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59화 (59/260)

EP.59 059─시엘 미드포드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

그의 대리자로 선택되어진 건, 시엘 미드포드.

그 사실을 인지한 시점에서, 밖으로 빠져나가는 사람들과 다르게 유페미아는 페르젠의 옷자락을 붙들고 그의 걸음을 멈춰 세웠다.

“……”

이윽고 썰물처럼 모든 사람들이 빠져나간 연회장 내부에서, 느릿하게 닫히는 문을 바라보며 유페미아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감이 잡히지도 않는다.

그리 말을 했는데도, 어째서 시엘은……

페르젠과 이리도 대립을 하려는 걸까.

그래, 사실은 알고 있다.

자신을 위해서이겠지.

모른다면 거짓말이리라.

하지만 노력이라는 말로, 최선을 다하겠다는 의지 따위로……

일개 왕국 기사가 뒤틀기에는, 높고 버거운 현실이었다.

헤어지는 순간은 최악이었으나, 후회와 미련이 없는 인생이 과연 이 세상에 존재할 수 있겠는가.

억지로 관여할수록 고통만 받을 뿐이니, 좋은 추억만을 간직한 채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면 될 텐데.

시엘은, 그 좋았던 순간들조차 일그러지는 과정을 자신에게 보여주려 들었다.

그럴수록 좋았던 추억에는 고통이 점칠 되어, 나중에 가서는 떠올리지도 못하게 되리라는 걸 모르는 걸까.

아니다……

사실, 이 모든 게 현실에 순응 해버린 자신이 내세우는 합리화 일 수도 있었다.

현실에 굴하지 않는 그의 심지가, 어찌 보면 대단하게 느껴진다.

그러니 왕도의 기사가 될 수 있었던 거겠지.

하지만 자신은 아니었다.

좌절했고, 포기했고, 꺾여버렸다.

페르젠에게 굴복과 복종을 서약한 건, 유페미아의 온전한 자의라고 보기에는 어려웠으나……

그렇다고, 순수한 타의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 당시의 서약 내용…… 나는, 한 번도 어기지 않았어요……”

“……”

페르젠은 자신을 끌어안는 유페미아를 내려다보았다.

까치발을 들고 어색하게, 자신의 목에 입술을 비빈다.

“그러니까……”

약속대로, 나를 슬프게 하지 말아줘요.

유페미아도, 페르젠이 결투에 나서는 걸 말릴 생각은 없었다.

오히려 시엘이 페르젠이라는 거대한 벽을 느끼고, 얌전히 자신을 향한 마음을 접은 다음 스스로의 길을 걸어 주기를 원했다.

그런 이별을 바라고 있으나, 흉흉한 페르젠의 눈빛은 시엘을 죽여 버릴 것만 같아 유페미아는 당시의 서약 내용을 되짚으며 페르젠에게 간절히 애원하듯 흔치 않은 아양을 떨어댔다.

“시엘 때문에, 제가 당신에게 이러는 게 오히려 마음에 들지 않을 수도 있다는 걸 알아요…… 하지만, 그는 제 소중한 인연이었어요. 나의 현재와 미래는 오직 당신에게만 바칠 테니까……”

“……”

“과거만큼은, 짓밟지 말아줘요……”

“……”

“좌절을 느끼고, 포기할 수 있는 정도로만…… 그를 몰아 붙여도 충분할 거예요…… 응. 분명 그러니까……”

유페미아가 페르젠의 손을 잡고, 자신의 가슴 위로 얹혔다.

“얼른 끝내고…… 돌아가서 저희 섹스해요. 당신하고 똑 닮은 아이를 가지고 싶어요. 당신 물건이 내 안으로 들어와 내부를 가득 채우고 자궁을 두드려줬으면 좋겠어요. 당신이 내 목덜미에 키스를 해줬으면 좋겠어요. 내 배를 원하는 대로 꾹꾹 눌러도 괜찮아요. 상냥한 손길은 저도 기분이 좋으니까……”

어쩌면 처음으로.

가장 적나라하다고 할 수 있는, 유페미아의 유혹에 페르젠은 손을 뻗어 그녀의 머리를 쓸어내렸다.

