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70화 (70/260)

EP.70 070─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아……”

오랜 잠에서 일어난 유리엘은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둠이 내려 앉아 제대로 보이지 않는다.

그에 마력을 불로 형질 변환시켜 주변을 밝혔다.

밖에는 비가오고 있었다.

‘냄새……’

매번 쓰던 향수를 뿌리지 못했기에, 방안에는 향과로 변질된 자신의 달콤한 체향이 은은하게 맴돌았다.

이대로 두어서는 곤란했기에, 창문을 조금 열고서 대기에 간섭해 깔끔하게 환기를 시킨다.

그제야 방안을 가득 드리웠던 달짝지근한 냄새가 사라지고.

비가 스며든 아카데미의 화단, 그곳의 흙냄새가 들어섰다.

꼬르륵.

‘배고파……’

아침부터 지금까지, 제대로 먹은 게 없었다.

그래도 교수실에는 간단한 다과를 위한 차와 쿠키가 마련되어져 있었기에, 주섬주섬 몸을 일으킨 유리엘은 물을 끓였다.

이윽고 홍차 한잔과 함께 쿠키를 베어 무니, 습기를 머금고 눅눅해진 최악의 촉감이 느껴진다.

그래도 공복감을 어떻게든 달래기 위해, 유리엘은 꾸역꾸역 7개의 쿠키를 전부 먹어 치웠다.

원래도 소식을 하는 편이라 그런지, 다행히도 적당한 포만감이 굶주린 배를 달래며 노곤하게 차오른다.

“……”

아마도 남은 시간은, 대략적으로 15일.

애초에 북부에 있을, 아스란 백작의 허락만 떨어지면 곧바로 약혼식이 치러지고 방학 중으로 결혼식이 거행되리라.

그의 아들은 아카데미에 다니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고민은…… 의미 없는 거겠지.’

한숨을 내쉬며 유리엘은 몸을 일으켰다.

어차피 언젠가는 가문의 뜻대로 이리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다.

그 시기가 어릴 적 그날에서, 지금으로 바뀌었을 뿐.

차라리 지금 이 순간, 알프레드라는 이름이 사라진 잠깐의 자유를 즐기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스륵……

생각을 마치고, 유리엘은 옷을 벗었다.

4층이니 누가 볼 일은 없겠지만, 그럼에도 부끄러워 구석으로 슬며시 이동하고서는 마력을 물로 형질변환 시킨 뒤 몸을 감싸 안았다.

대기에 간섭이 가능하고, 불과 물로 마력이 형질 변환 가능한 원소 마법사──괜히 알프레드의 어르신인 콜레오네가 그녀를 브뤼테인의 씨를 받기 위한 모체로써 애지중지 키웠던 게 아니었다.

“프, 하……”

이윽고 자신의 몸을 감싸 안은 물결 속에서, 유리엘은 찝찝하게 달라붙은 습기를 떨쳐내기 위해 목욕을 시작했다.

달빛이 스며들지 않은 터라, 움직이고 있는 그녀의 몸은 짙은 어둠에 가려져 흐릿하게 윤곽선만이 드러났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매우 아름다워 보였다.

수중에서 발레를 하는, 발레리노의 모습이 이러할까.

‘너무, 어두워……’

비가 내리는 어둠 속, 그 적막한 고요함을 무서워하는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괜스레 스산한 느낌이 들어 유리엘은 허공에 다시 한 번 불을 피웠다.

화륵!

그러자 끌어당기는 중력에 반항이라도 하듯, 탄력 있고 커다란 그녀의 가슴이 숨김없이 드러났다.

배에는 군살 하나 없었고, 그 밑으로 이어지는 탐스러운 엉덩이와 고간 사이에 역삼각형으로 수줍게 자라난 솜털에 가까운 음모는……

그래, 그 자태는 천박하지도 경박하지도 않았다.

아마 번식을 위하여, 수컷을 유혹하려는 최적의 형태가 있다면 지금의 유리엘이라 할 수 있겠지.

오직 욕망을 부추기는 그 자체.

어느 의미로, 경국지색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목욕을 하는 건 처음인데……’

마치, 슬라임이 자신의 몸을 기어 다니는 듯한 감각에 유리엘은 숨을 고르며 목욕을 이어 나갔다.

그렇게 어느 정도 상쾌함이 밀려오자, 몸을 감싸 안은 물을 없애 버리고 유리엘은 대기 중에 간섭하여 자신의 몸 주변으로 바람을 불게 했다.

“흐응!”

날씨가 날씨이다 보니 추웠다.

사방으로 불을 조금 더 피운 뒤, 건조한 공기로 자신의 몸을 말리면 되겠지만 그것이 피부에 좋지 않다는 걸 알고 있었기에 유리엘은 덜덜 떨며 이를 악물었다.

‘잘하면……’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겠다.

보살펴줄 사람도 없는 상황인데, 아프기까지 하면 억울해서 미쳐버리지 않을까.

그리 적당히 몸을 말렸다고 생각한 유리엘은, 주섬주섬 옷을 입고 교수실의 문을 열었다.

