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히로인을 강탈한 악당이 되었다-53화 (53/260)

EP.53 053─전야

4월 30일──어느 새, 4월의 마지막이 찾아왔다.

내일 부터는 깔끔히 수복된 아카데미가 정상적으로 운영되기에 처음으로 유페미아와 함께 출근을 하게 되리라.

때문에 그에 앞서, 4월 12일까지 제출 마감이었던 과제들의 종합적인 평가를 마지막으로 검토 하고 있었다.

‘의외로, 다들 열심히 하기는 했군.’

아카데미를 단순히 사교계의 연장선으로 여기는 자가 있는가 하면, 진심으로 본인의 미래를 위해 아카데미의 성적에 신경을 쓰는 이들도 많았다.

기본적으로 가주의 자리를 계승 받지 못하는 자는, 대부분 본인 살길을 알아서 찾아야 했으니까.

사이가 원만하다면 모르겠으나, 일반적으로는 그렇지 않았다.

그래서 황실의 시녀, 또는 관료, 나아가 마력을 품고 있다면 마도 병단이나 기사단에 들어가기 위해 노력을 하고 있는 것이다.

‘누락되거나, 실수한 부분은 없다.’

평민을 기준으로, 일반적인 사람이라면 성별의 차이에 따라 살면서 한번쯤은 반드시 겪어 보는 경험들을 알아 오라고는 했으나……

당연히 그리 되면, 겹치는 부분이 존재하기에 점수를 매길 때 중점으로 둔 사안은 교집합이 얼마나 적은가였다.

채점 우선순위가 그러했기에, 제일 우수한 점수를 받은 건 업종까지 세분화 시켜 과제를 제출한 5명이었고.

그 중에서도 자연스레 내 눈에 띄는 건……

‘리지, 라우라……’

두 사람은 마치 경쟁이라도 하듯, 입수한 정보를 다른 학생들보다 빼곡히 늘여 놓았다.

단순히 양을 부풀리기 위한 더미 같은 게 아니라, 읽어 보면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구나 싶을 것들 만으로만.

똑똑.

“들어오지.”

집무실 바깥에서 들려오는 정적을 깨트리는 노크 소리.

나는 고개를 들어 올린 뒤, 해당 시녀를 안으로 들였다.

“주인님, 황실에서 서신이 도착했습니다.”

“주고 나가 보도록. 아…… 그리고 마차를 대기시켜 놓아라.”

“알겠습니다.”

꾸벅, 허리를 숙이고 시녀가 나가자 나는 황실의 인장이 찍혀있는 서신을 뜯어 읽어 보았다.

내용은 예상했던 대로, 5월 7일에 열리는 연회에 나를 초청하고 싶다는 말이 형식적인 겉치레로 포장되어 있었다.

‘생각해보면……’

지금 시점에서 유페미아가 임신을 하지 않은 게, 오히려 다행일지도 모른다.

시엘 미드포드의 죽음으로 인한 충격이, 유산을 불러올 가능성도 없는 건 아니었으니까.

‘이번 황실의 연회는……’

틀림없는 종지부가 되어야 하리라.

나에게 있어서도.

유페미아에게 있어서도.

그리 생각을 마치고, 몸을 일으켜 집무실을 나왔다.

“나갔다 오마.”

“네. 다녀오십시오.”

연회에 입고 갈 드레스는 시간이 조금 걸리더라도, 웨딩 드레스는 베이스를 잡아둔 틀이 여러 개 존재했기에 그것에 살을 붙여 나가는 식이라 하여 이틀이면 충분하다고 마담이 말을 했었다.

그래서 이틀이 지난 오늘, 그것을 받으러 가기 위해 나는 마차에 올라타 아젤리아로 나아갔다.

“……”

이서진도, 페르젠도.

결혼식을 올린 경험은 한 번도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주는 설레임 같은 건 일말도 존재하지 않아 무척이나 낯설었다.

정말이지……

쓸데없이 차갑고, 냉정한 몸뚱이다.

* * * * *

“으음……”

옅은 침음을 흘리며,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건네주었던 학생들의 기본적인 인적 사항을 외우고 있었다.

언제나 지루하고 무료하게만 돌아가던 하루였는데, 그 일과에 해야 할 것이 생기니 유페미아는 나름대로 당찬 의욕을 선보였다.

‘14명밖에 없어서 그런지, 어렵지는 않네……’

이름은 진작 외운 상태였고, 그 학생의 가문에 관한 정보를 뇌리에 되새기던 유페미아는 문득……

‘그것도, 가지고 갈까.’

침실의 책상, 그 옆에 놓여 있는 자그마한 서랍 안에서 한 때 페르젠이 자신에게 내주었던 문제가 담겨 있는 종이를 꺼내든다.

끝끝내 풀지 못하고, 미궁으로 잠겨든 2번과 3번의 문제.

풀어내기만 하면 보상을 주겠다고 했던 약속에는 마땅한 기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니 그곳의 교수들이나, 학생들과 조금씩 친해지고 나면 살포시 이 문제를 보여주고 도움을 받으면 되지 않을까.

