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4 054─전야
“들어가지.”
바깥 상황을 알 도리가 없는 페르젠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얼음문을 열고서 유페미아와 함께 걸음을 내딛었다.
꾸욱!
처음에는 미끄러지면 어쩌지란 생각이 뇌리에 맴돌아, 자연스레 온 몸에 힘을 주는 유페미아였으나 얼음으로 이루어진 바닥은 놀랍게도 미끄럽지가 않았다.
마력을 형질 변환 시킨 원소는, 술사의 재량에 따라 어느 정도 기본 성질을 왜곡하는 게 가능했기 때문이다.
저벅……
또각……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성당의 내부이기에, 유페미아와 페르젠의 발걸음 소리만이 고요하게 울려 퍼진다.
본디 하객이 있어야 할 자리에는, 얼음꽃들이 피어나 빈자리를 가득 메워주고 있었고.
얇은 얼음으로 표현된 특유의 스테인드 글라스는, 달빛을 머금고 내부를 몽롱하게 비추어 내렸다.
곧이어 성당의 끝.
본래라면 성모 마리아의 그림이 놓여 있어야 할 자리였지만, 오복신──그 중에서도 사랑을 관장하는 신의 문양이 얼음으로 조각 되어 유페미아와 페르젠을 반겼다.
“나는, 어차피 올 사람이 없지만…… 당신이 이런, 아무 하객도 존재하지 않는 결혼식을 거행 할 줄은…… 몰랐어.”
조금은 감성적이게 되어, 유페미아가 길게 말을 했으나 페르젠은 앞머리를 쓸어 올리며 무덤덤하게 입을 열었다.
“사람이 북적 거리는 걸 원체 반기지를 않으니까. 그리고…… 너는 올 사람이 없는 게 아니라, 오지 않았으면 하는 사람이 있는 게 아니던가.”
“…………”
처음에는 무슨 소리인가 했다.
제대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사랑을 관장하는 신의 문양을 올곧게 바라보고 있던 페르젠이 고개를 돌려 자신과 시선을 마주하자, 유페미아는 일순간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아니, 소름이 돋다 못해……
무섭고, 두려웠다.
이 사람은, 이 남자는……
알고 있는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 모른 체를 해온 것이었다.
“아………”
티를 내고 싶지 않은데.
온 몸이 사시나무처럼 떨려온다.
페르젠이 의도적으로 돌려 말하지 않았다면, 유페미아는 틀림없이 이 자리에서 실금까지 해버렸으리라.
“결혼식은, 두 사람의 관계를 참석한 하객들에게 사회적으로 공인하는 자리지. 그런 점에서 내가 이런 결혼식을 치루는 건…… 해당 관계를 올바르게 인지했으면 하는 게 너 하나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
고요한 성당 안에서, 페르젠은 떨고 있는 유페미아의 뺨을 부드럽게 쓸어내리며 말을 이었다.
“사회자도, 주례자도 없으니…… 예식 절차에 따라 혼인서약문을 읊고 이 결혼식을 마치도록 하지.”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은 유페미아를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오른손을 들어 올렸다.
“나,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은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를 아내로 맞이하여 그의 남편이 될 것임을 맹세합니다.”
유페미아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페르젠은 얌전히 기다려 주었다.
시간이 걸리더라도, 그녀가 응할 수밖에 없음을 알고 있었기에.
“나……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는……”
그리고 페르젠의 예상대로, 유페미아는 침묵을 깨트리며 절망과 좌절이 깊게 스며든 구슬픈 음색으로 입을 열었다.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을…… 남편으로 맞이하여, 그의 아내가…… 될 것임을 맹세합니다……”
바보가 아니기에, 유페미아도 눈치를 챘다.
페르젠이 돌려서 말한 이유가 무언지.
나아가, 이 결혼식이 가지는 의미가 무언지.
그는……
목줄을 채우기 보다는, 스스로가 차기를 바라고 있는 것이다.
유페미아 본인은 시엘 미드포드를 위하기에, 오히려 그와 엮일 생각이 없었지만.
페르젠은 그러한 자신의 속마음을 몰랐고, 또 말해준다고 한들 믿을 수가 없으리라.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엘 미드포드를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은 건, 확실한 성의를 보여준다면……
지금처럼 모르는 척, 시엘 미드포드를 해치지 않을 거라는 의미.
