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71 071─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강의 준비…… 안 해도 되요?”
단순한 비가 아니라, 여름철 장마가 이르게 찾아오기라도 한 건지 그칠 기미를 보이지 않는 창밖의 빗줄기를 보며 유페미아가 조심스레 물었다.
그에 페르젠은 대답 대신 고개를 들어 그녀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찻잔을 입가로 가져다댔다.
아스란 백작의 아들, 제라드는 유리엘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그 시점에서 자신에게 감사를 할 만한 일……
추리를 할 필요도 없었다.
아마 유리엘과 그의 결혼이 암암리에 진행되고 있는 거리라.
알프레드의 노괴는, 결국 보험으로 황비를 배출하게 될 아스란 백작과의 관계를 더욱 두텁게 만들려는 생각일 터.
사실 아스란 백작이 북부의 수장만 아니었다면, 아니 정확히는 제레미아가 자신을 감싸기 위해 황제 폐하에게 내밀었던 조건이 아니었다면……
하등 관심이 없는 사안이었다.
“유페미아.”
오랜 침묵 끝에, 넌지시 운을 트는 페르젠.
그에 유페미아는 몸을 움찔하며 눈을 살짝 내리 깔았다.
“나…… 이런 분위기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요……”
항상 저런 식으로 무게를 잡고, 침묵을 깨트린 끝에 페르젠이 말을 했을 때는 안 좋은 기억만이 있던 유페미아이기에 음울한 표정으로 손을 만지작거렸다.
“그저…… 간단한 질문이다.”
“무슨 질문이기에……”
“너는 말이다. 내가 첩을 들이게 되면…… 슬퍼할 테냐.”
“……?”
유페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페르젠의 얼굴이 너무 진지한터라, 농담으로 받아들이기에는 어폐가 있어 보인다.
“나는…… 애초에, 언젠가 당신이 첩을 받아들이지 않을까라는 생각을 했어요. 내 몸에 흐르고 있는 피가 천하다고 했던 건 당신이었으니까. 이제 와서 이런 걸 묻는 게…… 조금 이해가 안가요……”
“루에르그의 대를 이을 건, 네 아들이다.”
페르젠의 그 말에, 유페미아는 자신의 배를 감싸 안았다.
“이 아이가, 아들이 아니라 딸이라면요……”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너무나도 간단히 읽혀드는 유페미아의 표정에 페르젠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그녀에게 다가갔다.
그리고는 뺨에 키스를 하며, 태아가 자라나고 있을 그녀의 배를 쓰다듬으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아들을 낳을 때 까지 너를 임신시킬 거다. 걱정하지 마라. 그 과정에서 딸이 몇 명이 되던, 나는 박대하지 않을 거야.”
이서진의 자아가 뒤섞인 덕분에, 지금의 페르젠은 자식의 성별에 대해 특정 선호도가 존재하지 않았다.
“못 믿겠으면 다시 말해주마. 유페미아…… 나는, 네가 아들을 낳을 때 까지 임신시킬 거다. 그리고 그 아이는 루에르그의 대를 이을 유일한 후계자가 될 거야.”
좋아해야할지, 싫어해야할지 애매하기 그지 없는 그 말에 유페미아는 어색하게 페르젠을 마주보았다.
“있잖아요……”
“그래.”
“당신은, 왜 나를 취한 거예요……”
그 동안 가만히 갇혀 있던 유페미아는, 이제는 안식처가 되어버린 자신의 새장과 그곳의 주인인 페르젠에 관해서 조금씩 알아 나가고 싶었다.
“……”
“명분상의 백작이라는 지위가, 당신에게는 필요하지 않잖아요……”
“유페미아.”
“응……”
“그 질문에 대해서는, 네가 무사히 출산을 하면 알려주마.”
알 필요가 없다고, 그런 식으로 대답을 할 줄 알았는데……
“첩은…… 당신의 오라버니가 제시했던 사안 때문에 그래요?”
“그래.”
“하지만 루에르그가, 북부의 수장이 될 수 있을지는……”
“가능하다. 네가 걱정하는 건, 수장의 자리를 찬탈한다고 해도 그걸 대를 이어 계속 유지할 수 있을지가 의문이겠지.”
