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52 052─전야
“여기는……”
쏟아지던 비가 그치고, 특유의 흙내음이 날리는 이른 아침.
페르젠은 자신을 마차에 태운 뒤, 어딘가로 조용히 향했다.
그 끝에 마차에서 내리니, 아젤리아라고 적혀 있는 고풍스런 옷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입구부터 마네킹에 입혀 놓은 드레스들은 절로 감탄이 나오게 만들 만큼 아름다웠고, 안으로 들어서니 비싸 보이는 옷단들이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렬되어 있었다.
변방의 루에르그에만 박혀있던 유페미아도, 아젤리아에 소속된 재단사들의 명성과 실력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보았다.
“지금, 있는 옷들만으로도 충분한데……”
“……”
옆에 서있는 페르젠의 옷자락을 조심스레 잡아당기며 말을 해보았지만, 아무런 대답도 들려오지 않는다.
그에 유페미아는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그가 옷 입히기 놀이를 하고 싶다면……
인형인 자신은 거기에 얌전히 어울려줄 수밖에 없으리라.
“어머…… 브뤼테인, 아니 이제는 루에르그 백작이시죠?”
“오랜만이군, 마담.”
“무슨 일로 오셨나요?”
“아젤리아에 들릴 이유가 하나 밖에 더 있겠나. 내 아내가 입을 드레스에 관해서 상의를 조금 하고 싶은데.”
“그러면 부인께서는 안쪽으로 치수를 재러 가도록 하실까요? 전체적인 상담은 그 이후에……”
“그 상담은 나와 하면 된다.”
“으음……”
페르젠의 말에 잠시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젤리아의 마담이 묘하게 흐르는 기류를 눈치 챘지만, 곧이어 싱긋 웃더니 유페미아를 휘하의 직원에게 맡긴 뒤 페르젠과 함께 테이블에 앉았다.
“원하는 주제 같은 게 있으신가요?”
“내가 요청할 건 두 가지다. 하나는 그녀를 가장 돋보이게 하면서도 너무 지나치다 싶지 않은 드레스이고, 둘은……”
오래 이어지는 페르젠의 말을 귀담아 듣다……
‘응?’
아젤리아의 마담은 그 안에 담겨 있는 모순을 눈치 챘다.
‘두 사람은 이미 결혼을 했을 텐데……’
어째서 웨딩 드레스의 주문 요청을 하는 걸까?
의아하기는 했지만, 마담은 겉으로 티를 내지 않고 접대 미소를 지으며 정성스레 페르젠을 응대했다.
아젤리아는 타인의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 아니었으니까.
* * * * *
이른 아침부터 이루어졌던 짧은 외출이 끝나고, 저택으로 돌아온 유페미아는 침실에 앉아 끌어 모은 무릎에 두 손을 얹히고 턱을 괴었다.
“……”
의미 없는 하루의 반복이 벌써 3개월.
아카데미의 출근조차 미루어졌기에, 하루 일상에서 가장 의미 있는 행동을 꼽아보라 한다면……
유페미아는 수면 외에, 고를 수 있는 선택지가 없었다.
웃긴 건, 이제는 고통스럽지도 않았다.
오히려 무덤덤하기만 했다.
말 그대로, 학습된 무기력.
식사를 하고, 목욕을 하고, 잠을 자고, 이따금 다리를 벌린 채 씨를 받기만 하는 생활의 반복이……
서서히 삶의 이정표로 자리 잡고 있는 것이다.
벌컥!
“……”
문이 열린다.
저택으로 내원한 의원에게서 드디어 완치를 진단 받고, 두 팔의 깁스를 성공적으로 풀어낸 페르젠.
끼익……
곧이어 그간 사용하지 못해 뻐근해진 팔의 근육을 풀어주다, 자신의 곁으로 다가오더니 자연스레 품안으로 끌어안는다.
언제나 무섭고, 불편하기만 했던 이 품속도……
이제는 따스함과 편안함 밖에 느껴지지 않았다.
“아……”
페르젠 특유의 커다란 손이 가슴과 옆구리를 타고 부드럽게 내려가더니 자신의 아랫배에 얹혀져, 톡톡 두드린다.
무기력을 학습하는 3개월의 시간 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기에 유페미아는 페르젠이 굳이 말로 하지 않아도……
이 모종의 신호를 해석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이것만큼은 도통 익숙해지지가 않는다.
스스로 치맛단을 붙잡아 가슴 부근 아래까지 끌어 올린 뒤, 입고 있는 속옷과 몸의 반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건……
여전히 수치스럽고, 부끄러웠다.