차가운 공기에 부르르 떨며 몸을 말리다 보니, 아랫배에서 소변이 급하다는 신호를 보내왔기에.

“으음……”

본관 4층의 복도, 길게 이어진 저 너머.

화장실로 향하는 길이 멀게만 느껴진다.

어둠은 정말로 딱히 무서워하는 편이 아닌데, 그러한 유리엘에게도 작금의 복도는 괜스레 공포감을 선사했다.

‘조금……’

미약하게 불을 피운다.

복도 전체를 밝힐 정도로 피웠다가는, 치안을 담당하고 있는 마도 병단이나 황실 기사단들이 의아함을 눈치 채고 올라오리라.

‘절대로, 들키기 싫어……’

집에서 쫓겨나 교수실에서 머물고 있는 실상이 까발려졌다가는 분명 말로 금치 못할 쪽팔림을 머금게 될 터.

또각……

그리 호롱불과도 같은, 자그마한 불꽃에 의지하며 유리엘은 어두컴컴한 복도를 거닐어 화장실로 들어섰다.

‘언니 마음, 이해는 가네……’

어릴 적, 자신의 언니는 밤에 화장실을 갈 때 마다 시녀들을 대동하거나 했다.

자신과 함께 잘 때는, 꼭 깨워서 같이 가달라고도 했고.

그 심정이 이해는 안 갔는데, 지금은 절절히 공감이 되었다.

‘어, 어차피 아무도 없으니까……’

문은, 열어 두어도 되지 않을까.

그리 판단을 마치고, 유리엘은 첫 번째 빈칸으로 들어가 앉은 뒤 느슨하게 몸의 힘을 풀었다.

쪼르륵……

빗소리를 제외하면, 아무런 소리도 들려오지 않는 적막함 속으로 민망한 소음이 울려 퍼진다.

문을 열어 놓은 상태라, 수치심은 더했다.

‘개새끼. 개새끼……’

이 모든 게, 그 남자──페르젠 때문이었기에.

유리엘은 얼굴을 감싸 쥐며 속으로 페르젠을 가득 원망한 뒤 볼일을 마치고 다급히 자신의 교수실로 돌아왔다.

“아……”

그리고 교수실로 돌아오고 나니, 물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뒤늦게 떠오른다.

‘어차피……’

자신보다 출근을 빨리 할 사람은 없으리라.

그러니 아침이 밝아 오면, 그 때 물을 내리면 된다.

‘자자……’

소파에 누워 유리엘은 눈을 감았다.

일어 난지 얼마 되지 않은데다가, 목욕까지 해서 좀처럼 수마가 몰려오지 않지만 그럼에도 꿋꿋이 잠을 청했다.

밤낮이 뒤바뀌게 되면, 괜히 없는 고생만 하게 될 테니.

* * * * *

똑똑.

“……”

똑똑.

“……”

똑똑.

부스럭……

“으음……”

규칙적으로 들려오는 노크소리.

소파 위에서 잠을 자던 유리엘은 눈을 떴다.

여전히 밖에는 비가 내리고 있었다.

물을 잔뜩 머금은 수건처럼 무거운 몸.

“으응……”

간신히 몸을 일으킨 유리엘은 피로에 찌든 신음을 내뱉었다.

약간의 오한이 드는 것 같기도 하다.

하지만 그것이 불편한 잠자리로 인한 뻐근함 때문인지, 정말로 감기 몸살로 인한 컨디션 저하인건지 좀처럼 감이 잡히지 않았다.

똑똑.

“씨……”

적잖게 거슬리는 노크 소리에 욕지거리가 나올려는 걸 참고 유리엘은 고개를 돌려 시계를 확인했다.

“……”

아침 8시 25분.

오늘은 강의도 있었기에, 일순간 졸음이 달아나는 걸 느낀다.

그에 황급히 부스스한 머리카락을 정돈하고, 문을 열었다.

“……”

키가 크다.

유리엘은 자연스레 고개를 들어 올렸다.

은색이 옅게 맴도는, 회색빛 머리카락과 푸른 눈동자.

준수한 외모를 가지고 있는 소년──아니 소년이라 하기에는 어폐가 있는 늠름한 모습이었기에, 사내라 하는 게 옳아 보였다.

“안녕하세요. 유리엘 교수님.”

“누구……”

“제라드 렌 밀레인 아스란이라고 합니다.”

“아……”

아스란이라는, 그 성을 듣자마자 유리엘은 눈앞의 사내가 누구인지 곧바로 눈치를 챘다.

“어제 늦게, 어르신에게 말씀을 듣고 찾아왔습니다.”

“……”

“출출 하실 듯 하여 빵을 사왔는데 아침으로 드시지요.”

구운지 얼마 되지 않은, 고소한 냄새를 풍기는 빵 바구니를 앞으로 내미는 제라드를 보며 유리엘은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유치해……’

할아버지, 콜레오네의 생각을 대충 짐작한 유리엘은 속으로 연거푸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크지는 않지만,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없을 저택이 있습니다. 저는 기숙사에서 생활을 하고 있으나 당장 지낼 곳이 없으시다면 위치를 알려드리겠습니다.”