루에르그는 기본적으로 자생이 불가능한 최악의 영지다.
하지만……
“제 1 황자가 황태자가 되면, 나는 그에게 하나의 조건을 제시할 거다. 어차피 현재의 북부의 상황과 일치하는 제안이라 크게 반발할거라 생각되지도 않아.”
“……”
“이 카드를 쥐어들고, 성공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으면 대를 이어서도 수장의 자리가 무너지지는 않겠지.”
북부는 기본적으로 다른 영지들에 비해, 무척이나 저렴한 세금 비율을 적용 받고 있다.
실제로 그 때문에 몇몇 영지에서는, 다른 영주들의 사업을 대리해주는 편이 많기도 했고.
때문에 페르젠은 북부에 그러한 곳을 합법적으로 만들어 전권을 위임 받을 생각이었다.
브뤼테인과의 연결 고리가 있는 상태에서, 이러한 이점 까지 쥐어들고 있으면 어지간해서는 몰락의 길을 걷지 않을 터.
“그러니…… 너는, 괜한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마음을 편안히 안정시켜주는 듯한 나지막한 목소리로, 앞머리를 살살 정리해주는 페르젠이 소파 위로 자신을 눕히고 품안으로 빈틈없이 끌어안는다.
그리고는 뒷머리를 부드럽게 쓸어 내려주는데, 그 끝에 새겨진 애정이 여전히 어색하고 낯설었다.
아이를 무사히 낳으면 알려준다고 했지만, 역시 유페미아는 이 애정의 동기가 무엇일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사랑?
잘 모르겠다.
설령 비틀린 형태라 하더라도, 그것을 사랑이라 믿는 자들은 좋아한다고 사랑한다고 속삭이기 마련인데……
페르젠은 단 한 번도, 자신에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없었다.
쏴아아아……
여전히 쏟아지는 빗소리.
거기에 뒤섞이는 건, 서로의 숨소리.
“……”
“……”
맴도는 침묵이, 이제는 불편하지가 않았다.
그에 유페미아는 꼼지락 거리며, 페르젠의 탄탄한 가슴팍에 조금 더 깊이 얼굴을 묻었다.
페르젠 특유의 고급스런 향수 냄새와, 희미하게 베여든 연초의 냄새가 코로 스며들어온다.
“연초, 끊어요……”
“……”
“아이한테, 안 좋아……”
고개를 조금 올려, 페르젠이 목덜미에 얼굴을 비비는 유페미아가 마치 다그치듯 나근나근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
그 귀여운 충고를 듣고서, 페르젠은 옅은 웃음을 머금고 유페미아의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쓸어 넘겨주었다.
“끊으마.”
짧지만, 행복한 시간이 소소하게 이어져 나간다.
* * * * *
오래 이어진 휴강 끝에, 다시금 시작된 강의는 6월에 있을 기말고사에 대한 상세한 알림으로 서두를 올렸다.
“조의 구성은 5인 1조로 2조, 4인 1조로 1조가 편성될 예정이다. 인원의 구성은 6월초에 발표될 예정이고 해당 안건에 대해서는 이의를 제기 받지 않을 테니 그리 알아 두도록.”
협동으로 시험을 치르게 되기에, 미리 발표를 하면 합을 맞출 수도 있겠지만 그것은 의미가 없었다.
해당 시험은 어디까지나 자율 통제로 이루어지니까.
자율 통제로 시신을 사역할 때는 흑마법사 본인의 의지가 시신을 통제하지 않는다.
오직 구현율, 그 범주 내에서 생전의 버릇이나 행동 등을 통하여 주어진 상황에서 자유로이 움직일 뿐.
“마력은 각자 동등하게, 15%의 수치만을 사용한다.”
이해력이나 익숙함──숙련도와 혈통──의 요소가 배제 되었을 때, 케테르 등급의 흑마법사 기준으로 1%의 마력을 소비하면 평범한 시신을 사역했을 때 2 ~ 3%의 구현율이 반영 된다.