차라리 페르젠이 직접 그리 해주면 어쩔 수 없다는 자기위안이라도 삼을 수 있으나, 스스로 해야 한다는 점에서 부각 되는 복종심이 매번 자괴감을 들게 만들었다.
‘남자는, 보통…… 가슴에 집착을 하지 않나……’
문득 떠오르는 생각에, 유페미아는 고개를 저으며 치맛단을 붙잡아 들치어 올렸다.
그가 자신의 아랫배가 아니라, 가슴에 집착을 했다면 자연스레 고개를 치켜드는 유두를 붙잡고 끝없는 희롱을 할 것 같았기에.
유페미아는 오히려, 그것이 더욱……
“아흑!”
이어지던 생각이 끊어지고, 유페미아는 아픔의 신음을 토해내며 페르젠의 가슴팍에 애처롭게 얼굴을 비볐다.
두 손은 치맛단을 붙들고 있으니, 작금의 상황에서 유페미아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아양이리라.
“너는, 언제쯤 내 아이를 가질 수 있을까.”
“아, 아파……”
화풀이라도 하듯, 자신의 자궁 부근 위쪽을 꾸욱꾸욱 누르는 페르젠의 손길에 유페미아는 울먹이며 말했다.
가임기에 관계를 가져도, 그 확률은 일반적으로 20%.
부부 모두가 아무런 이상이 없어도, 평균적으로 6개월은 걸린다.
첫날밤에 바로 아이를 가지는 경우도 있기는 하나, 예외는 어디까지나 예외였고 평균적인 통계는 그러했다.
하지만 페르젠은, 유페미아에게 임신에 도움이 되는 음식들을 꾸준히 먹여왔고 해당 기간 동안은 1 ~ 2회가 아니라 수차례 질내 사정을 했음에도 결과가 이러하니……
불안 섞인 짜증이 치밀었다.
유페미아는 소설의 메인 히로인이었으니, 그녀가 불임일 가능성은 없겠지만 반대로 악역인 페르젠이라면?
장르를 갑자기 NTR로 틀어버리는 대신, 나름대로 최후의 안전장치라고 그런 설정을 때려 박았을 가능성도 없지는 않으리라.
“다, 당신한테…… 무, 문제가 있는 걸 수도 있잖아……”
임신이라는 게 간단히 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그로 인한 스트레스를 자신에게 풀어내자 유페미아는 이슬 같은 눈물을 머금고 페르젠에게 말했다.
“……”
그에 페르젠은 반사적으로 눈살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고려하고 있는 불안한 가능성이었는데, 그것을 입 밖으로 겁도 없이 꺼내는 건……
매를 버는 건지, 간이 큰 건지.
“아……”
원치 않은 임신이었고, 심지어 그것에 대한 책임 전가를 오직 자신에게만 하자 억울한 마음에 내뱉은 말이었는데.
분위기가 점점 얼음장처럼 차가워지자, 유페미아는 지레 겁을 먹고 온 몸을 파르르 떨며 내뱉은 말을 주워 담으려 애썼다.
“아, 아니야…… 미, 미안해……”
“……”
“다, 당신 씨를 받아…… 품지 못한…… 내가, 잘못했어요……”
“……”
최대한 비굴하고 비참하게 기어보았으나, 페르젠은 여전히 묵묵부답을 고수할 뿐이었다.
그에 유페미아는 떨리는 손을 뻗어, 스스로 페르젠의 팔을 붙잡고 자신의 배를 꾸욱꾸욱 눌렀다.
“앗! 흐윽……!”
괜히 더한 벌과 괴롭힘을 받기 전에, 자진해서 나서는 모습.
“……되었다.”
극도로 불쾌해지기는 했으나, 유페미아가 스스로 이렇게 까지 하자 페르젠은 느꼈던 불쾌함이 말끔히 해소되는 기분이 들었다.
주어진 상황에서 따로 명령을 내리지 않아도, 강아지가 자연스레 그 명령을 시행하면 주인은 이런 기쁨을 느낄까……
유페미아의 눈가에 고인 눈물을 스윽 닦아주며, 페르젠은 손을 치워내고 유페미아의 치마를 무릎까지 바르게 내려주었다.
“내가 욕심을 낸 거겠지. 어차피 시간이 해결해줄 일일 텐데. 앞으로도 지금처럼 꾸준히 노력을 하면 되지 않겠나.”
고개를 숙인 페르젠이 유페미아의 눈가에 부드럽게 키스를 한다.
그에 유페미아는 두 손을 가슴 부근에 살포시 모은 채, 페르젠이 건네주는 상냥함을 조금이라도 더 오래 붙들기 위해 고개를 느릿하게 끄덕이며 대답했다.