“그……”

“제라드라고, 편히 부르십시오.”

“그래. 제라드…… 내가 너무 갑작스러워서, 어떤 반응을 해줘야 할지 모르겠네. 할아버지에게 무슨 말씀을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아카데미에서 이러는 건 조금 불편해.”

유리엘은 이마를 짚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그 때, 제라드의 푸른 눈동자가 매너 없이 자신의 가슴부터 시작해 몸 전체를 야릇하게 훑는 걸 눈치 챘다.

‘……’

기분이 급격히 불쾌해졌지만, 갑작스런 그 버릇없음의 이유가 환기가 되지 않은 채 방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신의 체향 때문임을 깨닫고 유리엘은 슬그머니 손으로 가슴을 가렸다.

“죄송합니다. 말씀은 전해 들었지만……”

향과에 관해서도 말을 해주었던 걸까.

유리엘은 눈살을 찌푸렸다.

“교수님.”

“그래……”

“불편하시다면, 아카데미의 강의가 모두 끝난 오후에 따로 찾아뵙겠습니다. 저녁이라도 함께 하며 이야기를 나누는 게 어떨까요.”

“일단…… 가봐.”

지끈, 두통이 치민다.

“알겠습니다. 그리고 이 빵은……”

필요 없다고.

그리 말을 하려 했으나, 유리엘은 저 너머에서 유페미아를 대동한 채 걸어오고 있는 페르젠의 모습을 보고서는 입술을 살짝 깨문 뒤 빵바구니를 낚아챘다.

“잘 먹을게.”

타악!

문이 닫힌다.

가까운 거리에서 직접적으로 만나는 건 처음이었던, 알프레드의 차녀──유리엘의 모습과 그녀의 유혹적인 체향을 되새기며 제라드는 걸음을 뒤로 돌렸다.

짧은 만남이었지만, 어째서인지 여운이 많이 남는다.

혹여나 옷에 그녀의 체취가 잠깐이라도 남아 있지 않을까.

문득 그러한 생각에 소매에 코를 가져다대는 제라드지만……

저벅.

“아……”

앞에서 페르젠을 마주하고, 곧바로 보기 좋은 미소를 머금은 뒤 예의 있게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좋은 아침입니다. 페르젠 교수님.”

“……본관에서는, 처음 보는 얼굴 같은데.”

“제라드 렌 밀레인 아스란이라고 합니다.”

아스란, 아스란……

북부 수장의 아들인가?

페르젠은 피식 웃었다.

루에르그가 브뤼테인을 등에 업고, 북부에 간섭하려는 걸 아는 사람은 고작 둘뿐이었다.

에르네스 제국의 황제와, 그의 딸 엘리자베스 황녀.

만약 이 사실을 알았어도, 이런 식으로 인사를 해왔을까.

대외적으로는 개인적인 행동을 브뤼테인이 수습한 걸로 알려져 있을 뿐이기에, 자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다 봐도 좋았다.

“제라드…… 그래, 그대도 좋은 아침이 되길 바라지.”

“예. 감사합니다. 또 언젠가 시간이 나면 저택으로 두 분을 초대해 근사한 식사라도 대접하고 싶네요.”

“식사, 대접이라……”

“네.”

곁의 유페미아는 놀란 표정을 지었지만, 페르젠은 그러지 못하고 제라드를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곧 강의가 시작하겠군요. 이만 실례하도록 하겠습니다.”

스쳐지나가는, 제라드의 자취를 쫓아 페르젠은 고개를 돌렸다.

“당신을 환대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는 게…… 의외네요……”

“……”

“아…… 나, 나쁜 뜻은 아니었어요……”

“나쁜 뜻이지 않나.”

“그게……”

“하지만 잘 짚었다.”

유페미아의 말대로, 사적으로 환대를 받을 만큼 타인에게 친절을 베푼 적은 존재하지 않았으니.

‘그 앞의 감사하다는 말도, 인사의 화답이 아니라 진심으로 감사하다는 뜻을 담은 걸지도 모르겠군.’

아스란 백작 가문이 자신에게 감사를 표현할만한 일……

그것은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걸 뜻했다.

그리고 잘못된 점을 알았다면, 바로 잡는 게 올바른 수순이겠지.

‘식사 대접은…… 그 때 가서 받으마.’

물론, 그 시점에서도 여전히 환대할 마음이 남아 있을지는 의문이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죄송합니다.

최소한 4편은 써서 올리고 싶었는데, 3편도 힘드네요.

주절주절 구차하게 긴말은 하지 않겠습니다.

그저 제가 열심히 강박증과 발악하면서 글을 쓰고 있다는 걸 알아만 주세요.

다른 건 몰라도…… 연중은 없을 겁니다.

매번 그래왔고, 앞으로도 영원히요.

이것만큼은…… 제가 드릴 수 있는 약속이에요.

사랑합니다.

항상 행복하세요.

다음화 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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