그러니 30 ~ 40%의 구현율을 확정으로 둔 상태에서, 배정 받은 시신에 관해 얼마나 피드백을 많이 받았는지가 성과를 가리리라.
“……”
말이 끝나자, 침묵이 맴돈다.
그도 그럴게 후계자로 낙점된 상황, 또는 명망 높은 가문과 약혼식을 올린 상태가 아니라면 아카데미의 시험 성적은 그들에게 있어서 인생을 보장해주는 하나의 단초였으니 긴장할 만도 할 것이다.
해당 시험 성적은 3년간 누적 되어, 황실을 비롯해 여러 가문의 기사단과 마도 병단의 면접 자리에 공식적으로 쓰이게 될 테니.
한 마디로, 가문의 성을 제외하고 밖에서 자신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 유일한 수단.
“그러면…… 강의를 시작하마.”
칠판으로 다가가, 소매를 걷어 올리고 페르젠은 분필을 쥐었다.
* * * * *
오전 11시.
강의를 끝마친 페르젠은, 수업 내내 자신과 눈도 마주치지 않던 리지가 휠체어를 움직여 황급히 나가버리는 모습을 보고 라우라에게 저벅저벅 걸어갔다.
“왜…… 그, 그러세요?”
특유의 다홍색 눈동자를 끔뻑이며, 라우라는 자신의 앞을 가로 막은 페르젠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오랜만에 마주하는 모습이었지만, 역시 특유의 고압적인 분위기는 좀처럼 적응이 되지 않는다.
이윽고 모든 학생들이 빠져 나가고, 단둘이 남게 된 걸 확인하자 페르젠은 라우라를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라우라.”
“네……”
“6월 4일에는 내가 너를 돌봐줄 수 있다. 하지만 이후 3개월의 방학 동안은 그럴 수가 없구나.”
“……”
“원래는 로젠베르크로 올라가 휴식을 취하려 했지만, 루에르그로 올라가게 되었으니…… 어찌 할 테냐.”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동안이라면 상관이 없겠지만, 방학 기간 내내 그녀를 데리고 있으려면 역시 명분은 페르젠보다는 당사자인 라우라가 만들어야 잡음이 없었다.
“그, 그건…… 거, 걱정 하, 하지…… 않, 않으셔도……”
“라우라.”
”……“
“걱정은 하지 않는다만. 3개월 동안 내 곁에 있기 위해 네가 뱉어낼 거짓말이 교수와 학생이라는 관계로 뭉그러트려 빠져나갈 수 있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 귀찮음을 수습하기 위해 결국에는 제노바 백작가와 연관된 사실을 들먹일 수밖에 없지 않겠느냐.”
팔짱을 끼는 페르젠이 교탁에 편안히 등을 기댔다.
“너는 똑똑한 아이지. 그러니 대비를 했을 것이다. 나는 로젠베르크로 방학 기간 동안 휴가를 갈 예정이라고 언질을 준적이 없었으니까. 그러니…… 어디 한 번 너의 계획을 들어보자꾸나.”
“아……”
페르젠의 그 말에, 라우라는 머뭇머뭇 거렸다.
대답을 회피하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지만, 페르젠은 그걸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 아주 가까이 다가와 라우라의 새하얀 턱을 붙잡아 들어 올렸다.
그에 자연스레 뒤쪽의 책상으로 비스듬히 엉덩이를 앉힌 라우라는 슬그머니 눈동자를 옆으로 굴리며 입을 열었다.
“교, 수님을…… 여, 여, 연모하고 이, 있다고……”
“……”
“마, 말을…… 해, 해 놓았어요…… 그, 날부터……”
“나를 연모하고 있다고.”
“네……”
“그건…… 조금 곤란하구나.”
“네?”
라우라는 의아함을 머금었다.
엮인 게 일방적인 사랑이라면, 그 만큼 수습하기 간단한 것도 없지 않을까?
질투에 눈이 멀어 혼자 선을 넘는 다던가 하는 행위로, 페르젠에게는 일말의 피해도 가지 않게끔 추후 뒤처리도 말끔하게 해결 할 수가 있는데.