때문에, 유페미아는 페르젠에게 턴을 넘기지 않고.
“또…… 언제나, 그를 존중하겠습니다.”
거대한 성당 안에서, 홀로 말을 이었다.
“또…… 부부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또…… 그의 슬픔과 기쁨을, 공유하겠습니다.”
“또…… 영원히, 그의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이에……
“나,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는…… 한 치의 거짓도 없음을…… 이 자리에서, 서약합니다……”
유페미아의 오른손이 내려간다.
그에 페르젠은, 짧게 응답했다.
“나, 페르젠 폰 슈바이크 브뤼테인은…… 유페미아 엘 로렌느 루에르그가 서약한 사계(四誡)를 어기지 않는 한 그녀를 슬프게 하지 않겠습니다.”
유페미아와 다르게, 페르젠의 마지막 말에는 서약이라는 단어가 뒷받침 되지 않았다.
그것은, 가변성을 머금고 있다는 증거.
예식 절차에서 있을 수 없는, 불공평이다.
그래, 그래서……
이것은 결혼식 따위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저, 이 세상에서 가장 호화로운 주종 의식.
“……돌아가지.”
페르젠이 오른손을 내린다.
“……응.”
유페미아는 고개를 끄덕였다.
곧이어 얼음으로 이루어진 대성당이, 본래의 마력으로 화해 푸른 연기처럼 휘날리며 마치 신기루였다는 듯 자취를 감추어 나갔다.
“……”
그리 침실로 돌아온 유페미아는, 옷을 갈아입고 있는 페르젠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말했던 바를 지키는 한, 페르젠 또한 자신이 내뱉었던 말을 지켜 줄 거라 생각한다.
그래, 지켜는 줄 거라고는 생각한다.
하지만……
자신이 모르게끔, 시엘을 죽인 다면.
나아가, 시엘 쪽에서 적의를 드러내 온다면.
‘……’
이제는, 페르젠이 아니라.
오히려, 유페미아가 확신을 받고 싶어 했다.
그리고 그 수단이, 무언지 유페미아는 잘 알고 있었다.
“……하고 싶어.”
“……”
유페미아의 목소리에, 넥타이를 풀어내던 페르젠의 손이 멈췄다.
“당신 하고…… 섹스, 하고 싶어.”
오늘은 가임기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페미아는 먼저 입을 열었다.
임신을 하게 된다면, 페르젠도 괜히 날을 세우지 않을 테고.
그것에 유페미아 자신도, 안도를 느낄 수 있게 되리라.
시엘 또한, 배가 불러온 자신을 보게 되면 단념하겠지.
그걸로……
모든 게 괜찮아 지는 것이다.
어차피 언젠가는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될 수밖에 없는 운명.
최대한 그것만큼은 미루어 보려고 발악 아닌 발악을 해왔던 유페미아였으나, 깔끔하게 포기하기로 했다.
“……”
하지만, 페르젠은 무심하게 자신을 바라보더니 넥타이를 마저 풀어나갔다.
그래, 자신이 이런 식으로 말해봤자.
그는 일말의 성욕도 품지 않겠지.
스륵……
때문에, 유페미아는 스스로 팬티를 벗어 내리고.
입고 있는 웨딩 드레스의 치맛단을 붙잡아, 허리까지 끌어 올린 뒤 침대 위에 개처럼 엎드렸다.
그리고는 젖지도 않은 자신의 음부를 스스로 벌리며, 페르젠을 유혹하듯 입을 열었다.
“당신, 아이를 가지고 싶어…… 그러니까, 당신의 씨를…… 받게 해주세요……”
“……”
다시 한 번, 페르젠의 손이 멈춘다.
어둠이 자욱이 내려 앉아 있지만, 유난히 밝은 달빛이 창문으로 들어오고 있어 유페미아가 스스로 벌리고 있는 음부뿐만이 아니라 그 위쪽의 항문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중이었다.
치욕적이기 그지 없는 자세.
하지만 유페미아는 끝끝내 허리를 내리지 않았다.
“아……”
그에 곁으로 다가온 페르젠이, 유페미아의 새하얀 엉덩이를 쓰다듬으며 말했다.
“말하는 바를, 착실히 지키는 구나.”