“대답…… 해줘요……”

“……”

그녀는 알고 있을까.

이 연극 자체가, 적지 않은 리스크를 감내하고 있음을.

그러할 진데 시엘 미드포드를 죽이지 못한다면……

막대한 실책을 범하게 된다.

하지만 자신의 손에 시엘 미드포드가 죽어, 과거가 무너지게 된다면 그녀는 얼마나 커다란 영향을 받을까.

페르젠은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사실 고작 한 여인의 감정과, 자신의 명운을 저울질 하고 있는 것부터가 어리석은 행동이었다.

“유페미아.”

“응…… 듣고 있어요……”

그래도……

“그 당시의 서약 내용을, 다시 읊어보겠나.”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는, 적어도 페르젠에게 있어서 고작이라는 수식어가 붙지 않는 여인이었다.

망가지는 건, 감내할 수 있다.

하지만 망가져버린 그녀가, 자살을 선택하게 된다면……

“당신을 존중해요……”

“또.”

“당신과 부부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해요.“

“또.”

“당신과 슬픔과 기쁨을 공유해요……”

“또.”

“당신 곁을, 무슨 일이 있더라도…… 떠나지 않아요.”

“그래……”

페르젠은 고개를 숙여, 유페미아의 이마에 입술을 맞추었다.

“나 또한…… 너를, 슬프게 만들지 않으마.”

이윽고 고개를 떼어낸 페르젠이 문을 열었다.

연회장 바깥, 결투의 입증인이 되어줄 수많은 관객들이 고개를 돌려 자신을 쳐다본다.

저벅……

그에 페르젠은 당황하지 않고, 기품 있게 걸음을 내딛었다.

관객들로 이루어진 벽이 좌우로 갈라지고.

그 너머에는 달빛이 내리비추는 조명 아래에서, 먼저 무대에 올라와있는 시엘 미드포드가 자신을 반긴다.

조금은 세차게 불어오는 밤바람이,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황궁의 화단들의 꽃내음과 떨어진 꽃잎들을 날려 보냈다.

그리고 페르젠은 자신의 제단을 쓰다듬고, 아공간을 열어 이사벨의 시신이 담겨있는 관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았다.

시엘 미드 포드는, 오러 나이트의 길을 걷는 자.

극의에 올라 포화 상태의 마력이 밖으로 새어나와 형태를 가다듬고 항마의 성질을 지니지 않아도.

과도기 상태에서 마력으로 재구성된 육체는, 인간의 한계를 넘어서도록 해준다.

그래서 일반적으로, 오러 나이트는 먹이 사슬에서 마법사의 우위에 서있는 존재들이지만 페르젠은 두렵지 않았다.

이나스 왕자가, 시엘 미드포드를 연극의 소모품으로 던져버린 건 분명 아직은 그의 경지가 높지 않다는 뜻.

더군다나 루에르그의 설산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전신에 동상을 입고 그것을 마력을 통해 치유한 뒤 세포를 재구성했다면.

순차적으로, 오러 나이트의 길을 걷는 자 보다 약하리라.

사지를 하나씩 마력으로 재구성해 10이라는 수치를 차근차근 달성해나가는 게 일반적인 루트라면, 시엘 미드포드는 해당 수치가 사지와 몸통에 고르게 분배 되어 있는 식이었다.

극의에 도달하는 가장 빠른 길이지만, 그만큼 나아가는 과정에서 다른 오러 나이트에 비해 위협적인 요소가 적다.

물론, 그 만큼 전신의 내구도가 마법의 위력에 어느 정도 견뎌낼 수 있는 편일 테니 무식하게 돌파를 해오면 위험하겠으나……

준비를 완벽히 끝내지 않은 배우는, 무대에 오르지 않는 법이다.

덜커덕!

관이 열리고, 통제 하에 사역되는 제국의 마녀가 몸을 일으킨다.

다수와 싸우는 게 아니었으니, 질적 가치가 높은 시신의 구현율을 최대한 끌어 올려서 전투에 임하는 게 정석적인 방식이나 페르젠은 거기서 끝내지 않고.

