새어 든다.
그냥, 상황 하나하나가……
어찌 이리도 자신을 못살게 굴어서 안달 인건지.
“만지지마. 내 몸에, 손대지마……”
발악어린 유리엘의 말이 이어지지만, 페르젠은 무시하고서 가까이 다가가 그녀의 이마를 커다란 손으로 짚었다.
정상의 범주를 아득히 벗어난 체온.
“건드리지 마……”
쓸데없이, 손은 왜 차가운 건지.
그 시원함에 유리엘은 문득 뺨을 비비고 싶어졌지만 참아냈다.
“미련하구나.”
“개새끼.”
“……”
“나쁜 새끼……”
“……”
“누구 때문인데, 전부 너 때문이잖아……”
달거리의 하혈 양이 평소보다 많았다.
그래서 그런지, 빈혈이라도 찾아온 걸까.
유리엘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세상이 빙글빙글 도는 느낌이었다.
그에 힘없이 고개를 숙이며, 화풀이라도 하듯 가까이 서있는 페르젠의 탄탄한 가슴팍을 두드리며 말했다.
“다, 치워놔……”
이윽고 파리한 안색으로 정신을 잃는 유리엘.
그러한 그녀를 두 손으로 안아들며, 페르젠은 한 동안 침묵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