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69 069─유리엘 웨인 데이나 알프레드
덜덜……
꾸욱!
리지는 다리를 한가득 오므렸다.
그 모습을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비웃음을 지었다.
“아무런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간신히 실금을 참아내는 게 전부인 네가…… 무얼 할 수 있단 말이냐.”
“하, 으, 흑……!”
“리지. 너는 이토록 무력하다.”
페르젠이 손을 뻗는다.
보드라운 뺨을 매만진다.
그 소름 끼치는 감각에 리지는 울먹이며 고개를 틀었다.
“다리가 멀쩡했다면, 자유로이 도망이라도 칠 수 있었겠지.”
하지만 턱을 붙잡은 페르젠은 그 저항을 무력화 시켰다.
아주 가까운 거리에서, 리지의 두 눈을 응시했다.
공포에 물들어 파르르 떠는 보랏빛 눈동자는, 애처롭다 못해 가여울 수준이었다.
“하, 하지 마……”
내려가는 손이, 리지의 손목을 붙잡는다.
그리고 억지로 제자리에서 일으켜 세웠다.
그녀가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없었다.
곧이어 너무나도 잔인하게, 페르젠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휘감고 춤을 추는 자세를 취했다.
마치 그날처럼.
그리고는 고개를 숙여, 리지의 귓가에 나지막하게 속삭인다.
……♪♪♩.
그 날의 음악을.
“싫어…… 싫어……!”
오버랩 되는 그 날의 기억이, 리지의 머리채를 붙잡고 끔찍한 심연 너머로 끌어당겼다.
몸부림치며 간신히 고개를 내밀어 보려 해도, 몰아치는 거센 파도는 순식간에 그녀를 집어 삼킨다.
이윽고 힘없이, 마리오네트처럼.
리지는 페르젠의 움직임을 따라 처연히 흔들렸다.
그리고 머지 않아, 자연스레.
꾸욱.
리지의 발이, 페르젠의 발등을 즈려 밟았다.
“아……”
그것은 아주 강렬한 촉매가 되어, 무수한 기포가 솟아오르듯.
억누르고 가두어두었던, 8년 전의 기억을 순식간에……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수면 위로 끌어 올렸다.
“아파…… 아파……”
망가진 왼쪽의 다리, 거기서 느껴지는 환각통에 리지는 하염 없이 눈물을 흘리며 괴로운 몸부림을 선보였다.
“리지.”
그에 페르젠은 반대쪽 다리를 슬그머니 즈려 밟히며, 그녀의 몸을 책상 위로 눕혔다.
그리고는 눈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고서는, 고개를 숙여 나지막한 목소리로 읊조렸다.
“사람에게는 본능이라는 게 있다.”
그 중에서도, 공포는 생존과 직결되는 신체의 적색경보.
“내 앞에서 솔직하게 구는 네 몸을, 부정하지 말고 따르거라.”
가까운 거리에서 코로 스며드는 풋풋한 체향.
거기에 뒤섞인 옅은 지린내에, 페르젠은 고개를 내렸다.
실금까지는 아니어도, 찔끔 흘러나온 소변이 하복부에 옅은 얼룩을 새기고 있는 모습이 선명히 보인다.
“나와 단둘이 마주했을 때, 배변조차 제대로 가리지 못하면서 무슨 복수를 하겠단 말이냐. 리지…… 브뤼테인이라는 가문과 아폴리온 등급의 흑마법사는 툭하면 실금이나 하는 아이에게 무너질 만큼 만만하지 않단다.”
스륵.
기나긴 말을 마치고, 몸을 뒤로 물린 페르젠이 옷매무새를 정돈하며 잠긴 문을 열었다.
“재고할 기회는 딱 한번 주도록 하마.”
“흑…… 끅……”
“감정과 육체가 네 이성에 호소하는 비명에 귀를 기울이도록.”
이윽고 페르젠이 방을 나서자, 거기서 홀로 남은 리지는 한참을 울먹이다 간신히 몸을 일으켰다.
트라우마는 조금씩 잦아들었지만, 그 여파로 인한 떨림은 여전히 남아 리지를 괴롭게 했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루에르그.
여전히 변함이 없는, 끔찍이 독선적이고 이기적인 남자.
“당신은…… 정말, 최악이야……”
구매했던 로즈웰 가문의 논문을 꾸깃꾸깃 쥐고서, 리지는 휠체어에 앉아 방을 나섰다.
2시 23분……
지각이었다.
* * * * *
“왔어……?”
“일어났나.”