해답을 얻는데 성공하면, 그 대가로 자그마한 가게를 차려달라고 하는 것이다.

이후, 조교로 일을 하며 얻는 돈으로 인테리어를 가꾸면 필요한 것이 있을 때 페르젠에게 손을 벌리지 않아도 되겠지.

시작은 카페로 하는 게 나을까?

처음은 미비할지라도, 차차 키워나가다 보면 다과회를 가지는 명소 같은 걸로 자리 잡을지도 모른다.

1층은 여전히 누구나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장소로 제한하고, 돈을 모아 2층과 3층을 늘려나간뒤 입장에 제한을 두는 것이다.

귀족들이란 본디 그런 차별적 요소를 좋아하니까.

자신들의 발밑에 평민들이 깔려 있고, 그 위에서 나름 품위 있고 격식 있다고 생각되는 이야기를 나누며 군림하는 상황은 오만한 자존감을 틀림없이 만족시켜 주리라.

“……”

그리 피워나가던 상상의 나래를 접고, 유페미아는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이 또한 주어진 상황, 페르젠이 만들어둔 상자 안에서 움직이는 것에 지나지 않지만 적어도 그 상자가 타인의 눈에 불행하게 보이지 않도록 꾸며내고 싶었다.

사실, 이미 타인의 시선에는 자신이 갇혀 있는 상자가 아름다운 성처럼 행복하게 보인다는 걸 알고 있지만……

‘시엘……’

오직 한 사람에게는, 그러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괜스레 그가 자신에게 얽매이지 않도록.

죄책감 같은 걸 품고 살아가지 않도록……

“무슨 생각을 그리 하고 있나.”

“……!”

깜짝!

유페미아는 어깨를 떨었다.

언제 들어온 걸까.

문을 여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는데, 어느 새 자신의 뒤에 서서 허리 쪽으로 손을 뻗는 그가 품안으로 부드럽게 끌어당긴다.

“그냥…… 아무 생각이나, 하고 있었어……”

말을 더듬지 않고, 침착하게 대답을 하며 유페미아는 자신의 몸을 야릇하게 만지는 페르젠의 손길을 얌전히 받아들였다.

정신은 아직 이 손길에 대한 일말의 저항감을 표시하는데, 길들여진 몸은 꼬리치는 강아지처럼 편안함을 느낀다.

그러다 손속이 거칠어지면,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고 비굴하기 그지 없는 복종의 자세를 취하게 되겠지.

삐걱……

침대로 걸음을 옮기는 그가, 자신을 품안에 반듯하게 눕힌다.

질리지도…… 않는 걸까?

매번 이런 식으로 더듬거리고 만지작거리지 않아도, 길들여질 대로 길들여진 몸은 이미 어떤 식으로 반응을 해야 하는지 선명히 기억을 하고 있는데.

“아, 저…… 해, 해가 떠있어……”

평소와 다르게, 느슨하게 풀려진 옷섶 안으로 두 손을 집어넣는 그가 자신의 가슴을 부드럽게 움켜쥐고 주물럭거린다.

원래는 이러지를 않았기에, 슬며시 페르젠의 팔뚝을 붙잡아 보려 했던 유페미아였으나 금세 포기했다.

그것은 목줄이 차여진 채로 이동할 수 있는 거리를 넘어섰다는 걸, 본능적으로 알아차렸기에.

목줄이 팽팽히 당겨지는 순간, 불쾌함을 느낀 페르젠은 그것을 세차게 잡아 당겨 자신을 다시금 교육 시키리라.

“기특하게도, 배우는 게 빨라졌구나.”

비웃듯 속삭이는 그의 한 마디가, 얼마 남지도 않은 자존감을 자비 없이 할퀴어버리지만……

“응……”

유페미아로서는, 긍정할 수밖에 없었다.

“아, 으응……”

그리 한 동안, 그의 장난감──소리를 내는 인형이 되어 놀아나던 유페미아는…… 유난히 별이 아름답게 쏟아지는 밤을 맞이했다.

* * * * *

“여기는, 왜……”

저녁 식사를 마치고, 목욕을 끝낸 유페미아는 침실로 돌아가려 했으나 자신을 드레스 룸으로 이끄는 시녀들의 손길에 그러지 못했다.

“아……”

하지만 거기서, 마네킹에 입혀져 있는 아름다운 웨딩 드레스를 발견하고는 잠시 넋이 나갔다.

신들을 보좌하는, 천사라는 존재들이 입는 옷이 저러 할까.

“갈아입도록 하지요.”

“제가요……?”

“마님을 위한 옷이니, 마님이 아니면 누가 입겠어요.”

“……”

입을 다물고, 가만히 서있는 자신에게 다가온 시녀들이 입고 있는 옷을 천천히 벗긴 뒤 웨딩 드레스를 입혀준다.

그리고는 거울 앞에 자신을 앉힌 뒤, 그 어느 때보다 정성스러운 손길로 가꾸어주기 시작했다.

그것은 마치 마법 같아, 시시각각 변해가는 자신의 모습을 거울 너머로 지켜보며 유페미아는 낯설음까지 느꼈다.