투웅!

제법 거대한 상자를 추가적으로 꺼내들어 바닥에 내려놓은 뒤, 뚜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실온에서 유일하게 액체 상태로 존재할 수 있는 금속.

수은이 대량으로 담겨져 있었다.

이 수은이 이번 전투에 있어서 페르젠의 안전장치, 뚫리지 않을 절대적인 방패가 되어 주리라.

“시엘 미드포드 경, 준비는 되었나.”

평소와 다르게, 페르젠은 품안에서 안경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안경알 부분을 섬세하게 닦으며, 자신의 감정을 완전히 갈무리한 무덤덤한 목소리로 반대편의 시엘을 향해 물었다.

“준비는, 진작 끝났습니다.”

“그런가……”

시엘 미드포드의 묵직하고, 재빠른 대답에 페르젠은 안경을 쓰고서 훨씬 선명한 그의 모습을 눈에 담았다.

“그러면 네 주군이 말했던 명예를, 가르침 받아보도록 하지.”

검을 쥐고 있는, 시엘 미드포드가 자세를 가다듬는다.

이윽고 바람에 날아온 화단의 꽃잎이, 춤을 추듯 넘실거리며 바닥에 힘없이 떨어졌을 때……

파직!

푸르디푸른 선명한 불꽃이 그것을 태우며, 시엘 미드포드의 몸을 아름답게 휘감았다.

* * * * *

인간의 몸으로 빛의 속도를 능가하는 건 불가능하다.

그랬기에 시엘 미드포드는, 페르젠이 폭압적으로 전류를 방사시켜 온다면 꿋꿋이 그걸 버텨내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그 과정에서 몸이 망가지기는 하겠지만, 고출력의 전류는 기하급수적으로 마력을 소진시킬 테니 적지 않은 이득을 취할 수 있으리라.

파지직……!

하지만 예상과 다르게, 전류 다발을 받아 내고 있는 몸은 심한 반동을 겪지 않았다.

루에르그의 설산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입었던 동상에 비하면, 충분히 참아낼 수 있는 수준의 통증.

때문에 시엘 미드포드는 검을 쥐고, 페르젠을 바라보았다.

알 수 없는 특이한 액체가 페르젠의 주변으로 떠올라 원을 그리듯 몸을 감싸 안으며, 기묘한 한기를 뿜어내고 있지만 베어낼 수 없을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파앗──!

뒤꿈치에 힘을 주고, 앞으로 내딛는 시엘 미드포드가 순식간에 멀찍이 떨어진 거리를 좁혀든다.

한쪽으로 특화되지 않고 밸런스 있게 재구성된 몸이라도 동위의 오러 나이트들과 비교 했을 때나 떨어지는 위력을 보이지, 일반적인 인간을 기준으로 삼는다면 이미 초인의 영역이었다.

우우웅──!

하지만 페르젠의 지척으로 도달하기도 전에, 특정 거리 안으로 들어선 시엘 미드포드는 무언가가 자신을 밀어내는 강한 반발력을 느끼며 정지라도 하듯 멈춰 섰다.

그 힘의 충돌이 불러온 반탄력으로 인해, 제법 시원한 바람이 페르젠의 옷자락과 머리카락을 흔들리게 만들었다.

“무지한 것들은, 생각하는 것조차 단순하구나.”

코앞에서 정지한 시엘 미드포드의 시선을 마주하며, 페르젠은 약간 흘러내린 안경을 고쳐 쓰고서는 그대로 나가떨어지는 시엘 미드포드의 모습을 무심하게 쳐다보았다.

“빠르고 무거우면 무얼 하나, 실속이 없거늘.”

수은(Hg).

특정 마이너스 임계 온도에 도달했을 때, 전기저항이 0이 됨과 동시에 자기장을 밀어내는 초전도체(超傳導體)가 되는 물질.

적어도 이 세계에서는, 오직 페르젠만이 알고 있는 정보였다.

자기부상열차에 흥미를 느끼고 정보를 알아본 이서진이 아니었다면 응용할 수 없었던 방식이었으니까.