“내 도움 없이 괴벽을 억제하게 될 날이 오기는 할까. 그러한 점에서 너의 그 거짓말이 과열 되었을 때…… 수습을 한다고 한들 무슨 수로 다시금 만날 테냐.”
“……”
“생각을 해보니 그 당시 축복을 받은 피아노를 로젠베르크로 보내준 게 잘하면 혼수품으로 보였을 수도 있겠어.”
“……”
“네 부모님의 머릿속에는, 어쩌면 네 일방적인 사랑이 아니라 나도 너를 마음에 들어 하고 있다고…… 그리 생각을 하고 있을지도 모를 터인데 지금까지 꼭꼭 숨겨두었구나.”
“그, 그게……”
라우라는 침을 꼴깍 삼켰다.
그 말대로, 자신의 아버지는 모르겠지만 어머니는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하고 있는 듯 했으니까.
“보기보다 발칙한 구석이 있는 아이었어.”
“아, 아, 아니에요……”
턱을 붙잡고 있던 페르젠의 손이, 목덜미 쪽으로 내려가 쇄골을 부드럽게 훑는다.
남성의 접촉이 단 한 번도 없었던, 눈처럼 새하얀 몸은……
그 낯설기 그지 없는 감촉에, 흠칫 떨며 움츠려들었다.
“라우라.”
“네……”
“당장은 어울려주겠지만,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방향을 바꾸거라. 네 생각보다 뒤처리가 원만하지 않을 수도 있어. 최악의 경우에는 그걸 수습하기 위해 제노바 백작가의 사실을 들먹이는 걸 원치 않는다면…… 내 첩이 되는 수밖에 없지 않느냐?”
페르젠의 그 말에 라우라는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페르젠의 나이는 24살, 전생의 삶을 더한다면 라우라 입장에서는 아직 어리게만 보이는 그의 아내가 된다는 게 적지 않은 거부감을 느껴져 굳이 이런 말을 하지 않아도……
그러할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만남을 위한 명분 이전에, 페르젠이 원할 때 자신의 아버지가 원활히 도울 수 있도록 해당 감정을 거래의 대가로 내놓으려 하기 위해서였는데.
물론, 지금 와서는 상황이 애매해졌다는 걸 라우라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다.
자신의 어머니가 호의적인 반응을 보일지는 미처 몰랐으니까.
“네…… 그, 그리…… 하, 할 게요.”
때문에 라우라는 자그마한 목소리로 대답하며, 두 손을 뻗어 가까이 밀착한 페르젠의 몸을 밀어냈다.
하지만 탄탄한 가슴팍은 좀처럼 밀리지가 않았다.
흑마법사 답지 않게, 다부진 체격.
“알겠다더니, 지금 이건…… 유혹이라도 하는 게냐.”
“아, 아니요……”
밀어 내려 애쓰고 있을 뿐인데, 페르젠 입장에서는 더듬거리는 걸로 보였는지 왜곡된 의사를 내뱉어 라우라는 얼굴을 붉혔다.
“그러면 6월 4일날 그곳에서 보도록 하자꾸나.”
“네……”
페르젠이 조용히 강의실을 떠나간다.
이후, 홀로 남은 라우라는 흐트러진 숨을 골랐다.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여름, 그 동안은 햇살이 강해 피부를 보호하기 위하여 긴팔을 입었으나 비가오고 있는 지금은 오랜만에 짧은 원피스를 꺼내 입었는데……
더웠다.
아니나 다를까 옷자락을 살포시 잡아 당기니, 자그마한 가슴골 사이로 송골송골 흐르는 땀방울이 분홍빛 유두에 이슬처럼 맺힌다.
킁킁……
“……”
더군다나 습기가 가득해서 인지, 희미하게 땀냄새까지 풍기는 듯하여 라우라는 당장이라도 샤워를 하고 싶어졌다.
인지 하지는 못하고 있었으나……
페르젠 앞에서, 자신의 몸은 상당이 긴장을 하고 있었나 보다.
그것이 조금은 형편없게 느껴져, 라우라는 한숨을 내쉬었다.
다음화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