이후, 홀의 계단을 내려와 저택의 화단으로 나오니……

이른 밤에 어울리지 않게, 단정한 정장 차림으로 서있는 페르젠이 자신에게 손을 내밀었다.

“도대체, 무슨…… 생각이야?”

“생략했던 결혼식을, 이제 와서 이어 할 뿐이지.”

“……”

그러니까 이제 와서 왜 그러는 거냐고.

유페미아는 던지고 싶은 질문이 많았으나, 여전히 내밀어져 있는 페르젠의 손을 쳐다보고는 그것을 힘없이 마주 잡았다.

당시 클로디아 가문과, 알프레드 가문의 결혼식이 부럽지는 않다고 말을 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이대로…… 대성당까지 걸어가려고?”

마차도 준비되어 있지 않은 모습을 보고, 유페미아는 떨떠름함을 머금었지만 페르젠은 무심하게 고개를 저었다.

“대성당은 설령 귀족이라 하더라도, 미리 예약이 잡혀져 있다면 그것을 취소시키고 마음대로 대관할 수가 없다. 신은 인간에게, 인간은 신에게 각자가 가진 권력이 영향을 끼치지 않는다는 것을 모토로 삼고 있기 때문이지.”

어느 신을 믿고 따르는 지는 자유이나, 그런 이들이 모여 종교를 발의하는 순간 신분과 직업을 막론하고 반란죄로 처형당한다.

“그러면, 여기서……”

“그래. 걱정하지마라. 초라하게 하지는 않을 테니까.”

미리 뇌리에 외워두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혹시나 하여 페르젠은 품안에서 도면을 꺼내들었다.

그리고는 사역하고 있는 이사벨의 시신을 화단의 중앙으로 내세운 뒤, 전력으로 마력을 소진했다.

마법이란, 반드시 살상적인 용도로만 쓰이는 게 아니었다.

특히, 마력을 얼음으로 형질 변환 시킬 수 있는 원소 마법사들은 이따금 대금을 받고 건물의 도면을 주축 삼아 미리 완공된 형태를 보여주기도 한다.

쩌저적!

대기 중의 수분을 얼리는 방식이 아니라, 마력을 얼음으로 형질 변환하는 것이 이 세계의 마법이기에……

퍼져나가는 수많은 서리들이, 담장을 타고 오르는 넝쿨처럼.

서로를 옭아매는 정성스런 뜨개질을 통해, 무(無)에서 유(有)를 창조해나가기 시작했다.

“……”

마법이라는 지식에 문외한 유페미아라도, 눈앞의 이 몽롱하고 황홀한 광경이 얼마나 대단한지는 어렴풋하게 감이 잡혀왔다.

심지어 저택의 거대한 화단, 그 전체를 어우르는 범위였기에 밖에서는 지나가던 사람들조차 걸음을 멈춰 세우고 그 광경을 조용히 감상하기 시작했다.

‘조금 더……’

외관의 구현에만 신경을 썼다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문제는 내관의 구현이었기에 페르젠은 최대한 집중했다.

모방하려는 것은 성이 아닌 성당.

물론, 그 성당 또한 수도에 자리 잡고 있는 대성당이 아니다.

정확히는 이서진의 기억, 그곳에 자리 잡고 있는.

성모 마리아의 형상이 나타나 기적을 행함으로써 성지가 되었다고 불리어지는, 라스 라하스 성당(Las Lajas Sanctuary).

직접 실물로 본 게 아닌, 사진을 통한 경관만이 뇌리에 남아 있어 도면으로 옮기는 작업이 쉽지는 않을 거라 생각했으나 특정 분야의 전문가는 괜히 전문가가 아니었다.

쩌적──!

이내 오랜 시간 뜨개질을 이어 나가던 서리들이 멈추어 서자, 눈앞에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화려하고 웅장한 성당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 외관은, 마치 사포질을 하지 않은 목재의 표면처럼 무수한 눈꽃송이들이 달라붙어 있었다.

갑작스런 차디찬 냉기의 형성에, 대기 중의 수분이 미세하게 얼어서 달라붙은 결과.

때문에 페르젠은 이사벨을 통해, 대기 중에 간섭하여 제법 거친 바람을 일으켜 그것들을 모두 날려버렸다.

파──앗!

그러자 얼음 결정들이 뭉쳐 이루어진 눈꽃송이들이, 불어오는 바람에 날려 지상으로 떨어져 내리기 시작했다.

오늘은 유난히 달빛이 밝았기에, 그 얼음 결정들은 마치 별이 쏟아져 내리는 듯한 광경을 자아냈고.

“예쁘다……”

저택의 밖에서, 엄마의 손을 잡고 그것을 바라보던 아이는 닿지 않을 보석을 향해 자그마한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거의 탈피를 하듯 눈꽃송이들을 모두 떨쳐내고 본연의 모습을 드러낸……

은은한 푸른색을 자아내는 얼음으로 이루어진 웅장한 성당의 모습에, 아이는 자신도 모르게 두 손을 꼬옥 모으고서는 기도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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