“부부, 로서의 의무에…… 최선을 다하겠다고, 서약했으니까……”
유페미아의 그 말은, 당신 또한 말했던 바를 반드시 지켜 달라는 간절한 애원으로 볼 수도 있었다.
“……”
물론, 페르젠은 어길 생각은 없었다.
하지만 5월 7일의 연회에서, 시엘 미드포드는 자리가 마련되는 순간 틀림없이 검을 겨눌 것이다.
그리 설계되어 있는, 비틀 수 없는 운명이니까.
명분이 마련되어진 상태에서 시엘 미드포드가 사망하는 건, 유페미아도 어쩔 도리가 없다는 걸 알 테지.
사실, 시엘 미드포드의 죽음을 확정 지을 수만 있다면……
굳이, 이러지 않아도 되었다.
최선을, 전심전력을 다하겠지만……
과연, 정말로 종지부를 찍을 수 있을까.
그러한 두려움이 있었기에, 페르젠은 작금의 상황을 이용하여 유페미아를 완전히 복종시킨 것이다.
최선을 얻지 못할 때를 대비해, 미리 차선을 챙겨두는 건 합리적인 선택이었으니까.
찌걱……
유페미아의 음부가 서서히 젖어든다.
본래는 전희를 더하는 편이었으나, 페르젠은 그러지 않고.
“아윽!”
곧장 질내를 파고들었다.
유페미아도 오히려 이러기를 바랐다는 듯, 깊숙이 페르젠의 성기를 받아들이며 교접부를 밀착했다.
“흐, 아앙!”
심지어 쾌락에 물들지도 않았는데, 빠져 나가려는 성기를 놓아 주지 않으려고 스스로 질을 꽈악! 조이는 교태까지 부려댔다.
그럴 때 마다, 수줍게 다물린 항문이 음란하게 뻐끔거렸지만……
유페미아는 개의치 않고, 그러한 자신의 천박함조차 페르젠 앞에서 적나라하게 선보였다.
그리, 울음인지.
아니면, 교성인지 알지 못할.
서글프고 야릇한 신음이, 4월의 마지막 밤을 장식해나갔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늦어서 죄송합니다!
그리고 전야 파트가 늘어나서 죄송합니다!
본래는 다음 에피소드인 시엘 미드포드를 한편 작성하려 했으나
쓰다 보니 분량이 9800자 까지 늘어났습니다!
원래는 줄곧 지켜보셔서 알겠지만 제가 7000 ~ 8000자 까지는 그냥 한편에 올립니다!
하지만 9800자는 한편으로 압축하기 아쉬워! 솔직히 말하자면…… 돈 때문에 이건 두편으로 쪼개어 올렸습니다!
9800자를 한편으로 올리기에는 아쉬웠어요. 죄송합니다!
그리고 52 ~ 53의 전야 파트는 전체적으로 심리 묘사가 중심입니다!
죄송합니다!
스토리 나가야 하는 거 알고 있는데 어쩔 수가 없었어요. 해야만 했어요.
원래는 5000~6000자 이내에 수습 가능한 감정선일거라 믿었는데 쓰다보니 아니더군요.
주인공의 심리 서술에도 모순이 생기면 안되어서……
지루하셔도 할말이 없습니다.
그래도 다음 에피 소드, 시엘 미드포드와.
해당 에피 소드에서 연결 되는 2 ~ 3개의 에피 소드는.
제가 히강악을 쓰면서 반드시 쓰고 싶었던 에피 소드들이라……
아마 독자님들도 만족하실 거예요!
가슴이 웅장해지고, 거기도 웅장해지실거라…… 믿어 의심치 않습니다.
여담이지만 히강악의 몇몇 히로인들은 a, b 단계가 나누어져 있습니다.
유페미아는 a 단계가 다음 에피소드에서 스토리가 진행 됨에 따라 자연히 기승전결에서 결을 맞이하게 됩니다!
* * * * *
또 한번 죄송합니다……!
서사 진행이 느리다는 걸 알고 있지만……
그치만…… 해야만 하는 심리 묘사 였는 걸.
어라? 미안할거 없다구?
그러면 다들 나를 좋아해주는 게 분명해……
그 사랑을 추천으로 확신시켜줘……
* * * * *
안내사항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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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후원자에 대한 감사 편지는 최신화를 기준으로 1시간 이내에 갱신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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