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57화 (57/260)

EP.57 057─시엘 미드포드

“참으로, 오랜 만에 보는구나.”

에르네스 제국의 황제는, 가장 무난한 말을 서두로 올렸다.

얼굴에 새겨진 주름은 장식이 아니라는 듯, 새겨진 연륜답게 오랜 역사가 증명해온 브뤼테인의 전통을 깨트린 페르젠을 보고서도 당황하지 않는 것이다.

“익히 전해 들었다만, 팔은 아무런 후유증이 없느냐.”

“이상은 없습니다. 걱정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래, 아카데미에 있었던 불미스러운 일을 재빠른 대처를 하여 조기에 진압했다지. 몸을 아끼지 않는 헌신에 몇몇 논의가 올라왔던 바, 최종적으로 루에르그의 세금을 3년간 면제하기로 결정을 내렸다.”

“폐하의 성은에 감사드리옵니다.”

“허면…… 이 연회를 편히 즐기도록 하거라.”

페르젠의 독자적인 행동인지, 그게 아니라면 루에르그라는 성을 빌려 브뤼테인이 황위 쟁탈전에 참여 하겠다는 건지……

황제는 제대로 된 갈피를 잡지 못한 채, 자신의 아들인 제 1 황자와 제 2 황자를 슬그머니 바라보았다.

역시나, 복잡한 표정이었다.

후자라면 사실상 페르젠의 지지를 얻는 것만으로도 황태자가 된다는 반증이라 할 수 있겠지만, 전자라면 그리 큰 의미가 없었다.

북부 변방의 영지 루에르그에서 운영할 수 있는 자금은 얼마 되지 않았고, 병사도 적었으니, 전력감이라 할 수 있는 건 사실상 페르젠 한 명.

‘제관에 쓰일 자를 직접 고르러 온 것인지, 그게 아니라면……’

황제는 못내 아쉬움을 금치 못했다.

속마음을 엿들을 수 있는 엘리자베스의 능력은 개인 마다 주기가 3개월, 5월 말에 연회를 열었다면 명확한 의도를 이 자리에서 캐낼 수 있었을 텐데……

‘지금으로서는, 지켜볼 수밖에 없겠지.’

황제는 조용히 페르젠으로부터 시선을 거두고, 자신의 사랑스러운 황비와 이야기를 나누다 잠시 뒤 함께 퇴장했다.

어차피 연회의 주인공은, 자신의 아들들이었으니까.

* * * * *

즐겁게 울려 퍼지던 연회장의 음악이, 내부의 혼란스러움을 가라앉히려는 듯 어느새 잔잔하게 바뀌어 흐른다.

그에 굳어 있던 귀족들 또한, 다시금 대화를 이어 나가며 활기를 북돋았지만 시선만큼은 간간히 페르젠의 뒤를 쫓았다.

하지만 당사자인 페르젠은 아무런 관심이 없다는 듯, 지나가던 시녀 한명을 붙잡고 와인 한잔을 따라 받은 뒤 메마른 목을 축였다.

“앗…… 미, 미안……”

“……”

마치 공황장애라도 온 듯,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유페미아가 페르젠과 반대로 걸음을 내딛어 몸이 부딪친다.

‘이 정도면 차라리……’

혼자 내버려 두는 게 나을까.

로벨리움 왕국의 2 왕자가 말을 걸어오면, 충분히 꼬투리를 잡고 늘어질 수 있는 실수를 해줄 것 같은데.

그리 유페미아가 들었다면 기겁할 생각을 속으로 고민하고 있던 페르젠은, 문득 가까워지는 낯선 인기척에 상념을 접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제관이라 불리는, 브뤼테인의 혈통을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몰랐는데…… 나는 참으로 운이 좋아. 그리 생각하지 않나.”

따뜻한 색감으로 어우러진 옷을 입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특유의 차디찬 분위기를 선명히 풍기는 푸른 머리의 여인.

“……”

처음에는 누구인지 몰랐던 페르젠이었으나, 그녀의 옷에 새겨진 문양을 보는 순간 바로 알아차릴 수 있었다.

엘마르크 제국의 제 1 황녀, 아니……

여제(女帝)──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인사 대신 눈살을 찌푸리는 건 조금 실망스러운 반응인데, 나는 불청객 따위가 아닌데 말이지.”

불청객이 아니다.

그 말은, 브뤼테인의 정보력으로도 알아내지 못했으니 비공식적으로 초청을 받았다는 말이 되리라.

‘황실의 의도가 도대체 무엇이기에, 그녀를 이 자리에 불렀지.’

엘마르크 제국의 이번 세대 황손들은 무려 7명이었다.

그리고 지금 남아 있는 건, 그레모리 그녀 한 명.

죽어버린 6명 모두, 독살과 괴한의 습격 등……

나름대로 이해할 수 있는 죽음의 형태를 가지고 있었지만, 그레모리 그녀가 직접 손을 썼다는 정황 또한 어렴풋하게 남아 있었다.

그래, 그것은 일부러 남겨둔 표식 같은 증거.

제 3 황자가 살기 위해 그녀에게 찾아가 무릎을 꿇고 구두를 핥았다는 건 유명한 일화였다.

결국에는 전부다 사망하고, 그녀 혼자만이 남았지만.

그레모리 엘딘 이슈타르 엘마르크, 28세의 나이에 여인의 몸으로 오러 나이트의 극의에 오른 괴물.

루에르그의 설산을 돌파하는 과정에서 시엘 미드포드의 성장이 가속화 되리라 예상을 했던 건 그녀 때문이기도 했다.

전신에 의도적으로 동상을 입힌 뒤, 강제로 마력을 움직여 세포를 재구성하는 방식은 그녀가 사용했던 사례였으니까.