“나, 나도…… 노, 노력 할게요……”
“하……”
페르젠이 실소를 뱉으며 입 꼬리를 슬쩍 말아 올린다.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하기는.”
“저, 정말인데……”
“그러면 가임기가 아닐 때도, 몸을 섞어 보도록 할까.”
“……”
“거봐라.”
말이 없어진 유페미아를 내려다보며, 페르젠은 그녀의 귓불을 살짝 깨물었다.
“으응……!”
“계속 말하지 않았나. 네 연기와 거짓말은 어설프다고. 앞으로는 말을 할 때 그 점을 명심하도록 하지.”
“아, 흐윽……”
훈육을 가장한 희롱이 야릇하게 이어진다.
똑똑.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밖에서 들려오는 노크소리에, 페르젠은 고개를 들어 올린 뒤 시녀들에게 안으로 들어올 것을 허락했다.
“실례, 하겠습니다……”
아래로 시선을 고정한 시녀들이 조심스레 걸음을 내딛는다.
유페미아가 스스로 치맛자락을 들치어 올린 채 혼나던 순간을 기억하고 있었기에, 이번에도 그러하다면 조금이라도 수치심을 들어주고자 했던 행동이었지만……
다행이, 그 때의 일이 되풀이 되고 있지는 않았다.
“여기, 말씀하셨던……“
“올려 두고 가도록.”
짧고 무심하게 이어지는 한마디를 따라, 시녀들은 침대 옆의 자그마한 서랍 위로 은쟁반을 내려놓았다.
이후, 문이 닫히며 시녀들이 나가자 페르젠은 은쟁반 위에 놓인 제법 익숙한 디저트를 유페미아의 눈앞에 들어 보였다.
“무언지 알고 있나?”
“몰, 라……”
페르젠의 품에 안겨, 시녀들의 시선을 외면하고 있던 유페미아는 건네 오는 질문에 힐끔 해당 디저트를 보고서 고개를 저었다.
“뤼베라고 하더군.”
이서진의 기억 때문에 페르젠으로써도 좀처럼 입에 달라붙지 않은 이름이었지만, 어찌되었든 뤼베란 이 세계의 요거트였다.
그것도 최근 들어, 수도에 유행을 타기 시작한.
“한 번 먹어보지.”
“……”
페르젠이 직접 뤼베를 한 숟가락 떠서 자신의 입술 앞으로 가져오자, 유페미아는 마지못해 그것을 받아먹었다.
“으, 으음……”
딸기 과즙이 첨가 되어 있었기에, 설탕과 어우러진 달달한 내음은 유페미아의 입안으로 가득 퍼져나갔다.
꿀꺽……
이윽고 그것을 삼킨 유페미아는, 자신도 모르게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발견한 사람처럼 입맛을 다셨다.
기본적으로 설탕이라는 재료부터가, 변방인 루에르그에서는 부리기 어려운 사치였으니까.
그리고 그런 유페미아의 반응을 확인한 페르젠은, 멈췄던 손을 움직여 자신 몫의 뤼베까지 유페미아에게 떠먹여주었다.
“아……”
잠시 뒤, 페르젠의 손이 멈추며 수저가 깔끔히 비워진 잔에 덩그러니 놓이자 유페미아는 옅은 아쉬움을 머금었다.
하지만 곧이어, 자신이 페르젠 몫의 뤼베까지 전부 먹은 것을 깨닫고는 염치가 없어져 얼굴이 살짝 붉어진다.
“맛있었나.”
“응……”
기어들어가는 듯한 작은 목소리.
“미, 안……”
“사과할 건 없다. 단 것은 그리 좋아하지 않으니까.”
개의치 않는다는 듯, 페르젠이 손을 뻗어 유페미아의 턱을 붙잡고 입가에 묻어 있는 뤼베를 혀로 상냥히 핥았다.
“나는 이걸로 충분하다. 그보다 생각보다 잘 먹어서 많이 놀랐어. 앞으로도 종종 사주도록 하마.”
“……”
페르젠의 그 말에, 유페미아는 애써 태연한 척을 하고 싶었지만 결국 미약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의 미동도 없는 움직임이었지만, 페르젠은 그 긍정을 충분히 눈치 챌 수 있었다.
작가의 한마디 (작가후기)
아기방 체크인 하기 전까지는 조금만 더……
* * * * *
유리엘 일러스트가 아마 곧 나오기는 할 텐데.
걱정이 앞서네요……
이번에도 영 결과물이 별로면 일러 복 없는 작품이라 생각하고, 노벨피아에서 제공해주신거 달아야겠슴……
* * * * *
추천 부탁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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