마차로 돌아오니, 잠에서 깨어난 유페미아가 나를 반겼다.
그에 마부에게 출발을 명하고서, 편하게 등을 기댔다.
“그……”
“왜 그러지.”
“빠, 빵을…… 조금 사가면 안 될까 싶어서……”
“안 될 건 없다. 입덧을 하는 와중에 먹고 싶은 게 있으면 거리낌 없이 말해라. 새벽만 아니라면 조달이 가능해.”
“응…… 알았어요.”
“가는 김에 뤼베도 사는 게 좋겠군. 좋아 했었지.”
“아……”
유페미아가 약간의 화색을 보인다.
“조금 넉넉하게 사가도록 하지.”
“그런데…… 당신 점심은……”
“네가 산 빵을 같이 먹으면 되지 않겠나. 그다지 먹고 싶은 것도 없다. 쓸데없는 배려는 하지 말고 네 몸을 신경 쓰도록 해라.”
“……”
아무런 말없이, 유페미아가 나를 올려다본다.
아마도 이러한 친절이 어색하고 낯선 거겠지.
“아…… 하, 하지 마요…… 밖인데……”
그 모습이 귀여워, 허리를 휘감은 손을 슬그머니 올려 가슴을 움켜쥐고서는 부드럽게 주물럭거렸다.
“아, 앙……”
더듬더듬, 익숙하게 유두를 찾아 살포시 옷 위로 비트니 야릇한 신음을 내뱉는다.
일말의 저항감도 없이, 이 성적인 자극을 받아들여 유두를 음란하게 세우는 모습이 퍽이나 만족스럽다.
쪽.
“읏! 모, 목에 자국 남기지마…… 가, 가리지도 못해……”
하지 말라고 하면, 더하고 싶은 것을 모르는 걸까.
끼익.
그러나 타이밍 좋게, 마차가 빵 가게 앞으로 멈추어 섰기에 나는 가벼운 입맞춤만 하고서 문을 열었다.
이내 빵 가게 안으로 들어서니, 특유의 고소하고 달달한 냄새가 기분 좋게 풍겨 온다.
“부족한 것 보다는 과한 게 나으니, 마음껏 담아라.”
입구에 놓인 바구니를 그녀의 손에 쥐어주고서, 나는 직원에게 다가가 뤼베를 넉넉히 주문한 뒤 의자에 앉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확실히 여자들의 천성은 시대를 불문하고 같은 건지.
고작 빵을 골라 담는 소소한 쇼핑에도…… 오래 걸린다.
“이 정도면…… 될 거 같아요.”
이윽고 20여분 끝에, 빵을 가득 채운 바구니를 내미는 유페미아를 보고서 나는 깔끔히 결제한 다음 마차로 올라탔다.
그리고는 주섬주섬, 포장된 뤼베 하나의 비닐을 뜯고 수저와 함께 유페미아에게 내밀었다.
“먹도록. 빵은 부스러기가 떨어질 수 있어서 곤란하지만, 뤼베는 상관없다. 아침도 걸렀으니 배가 많이 고플 테지.”
“아……”
머뭇머뭇, 나를 쳐다보다 얌전히 그것을 받아든 유페미아가 조심스레 한 숟가락 떠서 먹기 시작한다.
“거부감이 느껴지지는 않나.”
“응…… 맛있어요.”
“그래. 다행이다만…… 칠칠맞구나.”
“읍……”
고개를 살짝 숙여, 입가에 묻은 뤼베를 혀로 살짝 핥았다.
부드러운 입술의 감촉, 그 위에 얹힌 뤼베 특유의 단맛.
충동질 하는 외부의 자극이, 본능적으로 그녀의 입안에 혀를 집어넣어 범하게끔 지시했지만 간신히 억누르고서 고개를 떼어냈다.
그러자 얼굴을 살짝 붉힌 유페미아가, 자신의 입술을 손으로 더듬더듬 거리다 내 눈치를 잠깐 보더니 거리를 슬쩍 벌리고서 아무 말 없이 뤼베를 마저 떠먹는다.
그에 나는 창가로 고개를 돌린 뒤,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
날씨가 조금 흐리다.
밤에는 비가 올 것만 같았다.
* * * * *
쏴아아아……
예상대로 저녁이 되자 비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굵었다.
금방 그칠 것 같아 보이지는 않는다.
임신을 하고 몸에 변화가 찾아온 유페미아는, 고작 7시 밖에 되지 않았음에도 벌써 잠에 빠져 들었다.
똑똑.
“들어오도록.”
방문이 열린다.
허리를 꾸벅 숙이는 시녀.