물론, 그 또한 겉핥기식으로 남아 있었던 거라 해당 임계 온도를 알아내기 위하여 페르젠은 홀로 연구를 했었다.

그 끝에 간신히 알아낸 사실을 접목한 것이고.

‘마력 소모가 예상 보다 크지만……’

효과는 확실한 듯 했다.

도선에 직선이나 원형으로 흐르는 전류는, 그 주변으로 자연스레 자기장이 생겨난다.

갑옷을 입고 있는 시엘 미드포드의 몸뚱이가 그런 역할을 하기에는 무리가 있으나, 애초에 마력이 형질 변환된 전류는 기본적으로 마법사의 통제를 따르기에 흐름과 방향을 의도적으로 설정하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언가 특별한 능력이 있을 줄 알았는데, 고작 이게 다인가.’

각자가 마련된 최선을 들고 무대에 올랐으나, 역량과 기량의 차이가 압도적으로 나니 품었던 긴장감과 위기감조차 고조되지 못하고 꺼져버리는 느낌이 든다.

우우웅──!

발악하는 시엘 미드포드가 다시 한 번 몸을 일으켜 검 끝을 페르젠에게로 겨누나, 그럴 때 마다 페르젠은 전류의 출력을 높여 자기장의 크기를 키웠다.

불이 문명 발전의 발단이 되어 주었다면.

전류는 문명 발전의 전개가 되는 주축.

“예로부터 인간은 자연 앞에 무력했지.”

푸른 불꽃이 타다닥! 틔며 볼품없이 튕겨져 나가는 시엘 미드포드가 바닥에 엎드려 입술을 거칠게 깨문다.

고개를 들어 올려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일말의 위협조차 되지 않는 듯, 고고한 자태로 똑바로 서서 한없이 높은 위치에서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 * * * *

쓰러지지 않는.

부러지지 않는.

굽히지 않는.

꺾이지 않는.

그야말로 칠전팔기(七顚八起).

번번이 튕겨져 나가는 무력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시엘 미드포드는 포기하지 않고 페르젠에게 달려들었다.

그는 처절했고, 절박했고, 또 간절했으나……

터엉──!

결과가 바뀌는 일은 존재하지 않았다.

“쯧.”

그에 제국의 기사들은, 못 볼꼴이라도 봤다는 듯 혀를 차며 해당 광경을 외면했다.

오러 나이트가 되어서, 원소 마법사의 시신을 사역하는 흑마법사에게 저 정도로 농락당하는 게 말이나 되는 소리란 말인가.

오러 나이트 망신은 혼자서 다 시키고 있다고 생각하며, 이나스 왕자가 얼른 패배 선언이나 해주기를 바랐다.

처한 상황이 너무나도 한심하다 보니, 그의 의지와 기개를 높게 사주기에는 무리가 있는 것이다.

그래, 시엘 미드포드는 필사의 각오로 임하고 있으나……

그것에 감동을 해주는 사람은 존재하지 않았다.

사람의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고,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는 말이 정확히 이럴 때 사용되는 거겠지.

콰앙──!

시엘 미드포드의 발밑, 땅이 높게 치솟아 오르며 그를 허공으로 들어 올린다.

신체 능력이 비약적이더라도, 허공에서는 움직임이 제한될 터.

착지자세를 바로 잡는 시엘 미드포드를 보며, 페르젠은 얼음으로 구현화 시킨 거대한 정육면체를 만들어냈다.

특이점이 있다면, 내부의 공간은 비워져 있었고.

위쪽과 아래쪽에는 각각, 시엘 미드포드의 몸통과 머리만이 통과할 수 있는 자그마한 구멍이 새겨져 있다는 거리라.

이내 페르젠이 내부와 외부의 기압 차이를 다르게 설계하자……

후우웅──!

자연스레, 동일해지려는 기압의 흐름에 따라 시엘 미드포드는 거대한 얼음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끅!”

그리고 위쪽의 구멍을 통과해, 아래쪽으로 그의 머리가 불쑥 튀어나오며 끼여 버리자 페르젠은 비어버린 얼음의 내부를 점성 높은 물로 가득 채워버렸다.