“본의 아니게 실례를 저질렀군요…… 저 또한 엘마르크 제국의 여제를 이 자리에서 보게 될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기에, 평상심이 흐트러진 걸 이해해주시길.”

“생각보다 말을 예쁘게 하는 구나. 기분이 좋아 졌어. 마음 같아서는 뒤에 아기새처럼 감춰둔 그대의 아내하고도 이야기를 나누어 보고 싶지만…… 선약이 있어서 자리를 떠야하겠군.”

조금 멀리 떨어진 곳을 가리키는 여제, 그레모리의 손길을 쫓으니 그녀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엘리자베스 황녀와 시선이 마주친다.

그에 페르젠은 간단한 목례로 인사를 건넸고, 엘리자베스 황녀 또한 치맛단을 두 손으로 살포시 붙잡아 올린 뒤 기품 있고 우아한 응대를 해왔다.

“좋은 시간되기를 바라지.”

“여제께서도, 좋은 시간되기를 바랍니다.”

유유히 등을 돌리는 그녀의 뒷모습을 잠시 눈에 담았다가, 페르젠은 자신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있는 유페미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 정도로, 연회장의 분위기가 숨이 막히나.”

“응……”

낯섦도 낯섦이지만, 이 공간에서 언제 시엘과 페르젠이 마찰을 겪을지 몰라 유페미아는 피가 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면 잠시 테라스 쪽으로 나가 있도록 하지.”

페르젠은 무덤덤하게 내뱉은 말이었으나, 유페미아는 반색을 하며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죽하면 시엘이 지켜보고 있을 거라는 생각조차 못하고, 자신의 허리를 감싸오는 페르젠의 손길을 기쁘게 받아들이겠는가.

그리 화려한 불빛 속에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연회장 내부를 벗어나 테라스로 나오니, 선선한 밤바람과 함께 적막하고 고요한 분위기가 유페미아를 반긴다.

그제야 숨통이 트이는 듯한 느낌에, 유페미아는 잔뜩 긴장하고 있던 몸의 힘을 풀고 평온해진 숨을 뱉어냈다.

“익숙해지라고 하지는 않겠다만, 너무 긴장하고 있지 않나.”

“……”

“맨 정신으로 힘들다면, 술기운을 빌려보는 것도 좋겠지.”

들고 있는 와인 잔을 반 바퀴 돌린 뒤, 자신이 입을 대었던 부근을 유페미아의 입술에 가져다대는 페르젠.

“나는, 괜찮은데……”

술기운 같은 걸 빌리고 싶지는 않았으나, 잔을 기울여주는 그의 손길에 유페미아는 어쩔 수 없이 입술을 벌려 달콤하면서도 알싸한 와인을 입안으로 조심스레 머금었다.

“콜록……!”

도수가 상당히 높은 와인이었는지, 목이 타는 듯한 느낌과 함께 얼굴이 단숨에 새빨개진다.

그에 유페미아는 손부채질을 하여 그 열기를 식히려 했지만……

“흡……!”

갑작스레 고개를 숙인 페르젠이 자신에게 키스를 건네 오자, 적잖게 당황하다 조심스레 그의 등으로 손을 뻗어 힘없이 끌어 안았다.

“흣, 으응……”

평소의 입맞춤과 다르게, 와인 특유의 향기가 진하게 퍼져나가고 있어 유페미아는 혀를 섞고 타액을 교환하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몽롱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키스만으로도, 이리 야릇해지는 기분을 느껴볼 수가 있구나.

“……”

그리 오랜 시간 이어지던 키스가 끝나고, 페르젠이 고개를 떼어내자 유페미아는 입술 주변을 손등으로 닦으며 고개를 돌렸다.

어째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하복부가 아려온다.

속옷 안쪽의 유두도, 음란하게 서있었다.

‘아니야……’

때와 장소를 분간조차 하지 못하고, 발칙하게 발정 나버린 자신의 몸을 부정하며 유페미아는 뜨거운 숨을 내쉬었다.

조금의 취기가 느껴진다.

마셨던 와인 때문이라고 하기 보다는, 그 와인이 남기고간 잔향 때문에 취해버린 느낌이었다.

“남사스럽게…… 황궁에서 뭐하는 거예요?”

깜짝!

익숙하면서도 낯선 목소리가 들려오자, 유페미아는 화들짝 놀라며 페르젠의 등 뒤로 몸을 숨겼다.

“이 사람이야 원체 뻔뻔하니 그러려니 하지만, 당신은 부끄러움이라는 걸 안다면 응하지를 말았어야죠. 한손으로 아무리 노력해봤자 박수는 쳐지지 않는데.”

테라스로 들어섰다가, 두 사람의 낯부끄러운 모습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보았던 유리엘은 삿대질을 하며 훈계를 했다.

하지만 페르젠은 그런 그녀의 모습이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젤리아의 기품 있는 드레스를 저리 천박하게 소화해내고 있는 주제에, 감히 조신함을 논한단 말인가.

알프레드라는 가문 때문에 그녀의 체면을 위하여 마주치는 사람들마다 얼마나 필사적으로 시선처리를 했을지 상상조차 가지 않았다.

“유리엘, 양심이 있으면 너는 연회가 끝날 때 까지 여기 테라스에 박혀서 나오지 말도록 해라. 사람을 괴롭히는 취미도 정말 악질적인 방식으로 하는 구나.”

“무슨…… 뜻이에요.”

“되었다. 애초에 자각이 있었다면 그리 입지도 않았겠지.”

요점이 생략된 말이었어도, 유리엘은 그간의 경험으로 페르젠이 지적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고 슬며시 자신의 가슴을 가렸다.

하지만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리는 격이라 할 수 있어 의미가 없었고, 오히려 애매하게 가려진 풍만한 가슴은 더욱 경박하게 도드라질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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