“손님이 찾아 오셨습니다.”
“손님?”
내게는 손님으로 찾아올 만큼, 친분이 있는 사람이 없는데.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경입니다. 돌려보내도록 할까요?”
“아니…… 접객실로 응대 해주 거라. 곧 내려가지.”
“알겠습니다.”
황실 기사단은 아카데미의 치안을 담당하기도 하니, 아마 리지를 만나고서 나를 찾아온 게 아닐까 싶었다.
그러지 않고 서야, 그가 굳이 내 얼굴을 보려 할 이유가 없지.
“……”
역시나, 빗소리가 가득 울려 퍼지는 복도를 거닐어 1층으로 내려와 접객실 안으로 들어서니 살벌한 표정의 로에르가 나를 반긴다.
“앉아 있지 그러나.”
몸을 일으키려는 그를 보고서, 덤덤한 목소리로 응대해준 뒤 나 또한 편하게 의자를 뒤로 끌어내고 앉았다.
“페르젠……”
“루에르그 백작이라 했을 텐데.”
“……”
“너희 남매는 하나 같이 교양이 없구나.”
“네 놈은…… 정말 인간이기는 한 건가……?”
“쓸데없이 원초적인 질문이군. 그러면 무엇으로 보이나?”
“짐승만도 못한 새끼! 일말의 양심이 남아 있다면…… 어떻게 그 아이에게 8년 전의 그 날을 다시 되새기는가──!”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으니, 선택지를 쥐어준 거다.”
“양심이, 남아 있다고…… 하, 하하하!”
접객실 안을 비추는 붉은 양초 너머로, 크게 실소를 내뱉는 로에르의 흉악한 얼굴이 일렁거린다.
“양심이라는 게 남아 있다면! 네 놈은 용서를──”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그의 말을 끊고, 나는 입을 열었다.
“용서를 바라면, 용서 해주기라도 할 텐가. 만약 그리 하다면 나는 진심으로 너희 남매들의 구두라도 핥아줄 용의가 있다. 공개적인 사과를 원한다면…… 그래, 못해줄 것도 없지.”
꿈틀 거리는 페르젠의 자아가 거슬린다.
하지만 이제는 억누르는 것도 많이 익숙해졌다.
“……”
“시간은 되돌려 줄 수 없으나, 그만한 물질적 보상도 해줄 것이다. 하지만 너희들은 그걸 받아들일 생각이 없지 않느냐.”
무얼 하든 이들은 나의 진의를 의심할 터.
“네 여동생에게도 말했지만, 이루어지지 못할 용서를 갈구할 마음은 없다. 그러는 동안 너희들은 어떻게든 나를 몰락시켜보겠다고 끝까지 발버둥을 칠 테니까.”
“……”
“이런 말을 들어봤나? 복수를 하게 되면 너도 그 자식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혹은…… 복수는 또 다른 복수를 낳을 뿐이다.”
제 3 자가, 복수에 얽힌 사연을 들을 때 자주 하는 충고.
“공감하나?”
“집어치워라……”
“그래. 나도 그리 생각한다.”
“미친 새끼…… 어쭙잖게 자비를 베푸는 척 하지마라. 애당초 그럴 위치에 있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나? 네 놈은 한 가족의 인생을 송두리째 짓밟은 쓰레기다. 그 가증스럽고 위선적인 마음을 세간은 양심이라 정의하지 않아. 혹여나 진심으로 일말의 양심이라도 남아 있다면…… 변치 않는 그 역겨운 모습을 끝까지 유지해라.”
로에르가 거칠게 일어나 몸을 돌린다.
그리고는 그대로 접객실을 나갔다.
“메리.”
그에 나는 문밖에 서있을 시녀를 불렀다.
“네.”
“우산이 없더군. 가서 우산을 챙겨 주어라.”
“알겠습니다.”
가벼운 한마디, 그걸 끝으로 몸을 일으킨 나는 얼음이 가득 담긴 잔을 쥐어들고 그곳에 양주를 따랐다.
‘……’
추적추적, 빗물이 흘러내리는 창가 앞.
그 앞에 서서 불투명하게 비추어지는 나 자신의 모습을 보며, 조용히 양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로에르 폴 비스타인 클로디아……’
나는 말이다.
애초부터 시엘 미드포드라는 존재를 죽이기로 결심한 순간, 선인이 되어 몸부림 칠 바에야 악인이 되어 웃는 걸 선택하기로 했다.
‘풀 수 없는 매듭이라면……’
잘라내고, 태워버리면 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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