점성이 높은 만큼 저항이 심했던 터라, 시엘 미드포드의 움직임 하나하나는 힘을 제대로 전달하지 못해 얼음벽을 파괴하지 못했다.

그야말로 원소 마법사의 시신을 사역해 오러 나이트를 완벽하게 제압해낸 그림이라 볼 수 있었기에, 지켜보던 관객들 중 몇몇 원소 마법사들은 감탄을 토해내며 박수를 쳤다.

‘……’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기서 해당 결투가 끝나도 이상하지 않을 시점으로 보이리라.

이나스 왕자 또한, 이만 하면 충분하겠다 싶어 언제 패배선언을 하면 자연스러울지 고민을 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페르젠은 이대로 끝내고 싶지 않았다.

마력으로 재구성된 몸은 내구도가 높을지라도, 머리는 마법에 대한 저항력이 높지 않을 테니.

이대로 머리통을 터트려 버리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짙은 살의를 풀풀 흘려보내지만……

저 너머, 두 손을 간절히 모으고 있는 유페미아를 보고서 페르젠은 얼굴을 한번 쓸어내린 뒤 살의를 억눌렀다.

‘유페미아…… 너는, 여기까지 와서 내 명운(命運)의 결정을 스스로 하는 게 아니라 시엘 미드포드라는 확률에 맡기는 심정을 알고 있나.’

알 도리가 없겠지.

겉으로 티를 내지 않았어도, 손과 눈이 닿지 않는 어딘가에서 자신의 심장을 찌를 비수가 성장하고 있다는 불안감은 적잖은 스트레스를 안겨주었었다.

하지만 두 자아가 섞여버린 상태에서 이서진의 자아가 새긴 목표가 생존이라 한다면……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이 새긴 목표는 중증 강박 장애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되는 이 세계에서 어쩌면 유일한 여인,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였다.

그리하여 마련된 절충안은, 자연스레 하나 밖에 남지 않게 된다.

‘시엘 미드포드, 너는……’

이 자리에 무슨 생각으로 서있는 걸까.

한 번 전력을 가늠하기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목숨을 걸고.

죽을 각오로.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을, 죽이려 온 건가.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나……

페르젠 입장에서는, 시엘 미드포드가 후자를 선택하기를 바라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며 이사벨 론 피에르 제노바를 앞 쪽으로 움직였다.

타닥!

수은을 극저온으로 유지시키고 있던 냉기가 사라지고, 10% 가량을 제외한 모든 마력이 가용된다.

곧이어 손을 들어 올리는 이사벨 손끝으로, 강렬한 스파크가 일어나기 시작하더니……

파지직──!

찬란한 전류 다발이 뻗어져 나가는 잎과 가지처럼 사방팔방으로 비산하며, 하늘로 치솟아 올랐다.

쩌적!

이 정도로 방사되는 고압 전류가 한곳으로 모여들었다면, 시엘 미드포드의 머리통이 어떻게 되었을지 간단히 가늠할 수 있었다.

하지만 페르젠은 보란 듯이, 자신의 마력을 낭비라도 하듯.

그저 화려하고, 아름답고, 우아하고, 격조 있게……

전류를 통한 예술을 부렸다.

빛을 집어 삼키는 어둠이 내려앉은 밤.

비산하는 전류는 한 그루의 나무가 되어 밤의 어둠을 몰아냈다.

이윽고 시엘 미드포드를 옭아매고 있는 거대한 얼음이 부서지고.

그 알갱이들과, 안에서 흘러나오는 점성 높은 물이 순식간에 분해되더니 반짝거리는 수증기를 피어 올린다.

정말이지…… 몽환적인 광경이었다.

털썩!

그리고 그 수증기 안에서 내려와, 바닥으로 볼품없이 곤두박질치는 시엘 미드포드가 몽환적인 광경에 사로 잡혀 있던 관객들의 몰입을 깨트려버린다.

동시에 이나스 덴 프로이센 로벨리움의 한 마디가……

“졌소……”

잔잔하게 울려 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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